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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공업과 산업적 연구의 시작: Du Pont 사의 연구 개발
화학공업에서의 산업적 연구는 이미 19세기 중반이후에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1877년 독일에서 발효된 특허법은 유기염료연구를 대학에서 산업체로 확산되어가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는데,
이 특허법이 발효되기 1년전인 1876년 바이어회사(Friedrich Bayer & Co.)는 독일에서 처음으로 산업체 내에 초보적인
연구실을 설치해서 산업체 내의 연구개발을 시작했다.
미국에서도 제1차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화학공업 분야에서 산업적 연구가 본격화된다.
즉, 전쟁으로 인해서 독일로부터의 화학원료의 공급이 중단되었고, 또한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의 화학회사들은 독자적인 연구개발을 강화해야만 했다.
이런 역사적 조건속에서 성장한 미국 화학공업의 산업적 연구개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예들 가운데 하나는 나일론
개발의 신화를 창조한 듀폰사의 연구개발이라고 할 수 있다.
듀폰사의 1세기에 걸친 연구개발 과정은 과학에 바탕을 둔 연구개발이 얼마나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상업적 성공으로
나타나는 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된다.
듀폰사의 연구개발과 나일론 신화
원래 듀폰 (Du Pont, cf. 1 )사는 화약과 폭발물을 만드던 회사였다.
1917년 경에 이르러 듀폰의 경영진은 자신들의 회사를 유기화학 염료를 비롯한 다양한 염료를 생산하는 회사로 전환시키
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런 다각적인 경영의 일환으로 듀폰은 또한 다양한 화학 분야의 회사들을 사들여서 자신들의 자회사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1921년부터 듀폰은 레이온 섬유, 셀로판 필름, 자동차 안티녹킹제, 프레온, 합성 암모니아 등을 만드는 수많은
소기업을 단위 부서로 갖는 기업 형태를 띠게 되었고, 듀폰의 연구개발도 중앙집권적인 연구보다는 단위 부서가 각자의
분야에서 연구개발을 책임지는 분산적인 형태를 갖게 된다.
하지만 듀폰트의 최대 발명품인 나일론은 이 분산화된 연구조직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고, 듀폰트의 과거 시대의 유물인
거대한 중앙 연구조직의 산물이었다.
중앙 연구조직의 하나인 화학부서의 책임자였던 찰스 스타인(Charles Stine, cf. 1 , 2 )은 1927년 방만하다시피 한 듀폰트의 다양한 사업들에 확고한 과학적 기초를 세워줄 장기적인 차원의 기초 연구 조직을 설립할 계획안을 회사에 제출했고,
이것을 듀폰트의 경영진이 승인했다.
그뒤 스타인은 순수 기초연구를 표방하며, 기초 유기화학을 연구할 약 15명의 연구 인력을 대학에서 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아서, 1928년 초까지 중합체 분야에서 순수 연구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단 1명만을
고용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바로 하버드 대학 화학과 전임강사로 있었던 31살의 캐로더스 ( Wallace H. Carothers )였다.
캐로더스의 나일론 개발
1930년 이 중앙 기초연구 조직은 아주 우연히 네오프렌 합성고무와 최초의 완전한 의미의 합성섬유를 발견 했다.
직접적인 응용을 목표로 하지 않고 지극히 기초적인 연구를 하던 부서가 갑자기 상업적으로 의미가 있는 발견을 해낸
것이다.
듀폰은 이미 고무 화합물을 제조하고 있었고, 레이온과 아세테이트 섬유와 같은 인조섬유를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캐로더스가 합성고무와 합성섬유를 발견한 지 몇 개월도 안되서 스타인은 승진을 했고, 이에 따라 그는 다른 부서로 가게 되었다.
스타인의 후임으로는 볼튼(Elmer K. Bolton)이 오게 되었는데, 그는 기초 연구에 특권을 주었던 스타인과는 전혀 다른 연구
개발 철학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는 예전에 스타인의 기초과학 계획에 반대했던 전력이 있던 사람이었고, 산업적 연구에서 있어서도 상업적으로
이용가능한 구체적인 성과를 중시했다.
취임 후 그는 캐로더스 연구 팀에게 자유로운 기초 연구보다는 상업성이 있는 연구를 할 것을 요구했다.
더욱 구체적으로 볼튼은 캐로더스 팀이 발견한 최초의 합성섬유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것을 느끼고, 상업적 가치가 있는
좀더 안정된 섬유를 연구개발해 줄 것을 캐로더스에게 요청했다.
처음에 얼마 동안 캐로더스 연구 팀은 볼튼의 요청를 받아들여 계속 열심히 연구를 했다.
그러나 이런 목적 지향적 연구는 캐로더스에게 흥미를 주지 못했고, 그는 스타인 시절에 하던 방식대로 곧 다른 연구로
옮겨갔다.
캐로더스가 이렇게 연구 주제를 가지고 왔다갔다 하자, 볼튼은 캐로더스에게 섬유에 대한 연구를 할 것을 보다 강력하게
요구했다.
캐로더스는 볼튼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조수들에게 새로운 연구 방향을 지시했고, 마침내 1934년 캐로더스 팀은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도 안정되고 가수분해에 강한 최초의 폴리아미드인 나일론을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1935년 봄 캐로더스는 5-10 폴리아미드라는 물질을 최적의 화학섬유 후보로 추천했다.
그러나 볼튼은 캐로더스가 추천한 물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중간물질의 값이 너무 비쌀 것 같아 캐로더스의 추천을
무시하고, 대신 풍부한 벤젠화합물로부터 값싸게 제조할 수 있는 6-6 중합체를 옹호했다.
연구개발을 한 과학자와 연구개발을 관리하는 책임자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이었다.
애초의 나일론 개발은 캐로더스의 기초 연구팀이 비교적 자유롭게 한 것 이었으나, 이런 갈등이 생긴 뒤로는 볼튼이 연구
개발을 주도하고, 캐로더스는 그 과정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캐로더스는 회사가 연구 주제를 제한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했으며, 점점 신경쇠약 상태를 보이다가,
1937년 극약을 먹고 41세의 젊은 나이에 자살 을 하고 말았다.
아깝게도 미국은 잠재적 노벨상 후보를 잃어버렸다.
나일론 개발 과정
연구개발의 주도권을 잡은 볼튼은 나일론 6-6을 상업화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나일론을 새로운 섬유로 개발하려는 계획은 아직은 실험실 상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상업화를 하기 위해서는 연구실에서 했던 작업을 크게 확대할 필요가 있었고, 생산비 절감을 위해서는 고압 합성 기술를
이용해서 나일론을 만들 수 있는 중간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외에도 상업화를 하기 위해서는 생산된 나일론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옷감을 만들 수 있어야 했다.
다행히도 듀폰에는 고압합성이 전문인 암모니아 부서와 섬유 산업에 대해 잘 알았던 레이온 부서가 있었다.
이제 나일론 개발은 한 부서의 연구개발이 아니라 중앙 연구조직에 의해서 관리되는 협동 연구개발의 형태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여러 연구를 병행하여 추진되는 거대한 규모의 연구개발로 발전되었다.
이 과정에서 듀폰의 중앙 연구 관리자들은 그야말로 놀라운 연구개발 관리 능력을 보이게 된다.
우선 상업적인 차원에서 5-10 폴리아미드가 아니라 나일론 6-6을 선택한 것이 첫 번째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 다음 나일론 섬유를 뽑아내는 방법을 선택할 때, 레이온 섬유를 뽑아내는 방식인 건식 방사법(紡絲法)이나 아세테이트
섬유를 뽑아낼 때 사용하는 습식 방적법이 아니라, 새로운 용융 방사법을 선택했던 것도 역시 적절한 것이었다.
듀폰의 연구 관리자들은 나일론 개발하는 과정에서 실험실 단계에서, 반작업(半作業) 단계로, 실험공장 단계로, 상업적
생산단계로 진행하는 단계별 연구개발 전략을 서두름이 없이 단계별로 규모에 맞도록 가장 현명한 판단을 하면서 총지휘
했던 것이다.
또한 연구 관리자들이 나일론을 처음 상품화하면서 여성용 브라우스에 사용되던 값비싼 비단을 대체하려는 전략을 구사한 것도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1940년부터 나일론이 시판되기 시작했는데(cf. 1 , 2 ), 때마침 태평양전쟁이 터져 일본으로부터 실크 수입이 단절되는 바람에 듀폰 나일론을 가지고 더욱 급속도로 여성 고급 의류 시장을 잠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한 과학자가 기초연구를 하다가 실험실에서 우연히 발견한 나일론이라는 물질은 중앙연구 조직 관리자들의 현명한
일련의 종합적인 연구개발 전략과 결합되면서 듀폰의 나일론 신화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듀폰사의 나일론 연구개발 전략은 기업의 성공적인 연구개발의 한 전형적 사례로 기록되게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과 듀폰
기초과학에 바탕한 듀폰의 연구개발 전략은 듀폰사가 제2차세계대전 중에 원자탄을 개발하는 맨해튼계획의 참가하면서
더욱 공고히 된다.
듀폰은 이 계획에서 시카고의 금속연구소 과학자들과 함께 생산용 원자로를 건설해서 그것으로부터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일을 맡았다.
이때 듀폰의 연구개발 팀은 계획의 진행 과정에서 과학자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나일론 개발전략을 그대로 적용하여 또한번의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1942년 버클리 대학의 시보그 (Glenn T. Seaborg)는 실험실 상에서 미량의 플루토늄을 발견했다.
듀폰 팀은 이것을 캐로더스가 최초의 합성섬유를 발견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후 대량 생산을 위한 생산 개발계획을 세워나갔고, 이때 나일론 개발전략에서 얻은 자신들의 산업적, 공학적 경험을 십분 활용했다.
이리하여 듀폰사는 짧은 기간 내에 플루토늄을 대량생산 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맨해튼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커다란 공헌 을 했다.
플루토늄을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듀폰은 연구개발에 있어서 기초과학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즉,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의 핵개발의 참여로 듀폰의 경영진들은 기초과학에 바탕을 둔 연구개발에 더 많은 돈을 투자
함으로써 새로운 '나일론'을 계속 창출해낼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또한 1938년 연방정부의 법무부 반독점실에 대기업의 독점을 규제하려는 성향의 인물이 기용되면서 미국 내에 강한 반독점적 분위기가 나타난 것도 듀폰이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게 되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리하여 기초과학에 바탕을 둔 거대한 규모의 연구개발로 기업을 성장시킨다는 것은 듀폰사의 전형적인 기업 문화로
자리잡게 된다.
새로운 '나일론' 개발 정책 및 그 한계점
전후에 듀폰 팀은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나일론'을 개발하려는 연구개발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엄청난 연구비를 지출하고 거대한 공장을 설립해서 대량생산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개발 상품 가운데 상당
수는 성공적으로 상업화하는 데 실패했다.
그 한 예가 '합성석' (synthetic stone)이라고 불리웠던 포름알데히드 중합체인 델린 아세탈 수지(Delrin acetal resin)의
개발이었다.
포름알데히드는 값이 싸고 중합화하기 쉬웠다.
단 하나의 문제는 폴리포름알데히드가 아주 불안정해서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에서 포름알데히드로 전환된다는 것이었다. 중앙 연구조직의 화학자들은 아주 순수한 포름알데히드를 얻는다면 그 중합체는 안정할 것이라고 믿었다.
1952년부터 듀폰은 수많은 연구인력을 투입해서 이 폴리포름알데히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개발을 감행했다.
그런데 이때는 실험실작업에서 반작업, 그리고 실험공장작업, 대량생산 작업 식으로 순차적으로 진행했던 것이 아니라,
실험실 작업과 판매부서의 마케팅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여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본래의 나일론 개발 전략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시장에 내어놓기는 아직 열에 너무 불안정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듀폰의 연구원들이 중합체의 내부 결합 자체는 상당히 안정하고 분해는 단지 사슬의 끝부분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한 뒤로는 듀폰의 연구개발 책임자들은 이 계획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 만큼 값싸게 포름알데히드를 정화할 수 없었다.
또한 상품개발 팀이 델린의 상품화 결정을 좀 늦추어달라는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 관리자들은 쇠를 대체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델린의 특성을 믿고 가능한 빨리 상품화할 것을 원했다.
더욱이 생산비 절감 효과를 얻기 위해 그들은 실험공장 단계를 건너 뛰고, 곧바로 대량생산으로 들어갔다.
즉, 폴리포름알데히드 개발에 관련된 연구 관리자들은 반작업 단계와 실험공장 단계를 건너 뛰고 실험실 작업 단계에서
곧바로 상품화를 결정한 것이었다.
델린을 상품화하는 데에는 무려 7년이라는 긴 연구개발 기간이 소요되었는데, 이런 기나긴 동안의 강도 높은 연구개발
비용 때문에 상품의 값도 비쌀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델린의 개발은 듀폰 역사상 가장 값비싼 연구개발 계획로 기록되었다.
델린 개발에서 듀폰은 연구개발의 진행 속도를 정상적인 진행 속도에 비해 너무 빠르게 진행시켰던 것이었다.
사실 델린은 상품화하지 말았어야 할 제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상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듀폰은 이후에도 계속 새로운 연구개발을 하면서 곧바로
상품화에 들어갔다.
델린의 예는 전후 듀폰 회사의 연구개발에서 예외가 아니었고 오히려 통상적인 개발전략에 속했던 것이었다.
1957년 듀폰 회사의 화학 부서가 중앙 연구부서로 바뀌면서 듀폰의 기초 과학 에 바탕을 둔 연구 개발전략은 본격화되
었고, 이런 연구 전략으로 '새로운 벤처'(New Venture)를 추구하면서 듀폰은 계속 '새로운 나일론'을 기대했다.
또한 듀폰의 과학 기술자들은 기업의 연구개발뿐만이 아니라 학계 중심이었던 전문 학문 분야까지도 선도 하면서 과학
기술 분야에서 논문 출판 활동도 책임지게 되었다.
이런 기초 과학에 바탕을 둔 기업체의 연구 전략은 기업체의 연구개발로서는 성숙된 단계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거대 규모의 연구 개발 전략은 듀폰의 기업 이미지 제고에는 기여를 했지만, 연구개발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든다고
하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결과적으 로 듀폰트의 연구개발 비용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엄청나게 증가했으나, 새로운 생산품 에 의해 측정된 연구
개발의 생산성은 증가하지 않았다.
회사는 40여종의 새로운 생산품 을 개발하기 위해서 무려 20억 달러를 지출했으나, 수지타산의 면에서는 결과적으로 손해
였다.
1960년대에 듀폰 회사에게 이익을 주었던 효자 상품들은 '새로운 벤처'가 본 격화된 1960년 이후에 개발된 상품은 아니
었고, 오히려 1930년대와 40년대에 개발된 것 이었다.
또한 회사에 이익을 주는 연구개발은 새로운 신물질의 개발보다는 기존에 개발 한 물질의 공정을 개선하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고 하는 분석까지 나왔다. 급기야 1960년 대 말에 와서는 회사의 경영진들조차 '새로운 벤처' 전체 프로그램의
실패를 선언했고, 회사의 전체 개발 전략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졌다.
1970년 듀폰은 기초과학 중심의 유기적 연구 개발 전략에서 생산품 중심의 이윤 에 바탕을 둔 분산적인 연구개발 전략
으로 전환했다.
즉 자유방임적인 기초 연구개발 정 책에서 상품 및 공정 개선 연구개발 정책으로 전환했으며, 기존 제품의 품질 향상에도
주력하게 된다.
결국 1970년대 중반에 와서 듀폰 회사는 자신들이 나일론 개발에서 재미를 보았던 기초과학에 바탕을 둔 연구개발 전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맨해튼 계획 에서 보여준 기초과학의 힘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실감했던 듀폰의 경영진들과 연구책 임자들은 1930년대에
자신들이 나일론 개발에서 성공했던 것이 단순히 기초과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간과했던 것이다.
20세기에 들 어오면서 과학이 산업적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실험실에 서의 성공이 무조건
상업적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나일론 개발 과정이 말해주듯 이, 처음 단계에서는 기초과학이 연구 개발을 주도하지만, 연구결과가 실제로 생산으로
나타나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까지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되고, 이 모든 과정에서 연구개발 관리자들이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이 바로 기술 혁신의 필수적 요소였던 것이 다.
듀폰 회사의 한 세기에 걸친 연구개발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것은 기업체의 연구 개발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초과학
뿐만이 아니라, 기초과학에 의해 개발된 개발품을 산 업적으로 성공시키도록 만드는 수많은 공정기술, 경영기술도
함께 어울러져야 한다는 것 이었다.
기업체의 연구개발 과정에서는 기초과학 연구개발 정책과 상품 및 공정 개선 연구 개발 정책이 적절히 조화되어야 하며,
장기적 연구 개발과 단기적 연구 개발이 균형 을 이루고, 대규모의 중앙 집중적인 연구개발과 분산적 소규모적 연구
개발도 회사의 규 모에 맞게 균형을 이루어질 때만이 연구개발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또한 이런 다양 한 연구 정책은 회사가 지니고 있었던 당시 역사적 조건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작용했던 것이다.
국가사회주의와 독일 과학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으로 임명되면서 국가사회주의자 들은 독일에서 급속도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가사회주의자들의 목표는 반공주의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인종적 적'을 몰아내기
위한 반유태주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선 1933년 3월 31일 나치는 우선 프로이센에서 유태인 판사를 공직에서 해직시켰으며, 이와 때를 같이해서 유태인 과학자였던 아인슈타인도 공직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이런 압력 때문에 그해 3월 28일 아인슈타인은 베를린 아카데미에 사직서를 제출하게 된다.
4월 1일 소위 유태인 보이코트의 날(Tag des Juden-Boykotts)에는 베를린의 나치 돌격대(SA)들이 대학을 점거하고 유태인 교수와 조교들에게 욕지거리를 하며 심한 학대를 가했다.
이 때 유태인들의 상점은 폐쇠되었고, 유태인들은 거리에서 구타당했으며, 도서관이나 공공장소도 마음대로 출입을 하지
못했다.
4월 7일에는 유태인들을 공직으로부터 몰아내는 것을 정당화하는 법이 등장한다.
이때까지는 그래도 이 법에 예외조항이 있어서 1914년 이전에 관직을 얻은 경우나, 자신이 제1차세계대전 때 전선에서
싸우거나 전쟁 때 아들이나 아버지가 전사한 경우에는 구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9월 15일에 등장한 뉘른베르크 법안과 11월 14일에 추가된 새로운 법안에서는 3인 이상의 유태인 선조가 있거나,
2인의 유태인 조상을 가지고 있으면서 현재 자신이 유태인이거나 유태인과 결혼한 자는 유태인으로 간주한다는 것이
명문화되면서 유태인들이 애국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해서 얻은 공적에 의한 예외조항이 삭제되었다.
이에 따라 독일 내의 대학교수나 강사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유태인들이 유태인 공직자에 관련된 법에 해당되게 된다.
이 여파로 1934-5년 겨울 학기 동안에는 독일 교수 요원의 15%가 해직되게 되었고, 학생수도 급격히 감소했다.
괴팅겐 대학의 수학과 물리학 분야의 타격
이 시기 동안에 수학과 물리학과 물리학 분야는 특히 커다란 타격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이었던 곳은 당시
수학과 양자물리학의 메카로 불리웠던 괴팅겐 대학이었다.
괴팅겐 대학이 이렇게 피해가 컸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괴팅겐의 수학과 물리학 관련 학과들이 다른 대학에 비해 유태인에게 비교적 관대했기 때문에 유난히도 유태인 교수와 조교들이 많았던 때문이었다.
수학 분야 에서는 쿠랑(Richard Courant), 에드문트 란다우, 헤르만 바일, 오토 노이게바우어, 에미 뇌터 등이 대학을 떠났
으며, 물리학 분야에서는 보른, 제임스 프랑크, 헤르타 스포너, 에드워드 텔러, 노르트하임, 발터 하이틀러 등이 괴팅겐
대학을 그만두게 되었다.
당시 유태인 교수들은 나치의 이런 압력에 대해서 다양한 방식과 강도로 저항했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 대학을 떠나게
되고 만다. 우선 제임스 프랑크(James Franck)는 1933년 당시까지만 해도 독일을 떠날 생각이 추호도 없던 과학자였다.
그는 독일 과학계의 거물들인 막스 플랑크와 막스 폰 라우에의 지지를 얻고 있었으며, 베를린 대학의 네른스트의 후임
으로 물망에 오르던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했던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 소장에도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프랑크 자신은 또한 개인적으로는 제1차세계대전 중의 공훈으로 4월 7일 법안의 예외조항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치의 정책에 항의하는 뜻에서 나치의 직접적인 사임 압력이 있기 전에 먼저 공개적으로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 나치 당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비판하였으며, 심지어는 동료교수까지 경솔한 행동이었
다고 비판하게 되면서, 프랑크는 할 수 없이 독일을 떠나게 된다.
프랑크의 절친한 친구였던 막스 보른은 독일에 남아 있는 것에 대해서 그리 커다란 미련은 없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그는 외국으로 휴가를 간 뒤 독일로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자연스럽게 교수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쿠랑은 치열한 투쟁이 없이는 결코 순순히 교수 자리를 포기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랑크가 사임한 이후 이 여파가 쿠랑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때 나치는 그가 제1차세계대전 후 사회민주당의 시의원을 지낸 사실과 병사위원회에 선출된 사실을 들추어내면서,
그가 마르크스주의의 강한 요새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쿠랑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사태가 불리해지면서 결국 그는 1933년 8월 말에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제안한
자리를 받아들이고 만다.
유태인 교수들의 해직 사태가 벌어졌지만 당시 독일의 관료들은 대체로 모든 것은 법대로 처리한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는데, 관료들의 이런 태도가 괴팅겐에서의 연구 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즉 대학 당국이나 교육부의 관리들은 프랑크, 보른, 쿠랑 등이 4월 7일의 법안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그들이 합법적으로 교수 자리를 포기하기 전까지는 새로운 교수를 임용하지 못하도록 결정했다.
이런 결정은 우선은 학문적으로 부적절한 나치 당원의 임용을 막는다는 호의적인 면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너무
오래 동안 교수 자리가 공백으로 남게 됨으로써 괴팅겐에서 연구 전통이 단절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베를린 대학에 있던 프리츠 하버 (Fritz Haber)는 누구보다도 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는 제1차세계대전에 사용했던 독가스를 개발 하는 등 독일을 위해 누구보다도 애국적으로 봉사했던 인물이었고, 이 때문에 외국에서는 그를 전범자로까지 낙인을 찍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유태인이라는 혈통 때문에 독일에서조차 '인종적 적'으로 낙인이 찍히는 최악의 비극적인 상황 을 경험
하게 된다.
독일 과학자들의 반응
나치의 이런 경박한 행동에 대해서 당시 독일의 책임있는 과학자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우선 많은 독일의 지식인들은 처음에는 나치의 반유태주의 정책이 일시적인 현상일 것으로 생각했다.
예를 들어 당시에 이미 75세의 노령으로서 독일과학을 책임지고 있었던 막스 플랑크는 나치의 해고 정책에 대해서 조급한 정치적 행동을 피하고 대신 최종적인 해고 시기를 될 수 있으면 늦추게 만드는 식의 소극적인 대응 방식으로 이 시기를
헤쳐나갔다.
또한 그는 나치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연구소를 학자들이 스스로 통제하는 자체 통제 방식을 취하고, 과학을 사회적, 혹은 정치적으로 격리시키는 고립 전략을 구사했다.
즉 대부분의 독일 과학자들은 독일과학의 보존을 명분으로 삼아서 나치와의 최소한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외적으로 나치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강한 비판과 저항을 했던 과학자들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와 오토 한(Otto Hahn)을 들 수 있다.
폰 라우에 역시 처음에는 나치의 정책이 일시적일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치의 정책이 수구러들지 않는 것을 보면서 태도를 바꾸어 나치를 강하게 비판하게 된다.
한 예로 1933년 9월 18일에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에 대한 나치 정부의 태도를 갈릴레오의 종교재판에 비유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 뒤 나치에 대한 과학자들의 항의는 어느 정도 잠잠 하다가 1935년 1월 29일 프리츠 하버의 1주기 추도 집회에서 다시
대중적인 항의가 고개를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학생수와 강의수가 감소하고, 교수자리가 공백이 되면서 이에 대한 항의도 간간히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차원에서 나치 치하의 독일과학자들의 저항은 아직은 그리 강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나치 정부는 점차로 독일의 과학자들이 외국 학회에 참가하는 것을 규제했으며,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 학회도
나치의 정치 이념 공세장으로 이용되면서 외국 학자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독일 학회들은 점차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갔다. 더구나 평화주의자로서 나치에 반대한 죄목으로 수감 생활 중이던 카를 폰 오지에츠키 (Carl von Ossietzky) 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하자 히틀러가 이에 발끈하면서 독일인에게 노벨상 수상을 금지시켜서 독일과학자들은 노벨상조차 수상할 수
없게 되고 상을 수여하더라고 국가의 압력 때문에 수상을 거부해야만 했다.
나치 물리학자로의 길
독일 과학자들 가운데에는 철저한 나치주의자가 되어 새로운 '아리아 물리학'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과학을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노벨상까지 수상했던 레나르트 와 슈타르크 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이 어떻게 해서 나치에 가담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 역시 역사적으로 흥미있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이들의 전력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필립 레나르트
필립 레나르트 (Philipp Lenard) 는 히틀러 와 마찬가지로 독일이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는 할머니로부터 위대한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위대한 영웅에 대한 낭만적인 숭배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전파의 발견자인 하인리히 헤르츠 밑에서 실험물리학을 공부한 그는 음극선을 연구 하여 1905년에는 노벨 물리학상
까지 수상 했다.
레나르트는 음극선 연구에서 영국의 톰슨과 경쟁 관계에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톰슨이 비열하게도 자신의 이론을
도용해서 논문을 썼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그는 영국인은 비윤리적이고, 부정확하고, 불충분한 데이타로 남의 업적을 빼았으면서 논문을 쓰는데만 급급한
이기주의자라고 생각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레나르트는 이 전쟁을 공공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자유 독일과 영국의 물질주의적인
상인간의 전쟁, 즉 위대한 영웅과 상인 간의 전쟁이라 생각했다.
전쟁이 독일의 패배로 끝난 뒤, 그는 누구보다도 강한 충격을 받게 된다.
이러던 차에 1919년 11월 런던 타임스 지는 영국의 탐험대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 을 입증하는 개기일식 관측을 했다고 대서특필하여 보도했다.
이런 보도에 접한 레나르트는 크게 격분하여 이 보도가 바로 영국인의 전형적인 사기수법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레나르트의 반영감정은 묘하게도 아인슈타인이 유태인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반유태주의 감정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아인슈타인과 반유태주의
한편 아인슈타인이 유명해지면서 아인슈타인은 독일 내의 반유태주의자들의 공격 목표물이 되게 된다.
파울 바일란트(Paul Weyland)라는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한 사람은 '순수 과학의 보존을 위한 독일 과학자 노동
공동체'라는 단체를 조직해서 아인슈타인을 공격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단체를 '반 상대론 주식회사'라고 우수개 소리로 말하기도 했다.
과학에 대해서 무지했던 바일란트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중세의 철학자였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로 풍자했으며, 아인슈타인이 세계의 모든 것을 상대화했다고 하면서 상대성이론이야말로 학문적 다다이슴의 한 형태라고
비난하였다.
심지어 그는 1920년 8월 24일 베를린 필하모니 대강당에서 반 상대성이론 대중집회까지 열었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반유태주의적인 공격이 강화되던 상황에서 그해 9월 23일에 바드 나우하임(Bad Nauheim)에서 열린
독일 과학자·의사 협회의 학회에서 아인슈타인과 레나르트는 학문적인 문제를 놓고 격돌했는데, 이때 레나르트는 아인
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부정했던 에테르를 옹호했었다.
이 회의이 있은 뒤 레나르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고, 그의 반영주의 감정은 한층더 반유태주의쪽으로 전환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레나르트의 반유태주의가 강화되는 또하나의 우연한 사건이 레나르트 주변에서 생겼다.
1922년 6월 유태인이며 국제주의자인 독일 외무장관 발터 라테나우가 한 극우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때 레나르트는 사회민주당 학생단체 대표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라테나우의 애도일에 조기를 다는 것을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하이델베르크에 있던 그의 실험실로 쳐들어가서 실험실에 약간의 손해를 입히고 레나
르트를 노조 강단으로 몰고가는 모욕을 준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레나르트의 반유태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결국은 나치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요하네스 슈타르크
한편 레나르트와 쌍벽을 이루었던 슈타르크(Johannes Stark)는 1905년 '양극선'(Kanalstrahlen)의 도플러 효과를 발견하는 등, 레나르트와 같이 처음에는 실험 물리학 분야에서 명성을 날리던 과학자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슈타르크는 처음에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었다.
또한 그는 1904년 『방사성과 전기공학 연보 Jahrbuch der Radioaktivität und Elektrotechnik 』이라는 저널을 창간했었는데, 당시에는 아인슈타인과의 관계가 매우 좋아서 아인슈타인은 1907년 '등가원리'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이 저널에 발표하기도 했었다.(Einstein, 1907c)
1913년 슈타르크는 전기장 내에서 스펙트럼선에 갈라지는 현상으로 후일 자신의 이름이 붙게 되는 소위 '슈타르크 효과'를 발견했으며, 1919년에는 양극선의 도플러 효과와 슈타르크 효과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발견한 현상을 보어와 좀머펠트에 의해 새롭게 전개된 고전양자론에 의해서 해석하는 것을 무척 싫어
했다.
고전양자론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된 슈타르크는 1922년 『독일물리학 내의 작금의 위기』(Die gegenwärtige Krisis in der
deutschen Physik)라는 저작에서 상대론과 보어-좀머펠트의 고전양자론을 신랄하게 비판하기에 이른다.
한편 슈타르크는 과학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과학 단체의 조직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22년 제국물리연구소(PTR)의 소장 자리가 공석이 되자, 슈타르크는 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슈타르크는 과학자들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소망과는 달리 이 자리는 네른스트를 거쳐서 파센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또한 그는 장사에도 관심이 많아서 1922년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사업에 손을 대기도 했다.
하지만 사업이 여의치 않자 그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렇지만 과학계에서 인기가 별로 없었던 그는 노벨상 수상자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재임용되지 못했다.
이렇게 학계로부터 고립되면서 그는 1930년 4월 1일 마침내 나치당에 가입하게 된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고 파센이 제국물리기술연구소의 소장직에서 은퇴하자 슈타르크는 이 연구소의 소장이 되게 된다. 그뒤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모든 학술지의 편집을 통제하고 연구비 배분을 장악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아리아 물리학
나치가 정권을 잡자 레나르트와 슈타르크는 소위 '독일 물리학' 혹은 '아리아 물리학'을 내세우면서 과학에 있어서의
나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내새웠던 '독일 물리학'의 이념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우선 마르크스주의적인 기계적 유물론을 거부하고 대신 뉴턴주의를 표방했다는 것이다.
레나르트는 뉴턴과학의 핵심이 비유물론적이면서도 기계적인 철학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원초적 에테르를 선호했으며, 물질 객체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아니라 직관적인 관념을 중시했다.
이외에도 과학의 객관성과 국제성을 거부했으며, 자연에 대한 낭만적인 숭배를 강조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아리아 물리학'의 교의는 그 내용의 세부에 있어서는 서로 모순되는 점이 많았다.
이렇게 소위 '아리아 물리학'의 본질에 대한 나름대로의 입장을 가지고 아리아 물리학자들은 유태인의 과학은 상대성이론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도그마적인 과학인 반면에 아리아 전통의 과학은 실험 위주의 실제적인 과학이라고 주장했다.
레나르트는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를 자신의 스승에게도 적용했다.
레나르트의 스승은 전자파의 발견자로 유명한 과학자였던 헤르츠였는데, 그는 공교롭게도 아리아계와 유태계의 혼혈이
었다.
또한 그는 유능한 실험 물리학자로서 전자파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론물리학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 대한 연구도 수행한 바 있었다.
이것을 보고 레나르트는 헤르츠가 아리아계의 영향을 받아서 인류 모두에게 유용한 전파를 발견할 수 있었으며,
반면에 유태계의 좋지 않은 영향 때문에 도그마적이며 쓸데없는 이론물리학에도 종사하게 됐다고 설명하기까지 했다.
하이젠베르크와 아리아 물리학
1936년부터 이론물리학 자체에 대한 아리아 물리학자들의 학문적 차원의 공세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
들은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던 하이젠베르크를 자신들의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1936년 1월 29일 『민족의 관찰자 Völkischer Beobachter』잡지에 슈타르크의 연설이 길게 인용된 기사가 '독일물리학과
유대인의 물리학'이라는 제목으로 나타났다.
기성 과학에 대한 나치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적 공세가 강화되자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몇몇 양식있는 독일 과학자들이 이에 대해서 반발하게 되었고, 마침내 아리아 물리학자들과 하이젠베르크 사이에는 심각한 정치적인 싸움이 시작되게 된다. 이때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주의자들로부터 '백색 유태인', '물리학의 오지에츠키','정신적 유태인 혹은 유태인의 특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하이젠베르크에 대한 나치주의자들의 공격은 하이젠베르크가 좀머펠트의 후임으로 뮌헨 대학 교수로 임용되는 것을 저지
하던 때를 전후해서 가장 절정을 이루었다.
'독일 국가사회주의 교원 연맹'을 필두로 한 나치 선동대들은 하이젠베르크의 과학사상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하이젠베르크의 교수 임용에 대한 강한 반발을 보였다.
나치주의자들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궁지에 몰린 하이젠베르크를 돕기 위해서 하이젠베르크의 어머니는 약간의 교분이
있었던 히믈러의 어머니를 만나기도 했으며, 하이젠베르크는 어머니의 충고에 따라 친위대(SS)의 지도자에게 탄원서까지 써야만 했다.
하이젠베르크와 그의 스승이었던 좀머펠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뮌헨 대학의 이론물리학 정교수에는 결국은 아리아 물리학자인 빌헬름 뮐러(Wilhelm Müller)가 임용되었다.
언듯 보기에 나치주의자들에게 이것은 '백색 유태인'에 대한 '독일 물리학'의 승리였다.
하지만 미국의 역사학자 앨런 바이어천(Alan Beyerchen)은 이 사건을 두고 '독일 물리학'은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결과적
으로 전쟁에서는 패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평가하고 있다.(Beyerchen, 1977) 즉
이 사건 이후 독일 물리학계의 전문가들은 아리아 물리학의 선동가들에 대해서 더욱 철저한 경계를 하는 계기가 되게 되었고, 더욱이 뒤이어 발발한 제2차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나치 정부는 아리아 물리학의 선전가들보다는 전문적인 물리학자들은 선호하게 되면서 독일의 물리학 공동체와 국가 사이에는 공생 관계가 다시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결과적으로는 독일의 전문적인 과학자들이 '아리아 물리학자'에게 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