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번째 시간으로서 “신앙의 자세” 信仰の姿勢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먼저 본문 말씀을 두 곳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17절에서 20절까지 살펴보고 그 다음에 21절에서 24절까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7절~20절까지입니다.
로마서 2장 17절~20절
“17.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17.あなたが自らユダヤ人と称し、律法を頼みとし、神を誇り、
18.みこころを知り、律法から教えられて、大切なことをわきまえているなら、
19.また、律法
のうちに具体的に示された知識と真理を持っているので、目の見えない人の案内人、闇の中にいる者の光、愚かな者の導き手、幼子の教師だ、と自負しているなら、
20.[前節に合節]"
자, 여기서 지금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철저하게 차별하면서, 자신들은 선민사상 즉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라고 하는 사상, 그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율법을 제대로 지키고 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아주 크고,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저 부족하고 못난 사람들을 올바로 가르치고 지도하고 이끌고 있다고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모습은 어땠습니까.
21절~24절까지를 봅니다.
로마서 2장 21절~24절
“21.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1.どうして、他人を教えながら、自分自身を教えないのですか。盗むなと説きながら、自分は盗むのですか。
22.姦淫するなと言いながら、自分は姦淫するのですか。偶像を忌み嫌いながら、神殿の物をかすめ取るのですか。
23.律法を誇りとするあなたは、律法に違反することで、神を侮っているのです。
24.「あなたがたのゆえに、神の御名は異邦人の間で汚さ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그처럼 아는 것도 많고 자부심에 가득 차 있고 남들을 가르친다고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어떠냐 하면,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교회 물건을 훔쳐가고 율법을 범한다고 합니다.
항상 말씀 드리듯이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단순히 우리와 상관 없는 외국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처럼 신앙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방인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믿음이 없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별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하니, 이 유대인이라고 하는 범위를 현대의 의미로 좁히면 교회의 목회자나 교역자
정도로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잠시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를 살펴볼까 합니다.
누가복음 14장 7절~11절
“7.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イエスは、客として招かれた人たちが上座を選んでいる様子に気がついて、彼らにたとえを話された。
「結婚の披露宴に招かれたときには、上座に座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より身分の高い人が招かれているかもしれません。
あなたやその人を招いた人が来て、『この人に席を譲ってください』と言うことになります。そのときあなたは恥をかいて、末席に着くことになります。
招かれたなら、末席に行って座りなさい。そうすると、あなたを招いた人が来
て、『友よ、もっと上席にお進みください』と言うでしょう。そのとき、ともに座っている皆の前で、あなたは誉れを得ることになります。
なぜなら、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からです。」
자, 지금 예수님께서 어디 계시냐 하면 14장 1절에 보시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ある安息日のこと、イエスは食事をするために、パリサイ派のある指導者の家に入られた。そのとき人々はじっとイエスを見つめていた。
당시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종교지도층 인사, 그러니까 사회적인 위치가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지도자의 집이라고 하니,
사회적으로 보면 상당히 고위층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가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머물고 계셨으니까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었겠지요.
그 때 예수님이라고 하면 당시 사람들이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손님, 귀빈으로 대우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바리새인 지도자 집에는 주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초대 받았던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보고 계셨더니, 초청을 받아서 오는
손님들이 자기가 먼저 상석에 앉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어디 초청 받아서 가면 행여 높은 자리에 먼저 가서 앉으려고 하지 말아라. 만약에
그랬다가 더 높은 사람이 왔을 경우, 너희더러 자리를 비키라고 하면 얼마나 창피하겠냐. 차라리 그러지 말고 처음에는 낮은 자리에 앉게
되면 주인이 와서 너희를 높은 자리로 부르게 되니까, 오히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겠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뭐라고 하세요?
누가복음 14장 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なぜなら、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からです。」
예, 그렇습니다. 너희가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고 하면 오히려 낮아지지만,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자, 다시 목회자 이야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목사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사실 한국에 보면 그야말로
세계적인 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이 계신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오셨던 이스라엘에서 가깝지도 않고, 그리고 전세계 중에서도 대단히
작은 나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한국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세계적인 목사님들, 그리고 세계적인 규모의 교회가 많다는 사실을 보면
참으로 큰 축복을 받은 나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께서는 그런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다” 하는 말씀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기름부음이라고 하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기에서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의 형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면서 기름을
붓게 되는데, 그 이후에 제사장들을 세울 때에는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상에 들어서게 되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을 세우면서 선지자 사무엘이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다윗을
비롯해서 왕위에 오르게 되면 그 증거로 기름을 붓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울이 왕위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버리게 됩니다. 이에 따라 하나님의 영도 그에게서 떠나서, 이제 다음 왕인 다윗과
함께 하시게 됩니다.
이 사실, 즉 자신의 왕위가 위태로워지고, 다윗이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울은 다윗을 끈질기게 추격해서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켜주심으로 인해서 위기를 모면하게 되지요.
한편 다윗에게도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칼로 단번에 사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기회가 적어도 두 번은 있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그런 기회가 찾아왔을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입니다. 당장에 사울 왕의 목숨을 빼앗아버립시다 하고
간청합니다만, 그럴 때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상 24장 6절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彼は部下に言った。「私が主に逆らって、主に油注がれた方、私の主君に対して、そのようなことをして手を下すなど、絶対にあり得ないことだ。彼は主に油注
がれた方なのだから。」
사무엘상 26장 9절~10절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ダビデはアビシャイに言った。「殺してはならない。主に油注がれた方に手を下して、だれが罰を免れるだろうか。」
ダビデは言った。「主は生きておられる。主は必ず彼を打たれる。時が来て死ぬか、戦いに下ったときに滅びるかだ。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는 자를 치지 말지어다>라고 하는 기록은 없습니다만, 다윗은 그래도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사람인데, 그런 왕을 내 손으로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에 벌을 내리실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치셔서 죽거나 망하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목사 또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목사는 신성불가침, 벌하실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내리실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절대로 목사를 비판하거나 하면 안 된다는 말씀,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많이 들어봤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기름 부음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하면 조금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 자, 오늘도 이제 진짜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선택지가 많으니까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다음 인물들 중에서 실제로 사울이나 다윗처럼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성경에 기록된 사람은 누구일까요.
1번 사도 베드로, 2번 사도 요한, 3번 사도 바울, 4번 모두 기름 부음을 받았다. 5번 모두 기름 부음을 안 받았다.
정답은 예, 이 사람들이 사울이나 다윗처럼 실제로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물론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21절~22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私たちをあなたがたと一緒にキリストのうちに堅く保ち、私たちに油を注がれた方は神です。
神はまた、私たちに証印を押し、保証として御霊を私たちの心に与えてくださいました。
만약에 이를 구약에서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을 세울 때처럼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이나, 이
글을 읽고 있는 고린도 사람들이 모두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으로 세움을 받았다는 뜻이 됩니다만, 이는 그런 뜻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다고 하는 의미로 우리는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과거 구약시대 때 기름 부음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들 뿐이었습니다.
어제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더니 한국에서만 보더라도 목사님들이 매년 몇 명이나 배출될 것 같습니까. 크고 작은 교단을 모두 합치면
자그마치 1만명이나 배출된다고 합니다. 전체가 아니라 매년 1만명입니다. 그러면 전세계로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로 수많은
숫자의 목사들이 매년 새롭게 탄생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인가요? 그
사람들 다 기름을 부어준 거예요? 하나님 나라가 무슨 주유소입니까.
그리고 그 목사님들이 그러면 이 세상의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인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성경에는 <목사>라고 하는 단어가 유일하게 신약의 에베소서에 등장합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12절
“11.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こうして、キリストご自身が、ある人たちを使徒、ある人たちを預言者、ある人たちを伝道者、ある人たちを牧師また教師としてお立てになりました。
それは、聖徒たちを整えて奉仕の働きをさせ、キリストのからだを建て上げるためです。
그렇습니다. 목사의 역할은 성도를 온전하게 한다는 것, 봉사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복음인 성경말씀을 올바로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함께 봉사하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 이것이야말로 목사의 책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의 뜻이 바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하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さて、私たちには、もろもろの天を通られた、神の子イエスという偉大な大祭司がおられるのですから、信仰の告白を堅く保とうではありませんか。
그래서 예수님이야 말로 메시야, 기름 부음을 받은 대세자장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신성불가침과도 같은 존재라고 한다면, 목사는 베드로나 요한이나
바울보다도 높고, 그리스도 예수님과도 같은 존재라고 하는 말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아닙니다.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이 퍼지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야 간단하지요.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주장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사이비나 이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라고 하면서, 신성불가침이라고 해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어떻습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대우를 받아가면서 편안하게 살아갔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흩어 져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모으기 위해서 목숨 걸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너무나도 힘든 고통도 감수해야 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거기가 높은 자리인가요? 아닙니다. 낮은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 목회자의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높은 자리는요? 그것은 바로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의 자리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말씀이 오로지 목회자에만 해당되는 말일까 하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사실 사회적으로 보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가장 믿음직스러운 사람,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면 어디 그렇습니까.
우리 교회가 제대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외부 사람들은 이 교회를 별로 좋게 보지 않는 사람들 점점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로마서 2장 21절~24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2장 21절~24절
“21.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1.どうして、他人を教えながら、自分自身を教えないのですか。盗むなと説きながら、自分は盗むのですか。
22.姦淫するなと言いながら、自分は姦淫するのですか。偶像を忌み嫌いながら、神殿の物をかすめ取るのですか。
23.律法を誇りとするあなたは、律法に違反することで、神を侮っているのです。
24.「あなたがたのゆえに、神の御名は異邦人の間で汚さ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남들한테는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들은 그런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2천년
전에 기록된 것인데도,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와 어쩌면 이렇게 닮았을까 하는 것이지요.
목사만이 아니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의 모본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가르치려고
들면서, 자기들은 나쁜 짓들을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어떻다고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힘써 높여도 모자랄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높아지기는커녕 모독을 받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초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2대 왕 다윗, 3대 왕 솔로몬. 그들이 비록 왕이었습니다만 처음에는 상당히 겸손했습니다.
먼저 사울부터 보겠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그에게 이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립니다. 그러자 사울은 말합니다.
사무엘상 9장 21절
“21.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サウルは答えて言った。「私はベニヤミン人で、イスラエルの最も小さい部族の出ではありませんか。私の家族は、ベニヤミンの部族のどの家族よりも、取
るに足りな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か。どうしてこのようなことを私に言われるのですか。」
사무엘 선지자님, 아이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집안은 볼품없고요, 저희 가족도 제일 형편없는 집안인데, 그런 저에게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렇게 말할 정도로 그는 참 겸손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두 모아놓고 제비를 뽑아서 사울이 왕으로
결정되자 사무엘이 그를 부르는데, 어디를 찾아도 없어요. 그런데 그는 사무엘상 10장 22절에 의하면 짐보따리 사이에 숨었을 정도로
겸손하고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랬던 사울 왕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나중에는 자신의 왕위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아무런 잘못 없는 다윗을 혈안이 되어서
죽이려고 했고, 결국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높이기보다 자기를 높이려고 했던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어, 마침내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나단 선지자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다윗에게 축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사무엘하 7장18절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ダビデ王は主の前に出て、座して言った。「神、主よ、私は何者でしょうか。私の家はいったい何なのでしょうか。あなたが私をここまで導いてくださったとは。
역시 그도 참 겸손하지요.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고, 내 집도 대단할 것도 없는 가문인데도 자기를 이렇게까지 높여주신 것에 대해서
너무나도 감사 드리는 장면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어떤 짓을 저지릅니까. 사무엘하 11장 이후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간음하고, 이것이
들킬까 봐 결국 자신의 충신 우리아를 일부러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고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곱게 보실 리가 없겠지요. 이에 대한 죄의 대가로서 다윗의 가문에는 불화가 생깁니다. 남매 사이에 성폭행 사건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서 형제들 사이에 살인사건까지 실어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다윗은 그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 인해서 자신의
후궁들은 그 아들에 의해 수치를 당하고, 자신은 광야로 도망을 하는 수모를 겪는 등, 말년에는 그 집안이 엉망진창이 되고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도 왕이 되었을 초창기는 참으로 겸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열왕기상 3장 7절~9절
“7.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わが神、主よ。今あなたは私の父ダビデに代わって、このしもべを王とされました。しかし私は小さな子どもで、出入りする術を知りません。
そのうえ、しもべは、あなたが選んだあなたの民の中にいます。あまりにも多くて、数えることも調べることもできないほど大勢の民です。
善悪を判断してあなたの民をさばくために、聞き分ける心をしもべに与えてください。さもなければ、だれに、この大勢のあなたの民をさばく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위대한 왕 다윗을 이어서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를 모른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를 좋게 보시고 지혜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크나큰 축복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열왕기상 11장에 의하면 그와 같이 겸손했던 솔로몬도 나중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몇 번이나
경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솔로몬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일로 인해서 솔로몬이 죽은 다음에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이 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목사님들도 처음 목사 안수를 받을 때에는 정말 크나큰 소망을 가질 것입니다. 내 평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세계에 전파해서 큰 부흥을 일으키리라 하는 꿈을 누구든 꾸었을 것입니다.
어디 목사만 그런가요. 교회에 처음 등록하고 믿음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잘 모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제 세례를 받을 때, 직분을
받을 때, 이럴 때 어떤 생각을 갖게 됩니까.
내가 이제부터 교회에서 나쁜 짓 좀 해봐야지? 내가 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해봐야지? 아니요.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요. 정말
내 힘이 닿는 데까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겠다 하는 생각을 누구나 가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처음 믿음은 사라지고, 막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가르치려고 하고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초심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마태복음 5장 13절~15절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15절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気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もう何の役にも立
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あなたがたは世の光です。山の上にある町は隠れることができません。
また、明かりをともして升の下に置いたりはしません。燭台の上に置きます。そうすれば、家にいるすべての人を照らします。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소금과 빛의 역할이 무엇이겠습니까.
소금은 음식에 들어가서 짠 맛을 나게 합니다. 곰탕 같은 것을 생각하면 거기에 소금을 넣지 않으면 정말 밋밋해서 아무런 맛도 나지
않습니다만, 소금을 조금 넣으면 그 곰탕 맛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면 먹는 사람들이 소금 맛을 칭찬하나요? 요즘 보면 소금도 여러
가지 고급 소금도 있다고 합니다만, 아무리 고급 소금이라고 하더라도 음식에 넣으면, 그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음식 칭찬을 하지 음식에
넣은 소금 칭찬을 하지는 않습니다.
소금을 아무리 넣어도 짠 맛이 나지 않아요. 아니면 소금을 넣으면 짠 맛만 나고 도무지 음식 맛이 살아나지 않아요. 이건 제대로 된
소금이 아니지요. 정말로 좋은 소금은 어떻습니까. 정말로 좋은 소금은 자신의 짠 맛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다른
음식들의 맛을 드러나게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소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소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하신 분들이 많으신 것 같은데, 이 빛에 대해서는 오해를 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빛이라고 하면 남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박수를 받는 위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빛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공연을 보러 갔어요. 거기에는 많은 배우들이 등장합니다.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겠지요. 그 무대에는 분명 많은 조명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조명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배우의
연기력, 가창력, 화려한 무대장식을 칭찬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진정한 조명이면 조명일수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무대에 있는 배우들이나 장식들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비싼 조명이라 하더라도 조명을 한 번 켜면 무대나 배우는 안
보이고 환하기만 하다면, 그런 조명을 누가 쓰겠습니까.
요한복음 12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わたしは光として世に来ました。わたしを信じる者が、だれも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야, 너희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여기 와서 나한테 예배해. 뭐 이러셨던 적이 있으셨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 의미는 예수님께서 화려하게 주목을 받기 위해서,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이라고 하는 캄캄한 어둠 속에 헤매고 있는 우리를 비춰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길을 우리에게 비춰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죄 많은 우리를 오히려 섬겨주시기 위해서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また手に箕(み)を持って、ご自分の脱穀場を隅々まで掃ききよめられます。麦を集めて倉に納め、殻を消えない火で焼き尽くされます。」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음에 오실 때에는, 그런 자비로운 모습,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전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첫 믿음을 찾아야 합니다. 겸손했던 그 믿음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5절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けれども、あなたには責めるべきことがある。あなたは初めの愛から離れてしまった。
だから、どこから落ちたのか思い起こし、悔い改めて初めの行いをしなさい。そうせず、悔い改めないなら、わたしはあなたのところに行って、あなたの燭台をその場所から取り除く。
우리가 이처럼 주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는 자리에 함께 있다고 한다면 아직까지는 우리가 있는 곳에 주님의 촛대, 축복의 촛대는
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사랑을 버리고, 처음 행위를 버리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이 축복의 촛대를 옮겨버리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의 자세, 신앙의 자세를
다시 한번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낮은 자리에 가서 겸손한 마음으로 빛과 소금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비추고, 다른 사람들을 주님의 은혜 가운데에 드러내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자세이자 신앙의 자세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더 늦기 전에, 주님께서 촛대를 옮기시기 전에, 회개할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더욱 낮은 자리로 가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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