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우리나라 최고 힐링 여행지답게 어딜가나 예쁜 감성의 카페와 숙소가 많다. SNS에서 '제주도 여행'만 검색해도 외국에 온 듯한 이국적인 장소들이 끝도 없이 나온다. 사람들은 제주도 여행을 더 멋있게 했음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더 화려하고 특별한 장소를 찾아다닌다.
물론 화려함도 좋지만 한번쯤은 '제주도의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어떨까. 감성 넘치는 사진도 없고, 누군가의 관심이 덜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면에서 해녀박물관은 의미가 있다.
해녀는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의 정신이다. 우리는 해녀가 갓 잡아온 해산물에만 환호할뿐 정작 해녀들의 삶과 문화에 관심이 없었다.
예전에 제주가 고향인 친구가 있었다. 다들 그에게 공통적으로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싱싱한 해산물은 실컷 먹었겠네요"
친구는 그 이야기가 무척이나 싫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해녀였다. 어머니는 싱싱하고 품질좋은 해산물은 어시장에 내다팔았고 작고 하자있는 해산물만 가져와 반찬을 만들었다. 밤에는 퉁퉁 불은 발을 문지르며 잠을 청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어릴 때부터 봐오던 그는 해산물이 싫었다. '저놈의 해산물만 아니면 엄마가 편하게 지내셨을텐데'
그의 말처럼 제주의 싱싱한 해산물은 해녀들에게는 생계수단이자 가혹한 노동의 이유가 됐다.
지금은 여자만 물질을 하지만 원래는 남자도 물질을 했다고 한다. 포작이라고 부르는 해남들은 주로 전복을 잡았고, 여자는 잠녀라고 해서 미역같은 해조류를 채취했다.
제주의 물질은 최소한 삼국시대 이전부터 기록될 정도로 역사가 깊다. 하지만 제주의 전복은 고스란히 공물에 바쳐졌다. '전복공물'이다. 그 착취가 심해지자 포작인들은 도망치기도 했고 수군에 동원되며 수가 줄어들자 17세기 후반부터는 전복량 채우기가 해녀들 몫으로 돌아갔다.
해녀들은 전복공물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다. 전복을 제때에 진상하지 못하면 태형을 받기도 했고, 전복량을 채우려고 물질을 하다가 뱃속 아기를 잃기도 했다.
물질의 안전을 위해 고사를 지내는 일이 많았다(제주 해녀박물관 전시)
해녀들은 물질후 몸을 녹히기 위해 불턱에 모였다
아이를 데리고 물질하러 나올수 밖에 없는 해녀들. 물질하는 동안 아이는 바구니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이런 해녀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며 진상을 금한 기록도 있다.
세조시대 제주목사는 해녀들이 진상을 위해 전복을 따는 것이 괴로워 3년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 정조 또한 전복을 캐는 여인들의 수고로움을 생각하면 전복을 먹을 생각이 나지 않는다며 끝까지 전복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임금과 관리들은 혀의 달콤함만 생각할 뿐 해녀들의 고통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물질은 생사를 걸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지금처럼 매끈한 잠수복을 입고도 깊은 바다에서 사고가 발생하는데 그 옛날 변변한 잠수장비 하나 없이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일은 늘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해녀들은 잠수한 후 물위로 솟을 때마다 '호오이' 하면서 한꺼번에 막혔던 숨을 몰아쉰다. 숨비소리라 부른다. 음정이 날카로우면서도 짙은 애상을 간직한 정깊은 소리지만, 생애 최후의 날숨이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해녀들 사이에서는 딸이 태어나면 해녀짓을 시키기가 싫어 차라리 죽도록 엎어버릴 정도였다.
구좌읍 하도리에 위치한 해녀박물관
해녀박물관에서 바라보는 바다
해녀박물관은 지금도 가장 많은 해녀가 물질을 하고 있는 구좌읍 하도리에 있다. 해녀항일운동기념 공원이 있는 곳이다.
올레길에 관심있다면 제주 올레 제20코스의 종점이자 마지막 코스인 제21코스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박물관은 제주 해녀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2006년에 건립됐따. 박물관 건립 후 10년 뒤인 2016년에는 제주 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해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최근에는 해녀학교도 만들어졌다는 소식이다. 해녀학교에 들어가려고 3수까지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렇다고 해녀의 애환과 고통이 사라질 순 없겠지만 해녀의 물질이 조금이나마 가치를 존중받는다는 생각에 위안을 받는다.
물질은 자칫하면 큰 사고로 번질 수 있어 해녀들은 늘 공동체로 움직였다
박물관에는 해녀들의 삶과 다양한 해녀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1전시실에는 수십년을 해녀로 살아온 이들이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소개하는 영상이 있다. 물론 목소리는 담담하지만, 영상에 귀기울이고 있으면 그 담담함이 얼마나 오랫동안 쌓인 아픔과 슬픔의 표현인지 알게 되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2전시실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해녀도구는 바로 해녀복이다.
옛날에는 남녀가 나체로 잠수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려사'에는 남녀 나체 조업을 금한다는 금지령까지 적혀있다.
이후 해녀들은 물옷이라는 천옷을 입었다. 지금은 고무옷이 나오면서 추위도 견디고 물속에서 오래있을수 있게 됐지만 1970년대 전까지만 해도 물소중이, 물적삼이라 부르는 재봉틀이나 바느질로 만든 물옷을 입었다.
고무 잠수복 이전에 입었던 물소중이 물옷
현대의 해녀복
다양한 물질도구
해녀박물관 앞마당에는 해녀항일운동 기념비가 있다. 해녀어업조합이 일제의 편에서 해녀들의 해산물을 수탈하면서 시작된 해녀항일운동이다. 당시 해녀의 손에는 수확량의 20%만이 떨어질 정도로 착취가 심했다고 한다.
지독한 '전복공물'에서 해방되자마자 일제와 일본상인, 선주들의 착취에 다시 내몰린 것이다. 처음에는 생종권 투쟁이었지만 점차 항일운동으로 번져나갔다. 1931년 6월부터 7개월동안 만7천여명이 참여해 238회에 걸친 집회와 시위를 펼친 국내 최대 규모의 여성항일운동이다. 해녀들의 단결력과 저항정신이 기념탑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기념탑에는 해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 마을 출신 강관순이 지은 '해녀의 노래'가 새겨져있다.
아무리 하찮은 삶이라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주의 삶을 지탱해오고,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준 해녀들의 삶이 더욱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야외마당에 놓인 배. 해녀들을 실어나른다.
실제 불턱의 모습, 허술한 돌담이어도 해녀들에게는 따뜻한 쉼터였다
불턱내부
해녀항일운동비와 해녀항일운동을 이끈 해녀 부춘화,김옥련,부덕량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