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을 유통하는 성도입니까?
성경본문 : 잠언 19: 17
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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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호 목사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독점(獨占)하는 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유통’(流通)하는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장로교(長老敎)의 시조(始祖)인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교회의 정치적ㆍ 사회적 책임을 네 가지로 말했습니다.
①정치 지도자들의 구원을 위한 기도의 책임(제사장적 책임),
②경제 정의의 실현의 책임(시민적 책임),
③집권세력에 대한 권고의 책임(선지자적 책임),
④국가로 하여금 참된 종교를 보호하고 교회를 돕도록 요청할 책임(동반자적 책임)입니다.
책임(責任)을 진다는 것은 성숙한 자의 몫입니다. 책임을 질 때는 사랑과 애정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당하겠다는 마음으로 책임지는 자세를 가지게 될 때 주님께서는 교회를 향한 소망의 등불을 계속해서 켜 주실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통해 가난한 자에 대한 교회의 책무(責務)를 살펴보고 축복의 유통자로서의 성도의 삶의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교회의 책무입니다(17절a).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17절).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편견 없는 존중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 역시 더불어 살아야 될 동반자로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잠언에서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주님의 말씀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언 14:31, 참고 17:5).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유통할 때 삭막한 사회에서 오아시스 같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언 11:24~25).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신도 윤택하게 될 것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물질적인 부요뿐 아니라 심령의 부요함은 다른 사람을 윤택하게 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고, 없는 자와 있는 자 사이의 갈등을 빚는 자본주의 논리와는 달리 하나님 나라의 논리는 신앙과 은총의 논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교훈은 갖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끈한 마음으로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교회가 실천해야 하는 것은 상대가 잘하면 우리도 잘해야 한다는 조건반사(條件反射)의 논리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대로 사랑의 마음으로 품어내는 용납의 논리, 나눔의 논리, 축복의 논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우리는 이 땅에서의 지배 논리가 아니라 나눔과 섬김의 천국 논리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인정하시고 제자된 우리들이 그 책무를 감당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요한복음 12:8).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나누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사도행전 20:35).
신약에서‘가난’의 의미는 경제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습니다. 신약의 사상가운데서 가난한 자의 정의는 확대 해석됩니다.
① 육체적으로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장애와 질병 때문에 선천적으로 어렵게 태어난 분들과 후천적으로 예기치 않은 사고로 장애를 만난 분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장애로 고생하는 분들을 교회와 사회는 따뜻한 마음과 손으로 어루만져야 합니다.
② 영혼이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많이 배웠지만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나라에 눈먼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현세 집착적인 사람은 부패합니다. 오는 세상에 대한 진리가 너무 부족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에 대해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담대하게 외치는 것입니다. 물질을 통해 육신적으로 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살리는 것이 더욱 시급한 교회의 책무입니다.
③ 관계에서 가난한 자들이 있습니다.
군중(群衆) 속에 있지만 고독으로 영혼이 병들어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가 이러한 사람들을 끌어안지 않는다면 이 사람들은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고령화(高齡化) 사회를 맞아 나이가 장애가 되지 않도록 교회에서 주님을 배우고 봉사할 수 있도록 교회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둘째,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입니다(17b).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17절).
우리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기에 주님께서 갚아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는 것은 곧 주님을 배려하는 것이며 주님은 이것을 결코 잊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25:31~46).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태복음 6:20a). 가난한 자를 돌보고 연약한 자에게 배려하는 것은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놓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 축복의 당사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乞食)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편 37:25~26).
선조가 베풀면서 구제할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억하시고 후손의 축복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우리에게 위대한 유산을 물려 주셨구나’라고 간증할 정도로 우리 모두가 나눔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다음세대를 주님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누면서 살아야 합니다. 영적인 빈익빈 부익부(貧益貧富益富)의 고리를 끊고 우리 후대를 위해서 나눔의 축복을 공유해야 합니다.
나눔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십니다. 섬김의 실천자로서 축복을 유통하는 교회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실천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①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미 받은 물질과 가족, 은사와 직분, 직장 동역자와 사명 모두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생각하는 감사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불평하는 자는 결코 이웃과 나누지 못합니다.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하는 자만이 나눌 수 있습니다.
②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만큼 이웃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 물질과의 관계에 있어서 거리낌이나 불순종이 없도록 우리의 삶을 재조정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를 통하여 나눔을 실천한다면 전략적으로, 정기적으로 도울 수 있고, 검증된 대상에 대해 안전하게 도울 수 있고 평가할 수도 있는 이점(利點)이 있습니다. 건전한 구제를 실천할 때 자신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영적인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③ 나눔과 기부 문화의 첨병으로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 책임감)를 실천해야 합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성공(成功)이란 그대가 살았기에 한 영혼이라도 더 평안히 숨쉬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모든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관계에 있어 가난한 우리의 이웃들을 도웁시다. 가난한 자를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용납과 나눔과 축복의 유통자로 자신을 세워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