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31, 교주와의 동행
70년대 초 어느날, 그러니까 노광공이 당뇨합병증으로 54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후 그의 둘째아들 노영구(세칭 동방교의 명명-아브넬)가 후계를 물려받아 성자 하나님이라고 떠 받들려지고 있던 때였다. 첫째 아들은 노영도(세칭 동방교의 명명-아바)라는 인물인데 키도 훤칠하고 인물도 잘 생겼으나 교주인 아버지의 돈으로 무위도식하며 세칭 동방교와는 거의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었고 복잡한 여자관계 때문에 아버지 노광공의 눈밖에 나 있어서 후계는 둘째아들이 물려받고 있었다.
그 성자 하나님, 노영구가 서울에서부터 자기 전용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부산 '초량12교회'로 납신 것이다. 내가 '초량12교회' 전도사로 일하고 있던 때였다. 얼마나 황송했던지... 그런데 당시 밀양 일대에서 학생들이 많이 전도되어 한창 부흥(?)하고 있던 밀양교회에 가보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이 시절에는 세칭 동방교에서 교회앞에 일정한 숫자가 붙지 아니했다. 그런 제도가 슬그머니 없어져 버렸다.
당시 밀양교회는 기드온장로라는 30대 말 정도의 여자가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양반은 김태문 삼손목사의 부인이기도 했다. 남편은 서울의 본부에서 목사로(사실 말이 목사이지 하는 일은 세칭 동방교내의 노가다 일 전담), 부인은 밀양에서 전도사로 세칭 동방교에 충성하고 있는 부부였다.
밀양에서 조그만 가옥을 전세내어 예배당으로 꾸미고 주로 여자중고생들을 전도하여 교인으로 삼고 있었는데 조그만 가옥이 비좁을 정도로 신도수가 증가하여 부흥을 이루고 있었다. 부산경남의 본부라 할수있는 '초량12교회' 전도사로 있던 나도 가끔 이곳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부흥을 독려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곳에 성자 하나님이 납시겠다니 밀양교회로서는 얼마나 영광이었으랴.
급히 세칭 동방교의 밀양교회에 전화로 연락해놓고 성자 하나님을 같이 수행해서 따라갈 사람을 물색하는 중에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 밀양인 내가 길을 잘 안내할 수 있겠다고 선정이 되었다. 길을 안내하는 네비게이션이란게 없던 시절 아니던가. 그런데 승용차를 타면서 웬일인지 성자 하나님은 운전기사의 우측 조수석에 않고 나를 승용차의 상석인 운전석 뒤쪽 오른편에 앉게 하는것이 아닌가.
당시의 세칭 동방교에서는 절대복종이 아닌던가, 감히 어디라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상석에 점잖게 앉았다. 나의 왼쪽 옆에는 내 또래인 '초량12교회'의 명명을 살렘이라고 부르는 여신도가 같이 동행하고 있었다. 성악을 전공해서 노래도 잘 부르고 초량 12교회 한쪽 구석에 있던 풍금도 잘 타던 처녀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사법서사를 하고 있었으며 당시로서는 꽤 부유했던 집안의 처자였다.
사상을 지나 구포다리를 건너 우리가 탄 승용차가 김해국도를 지나다가 어느 주유소에서 차의 기름을 보충하는데 같이 동승해가던 살렘이 재빨리 차에서 내려 기름값을 계산했다. 아브넬 할아버지(2대 교주 노영구)의 자가용차에 기름값 내는 것이 이렇게 황송하고 영광일 수 없다는듯이 겸손의 몸짓을 보이던 것이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진영, 수산을 거쳐 밀양 가곡동에 있는 교회에 도착하니 여러 여학생 신도들이 영광의 ‘성자 하나님’을 맞이하기 위해 승용차 주위로 몰려드는데 뒷좌석의 상석에서 내리는 나를 그분으로 착각하고 온갖 송구스런 예를 갖추면서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얼른 내가 아니고 이분이라고 조수석에서 내리는 2대 교주 노영구를 가르쳐 주었다.
후에 알고보니 무슨 불심검문에라도 걸리게 되면 뒷 좌석의 상석에 앉은 나를 교주라고 착각하게 하려는 꼼수였다고 알게 되었다. 그때는 그만큼 세칭 동방교에 대해서 외부에서 보는 이미지가 좋지 않을때였고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던 시절이었다.
우연찮게 오래된 기록 하나를 찾았다.
당시의 분위기를 조명할 수 있어서 그대로 올린다.
19 * * . 7. 20. 일. 흐림
아브넬 조부님(註.2대 교주 노영구를 지칭)을 모시고 부산지방의 전체 성민들이 금강원에 야외집회를 가는 날이다. 나는 아침8시에 일어나 준비를 했다. 광안리 해수욕장에 해양훈련 간다고 집에 말하고 점심을 싸가지고 성민들 모이는 장소인 부산대학 정문을 향해 집을 출발했다. 나는 자세한 장소를 잘 몰랐기 때문에 서면의 특급버스 정류소에서 내려 초량12교회에 전화하려고 공중전화부스로 가는데 요엘(註.샬롬 요엘의 저자, 문정열)이 나를 발견하고 쫓아왔다. 그래서 요엘하고 같이 부산대학 정문앞으로 갔다.
성민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부산대학 정문에 있던 성민들이 11시경 모두 산으로 올라 갔는데 작년에 왔던 장소라 한다. 나는 작년에는 안 왔기 때문에 몰랐다. 50분가량 걸어 올라 온 장소인데 금강원이었다. 조금 후 안 일이지만 이 장소가 아닌데 성민들이 여기로 와서 할아버지(註.노영구를 지칭)께서 굉장히 노하셔서 부산대학 정문앞까지 오셨다가 돌아가시고 초량12교회로 다시 돌아오라고 하셨다 한다.
성민들은 울상이 되었다. 하늘에서 비는 조금씩 심심찮게 내리는데 성민들이 어쩔줄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중에 먼저 내려갔던 성민들이 조부님(註.노영구를 지칭) 오신다면서 좋아서 팔딱거리며 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정말 조부님(註.노영구를 지칭)께서 윗도리를 어깨에 걸치시고 올라오셨다.
나는 무척 기뻤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 할아버지 (註.노영구를 지칭) 노하셨지만 그런 할아버지 아니라고... 거기서 성례식(註.세칭 동방교에서는 예배를 이렇게 불렀다)을 마치고 조금 높은 장소로 옮겨서 점심을 먹고 오후 4시경까지 케이블카가 오르내리는 곳에서 성민들이 놀았는데 무척 시끄러웠지만 ‘사찌기 사찌기 사뽀뽀’ 놀이등을 하면서 모두 재미있게 놀았다.
내려오는 길에 할아버지(註.노영구를 지칭)께서 회전목마를 타시기도 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야외로 나오니 나는 꼭 놀러 나온것 같이 마음이 혼란하였다. 내 생각 같으면 자주 이렇게 야외로 나왔으면 좋겠다. 하루를 유쾌히게 지냈다. 약 260여명 모였다고 한다.
註. ‘사찌기 사찌기 사뽀뽀’ 놀이-여러사람이 주욱 둘러앉아 있고 사회자가 일어서서 선창으로 ‘사찌기 사찌기 사뽀뽀’ 하면서 양손을 비비고 몸짓을 하면서 자기 신체의 여러군데에 갖다대면 앉아있는 사람들은 후창으로 ‘사찌기 사찌기 사뽀뽀’ 하면서 그대로 사회자의 손짓, 몸짓을 따라 해야 하는데 손짓과 몸짓이 틀린 사람을 사회자가 발견하여 일으켜 세워서 벌칙을 주는 놀이, 벌칙으로는 노래를 한곡 하거나 사회자가 시키는대로 장기자랑 하나를 해야하며 사회자는 주로 2대 교주 노영구 자신이 했음.
첫댓글
사이비종교를 믿는 사랑들의 대부분은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나마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나이에 전도를 받으니 의심을 못하고 믿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대학을 가면 '대악'이라고 부르며 은근히 대학 가는 것을 싫어했지요. 그 덕분에 대부분의 성민들은 고졸이나 중졸, 초등졸로 끝나면서 인생에 주름이 생기게 되지요. 오직 지성금만 많이 내게 하고, 대기처로 올려보내서 무노동 일꾼들을 부려 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집단들 입니다. 그 덕분에 동방교는 발전이 더디고 늙은이들만 남은 집단으로 추락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