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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grace
(회개와 용서를 받을 수도 없는 죄들. 21-25)
21. 회개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더 나아가,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다. 이 점은 위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하며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이 은혜를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신 것을 보고 놀랐다(행 11:18, 고후 7:10). 바울은 디모데에게 불신자들을 부드럽고 관대하게 대하라고 명령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주셔서 그들은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딤후 2:25-26).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회심을 원하신다고 선포하시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권고를 보내신다. 그러나 권고의 효과는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에 달렸다. 이는 우리가 사람을 창조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자기 능력으로 더 훌륭한 본성을 입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의 전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고 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구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으로 살리신다. 엄밀히 말한다면, 회개가 구원의 원인이 아니지만 그것을 믿음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에서 분리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사야도 증거한 대로 이미 밝혀졌다.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 59:20)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왕성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성령이 역사 하셨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사야서를 보면, 신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호소하고 슬퍼하면서, 버림을 받았다는 일종의 표지로서 자기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신 것을 가리킨다(사 63:17). 배교자들을 구원의 소망에서 제외하려고 한 사도는 그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라고 그 이유를 제시한다(히 6:4-6).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멸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 사람에게 아버지 같은 그의 은혜를 보이시며 이를테면 그의 고요하고 기쁜 얼굴로 그들을 그에게로 이끄신다. 그러나 불경하여 용서하실 수 없는 자들은 버림을 받은 자들의 마음은 강퍅하게 만드시며 그들에 대해서는 진노를 나타내신다.
의식적으로 배교하는 자들에 대해서 사도는 이런 벌이 있으리라고 위협한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믿음을 버리며, 하나님을 조롱하며, 그의 은혜를 멸시하며,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며 짓밟으며(히 10:29), 참으로 힘을 다해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이다(히 6:6). 어떤 엄격한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듯이, 바울은 모든 의식적인 죄에 대해서 용서받을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교만은 용서를 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모독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용서의 여지 없이 엄격한 벌을 내리시는 것은 당연하다고 가르친다. 그의 말을 인용한다면,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고 하였다. 다른 구절에서도 그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만 있으리라." (히 10:26-27)고 하였다.
옛날 노바티아누스파(Novatianists)가 미친 듯이 날뛴 것은 이런 구절들을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선량한 사람들은 이 구절들에 나타난 냉엄한 태도에 반감을 가지고 이 서한에는 사도적 정신이 그 모든 부분에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거짓된 작품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서한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상대로 논의하는 것이므로 이 말씀들이 그들의 오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첫째로, 사도는 그의 주님이 하신 말씀과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마 12:31-32, 막 3:28-29, 눅 1 :10).
다시 말하거니와 만일 우리가 사도를 그리스도의 은혜에 반대된 자로 만들려고 하지 아니한다면, 사도가 이런 예외에 대해서 만족하게 생각한 것이 확실하다. 이에 따라서 결론은 어떤 죄에 대해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일이 없으나, 한 가지 죄만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이 죄는 절망적인 광기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연약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 사람이 마귀에게 사로잡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22. 용서할 수 없는 죄
그러나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땅히 결코 용서를 받지 못할 이 가증한 죄의 성격을 규명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이 죄를 정의하기를, 용서를 믿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그리스도께서 이 죄는 이 세상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과(마 12:31-32)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헛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이 세상에서 범할 수 있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어거스틴의 정의가 옳다면, 죽을 때까지 계속되지 않으면 그런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형제에게 내려진 은혜를 시기하는 사람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다고 한다. 그들이 어디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의 도움을 받아서 자연히 모든 다른 정의를 쉽게 능가할 수 있는 진정한 정의를 이제 제시하겠다. 하나님의 진리의 조명을 받아 무지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으면서도 악한 의도로 하나님의 진리에 항거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이다. 이런 항거만이 그들의 죄가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하신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서,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즉시 부언하셨기 때문이다(마 12:32, 눅 12:10, 막 3:29). 그리고 마태는 "성령을 거스르는 훼방" 대신에 "훼방의 영"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비난을 던지면서 어떻게 동시에 성령을 비난하게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무지해서 그리스도를 저주하는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가 계시되기만 하면 그 진리를 소멸시키려는 의식적인 의도는 없는 사람들,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임을 알고 그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중상하는 말을 하지 않을 사람들 즉, 이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서 죄를 짓는다. 복음의 가르침을 극악한 말로 저주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것이 복음에서 온 것인 줄 안다면 기꺼이 진심으로 공경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논박하며 반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을 확신하면서도 그 양심이 여전히 반대를 계속한다.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사역인 조명에 반항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은 성령을 거슬려 훼방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유대인들 중에 그런 자들이 있었는데, 스데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에 대적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항하였다(행 6:10). 그들 가운데는 율법에 대한 열성으로 부득이 그런 행동을 취한 사람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사악하고 불결한 생각으로 하나님 자신에 대항해서 미친 듯이 날뛰는 자들도 있는 것 같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에게서 온 교훈인 줄을 알면서도 그 교훈에 항거한다. 주께서 책망하신 바리새파 사람들도 그런 자들이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바알세불"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중상하였다(마 9:34, 12:24). 그러므로 이것이 훼방의 영이다. 즉 인간이 대담해져 하나님의 이름을 의식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바울이 자신이 불신 앞에서 모르고 그런 일들을 저질렀기 때문에 용서를 받았다고 주장할 때에(딤전 1:13), 그는 이 점을 암시하는 듯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주의 은혜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무지와 불신앙이 합해서 바울이 용서를 얻게 했다면, 지식과 불신앙이 합한 경우에는 용서를 받을 여지가 없다는 추론이 나온다.
23. "두 번째 회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세히 주의해 보면, 사도가 말하는 것은 한두 번 하는 타락이 아니고, 버림받은 자가 구원을 버리는 그 보편적인 반역임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그의 서한에서, 선택받은 자들 사이에서 나가기는 했으나 선택받은 자들에게 속하지 않았다고(요일 2:19)한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결코 화해하시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요한이 여기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단 그리스도교에서 떠났으면서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런 잘못되고 악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권하면서 그는 큰 진리를 말한다. 즉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의식적으로 또 고의로 배척한 자들에 대해서는 다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척한다는 뜻은 방탕, 무절제한 생활로 단순히 주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이 아니고 주의 가르침 전체를 고의로 또 의식적으로 배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만성이 "타락"과 "죄를 지음"이란 말들에 있다(히 6:6, 10:26). 그래서 노바티아누스파는 "타락"을 해석할 때 그것은 주의 율법에서 도둑질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고 배웠으면서도 절도 행위나 음행을 버리지 않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주장한다. 여기는 암시적인 대조법이 있어서 전에 말한 것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떤 특수한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완전히 돌아서는 것, 이를테면 전인이 배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도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후에 타락한 자들에 대해서 말할 때에(히 6:4-5), 그것은 성령의 조명을 의식적인 불경건으로 없애고 하늘의 은사의 맛을 뱉어 버리는 자들은 성령에 의한 성화에서 스스로 단절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유린하리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고의적이며 계획적인 불경건이란 뜻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 사도는 뒤에 있는 다른 구절에서 "고의로" 이라는 말을 첨가한다. 진리에 대한 지식을 얻은 후에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을 위해서는 속죄의 제사가 다시없을 것이라고(히 10:26) 사도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죄를 위한 계속적인 속죄의 제물이심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서신의 거의 전체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설명하면서 이 점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회생을 거부하면 다른 희생은 없다고 사도는 말한다. 그뿐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명백하게 부정할 때에 사람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거부한다.
24. 용서받을 수 없는 자들은 회개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빌면서 피난처를 구하는 사람들이 전혀 용서를 받을 기회가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냉혹하며 주의 자비와는 이질적인 생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이에 대해서 대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께로 돌아가는 사람에게 대해서 용서를 거부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으로 영원히 눈이 어두웠고, 그 결과로 회개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에서의 경우에도 이 점에 반대되는 것은 조금도 없다. 사도는 후에 에서의 예를 이 점에 적용하여, 에서가 잃어버린 상속권을 회복하려고 눈물과 통곡으로 구했으나 헛수고였다고 말한다(히 12:16-17). 이것은 예언자가 한 경고에 버금가는 진리이다. 예언서에는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고 한다(슥 7:13). 이런 말들은 진정한 회심이나 하나님께 대한 호소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불경건한 사람들이 궁지에 빠졌을 때에 느끼는 불안을 표시할 뿐이다. 그들이 전에 태연하게 무시하던 일, 곧 그들의 모든 행복은 주의 도움에 달렸다는 사실을 궁지에 빠진 다음에야 불안한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도움이 그들에게서 떠난 것을 괴로워하는 것이지 도움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의 "부른다"(슥 7:13)는 말과 사도의 "눈물"(히 12:17)이란 말은 절망 상태에 빠진 악인들을 괴롭히는 저 무서운 고통을 의미할 뿐이다.
여기에 깊이 유의해야 할 사실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악인이 회개하기만 하면 곧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예언자를 통해서 선포하신(겔 18:21-22) 하나님께 자기 분열이 생기는 결과가 초래 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사람의 마음은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 구하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은 결코 속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이 재난을 당해서 그 해결점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아야 되겠다고 깨달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면 여전히 도망하여 마음이 산란하고 맹목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회심"이니 "기도"니 하고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25. 가짜 회개와 진짜 회개
그러나 문제가 있다. 사도는 가짜 회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아합이 용서를 받고 그에게 내리게 되어 있었던 벌을 피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만년의 행동을 보면, 그가 다만 갑작스런 공포심에서 떨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왕상 21:28-29). 그는 굵은 베를 몸에 두르고 재를 쓰고 땅에 누웠으며(왕상 21:27), 그에 대한 증거로 보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여전히 완고하고 악의를 품고 있었던 이상 옷을 찢었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셨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위선자들은 이와 같이 얼마 동안 용서를 받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항상 그들 위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경계로 삼기 위한 것이다. 아합에 대한 벌은 경감되었으나 그것은 단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느끼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그에게 어떤 유익이 되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저주는 비록 은밀했으나 그의 집에 머물렀고 그는 영원히 멸망하고 말았다.
에서에게도 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는 거절을 당했으나, 그의 눈물로 인하여 현세의 축복은 허락되었다(창 27:40).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영적 상속은 두 형제 중에 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에서가 무시되고 야곱이 선택됐을 때에 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동물적인 인간으로서의 위안은 남아 있었다. 즉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로 기름지게 되리라는 것이었다(창 27:28).
내가 방금 말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경계로 삼아서, 우리는 진지한 회개를 하도록 더욱 마음을 다하여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실하게 또 충심으로 회심할 때, 무가치한 자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면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꺼이 용서하시리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수단으로 강팍한 자들 위에는 어떤 무서운 심판이 내릴 것인가를 배운다. 지금도 강팍한 자들은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얼굴과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멸시하며 무시하는 것을 하나의 재미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울음이 거짓이며 마음이 부정직한 것을 아시면서도, 자주 손을 내밀어 그들의 재난을 완화하셨다(시 78:36-37). 그들이 곧 자기의 본성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시편에서 하나님께서 한탄하신 바와 같다(57절). 이와 같이 지극히 인자한 처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진지한 회심으로 인도하려 하셨고 또한 그들을 변명할 여지가 없게 만들려고 하셨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일시 징벌을 중지하심으로써 항구적인 법으로 자신을 속박하시는 것이 아니고 때때로 위선자들에 대해서 더욱 엄격한 태도를 취하시며 벌을 배가하셔서, 그들의 거짓을 불쾌하게 생각하심을 알리신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용서하신다는 선례를 보이셔서, 경건한 사람들은 생활을 고칠 용기를 얻게 하시고 완고하게 핍박을 아는 교만한 자들은 더욱 엄한 정죄를 받게 만드신다.
기독교 강요 제 3 권 제 3 장 믿음에 의한 우리의 중생(회개와 용서받을 수 없는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