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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신앙 찾기] 검은 사제들
우리 본당 신부님에게 ‘검은 사제들’ 영화를 보셨는지 물어보았다.
신부님 : 그건 너무 비현실적이야.
나 : 좀 그렇죠. 크크크.
그런데 어떤 부분에서요? 구마의식이나 뭐 그런 거요?
신부님 : 강동원 얼굴로 사제를 할 리가….
나 : 크크크.
필자가 가입한 밴드에 올라온 글이다. 이 글을 읽고 매우 재미있어 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영화 ‘검은 사제들’이 제작된다고 했을 때,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배우 강동원이 주연을 맡았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예고 포스터’가 공개되었을 때 역시 주관심사는 ‘사제복을 입은 강동원’이었다. 누리소통망 서비스(SNS)에서는 너나없이 사제복이 그리도 잘 어울리는 강동원에 대한 찬사가 빗발쳤다. 강동원에게 사제복을 입힌 것은 ‘신의 한수’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강동원은 의도했든 아니든 결과적으로 가톨릭과 무관하지 않은 행보를 보였다. 그는 공지영 작가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송해성 감독, 2006년)에서 사형수 윤수를 연기해 사형제도에 대한 비판여론을 환기시켜 주었다. 이 작품은 제16회 가톨릭 매스컴상 대상을 받았다.
그리고 8년 뒤, 제24회 가톨릭 매스컴상에서 ‘두근두근 내 인생’(이재용 감독, 2014년)이 영화부문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는데, 강동원은 이 영화에서 철부지 착한 아빠로 출연해 관객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였다.
그 강동원이 ‘검은 사제들’(장재현 감독, 2015년)에서는 부제품을 받은 성직자로 등장해 초현실적 상황에 직면해서 의심과 불안, 혼돈과 두려움에 사로 잡히다 사악하고 위험한 악령에 맞서 이를 극복하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편영화 ‘12번째 보조사제’의 확장판
‘검은 사제들’은 장재현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이다. 그가 2014년에 만든 26분짜리 단편영화 ‘12번째 보조사제’는 전주국제영화제, 가톨릭영화제 등에서 상영하여 호평을 받았고, ‘검은 사제들’의 동기가 되었다.
‘12번째 보조사제’에서도 구마의식을 하는 신부(박지일)와 보조사제(이학주)가 등장하는 기본 구성은 같다. 다만 보조사제의 마음속 깊은 곳에 드리워진 어둠, 그 두려움의 원인이 군대 폭력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사실 이러한 설정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더 개연성 있고 설득력 있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군대 폭력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자행되며 그 때문에 젊은 병사들이 어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지 잘 봤지 않은가?
선임병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구타당하던 악몽 같은 기억을, 부마자의 악령이 불러내자 보조사제가 두려움에 싸여 뛰쳐나가는 설정은 그래서 좀 더 현실적이다.
‘검은 사제들’은 이 부분을 최준호 부제(강동원)의 트라우마(사고 후유 정신장애), 바로 여동생의 죽음으로 설정하였다. 사나운 개에게 물어뜯기는 어린 여동생을 버려둔 채, 무서워 도망친 일은 끊임없이 죄의식과 악몽으로 되돌아와 그를 괴롭힌다. 마음 속 어둠을 부마자의 악령이 알아채고 이를 끌어내자 최 부제는 다시 도망친다.
그러나 두 영화가 이를 풀어내는 방식은 다르다. ‘12번째 보조사제’에서는 신부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은 인정하고 안고 가라. 그러나 도망치지는 말아라.”
이에 비해 ‘검은 사제들’은 최 부제의 자기 극복의 의지와 용기를 부각시킨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죽은 여동생의 환영을 보고 나서다. 어두운 골목에 서서 바라보고 있는 여동생을 마주하면서 최 부제는 저토록 어두운 곳에 여동생을 놔둘 수 없다고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고통 받는 부마자에게 돌아가 자신을 나약하게 하고 두렵게 한 그 실체와 대면하고자 한다. 돌아온 최 부제에게 김범신 신부(김윤석)가 묻는다. 앞으로 평생 술 없이는 잠들기 힘들고, 악몽에 시달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에 들어설텐데 괜찮은지를 말이다.
이에 대해 최 부제는 에제키엘서 2장 6절을 인용한다.
“사람의 아들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도 두려워하지 마라. 비록 가시가 너를 둘러싸고, 네가 전갈 떼 가운데에서 산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는 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을 보고 떨지도 마라.”
히브리어로 ‘하느님께서 강하게 하신다.’라는 뜻을 가진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이끈 예언자다.
이름은 징후다
‘이름이 징후(Omen est Nomen)’라는 말이 있다. 영화 속 주요 인물, 특히 사제들의 세례명은 나름의 뜻을 담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김 신부의 세례명은 베드로, 최 부제의 세례명은 아가토이다.
베드로는 어부로 예수님의 첫 번째 부르심을 받은 제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그분의 말씀대로 “사람 낚는 어부”(마태 4,19 참조)로 만들어 주셨다. 김 신부 역시 세례명대로 최 준호 부제를 ‘낚아’ 고통 받는 부마자를 구하려 한다.
아가토는 아마 알렉산드리아의 구마사제 ‘아가토(St. Agatho an Exorcist)’ 성인을 가리키는 것 같다.
영화에서 최 부제는 “남들 다 하는 거 하기 싫어서”라는 이유로 세례명을 지은 것처럼 말하지만(실제 그럴 수도 있다.), 이름은 그의 존재 증명이고, 징후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적어도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직접 쓴 감독은 최 부제에게 아가토 성인의 능력과 그의 신앙적 궤적을 부여해 준 것일 터이다.
이름의 중요성은 부마자의 몸에 숨어 있는 사령을 끌어내려면 그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는 대목에서도 나타난다.
한국적 오컬트영화
‘검은 사제들’은 개봉 40일째(2015년 12월 15일 현재) 540만 명의 관객수를 돌파했다. ‘쌍천만 관객’이라는 단어가 나올 만큼 흥행이 잘된 한국영화가 드물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검은 사제들’의 흥행돌풍은 예사롭지 않다.
일단 영화산업에서는 비수기로 꼽는 11월 개봉작이라는 점, ‘오컬트영화(occultism movie : 초자연적 사건이나 악령, 악마 같은 소재로 다루는 영화)’는 장르의 성격상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려 흥행력이 크지 않다는 점, 특정 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결코 흥행에 좋은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통상적 견해를 깬 데는 김윤석의 노련하고 힘있는 연기력, 강동원 스타의 힘, 여기에 신예 박소담의 이미지까지 가세하여 배우들이 제 몫 이상을 해준 것이 주효했다. 아울러‘엑소시즘(Exorcism, 구마)’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사제들의 치열함과 희생정신, 엑소시즘 과정에서 악령과의 대결을 긴장감 넘치는 구도로 끌어간 감독의 연출력이 관객들을 흡인한 것도 이 영화가 호평을 받는 이유이다.
가톨릭 구마예식을 통하여 ‘엑소시즘’을 다루기 때문에 영화에는 기도문이나 예식에 필요한 소품(성수, 성유, 소금 등), 성가 등이 등장한다. 영화는 이 장면을 위해서 교황청에서 펴낸 「구마예식서」 등 가톨릭 구마예식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조사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소머리를 이고 굿을 하는 무당의 사진을 입수하여 영화 속에서 재현함으로써 한국적 샤머니즘을 결합, 한국적 형상의 오컬트영화를 만들어낸 상상력도 이채롭다.
이러한 요소들로 말미암아 ‘검은 사제들’은 장르 영화의 쾌감이 살아있는 대중영화로 안착하게 되었다. 특히 종교와 관련된 부분이 있으나, 종교적 설정의 중압감에 눌리지 않고 신앙이 있거나 없음을 막론하고 모처럼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되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자로서 이 영화를 주목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악의 존재와 그것을 퇴치하고 사람을 구원하려고 스스로를 희생하는 이들의 존재를 환기시켜 준다는 점에서이다. 영화 속의 구마사제처럼, 때로 오해받거나 핍박받고 아무도 노고를(심지어 희생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 길을 가는 이들이 있음을 기억할 일이다.
[영화 속 신앙 찾기] 늙은 자전거
“풍도야~.”
“예, 할배~.”
“할배, 참 조용하데이. 너무너무 조용해서 세상에 할배랑 풍도만 있는 것 같다. 너무 좋다. 할배도 좋제?”
푸르른 초록을 풍광으로 가득한 시골길을 달리는 삐걱대는 자전거 위에서 손자와 할아버지가 주고받는 대화가 정겹다.
문예 영화 그리고 힐링 영화
할아버지 강만(최종원 분)은 괴팍한 성격 탓에 반겨주는 이도 없이 술과 낡은 자전거를 벗 삼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집 나간 아들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손자 풍도(박민상 분)가 나타난다.
강만은 손자를 거둬줄 수 없다며 풍도를 거부하지만, 당돌하고 뻔뻔한 풍도는 보육원에 가지 않으려고 강만을 조르고 강짜를 부리며 그의 곁에 남는다. 이렇게 괴짜 노인 강만과 당돌 소년 풍도가 낡은 자전거와 동행하는 영화 ‘늙은 자전거’가 시작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는 언제나 곁에 두고 있는 낡은 자전거만큼이나 늙고 기운이 없다. 고집불통의 성격인 그는 장터에서 만나는 속옷 판매상 복만을 보면 으르렁대며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지만, 손자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여느 할아버지 못잖다.
파출소에서 태연히 ‘할아버지가 시한부’라며 동정심을 자아내는 풍도는 말썽꾸러기의 전형적인 표정을 지녔지만, 문득문득 관객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게 하는 따스한 마음을 지녔다.
영화 ‘늙은 자전거’는 고아가 된 손자를 갑자기 떠맡게 된 할아버지와 철없어 보이는 손자가 급작스러운 동거를 시작하며 애틋한 정을 나누는 휴먼 드라마로 얼개를 꾸미고 있다.
너무나 착한(이 작품을 연출한 문희융 감독에 따르면 참으로 ‘순한’) 영화다. 물론 시선에 따라서는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틀에 착하고 답답한 영화라고 보겠지만, 분명이 작품은 착함에만 머물지 않고 관객들에게 좋은 마음과 기운을 전달하는 순한 영화다.
그래서 이 작품은 요즘은 만나기 힘든 ‘문예 영화’라 하겠다. 그렇다고 단순히 착하고 아름다운 문학적 감수성만 가득한 예술영화가 아닌 그 가치와 사회적 메시지가 가득한 다시 말해 요즘 시대에 맞는 ‘힐링 영화’임에 틀림없다.
매력적인 주연과 조연, 그리고 연출자의 시너지
속옷 판매상 복만, 다방 종업원 미자, 여인숙 주인 숙자 등 개성 있는 조연은 물론 다소 과장되고 작위적인 연기와 ‘화이트 아웃’(눈보라로 잘 보이지 않는 상황) 등의 전형적 기법을 사용해 요즘은 보기 힘든 ‘TV문학관’을 영화관에서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을 부정하긴 힘들다. 하지만 영화를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우리가 잊고 있던 전형적인 문예 영화를 만나는 반가움과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할아버지 강만을 연기한 최종원은 40여 년 동안 150여 편의 연극과 영화에 출연한 대표적인 연기자다. 사랑을 향한 열혈남으로 포복절도한 연기를 보여준 속옷 판매상 복만을 연기한 박상면은 개성 넘치는 연기력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이다.
그리고 다양한 작품에서 안정된 연기를 선보이며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조안은 ‘장터의 꽃미녀 미자’로 열연하며 솔직발랄한 그녀만의 매력을 선보였다. 그리고 호탕한 여인숙 주인 숙자는 가수인 춘자가 출연해 맛깔스런 연기를 구수하게 펼쳐 보였고, 착실한 9급 공무원 창식을 연기한 김형범은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감초역할을 잘하기로 소문난 연기자였다.
주인공 풍도를 연기한 박민상은 이 작품으로 영화에 데뷔했지만, 이미 ‘왔다 장보리’, ‘최고다 이순신’ 등 드라마와 광고를 통해 얼굴이 알려진 아역 연기자다. 특히 이 작품을 통해서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크게 엿볼 수 있었고, 현재 강우석 감독의 차기작 ‘고산자, 대동여지도’에 어린 김정호 역을 연기해 조만간 영화관에서 그의 새로운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화려한 주조연이 합심해 출연한 이 작품을 연출한 문희융 감독은 ‘저먼 동화의 나라로’로 1987년 한국 청소년 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했으며, 시나리오 ‘처형’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본선에 진출한 바 있다.
지난해 개봉한 ‘연평해전’의 시나리오 각색을 맡기도 했던 그는 연출의 변을 이렇게 밝혔다. “할아버지의 낡은 자전거만큼이나 느리게 전개되지만, 그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견뎌내는 사람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이렇듯 화려한 주연과 조연들이 문희융 감독의 지휘로 큰 규모는 아니지만 섬세하고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영화 한 편을 빚어낸 것이다.
수채화처럼 펼쳐진 장면들의 상징
우리 시골의 아름다운 자연을 가득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충남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에서 대부분의 장면을 촬영했다. 시골길과 푸른 들판은 물론 장터, 여인숙 등 장돌뱅이 할아버지의 여정을 따라가는 카메라를 위해 거의 모든 장면이 부여에서 촬영되었다. 덕분에 작품을 보는 관객들의 눈과 마음은 맑고 시원하게 펼쳐지는 풍광들의 모습에 저절로 깨끗해짐을 맛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연출자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강가에서 할아버지가 풍도에게 하는 강아지풀 장난은 과거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현재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어지며 이 가족에게 내재된 연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자전거를 타는 풍도의 위치가 옆에서, 나란히 그리고 일어서서 타는 모습으로 변하며 두 사람 관계의 변화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나면 제목의 ‘늙은’이란 단어에 담긴 깊은 의미를 알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낡아버린 오래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켜켜이 쌓인 시간, 역사, 가족 간의 기억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풍도를 통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게 될 이들 가족의 이야기를 알게 해준다.
한편 상처를 지닌 풍도의 불같이 뜨거워진 감정을 아름다운 자연 속에 배치함으로써 순화시켜주는 감각 또한 연출자의 배려라 하겠다.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들려주기보다 마치 반전처럼 후반부에 ‘속 깊은 풍도는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들려준다.
이런 직접적인 표현보다 우회적인 상징과 암시가 감독의 의도였음을 관객들은 알게 된다. 영화 속에 가득한 상징과 암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화해하는 그리고 성장하며 새롭게 꾸려지는 가족의 모습을 그려냈다.
영화에 알맞게 재단된 원작
우리나라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독보적인 존재인 이만희는 한국의 대표 극작가다. 그의 원작 연극 ‘늙은 자전거’에서 나온 이 영화는 원작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 인물의 성격을 영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구성을 바꿨다.
또한 시대적 배경을 1970년대인 원작과는 달리 ‘스마트폰’이 등장하는 현재로 바꿨지만, 작품 안에 흐르는 정서는 1970년대를 유지하는 영화적 묘미를 살려냈다.
원작에서 보여준 가족 이야기를 좀 더 강렬하게 3대에 걸친 남자들의 연속성을 통해 들려준다. 그리고 ‘풍도’가 ‘복만’과 ‘미자’를 통해 새로운 가족으로 이루어지며 새로운 행복의 시작을 엿보여주는 것으로 가족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는 가족, 가정의 소중함
지난해 10월 바티칸에서 열린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제14차 정기총회는 ‘교회와 현대세계에서의 가정의 소명과 사명’이란 주제로 열렸다. ‘가정’을 주제로 한 주교 시노드를 재작년에 이어 연속으로 두 번이나 개최할 만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가정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시다.
교회는 물론이며 현대 아니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기초 공동체가 바로 가정이고 현대에 이르러 위기에 처한 것이 또한 가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교황님은 “가정은 희망을 만드는 공장”이라고 하셨고, “가정은 서로 용서하는 것을 훈련하는 커다란 체육관”이라며 가정에서 사과와 용서로 하루를 마감할 것을 권고하신 것처럼 가정의 중요함을 강조하셨다.
이처럼 우리 교회에서 가족, 가정의 중요함은 아무리 많이 언급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핵가족 아니 가족 파괴가 예삿일이 된 요즘이지만 가끔 자녀들과 함께 부모님을 찾아가 뵙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 나와 부모, 나와 자식과의 관계를 더욱 굳건하게 해줄 것이다. 영화 ‘늙은 자전거’는 그런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다.
원고 마감을 넘겨가며 여러 작품들 속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해 이 작품을 선택한 까닭은 조금이라도 더 교회의 영성에 가깝고 그런 작품을 소개하고자 하는 욕심에서였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여러 다양한 통로를 통해 작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 조금은 낯설지만 귀한 작품을 소개하려는 좋은 기회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하여 수많은 상업영화의 틈 사이에서(간편하게 가까운 극장에 가서 볼 수 없기에) 조금은 수고스럽더라도 더욱 좋은 작품들을 만날 기회를 독자들에게 선사하고자 하는 필자의 작은 바람을 고백한다.
[영화 속 신앙 찾기] 로봇, 소리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특히 공중파도 아닌 케이블 드라마의 시청률이 18%를 넘었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면서 이 드라마의 성공요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가 분분하다.
이 드라마의 성공요인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지나온 시대에 대한 따뜻한 정서를 잘 부각시키면서 복고적 향수를 자극했다는 점이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응답하라’라는 제목은 여기저기에서 무언가를 이끌어내고 소환하려는 주문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그런데 정말 누군가의 부름에 응답하는 이야기로 이루어진 영화가 있다. 바로 ‘로봇, 소리’(이호재 감독)다.
우주의 어느 지점에서 세상의 수많은 소리를 감청하고 기억하며 저장하는 존재가 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쏘아올린 인공위성이다. 이 인공위성 로봇은 우주를 떠도는 수많은 소리 가운데에 어느 아버지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응답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김해관(이성민 분)이다. 그는 10년 동안 실종된 딸 유주(채수빈 분)를 찾아 헤맨다. 딸이 마지막으로 남긴 휴대전화의 음성 메시지를 꼭 끌어안고 티끌 같은 단서라도 있다면 어디든 달려간다. 그는 딸이 찾아오기라도 할까봐 바뀐 도로명 주소가 적힌 문패도 달지 않는다.
어느 날 딸을 찾아 섬에 갔던 김해관 앞에 하늘에서 고철 덩어리가 추락한다. 친구의 도움으로 고철 덩어리를 수리하고 나서야 김해관은 그것이 감청 로봇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로봇은 소리에 반응하고 탐색하며 기억한다. 그는 이 로봇이야말로 딸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 여기며 로봇에게 ‘소리’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함께 딸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로봇소리는 사실 스파이 위성으로 세상의 모든 음성정보를 감청하고 수집하는 일을 해왔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과 교신 중인 음성들, 공포에 떨며 구해달라고 하는 어떤 외국 소녀의 목소리 등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이것은 로봇 소리가 어떠한 기능을 담당했는지 그리고 왜 미국과 한국의 정보기관 양쪽에서 이 로봇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를 암시해 준다. 로봇 소리를 사이에 두고 김해관과 양국의 정보기관 사이에 숨바꼭질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응답을 통해서 매개되는 ‘찾는’ 행위
이 영화에는 누군가(무엇인가)를 찾아야 하는 공통의 행위가 있다. 아버지는 딸을 찾아야 하고, 정보기관은 로봇을 찾아야 하며, 로봇은 도와달라고 울부짖던 아프가니스탄의 소녀를 찾아야 한다.로봇은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 지역을 폭격하라는 미군의 교신과 학교에 포탄이 떨어지고 겁에 질린 아이들, 도움을 청하며 흐느끼는 소녀의 목소리도 들었다. ‘찾는’ 행위는 흔적을 좇아 이루어지는데, 이 흔적의 방식은 바로 소리다.아버지와 로봇의 찾는 행위는 ‘응답’을 통해서 매개가 된다. 간절히 딸을 찾는 아버지에게 로봇이 응답하고, 로봇은 아프가니스탄 소녀의 목소리에 응답하고자 소녀를 찾는다. 여기에는 역시 공통의 정서가 작동하는데 그것은 바로 죄책감 또는 회한이라는 정서이다. 이것은 연민이나 사랑의 마음일 것이다.
영화는 응답과 그것을 추동하는 연민이나 사랑의 정서로 채워진다. 아버지는 딸이 2003년 대구 지하철역 화재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 인정하게 된다. 딸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딸과의 다정했던 기억, 따뜻한 사랑의 흔적들을 되찾는다.
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방식으로 사랑한 아버지, 그것 때문에 딸과 어긋났던 사랑의 방식은 아버지 해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고 죄의식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로봇 소리와 함께 감행한 탈주에서 딸을 이해하고 그 흔적을 찾아 딸과의 기억을 복원한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딸의 마지막 음성을 듣고 화해와 애도가 이루어진다. 로봇 소리 역시 김해관을 도움으로써 자신이 짊어졌던 소녀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은 덜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기계와 사람의 교감을 제법 섬세하게 그렸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원한 우주동화 ‘E.T.’(1982년)가 사람과 외계 존재 사이에 형성되는 감정적 교류를 포착하고, ‘A.I.’(2001년)는 사람 형상의 인공지능 로봇이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존재임을 알린 바 있다.
그런데 고도의 정밀성이 부족해 보이는, 그래서 고철 덩어리 같은 ‘로봇, 소리’의 로봇으로부터 사람의 온기와 감정이 전달되듯 느껴지는 것은 꽤 신선한 경험이다.
이는 로봇과의 연기에 사람의 온정과 온기를 입힐 수 있도록 감정이입을 한 배우 이성민과 목소리만으로 연기의 합을 맞춘 배우 심은경의 공이 크다. 이성민은 마치 로봇을 아기처럼, 딸처럼 대함으로써 로봇에게 사람의 감성을 입혔고, 심은경은 엉뚱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매력을 발현시켰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
우리는 기도를 한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이고, 그렇기 때문에 너무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고들 한다. 늘 달라고만 하는 그런 유아적 자세는 성숙한 신자의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기복을 위한 기도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정말 힘들고 괴로울 때 기도를 통하여 주님께 온전히 나를 맡기라 하지 않는가. 간절함과 절박함이야말로 우리 기도에 대한 응답이 이루어질 수 있는 최상의 요건이 아닐까?
‘브루스 올마이티’(톰 새디악 감독, 2003년)라는 영화에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세상 곳곳에서 올리는 기도 소리 때문에 하느님께서 시끄러워 견딜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에서 그분이 우리 기도를, 외침을 듣고 계시는 것을 익살스럽게 설정한 것이다. ‘시편’에서도 보면 고난에 놓인 다윗이 하느님께 끝없이 자신의 소리(기도)를 들어주십사고 울부짖는 대목이 선연하다.
“하느님, 제가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소서. 곤경에서 저를 끌어내셨으니 자비를 베푸시어 제 기도를 들으소서”(시편 4,1).
“이 곤경 중에 내가 주님을 부르고 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였더니, 당신 궁전에서 내 목소리를 들으셨네. 도움 청하는 내 소리 그분 귀에 다다랐네”(시편 18,7).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의 소리(기도)를 듣고 계시고, 어떤 형태로든 응답하신다고 믿는다. 스웨덴 영화작가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의 영화 ‘어두운 유리를 통해(Through a Glass Darkly)’, ‘겨울빛(Winter Light)’, ‘침묵(The Silence)’을 영화 연구자들은 ‘신의 침묵’ 삼부작 또는 신과 구원의 삼부작이라고 부른다.
이 작품들에 담긴 세상의 불행과 고통과 고독은 과연 신이 있는지, 있다면 왜 신은 침묵하고 있는지를 묻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침묵’의 여주인공이 병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며 “신은 침묵하고 있다.”라는 대사를 함으로써 ‘신의 침묵’은 베리만 영화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로봇, 소리’에서 로봇은 침묵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수집하고 전달한 음성정보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대기권 안으로의 추락을 감행하며 소녀를 찾아나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느 사막, 아마도 아프가니스탄의 사막을 씩씩하게 횡단하고 있는 로봇의 모습이다. 사실 이 장면으로 영화가 코믹스럽게 되어버렸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인공지능을 갖춘 이 로봇의 결연한 의지만큼은 돋보였다.
‘로봇, 소리’는 아버지의 부성애를 중심에 두고 있으면서 지금 사회의 암울한 그림자들을 슬쩍 건드린다. 바로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나 안타까운 생명들을 앗아간 세월호 사고다.
감청 로봇을 둘러싼 국정원의 대응은 민간인 사찰과 미국의 스노든 사건에 대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물론 ‘로봇, 소리’가 처음의 취지를 살리지 못함으로써 그 메시지의 효과가 크지 않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화 속 신앙 찾기] 동주
이육사(1904-1944년), 이상화(1901-1943년)와 함께 3대 저항시인으로 불리며 일제강점기를 살며 저항했던 윤동주 시인, 그의 고종사촌으로 가장 친한 친구이며 문학적 경쟁자였던 송몽규. 그들의 이야기는 두 사람의 인생처럼 잘 알려져 있지만 또한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1935년,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동갑내기 동주(강하늘 분)와 몽규(박정민 분). 콩트 ‘술가락’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몽규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동주는 시에 대한 마음을 숭실중학교 문예지에 ‘공상’이란 시를 실으며 더욱 깊이를 더해간다. 이후 몽규는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체포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고, 마침내 둘은 1938년 스물두 살의 나이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며 경성에서 생활을 시작한다.
푸르른 청춘의 삶을 젊은이답게 사랑에 가슴 설레고, 문학과 혁명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말이다. 졸업을 앞두고 ‘창씨개명’이란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에 시달리던 이들은 결국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일본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독립을 위해 힘쓴다. 더욱 적극적인 참여와 활동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몽규, 더욱더 깊어진 자아성찰로 절망적인 순간에도 시를 통해 혼란과 비극의 시대를 극복해 나가려던 동주.
두 사람은 어두컴컴한 압제의 순간은 물론 평생을 함께한 동지이며,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이고, 또한 서로를 격려하는 경쟁자였다. 영화 ‘동주’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짧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오롯이 담긴 작품이다.
실화 영화 속 사실과 허구
영화는 사실(팩트)과 허구(픽션)를 뒤섞어 관객에게 보여준다. 동주와 몽규가 함께 잡지를 만들 때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활짝 웃으며 등사 롤러를 밀던 해맑은 청년이 바로 문익환 목사다. 또한 문익환 목사의 아들 배우 문성근은 동주가 존경하던 시인 정지용으로 출연했다.
영화에서 동주의 친구인 이화여전의 ‘여진(신윤주 분)’과 동주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 여인 ‘쿠미(최희사 분)’는 허구의 인물이다. 하지만 이 두 여인을 통해 이들의 청춘이 청춘다워졌다고 할 수 있다.
동주가 일본에서 대학에 다니던 시절 여학생들과 소풍을 다녀온 사진이나 그의 시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영화적으로 해석해 감미료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또한 영화에서 ‘쿠미’를 보호해주는 ‘다카마스’는 실존인물이다. 윤동주가 존경하던 일본인 교수로 당시 요시찰인으로 검거되었던 사람이다.
이 작품의 내용은 대부분 사실이며 약 30% 정도의 허구가 가미되어 영화적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단아한 흑백 언어
영화는 흑백으로 만들어졌다. 북간도의 용정과 경성, 그리고 교토와 도쿄 등 장소가 많았고, 시대를 표현하는데 수많은 장치들이 필요했지만 6억 원가량의 저예산으로 제작되었다. 당시를 현실적으로 그려내고자 하는 묘책으로 흑백영화 제작이 결정되었다.
이준익 감독은 이를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하지만 이를 통해 오히려 시대적인 사실감이 배가 되었다. 오히려 컬러 영화보다 더 섬세한 작업을 거쳐 제작이 이뤄졌고,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시대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그 진정성을 넓게 확보시켰다.
또한 영화를 본다면 영화의 끝자막(엔딩 크레딧)이 나올 때까지 감상하기를 바란다. 여기에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실제 모습과 약력이 등장한다. 축구 선수로 활동했다는 윤동주의 약력은 부드럽고 서정적인 이미지로만 생각했던 관객들의 선입견을 깨기에 충분하다.
동주 역을 맡은 강하늘의 목소리가 담긴 엔딩곡, 박정민이 직접 촬영한 송몽규의 묘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영화의 마지막까지 자리한 사람이다.
영상 언어로 담아내는 실화 영화
미국이나 한국에서 실화 영화는 명확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스포트라이트’가 미국 최대의 영화상인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수상하고 ‘레버넌트’가 남우주연상과 감독상, 촬영상을 수상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월 말 개봉한 ‘귀향’과 ‘동주’가 순탄한 흥행 성적을 거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실화 영화가 지닌 힘을 알 수 있다.
실제 있었던 사실이나 인물을 다룬 영화를 ‘실화 영화’라 한다. 세상에 알려진 사실, 인물 묘사가 만듦새를 더 어렵고 섬세하게 하는 작업이고, 관객은 자신의 지식과 같은 것을 작품에서 찾으려 하기에 객관적으로 작품을 감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 때문에 작품에서 빚어지는 감동은 더 깊고 풍부해질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실화 영화’ 인물을 다루는 경우 인물의 생애를 다루는 전기 영화, 직업 또는 업적에 치중하는 미술 · 음악 · 문학 · 종교 · 경제 · 정치영화, 인물 배경의 시대를 담은 사회 영화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제작자나 연출가는 어떻게 풀어갈 지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정의를 위해 무관심을 극복해야 한다
지난 1월 1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고통받는 비극과 부정의 폭력에 맞서 평화를 이루려면 무관심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교황님은 ‘세계 평화의 날’을 맞아 12억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연대를 가로막고 있는 무관심을 극복하고 다시 태어날 것”을 당부하셨다.
지난해 12월 28일 정부는 한국과 일본 간에 ‘일제에 의한 위안부 피해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고 발표했다. 대통령은 “피해자 할머니들이 살아계시는 동안 마무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피해 당사자들의 생각을 직접 듣지 않고, 그분들이 납득할만한 합의가 아닌 마무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밖에도 표현의 자유와 작품의 상영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침해당하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 국민 개개인에 대한 사생활 침해가 분명할 것으로 보이는 ‘테러방지법’ 등 이 땅에서 행해지는 옳지 못함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몽규가 “국가의 주권을 찾기 위한 길은 도대체 뭐냐?”고 따져 묻던 장면의 교실 칠판에는 ‘의지(意志)와 지성(知性)은 같은 것이다.’라는 글이 쓰여있다. 이것은 단순히 교실에 대한 미술적 표현이 아니라 ‘동주와 몽규’의 삶을 통해 제국주의의 부도덕성을 지적하고, 이에 대해 분연히 일어나는 젊은 정의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울 청운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필자에게는 자하문 언덕에 올라 시내를 내려다보며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윤동주의 시들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윤동주의 언덕’으로 꾸며진 그곳에 가면 붉은 벽돌에 빨간 지붕으로 만들어진 내 유년기의 집을 내려다볼 수 있다. 그곳에서 이따금 어린 시절의 꿈을 되살리며 올바르고 정의로움에 대해, 그리고 청년 시절의 꿈을 떠올리는 시간을 갖는다.
우리가 평소 지녔던 서정적인 이미지의 윤동주 시인을 뛰어넘어 그가 추구했던 사회, 그리고 꿈꿨던 세상을 이 작품을 통해 엿볼 수 있다면, 시인과 혁명가 두 사람은 물론 그 시대에 살다 사라진 수많은 젊은 꿈들이 기뻐할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 ‘동주’가 세상에 나온 가장 큰 뜻일 게다.
[영화 속 신앙 찾기] 인간에 대한 희망과 예의 그리고 존재 증명 ‘사울의 아들’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유다인 대학살)는 그 유례없는 폭력성과 비극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홀로코스트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수많은 이에게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그리고 영화나 소설 등 여러 매체를 통하여 전달되고 형성되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나 영상은 생생한 인상으로 대중에게 그 어떤 매체보다 강력한 충격효과를 제공하였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쉰들러 리스트’는 흑백영상이지만 작은 여자아이의 빨간 옷만은 컬러로 표현하여 시각적인 인상만이 아니라 정서적 충격효과도 배가시켰다.
스필버그 감독이 이 작품을 흑백영상으로 만든 이유는 이렇다.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상은 모두 흑백이었다. 흑백이 아니고는 나는 이 비극을 재현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물론 이러한 전제에서 볼 때 작은 여자 아이의 빨간 옷은 다분히 감성적인 측면이 있다. 강조와 환기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이유에서다. 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있지만,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는 효과는 충분히 거두었다.
재현의 윤리에 대한 고민
사실 홀로코스트 영화는 재현할 때 간단치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사라지거나 기억 속에서 여과되어, 의도하였든 아니든 왜곡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래서 재현이 정말로 가능한 것인지, 또는 어떻게 재현해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지 재현의 윤리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한다.
재현의 측면에서 헝가리 감독 라즐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은 도전적인 시각 체험을 제공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이 영화가 재현에 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 잘 드러낸다.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 초점이 맞지 않은 듯(out of focus) 흐린 후경(background)의 영상을 보게 된다. 화면 후경에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는데 알아볼 수가 없다. 움직이는 대상이 화면 앞쪽(foreground)으로 다가온 다음에야 선명하게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영화는 주인공 사울(게자 뢰리히)의 시점에 맞춰져 있음을 알게 된다. 카메라는 그를 따라다니며 그가 보는 것을 보지만, 그가 보지 않는 것, 곧 도처에 있는 죽음의 공포에 질려서 주변을 보려하지 않는 것은 아웃 오브 포커스(피사체는 선명하게 나오고 그 배경은 흐릿하게 나오는 효과)로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영화는 대부분의 영화가 차용하는 전지적 시점을 회피하려 노력한다. 감독과 작가의 시점으로 모든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주인공의 시점에서만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시야를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홀로코스트를 다루고 있음에도 영화는 관객에게 충격이나 강렬한 인상을 주는 모습을 애써 피하고 있다. 그저 팔다리 또는 뒤엉켜 있는 사체의 나신 일부만이 화면 가장자리에 잠시 나타나거나 아웃 오브 포커스로 희미하게 제시될 뿐이다. 이는 사체에 대한 물화(物化)의 방식으로 보인다.
왜 이렇게 보여주는 걸까? 사체를 인간이라 생각하게 되면 도저히 그 환경과 상황에서 견디지 못할 것이기에 사울 스스로 그렇게 내면화한 것을 표현한 것일까? 그런데 하나 예외가 있는데 바로 사울 아들의 주검이다.
이 영화가 사울의 행동과 의식 변화, 아들의 장례를 치러주려는 아버지 사울의 분투는 어찌 보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것에 집착하는 사울의 행동을 따라 가는 것이어서 아들의 사체는 어쩔 수 없이 정면으로 노출된다.
혹시나 감독은 그간의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미증유의 비극을 고발하고자 해도 그 과정에서 선정적으로 그 비극적 상황들을 전시하거나 볼거리로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과 반성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실제 네메스 감독은 아우슈비츠 피해자 집안 출신이라고 한다. 그는 “그간 생존을 다루는 감동적인 드라마가 주를 이루는 홀로코스트 영화를 보면서 답답함을 느꼈다. 비극적이고 참혹한 과거를 신화로써 재생산하려는 시도에 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그에게 홀로코스트는 ‘신화’가 아니라 너무나 참혹하고 비극적인 현실이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영화는 아우슈비츠의 ‘존더코만도’인 사울이란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존더코만도는 시체를 처리하는 사람이다. 존더코만도는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유다인들을 가스실로 보내고 그들의 물품을 정리하고 사체를 소각하며, 그 재를 강에 뿌리는 일을 맡는다.
독일군을 대신하여 차마 하지 못할 일들을 처리하지만 죽음을 잠시 유예받을 뿐 그들 역시 가스실로 보내질 운명이다. 늘 죽음을 보며, 언젠가 닥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들은 애써 죽은 이들을 외면한다, 그저 물건 치우듯이. 그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체를 치우던 사울의 눈에 어린 소년이 들어온다. 아직 완전히 숨이 멎지 않은 소년은 수용소 의사에게 보내지지만, 의사는 아이의 숨을 막아버린다. 그 소년이 바로 사울의 아들이다.
사울은 아들의 죽음에 분노하지 않는다. 그가 분노하기에는 이미 수많은 죽음을 보았고 겪었기 때문이다. 대신 사울은 아들의 장례를 치르려 한다. 랍비를 찾아 기도를 통해 예를 갖추고 매장하려는 것이다.
사울은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들의 만류에도 랍비를 찾아다닌다. 겨우 랍비를 찾아 기도를 청하지만, 랍비는 제대로 기도하지 못한다. 그즈음 사울이 속한 존더코만도에 대한 가스실 처형이 결정되고 이를 알게 된 존더코만도들이 저항에 나선다. 사울도 탈출하는 무리에 섞여 수용소 밖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독일군이 개를 앞세워 추격해 오고 사울은 어쩔 수 없이 아들의 시체를 둘러맨 체 강물 속으로 몸을 숨긴다. 하지만 아들의 시체는 물에 떠내려간다. 추격을 피한 무리가 강 건너 숲속의 오두막에 잠시 몸을 숨기지만, 이윽고 다다른 독일군은 오두막을 향하여 총을 발사한다.
‘사울의 아들’은 죽음의 공간에서 아들을 발견한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영화는 아들이 아닐 수도 있음을 내비친다. 사울은 아들이라 주장하지만, 동료들은 “네게는 아들이 없어.”라고 단언한다. 아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소년의 장례를 치러주려고 사울은 동료를 협박하거나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죽음의 시간과 공간에서 사울이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린 아들의 장례는 인간의 존엄과 품위에 대한 최소한의 마지막 보루가 아니었을까? 그것만이 아직 자신이 인간임을 자각할 수 있는 증거라고 여긴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소년은 아들이 아니고 인간의 대표적 상징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이 영화의 전략은 옳을 뿐 아니라 윤리적이다.
물론 사울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소년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도 올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시체도 강물에 떠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할 수 있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그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희망이고 예의가 아니겠는가?
거듭나는 사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다. 그분의 부활을 축하하는 이 시기에,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죽음을 극복하여 새 생명, 새 희망으로 오신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 부활의 은총을 묵상해본다.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인간이 배신하고 외면하더라도, 사울과 같은 인물을 통해서 여전히 인간에게는 희망이 남아있는 게 아닐까?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하고, 인간답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모습이야말로 인간을 위해 희생제물이 되신 그분의 부르심에 대한 최소한의 응답일 것이다.
사울은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전 이름이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 바오로로 거듭났듯이 영화 속 사울은 아들의 주검을 만나 죽음의 꼭두각시에서 ‘인간’으로 거듭난다. 비록 그의 육신이 소멸한다 해도.
[영화 속 신앙 찾기] 미라클 프롬 헤븐
“저는 지금까지 기적이 빛과 큰 소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알아요. 기적은 아무 조건 없는 선과 사랑이라는 것을요. 저에게는 신의 손길과 같았죠. 10미터 높이에서 거꾸로 떨어져도 살아남는 위대한 기적도 있지만, 삶에는 작은 기적들도 많아요. 날마다 그것을 보고 느끼며 살아갈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이 모든 것을 겪고 나서 저는 작은 순간도 모두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죠.”
불치병에 걸린 딸의 치료를 위해 노력하다 하느님의 기적과 함께 새로운 삶의 영광을 얻은 어머니는 사람들 앞에서 그녀의 가족에게 안겨준 기적에 대해 들려준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감동시켰던 것은 치유의 기적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나누었던 작지만 끊임없는 사랑이었고, 그것이 모여 결국 커다란 기적을 낳게 된 것이다.
미국 텍사스에 거주하는 크리스티 빔(제니퍼 가너 분)은 수의사인 남편과 성격이 각각 다르지만 명랑한 세 딸 애비와 애나벨(뒤에 ‘애나’로 통칭함) 그리고 아델린과 함께 살고 있다. 주일이면 가족이 하느님의 영광을 함께 찬미하며 여느 가정처럼 평온하게 행복한 삶을 누리는 가정이다.
느닷없이 찾아온 시련, 그리고 기적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과도 같이 둘째 딸 애나(카일라 로저스 분)에게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찾아온다. 세 딸 가운데 유독 맛있는 걸 좋아하고 유쾌한 아이에게 찾아온 무시무시한 통증과 식중독 그리고 위산 역류 등의 증상을 가족은 쉽게 치료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병의 원인은 알 수 없고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는다. 여러 병원을 다니며 가족은 절망에 빠지고, 병명조차 알아내지 못한 채 치료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에 직면한다. 크리스티는 무리해서 찾아간 보스턴 소아병원에서 처음으로 희망의 빛을 보게 되고, 애나도 긍정적으로 힘을 얻는다. 하지만 치료를 포기하고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가족의 추억이 가득한 집 앞마당 나무 앞에 선 세 자매. 이들에게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커다란 기적의 순간이 다가온다.
환우와 그 가족에 대한 현실적인 시선
불치병에 걸린 딸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크리스티를 향해 일부 교우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가혹한 시련의 원인이 크리스티에게 있을 것이라는 의혹의 눈길을 던진다. 위로해 주어야 할 가까운 이웃이 오히려 상처를 주는 현실과 어쩌면 그리도 똑같을까?
영화는 서서히 지쳐가는 환우의 가족에 대한 시선은 과장하지도 화려하거나 감상적으로 담아내지 않는다. 먼 지방의 전문병원을 오가는 교통비는 물론 비싼 치료비 때문에 밤낮없이 일해야 하는 아버지, 그리고 조금씩 지쳐가는 언니와 동생의 모습은 여느 환우의 가족들 모습 그대로다. 물론 병에 시달리는 애나와 그 곁에서 희망을 끈을 놓지 않으려는 크리스티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조금씩 찾아오는 기적들, 어쩌면 이것이 더 큰 기적기적이란 사전적 의미로 ‘상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기이한 일, 불가사의한 현상’이라고 한다. 크리스티와 애나가 예약 없이 무턱대고 찾아간 보스턴의 소아 전문병원에서도 사람들은 불치병 환우라는 애틋한 시선으로 모녀를 바라보기만 한다. 포기하려는 순간 작지만 소중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난다.
친절한 흑인 여성 안젤라와 멕시코인으로 유쾌한 전문의 사무엘 너코 박사는 애나에게 긍정적인 힘을 주고, 크리스티에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한다. 신용카드가 정지된 줄 모르고 애나에게 찾아가는 가족에게 비행기 회사 직원의 친절한 배려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커다란 치유의 기적은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난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을 찾아가는 것은 이들 가족이 겪는 현실적인 시련과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자그마한 사랑이 실천되는 모습이다. 그것은 이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들려주려는 기적이 치유의 커다란 기적의 신비라기보다 우리 곁의 작고 소중하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기적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아무 사고 없이 하루하루를 보낸 것에 감사하여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아주 작은 기적들이 바로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앞으로 우리에게 찾아올 종교 영화
올해 부활절을 맞아 영화 ‘부활’이 개봉되었다. 두 달 동안 전국에서 20만 명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고 지금까지 상영되고 있다.
올해 우리 곁에 찾아올 종교 영화로 ‘사일런스’, ‘벤허’, ‘더 프로미즈’, ‘광야에서의 40일’ 등이 예정되어 있다. 특히 2014년 ‘노아’의 흥행에 힘입어 할리우드에서 다시 제작한 ‘벤허’는 대형 스펙터클한 영상으로 영화관을 찾을 예정이다.
17세기 일본에서 박해받는 예수회 사제의 이야기를 담은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한 ‘사일런스’는 칸 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된다. 세계적인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연출을 맡고, 페레이라 신부님 역에 리암 니슨이 열연하며, 아사노 타다노부와 카세료가 출연하는 등 화려한 주목을 받고 있다.
어쩌면 2016년은 우리에게 종교 영화의 혜택을 가득 받는 한 해가 될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해외에서 활발하게 제작되고 관객에게 찾아가는 작품들이 그득한 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그 움직임이 작다는 현실이다.
하지만 이 작품들을 보며 우리의 소명을 조금씩 키워가는 것은 어떨까? 나아가 우리나라 관객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영화 관객에게 우리나라의 가톨릭 영화를 선보이는 그날을 행복하게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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