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애 3:55~66
제목: 심히 어려울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 기독교는, 기쁘고 행복할 때는 물론이고, 너무 어려워서 심히 깊은 구덩이에 빠진 상황에서조차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입니다.
애3:55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I AM)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여호와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
출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한분만이 ‘스스로 있는 자’ 즉 여호와이십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한분 하나님이시고 한 본질이십니다. 그 한 본질의 이름이 여호와입니다. 위격은 3 위격들로 구분되지만 한분이신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신데, 예를 들어, 성자의 위격이신 예수님도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초신자나 교리를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하여 이와 관련하여 칼빈의 설명을 한 번 더 인용해 올립니다. 기독교강요의 내용입니다.
믿음에서 비롯되는 기도도 그리스도께 드려지고 있다. 하나님께 무언가 드려야 할 것이 있다면 기도야말로 특별히 하나님의 위엄에 속하는 것이다. 선지자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2)라고 말씀하며, 또한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으니, 결국 그가 여호와이신 것이 되는 것이다. ← 『기독교강요』, 1.13.13. |
궁극적이고 영원한 구원은 영혼의 구원이지만, 구원의 여러 의미에는 현세에서의 위기나 곤경에서 벗어나는 것도, 넓게는, 포함됩니다. 신비주의자나 기복신앙에 집착하는 자들은 현세구복(現世求福)만을 추구하지만, 개혁주의와 건전한 복음주의는 궁극적이고 영원한 구원에 더 초점을 두고 믿습니다.
욜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
칼빈은『기독교강요』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여호와이신 것이라고 합니다. 신약교회의 성도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얻고(욜2:32) 안전함을 얻는 것(잠18:10)은 애3:55(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너무 어려워서 심히 깊은 구덩이에 빠졌을 때에조차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은 구약교회와 신약교회 모두의 성도들이 행하는 절실하고 진실한 기도입니다.
● 오늘 묵상의 제목 겸 요절인 애3:55 아래에 나오는 말씀들도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심히 깊은 구덩이(애3:55)는 시130:1의 깊은 곳입니다. 그곳은 그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깊은 해연(海淵)을 가리키고(겔 27:34) 심한 고통∙압박감 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시130:1.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
심한 고통∙압박감이 엄습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신앙의 저력입니다. 아마도 이런 지경에서 기도할 때 성령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the Spirit himself intercedes for us) |
혹시 너무나 어려워서 기도조차도 잘 안 된다면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이름만이라도 부르십시오. 그리하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실 것입니다. 고난에 처한 어느 며느리가 친정 엄마의 이름을 부르며 막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들을 종종 듣는데요. 친정엄마는 딸이 시댁에서 고난 중 부르짖는 소리를 못 듣지만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애3:56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Do not hide Your ear) |
하나님은 성도의 부르짖음과 기도를 이미 다 들으셨고 앞으로도 들으실 것입니다. 다만 성도가 부르짖는 절박함은 구박 당하고 억울한 며느리가 친정엄마의 이름을 부르는 것 이상으로 애절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애3:57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Do not fear) 하셨나이다 |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외에는, 어느 것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참 믿음은 다른 피조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의 확신은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롬8: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neither angels nor demons(=principalities))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하나님이 아닌 어떤 피조물도, 심지어는 천사나 귀신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 확신은 궁극적으로는 구원의 확신이고 일상생활 가운데에서는 기도하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붙들어 주시고 안전하게 보호해 주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속량해 주신 은혜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애3:58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You have redeemed my life) |
속량(贖良)은 ‘① 몸값을 받고 종을 놓아주어 양민이 되게 함 ②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대속한 행위’ 등의 의미입니다(Daum 사전). 기독교가 아닌 세속의 사전조차도 속량을 예수님의 대속(代贖, 남의 죄를 대신하여 받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 세상의 악한 자들과 이들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사탄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타락한 사악한 영이지만, 사람을 괴롭히는 악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사탄 앞에 정관사가 붙으면 우리가 흔히 아는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인 그 사탄이고, 관사 없이 사용되어 인간 대적자를 의미할 때도 있다고 합니다(시109:6- NIV, 한글개역 성경 난외 주 "송사하는 자”로 번역됨). 애3:59~65를 보면 나를 억울하게 하는 자(59절), 나를 모해(謀害, 나쁜 꾀를 써서 남을 어려움에 빠뜨림) 하는 자(60절), 나를 비방하는(reproach) 자(61절), 나를 치는(헐뜯는) 자(62절)와 나를 조롱하여 노래하는 자(63절)들이 나옵니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사탄의 조종을 받는 자들로서 성도들을 억울하고 괴롭게 만드는 원수들입니다. 사탄(영적 존재)과 사탄 같은 자들(성도를 괴롭히는 인간 대적자)은 감히 하나님께는 도전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치열한 위해를 가합니다. 그러나 애3:64 이후에 그 판도는 바뀌어서 악인들은 보응을 받고 멸망합니다.
애3:64.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보응하사 65.그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66.주께서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사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 |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지만 끝까지 악한 자에게는 진노하십니다.
민14: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 |
성도가 이 세상을 사는 그 길은 가시밭과 고난의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을 끝까지 집요하게 괴롭힌 악인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저주를 받고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들이 너무나 어려워서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어찌 아버지께서 그 자녀들을 외면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애통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첫댓글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위 묵상 본문만 읽어도 충분하십니다. 한편, 중급자 이상이나 더 다양한 이해를 원하는 분들을 위하여 기타 댓글과 주석 등을 올립니다.
네, 추가로 잘 참고하겠습니다.
예레미야(Jeremiah)
뜻 : 여호와는 멀다
베냐민 땅 아나돗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서 4대 선지중의 한 사람이다 유대왕 요시아 13년 부터 시드기야 왕 11년까지 42년간(B.C. 628-586)의 선지자이다(렘 1:1-3). 그는 정렬적인 애국지사로서 백성들이 여호와를 배 반하고 국가와 민족을 좀먹는 행동을 일삼는 관민을 볼때에 통분하여 크게 책망하나 목이 굳은 민중은 듣지 않고 도리어 원망하고 가두고 심지어 죽이려고 까지 하였다(렘 36:19). 유대왕 여호와긴 4년에 여호가 예레미야에게 두루마리 책에 이르신 말씀을 기록하라 하시므로 그대로 기록하여 모든 백성에게 낭독하고 또 왕앞에서 낭독하매 여호와김이 낭독하 는 데로 베어 화로에 던져 태웠다(렘 36:1-23).
여호와가 에례미야에게 명하사 다른 두루마리에 이럼 말을 다시 그대로 기록 하고 여호 와김왕에 대하여는 바벨론 왕이 이땅을 멀리하라 라고 예언하라 하 시매 그대러 행하였 다(렘36:27-32). 그 후에 갈대아 인에게 항복하라 권고하자 잡아 토굴에 가두었다(렘 39:13-16) 그 후 다시 백성의 평안은 구하지 않고 군사와 백성의 사기를 저하시킨다고 물없는 진흙구덩이에
던져 넣은 것을 구스사람 에비멜렉이 왕에게 청하여 끌어내고 시드기야왕이 비밀히와서 다시 물으매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면 살고 항복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대답하였다(렘38:7-13, 38:16-18).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2년만에 함락시키고 왕 을 사로잡아 그 목전에서 그 아들들과 귀인들을 죽이고 왕의 눈을 빼고 바벨론으로 옮겼다(렘 39:1-9).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KCM사전>
아! 예레미야가 여호와는 멀다는 뜻이군요. 반어법으로 하나님이 멀다고 표현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의미도 있는 것 같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예레미야애가(Lamentations of Jeremiah) <--출처: 비전성경서전(두란노)
예레미야서의 슬픔에 잠긴 발문(跋文:postscript)이다. 이 책의 히브리어 제목은 본문이 시작하는 첫 단어를 따서 '어찌할꼬'라는 의미의 '메카'('ekha)로 불렸으며, 헬라어로 기록된 70인역의 제목은 '큰 물음' 또는 '탄식시'라는 의미의 '트레노이(threnoi) 였다. 다섯 장의 매가를 통해 저자는 죄로 인한 예루살렘의 운명에 대해 탄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공의를 주장하는 예언자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이 책은 죄로부터 비롯된 슬픔, 비통, 고뇌, 황량함과 고통을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책이다(매 3:1-18). 애가서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슬퍼하면서 동시에 생존자들을 향해 비난하며 또한 그들에게 가르침과 희망을 주고 있다(매 4:22). 이 책은 에스겔서와 다니엘서와 함께 포로기에 속하는 예언서로, 예레미야매가가 지난 일에 집중하는 반면 에스겔서와 다니엘서는 앞날을 바라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 및 기록 연대: 히브리어 본문은 저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몇 가지 점에서
예레미야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먼저 유대인들의 전승이 이 책의 저자로 한결같이 예레미야를 지목하고 있다는 점이며, 무엇보다 70인역이 이 매가를 예레미야서 바로 다음에 놓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70인역의 머리말에는 "예레미야가 앉아서 예루살렘에 대해 매가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예레미야가 저자라는 또 다른 주장은 매가의 문체와 구절에 있어서 예레미야서와 많은 유사점 때문이다(애 1:15 과렘8:21, 그리고 매 1:16과렘 9:1; 13:17; 14:17).
역대하 35:25의 “예레미야는 저를 위하여 매가를 지었으며 노래하는 남자와 여자는 요시야를 슬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는 기록이 애가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레미야가 매가의 저자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작 연대에 있어서는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 즉매가서 전체에서 보여지는 예루살렘 파괴의 생생한 묘사와 충실한 감정에 비추어 볼 때 예루살렘이 멸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록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BC586년 초나 말기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역사적인 배경: BC588-586년에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벽을 포위하고 있었으며(왕하 25:1-10 참고), 유다의 동맹군인 매굽은 전쟁에서 패했으며, 유다의 다른 성읍들은 차례차례 무너졌다(렘 34:6-7 참고).
이제 예루살렘만 남게 된 것이다. 바벨론의 포위로 말미암아 성중에는 양식이 다 떨어졌으며 (왕하 25:2). 심지어 굶주린 어머니들은 자기 자녀들을 먹기도 했다(매 2:20:4:10). 마침내 성벽이 뚫리고 바벨론의 군대가 도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왕하 25:4-7), 느부갓네살이 그 도시를 점령하기까지는 수주일이 걸렸으며, 점령한 후에는 도시를 약탈했다. 그 후에는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귀인의 집까지 파괴하기 시작했다(왕하 25:8-9)마침내 예루살렘의 성벽까지도 허물어버렸다(왕하 25:10). 바벨론 군사들이 예루살렘을 떠났을 때에 그곳에는 불에 그을리고 깨진 벽돌 조각들만 남았을 뿐이었다. 이 모든 광경을 예레미야는 목격했다(렘 39: 1–14:52:12-14), 예레미야애가서는 이처럼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멸망당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기록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버리시고,
그들을 향한 은혜를 거두신 것에 대한 심리적, 영적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
기록 목적: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하여 슬픔을 표하며,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과 그의 백성에 대하여 여전히 신실하심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기록하였다. 즉 하나님께서 막을 심판하시는 약속에 대한 신실성과 그의 백성에 대하여 아직도 불변의 사랑과 자비심을 갖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다(매 3:22-23),
예레미야매가와 신명기 28장과의 관계: 애가의 저자는 예루살렘이 경험한 모든 비통과 고난이 이미 약 900여 년 전의 모세가 예언한 신명기 28장의 저주가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이 당한 불행의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대한 불순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위한 희망의 메시지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우신 언약에 성실하셨다. 이스라엘이 당한 불행은 불순종의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불순종에 대한 심판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또한 회개에 대한 회복도 약속하셨다(신30:1-10). 이는 애가의 저자가 그 와중에서도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이유이다(애3:21-32), 포로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그들로 하여금 신명기 28장의 교훈을 배우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예레미야매가 5:21-22의 기도는 낙담한 백성들의 의심하는 부르짖음이 아니라 오히려 신명기 28장과 매가서의 교훈을 알고 있는 포로들의 믿음의 반응인 것이다.
애가의 구조와 문체적 특성 : 매가의 형태는 두 가지 구조적 요소의 사용에 의해 강조된다.
첫째는, 다섯 장 중에서 세 장의 첫머리에 나오는 '아!' '오!'(히브리어로 '메카’)라는 단어의 반복이다(매 1:1:21:4:1 참고). 이 '메카'라는 말은 극도의 놀람이나 비통한 감정을 나타낸다.
매가 형태가 강조하고 있는 두 번째 요소는 1-4장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키나'(qinah)의 사용이다. 애가나 기타매가문학은 보통 그 나름의 독특한 보법(譜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으며, 그 보법에는 ‘키나’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이것의 가장 큰 특징은 평행 구절의 두 번째 콜론(colon)이 항상 첫 번째의 것보다 짧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절름발이식의 보법 형태는 독자에게 허무감과 불만전한 느낌을 갖게 준다. 이러한 두 가지의 요소는 애가에 슬픈 기분을 더해 주며,
그들의 감정적 격렬함을 높여 주고 있다.
애가는 모두 5장에 걸친 일련의 비탄시이지만 각 잠은 서로 분리된 매가이다. 1~4장은 비록 그 세부적인 점에서는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다 개별적이고 완전한 알파벳 두운 시 (acrostic poetry)이다. 1, 2장과 4장은 각각 히브리 알파벳의 22자로 시작되는 22절로 되어 있다. 3장은 이 책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66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장에서 처음 3절은 히브리어 첫 글자인 알렙으로 시작되며 그 다음 3절은 히브리어 두번째 글짜인 '베트'로 시작된다. 단지 5장만은 22절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알파벳 두문시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는 않다.
매가서의 문학적 구조는 또 하나의 독특성이다. 1~2장과 4-5장은 서로 평행을 이루는 교차 대구법으로 배열되어 있다. 2장과 4장이 하나님께 중점을 둔 반면, 1장과 5장은 사람에게 중점을 두고 있다. 3장은 고뇌 중에 있는 저자의 반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 책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 배열은 오른쪽 그림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전체 개관: 예레미야애가는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슬픈 책이다. 저자는 거대한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의 슬픔을
여기에 적고 있다(애 1:1~2). 그러나 슬픔 가운데서도 저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한다(애 1:18). 모든 것이 큰 슬픔으로 보이지만 미래에는 기쁨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항상 신실하신 분이시다. 예레미야애가의 핵심 구절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매 3:22-23)이다. 장별로 본 매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애가 죄로 인한 예루살렘의 훼파(매 1장)
두 번째 매가: 예루살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매 2장)
세 번째 매가: 예레미야의 반응 그의 고뇌와 희망과 기도(매 3장)
네 번째 매가: 여호와의 진노(매 4장)
다섯 번째 애가 남은 자들의 반응(애 5장).
예레미야 애가에 대한 전반적 설명을 올려 주시니 이 댓글 하나만 보아도 개관이 되어서 좋습니다.
@노베 네, 공감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함 (예레미야 애가 3:55-66) ← <매튜 헨리 주석>
우리는 이 전장을 통하여 예언자의 가슴속에서 감정과 믿음, 또 공포와 희망 사이의 투쟁을 관찰할 수 있다. 그는 불평을 하고 그리고 그 자신을 위로한다. 시편 42편과 같이 자신을 위로하고 그리고 다시 불평을 한다. 그러나 거기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믿음은 최후의 말을 얻고 정복자로 실현된다. 이 구절에서 그는 어떤 위로를 가지고 결론을 맺는다. 여기에는 그가 자신을 위로하는 두 가지가 있다.
Ⅰ. 그는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다. 이것은 공적인 고난에 대하여 그 자신을 고무한 예언자의 개인적인 경험에 돌릴 수도 있다. 특별한 성도를 적당한 시기에 구원하신 그는 일반적으로 교회를 구원하심에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다. 또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헛되지 아니하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유대인 중에 있는 남은 선한 백성일 수도 있다. 예언자와 그의 경건한 친구들은 세 가지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하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1.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 진노의 구름으로 인하여 그들의 기도가 상달할 수 없는 것 같았음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었지만(44절)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두 번째의 생각으로서 적어도 더 깊은 시련으로써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었다. "너희는 나를 헛되이 찾지 말라." 그들이 깊은 구덩이에 있을 때 마치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산 자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55절). 그들의 울음이 기도를 방해하지 않았다. 우리가 깊은 구덩이에 버려졌다 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서부터 지극히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을 유의하라. 고래 배속에서의 요나와 같이 "내가 깊은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시 130:1). 하나님은 깊은 함정에서 드리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실 수 있었다. 그렇다. 사실 그러했다. "당신이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어떤 사람들은 다음 말을 깊은 감사함에 대한 고백으로 번역한다. "당신은 나의 호흡에" 나의 부르짖음에 "당신의 귀를 숨기지 아니하시고." 원본에는 그런 해석의 의미도 포함할 것이다. 우리는 거기 더하여 그것을 탄원으로서 읽는다. "당신의 귀를 숨기지 마옵소서." 깊은 구덩이에서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에게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소리를 들으심은 그가 어떠한 때라도
그의 귀를 감추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우리에게 고무하는 것이다. 그가 호흡을 어떻게 기도라고 부르는가를 관찰하자.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향하여 호흡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쫓아서 기도한다. 기도는 탄원으로 자비한 공기를 빨아들이고, 찬양으로 그것을 되돌려 보내는 중생한 사람의 호흡이다. 그것은 영적 생활의 증거요 지속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나의 숨을 헐떡거림으로 읽는다. "내가 숨을 거둘 것 같을 때, 그리고 나는 나의 마지막을 호흡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당신은 내 고통을 지각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그들의 공포를 평안하게 하셨다(57절).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당신은 당신의 나타내심으로 나를 은혜롭게 안심시키고, 내 가까이 당신을 보게 하셨으나 나는 당신을 나로부터 멀리 계신 것으로 생각하였었나이다." 우리가 순종의 길로 하나님께 가까이할 때 그가 자비의 길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볼 수 있을 것에 유의하자.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은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하나님의 예언자의 예언이다(사 41:10, 13, 14).
이것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들을 예방하는 선지자의 예견의 언어이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조용하게 하고 그들을 순하게 하는 선지자의 언어이다. 그의 예언은(언어), 재난 중에 있으면서도 그래도 아직 하나님의 백성인 그 영혼들에게 대하여 선지자의 영의 증언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3. 그는 이미 그들에게 대하여 호소하기 시작하였다(58절).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을 펴셨고" (이것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내 생명을 속하셨나이다. 내 생명을 취하여간 이들의 손에서부터 내 생명을 구원하셨나이다. 금방이라도 삼켜질 것 같은 때에 내 생명을 그들의 전략물로 주는 대신에 나에게 주셨나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에게 대하여 그는 그들을 위하여 아직도 더 호소할 것이라고 고무하는 것이다. "당신이 죽음에서부터 내 영혼을 구원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나의 발을 타락에서부터 건지실 것입니다. 당신이 내 생명의 원통을 펴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다른 원통한 것들도 펴실 것입니다."
Ⅱ. 그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하여(그 심판을) 그리고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하여 호소함으로써 그 자신을 위로한다.
1. 그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 대하여 호소한다. 그의 적들은 사악하며 악독한가?(59절)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셨사오니, 나는 전혀 잘못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많은 고난을 당하였음을 아시나이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는 다음의 것들을 아셨다.
(1) 그들이 그에 대하여 가진 악의, "당신은 모든 그들의 복수를 보셨나이다. 그들이 마치 내가 그들에게 행한 어떤 큰 상해를 인하여 보복이나 하는 것처럼 나에게 해악을 행하기를 원하고 있음을 아시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것들을 유의하자.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여 마음속에 가진 모든 복수할 생각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포악과 조심하는 일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보복하려는 생각을 허락해서는 안 되며 그것이 머무르게 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이유없이 그들의 마음속에 우리에게 복수하려는 모든 생각을 가진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그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맡겨야 한다.
(2) 그들이 그에 대하여 해악을 행하려고 하는 음모와 궤계. "저희가 내게 보수하며 나를 모해함은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60절). 또 다시 저희가 나를 훼파하며 모해하는 것을 들으셨나이다(61절).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궁리하고 모해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다 말로나 행위로나 보이든지 안보이든지 간에 그것은 당신에게 알려져 있나이다. 아니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이 나에게 대하여 종일 모해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파악되어지고 감찰되어지도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드러나고 벗겨진다. 교회의 적들이 가장 깊이 감춘 비밀한 계약이라도 교회의 하나님에게 완전하게 알려지고 그에게는 그들이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하자.
(3) 그들이 그에게 한 모욕과 비방. 그들이 그에게 대하여 업신여겨 말한 모든 것과 그들이 비난하여 말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아신다. "그들이 훼파하는 것을 들으셨나이다(61절). 그들이 나의 인격에 대하여 나쁘게 말한 모든 말들과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로 나를 공격하는데 사용한 모든 것들과 그들이 나를 가증하고 하찮게 만드는데 사용한 모든 방법들과 일어나 나를 치는 자의 입술(62절)을 하나님은 아신다. 그들이 나에 대하여 말하는 어느 때이든지 그들이 사용한 오만한 말들, 즉 그들이 앉고 일어설 때
그들이 밤에 누울 때와 아침에 일어날 때, 그들이 식사외 모임의 자리에 앉을 때와 일어날 때, 아직도 나는 그들의 노래이다. 그들은 불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조롱거리로 만든 것같이 나의 불행을 가지고 그들 자신과 서로 서로를 위한 즐거움을 삼았다." 예루살렘은 그들이 그 위에서 노는 평판(平板)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 이라고 이름 붙인 어떤 음악이나 연극, 어떤 가극이나 막간의 희극을 연출했었을 것이다. 그것은 본래 비극이지만 거룩한 성읍이 불운하기를 원하는 그들에게는 대단히 환영받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에 대하여 그리고 그 백성들에 대하여 말한 모든 잔인한 말들을 계산하기 위하여 어느 날 죄인들을 부르실 것을 유의하자.
2. 그는 이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호소한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감찰하셨사오니, 그것을 입증할 어떤 증거도 필요 없습니다. 또한 그 입증을 실행할 어떤 고발자도 필요 없습니다. 당신께서 그 진상을 보셨고, 지금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맡겼사오니, 나를 위하여 신원하옵소서. 그들을 처리하옵소서."
(1) 그들이 받아야 할 만한 대로(64절) "저의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하사 그들이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들에게 행하십시오. 그들의 손으로 우리에게 행한 것같이 당신의 손으로 그들에게 행하십시오. 그들이 우리를 많이 애타게 하였습니다. 이제 주께서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소서(65절). 그 마음을 당혹케 하소서(어떤 이들은 이와 같이 번역한다). 그들로 하여금 모든 면에서 협박하는 해악으로 둘러싸이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나갈 길을 볼 수 없게 하십시오. 그들의 마음을 낙담케 하소서(다른 이들은 이것을 이와 같이 번역한다). 그들이 절망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들 자신이 없어지도록 단념하게 하소서." 하나님은 분명하게 생각하는 그들의 두뇌를 혼란시킬 수가 있고, 굳세게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을 낙심케 하실 수가 있다.
(2) "그들로 하여금 위협을 따라 취급되게 하십시오. 저주를 더하시며, 그것은 당신의 저주가 그들 위에 오게 하십시오. 당신 백성의 적들에 향하여 당신의 말로 발설한 모든 해악을 그들 위에 오게 하십시오(65절). 그들이 우리를 저주하였습니다. 그들이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것만큼 그것이 그들에게 임하게 하십시오. 당신의 저주는 진실로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들의 저주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저주는 의롭고,
열매를 이룰 것입니다. 당신이 저주한 사람들은 실제로 저주를 받습니다. 당신의 저주가 실현되게 하십시오(66절). 그들이 분노로 우리를 군축하고, 파괴한 것같이 진노로 그들을 군축하고 멸하소서. 여호와의 천하에서 멸하소서. 그들로 하여금 빛의 유익이 없게 하시고, 하늘의 은혜가 없게 하십시오. 하늘에 앉아서 그들을 웃으시는(시 2:4) 전능하신 분에게 파멸을 당하였다고, 그리고 하늘이 통치한다고 모든 사람이 말할 수 있는 방법으로 멸하십시오." 우상에 대해서 말하여 진 것은(단 4:26) 여기서는 그 예배자들에게 대하여 말하여진다(예배자들은 또한 우상에게 되어진 것과 같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이 하늘 아래서 망할 것이다(렘 10:11).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늘 행복으로부터 제외될 뿐 아니라 이 보이는 하늘 위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이 보이는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어늘" (시 115:6) 그를 거역하는 사람들은 보호를 받을 가치가 없다.
또 한편의 길고 풍성한 설교를 읽고 제 영혼이 풍요해집니다^^
깊은 구덩이에 빠져서 나를 구원해 줄 자가 없으나 하나님은 나를 아시고 내 소리를 들으시는지라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부르짖는 기도가 예레미야의 기도이고, 또 우리들의 기도네요.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렇게 슬픈 애가를 지어 부를 수밖에 없었던 정황들이 이해가 됩니다.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해 폐허가 된 모습을 보니 얼마나 절망스럽고 애통했을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은 구약에도 신약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만고의 진리로 작용하고 있음을 더 알게 되네요.
밤이 깊고 절망이 깊으면 새벽이 오고 소망도 커지는 법이죠.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이든 직장이든 나라든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붙잡고 모두가 힘을 내어 안전지대로 옮겨갈 수 있기를, 소망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을 던지는 기독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깊은 구덩이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나의 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는 나의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
아멘!
하나님은 삼위가 일체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 위격은 셋으로 구분되지만 본질은 하나이신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이고, 성자의 위격이신 예수님도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계시다는 설명에서 많이 배웁니다. 매우 훌륭한 설명입니다. 감사합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묵상 본문과 함께 읽으니 제 영혼에 더 큰 울림이 있습니다.
좋은 내용의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현재 저와 우리 나라가 처한 상황에 걸맞는 깊은 내용의 묵상에 매우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