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월(慧月) 스님
부처 골수 훔치려 몸부림친 지혜로운 '큰 도적' 분별시비 모두 놓아버린 천진불 |
혜월(慧月, 1861~1937) 스님은 ‘근대 한국 선(禪)의 달마’로 불리는 경허(鏡虛, 1849~1912) 스님의 제자이다. 세간에서는 경허 스님의 제자 가운데 ‘만공(滿空)의 불사(佛事), 용성(龍城)의 역경(譯經), 혜월의 개간(開墾)’이라 일컬어 세 스님을 당대의 3대 걸승(傑僧)이라고 칭송하곤 한다. 이 분들의 업적은 대부분이 수행자의 본분사(本分事)뿐이어서 내세울 만한 것은 아니지만, 일제치하라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과 오랜 세월동안 탄압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당시 불교계에서는 가히 혁명적 변화로 평가되기도 한다. 쇠락하고 변질된 한국불교의 위상을 회복하고 그 가치를 재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혜월 스님은 두 분 스님에 비해 단편적인 일화만이 전해질 뿐 그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다. 이렇다 할 법문도 없고, 더욱이 변변한 문집 한 권 남기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스님은 1861년 6월 19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신평리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평산 신씨(申氏)로 알려졌으며, 11세의 어린 나이에 덕숭산 정혜사(定慧寺)의 혜안(慧安)스님을 은사로 동진출가(童眞出家)했다. 그런데 이 11세의 천진불(天眞佛)은 76세로 입적하는 그 순간까지도 천진불 그 대로였다.
스님이 파계사 성전(把溪寺 聖殿)에 있을 때는 함께 있는 동승(童僧)을 ‘큰스님’이라 부르면서 존대한 일이며, 절의 일꾼과 동네 주막집 주모가 그들의 통간(通姦) 장면을 스님에게 들켜 배가 아파 벌거벗었다는 거짓말에 손수 죽을 쑤어 바친 일은 세속의 잣대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스승 경허 스님과의 만남은 24세 때로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수심결(修心訣)』을 배운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 후 내면 깊숙이 존재하고 있는 본래 천진을 깨달아 수법제자(受法弟子)가 되었다. 경허 스님의 문집에는 혜월 스님에게 내린 전법게 ‘법자 혜월에게 주다(與法子慧月)’의 전문이 전해지고 있다.
了知一切法(요지일체법)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
如是解法性(여시해법성)
卽見盧舍那(즉견노사나)
依世諦倒提唱(의세제도제창)
無生印靑山脚(무생인청산각)
一關以相塗糊(일관이상도호)
일체법을 요달해 알 것 같으면,
자성에는 있는 바가 없는 것.
이같이 법성을 깨쳐 알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세상 법에 의지해서 그릇 제창하여 문자와 도장이 없는 도리에
청산을 새겼으며 고정된 진리의 상에 풀을 발라 버림이로다.”
스님은 스승으로부터 받은 이 게송대로 입적할 때까지 ‘무소유’의 삶을 철저히 지켜 나갔다. 정혜사에 있을 무렵 하루는 도둑이 들었다. 양식을 훔쳐내 지게에 지고 가려던 도둑은 가마니가 무거워 쩔쩔매고 있었다. 이 때 스님은 도둑의 지게를 들어 올려 슬며시 밀어 주었다. 스님은 자신을 보고 놀란 도둑에게 양식이 떨어지면 다시 오라고 했다고 한다. 천진과 무소유 그리고 자비를 담고 있는 한편의 아름다운 수채화가 아닌가.
황무지를 개간하여 만든 세마지기의 논을 두마지기 값만을 받고 팔아버린 일 역시 세속의 탐욕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동시대를 함께 살다 간 수행자들조차도 스님의 행동을 이해하기는커녕 힐난과 질타를 퍼부었다고 한다.
스님의 이러한 천진과 무소유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과연 세간에 전해지고 있는 대로 일자무식의 까막눈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천성 때문일까. 제자들의 집착과 편견을 용납하지 않았던 다른 일화라든지 제자 운봉(雲峰)스님에게 남긴 임종게(臨終揭)를 엿보면 그렇지도 않은 듯싶다.
일체의 변하는 법은
본래 그 실체가 없다
모양이라는 것은 원래 허망한 것
바로 이것이 견성이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본무진실상(本無眞實相)
어상의무상(於相義無相)
즉명위견성(卽名爲見性)
스님에게서는 여느 수행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번뜩이는 지혜나 서슬 퍼런 수행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불법(佛法)을 위해 스승 달마에게 자신의 왼팔을 바쳤던 혜가의 절박함이나 임제(臨濟)가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되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고 부처를 죽이는 일(殺父殺祖)’과 같은 극단적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스님은 이 천진과 무소유를 통해 그 어느 누구보다도 지혜로웠고, 깨달음을 향한 구도열이 집요했으며 치열했던 수행자가 아니었을까. 아마도 스님은 선가(禪家)에서 이야기하는 부처의 골수를 얻기 위해 몸부림쳤던 지혜로운 ‘큰 도적’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님은 48세 때부터 도리사(桃李寺), 파계사 성전, 통도사 극락암(通度寺 極樂庵), 천성산 내원사(千聖山 內院寺) 울산 미타암(彌陀庵) 등 여러 사찰에서 한 손에는 호미와 곡괭이를, 한 손에는 제자들의 깨달음을 독려하는 죽비를 들고 계셨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믿어버리는 순진무구한 천진불, 헤월스님. 스님이 입적하기 전 부산 범일동 안양암(安養庵)에서 스님을 친견했던 현칙(玄則)스님은 “『전등록(傳燈錄)』에 나오는 역대의 조사들조차도 살림살이를 힘써 간섭한 이도 있고, 인사나 체면 같은 예절에 구애된 이도 있었지만, 헤월 스님에게서는 그런 일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분별시비를 모두 놓아버리고 단지 마음의 부처를 보고 스스로 귀의한 것이다. 이러한 스님의 상태를 보고 ‘침을 잘못 맞아 저런 병신이 되었다’고 비웃는 세인들에게 현칙 스님은 다음과 같이 읊기도 했다.
지혜의 달이 언제나 큰 밝은 빛을 내뿜건만
알지 못하는 것은 눈먼 세상 사람들이네
혜월상방대광명(慧月常放大光明)
안맹세인총불지(眼盲世人總不知)
-오경후/한국불교선리연구원 선임연구원
[출처] 혜월(慧月) 스님 :부처 골수 훔치려 몸부림친 지혜로운 '큰도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