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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巫의 어원 미리내와 천일생수天一生水
무당을 한자로 쓰면 무당巫堂이 된다. 무당이라는 말은 한자가 생겨난 이후에 붙여진 명칭이다.
무당을 의미하는 우리의 고유한 문자가 한자를 쓰기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므로, 무당의 근원이 되는
무巫자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그 어원을 찾아 볼 필요가 있다.
역사상 최초의 무당으로 볼 수 있는 분이 팔여八呂의 음音에서 태어난 마고와 아비 없이 태어난 그의
두 딸 궁희와 소희이다. 이들을 삼신이라고 한다.
삼신에게서 황궁, 청궁, 백소, 흑소가 태었고, 이들을 시조로 하여 많은 인구가 태어났다.
<부도지>에 따르면, 그들이 지유地乳를 먹고 살았는데, 인구는 불어나고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마고가 후손에게 따먹기를 금기시킨 포도를 따먹고 성정이 패악해짐으로, 마고가 이들을 모두 마고성
밖으로 추방하였다.
마고는 궁희 소희 두 딸을 데리고 천수天水를 끌어들여 성을 청소하고 닫아버렸다.
말하자면 지금도 무당들이 굿에서 해 오는 천수치기를 한 것이다.
우리의 조상 황궁이 마고성을 쫓겨나 천산주로 이동하면서, 후손에게 "해혹복본解惑服本하라"는
마고의 유시를 가르쳤다.
해혹은 왜 추방당해야 하는지 의문을 해소하라는 말이고, 복본은 다시 찾아오라는 말이다.
천수는 빗물을 의미한다. 빗물은 하늘에서 내리는 물이다. 그래서 천수라고 한 것이다.
천수라는 말도 후대에 생긴 말로 볼 수 있다.
빗물이 처음부터 있었던 말로 생각된다. 빗물은 하늘에 빌어서 내리는 물이라는 뜻이다.
비를 ‘빌다’라는 뜻으로 보면 빗물이 누군가 빌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물로 뜻이 풀리는 것이다.
아마 처음으로 하늘에 빌었던 사람이 마고였을 것이다.
하늘에 빌어서 물을 내리게 하는 사람이 물사람, 하늘에 빌어서 물을 내리게 하는 어머니가
물어머니라면, 물어머니의 딸을 물아기씨로 볼 수 있다.
빗물이라고 해서 다 하늘에 빌어 내리는 물은 아니다.
아프리카에 내리는 빗물이나 미국에 내리는 빗물이 우리와 별 상관이 없는 빗물이듯이 우리에게
내리는 빗물이라고 해도 물어머니가 빌어서 내리는 빗물이 아니라면 우리와 상관이 있는 물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와 상관이 있는 물은 은하수, 즉 우리 고어로 미리내의 물일 뿐이다.
은하수를 옛날 사람은 한자로 한수漢水라고 하였다. 미리내를 한수라고 하였던 것이다.
마고가 천수치기를 한 미리내가 머리 위로 흐르고 땅에서도 미리내처럼 흐르는 한수를 찾아 소서노와
온조 두 분이 하남 위례성에 한성백제를 세울 때 서울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강의 이름을 한수,
즉 한강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한강漢江의 뜻은 중국 땅에 흐르는 한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의 머리 위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은하수라는 뜻이다.
소서노와 온조 두 분이 하남 위례성에 한성백제를 세울 때 미리내와 한수 두 가지 명칭을 다 고려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서울을 벗어나 신장 쪽으로 가면 그곳의 한강이름이 지금도 매리내로 불리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한성은 은하수가 지나가는 나라의 도성이라는 뜻이다.
하늘의 중심이 되는 영역을 자미원이라고 한다.
자미원에는 천일성天一星으로 불리는 별자리가 있다. 이 별이 천수의 근원이 되는 별자리이다.
우리 조상은 하늘에서 물이 생성되는 자리를 천일이라고 하였고, 천일에서 만들어진 물은 천일생수
天一生水라고 하였다.
이 물이 고이는 곳이 적수積水라는 별자리이다.
천일생수한 물이 일단 여기에 고였다가 은하수로 흘러든다고 보았다.
그래서 물이 고임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물고기문양을 썼을 것으로 본다.
이 하늘의 물에 처음으로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다스린 분이 마고이다.
그는 그의 두 딸을 데리고 천수를 끌어들여 마고성을 청소함으로써 이 일을 처음 으로 시행하였다.
그래서 그를 물어머니라고 하였고, 그의 두 딸을 물아기씨라고 하였다. 멋진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굿에서는 무당이 두 시녀侍女를 데리고 천수치기를 한다. 천수치기를 함으로써 주변이 정화된다.
이런 의식은 마고가 천수를 끌어들여 마고성을 청소했던 의식이 지금도 그대로 전수되어 오는 의식
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천수치기의 역사가 14000년이나 됨을 알 수 있다.
한성백제을 세운지 얼마 아니 되어 오호五虎가 한성에 침범하였다.
소서노가 이들과 맞서 싸다 전사하였다. 그를 장사지낸 능을 한성백제 어디엔가 만들었을 것으로 추
정이 되는데, 이 능이 미리내 주변 어디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고기 형상으로 생긴 고분을 찾기만 하면 이런 고분들 중에서 아마 가장 큰 능이 소서노의 능이 될
것으로 본다.
그의 내연의 남편이었던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이 그를 어하라에 봉했다.
어하라는 붉은 옥의 나라라는 뜻이다.
백제를 세우기 전에 경기도 일대를 정벌하여 땅을 확보하고 이 고장을 잉벌로로 칭하게 되면서
추모왕이 그를 여왕으로 대접하여 내린 왕호였다.
여왕이 돌아가셨으니 그를 왕으로 예우하여 물고기형상으로 능을 만들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물고기형상의 무덤을 한심하게도 역사를 모르는 역사가들이 장고형고분이라고 부르고 있다.
장고처럼 생겨서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차라리 일본처럼 전방후원분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고 본다.
물고기 형상을 전방후원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백제문화연구소에서는 전방후원분을 금성분金星墳이으로 호칭하였다.
2006. 1.1.자로 백제문화연구소에서 세계최대규모의 물고기형상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일본의
명칭이다)을 정부의 도움이 없이 독자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하였음을 DAUM 카페 [전방후원분지킴]
이에 논문과 함께 발표하였다.
금성은 태양계에 속한 별로 8년 주기로 태양을 한바퀴 돈다.
아라비아 숫자 8자형으로 공전하기도 하고, 한자 八자형으로 공전하기도 한다.
공전주기의 형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태양을 호위하는 별로 알려져 왔다.
그래서 신전을 지을 때는 원구단과 같은 8각형의 신전을 짓거나, 판테온과 같은 기둥 8개를 세우는
신전(전면, 후면 각 8개, 좌우측면 각 16개라는 8개의 배수로)을 지었다.
물을 의미하는 물고기 문양에는 신전의 호위를 의미하는 8자의 의미가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물고기형상무덤이나 8자형무덤을 만들거나 8자형의 신전을 짓게 된 것이다.
신라 경주의 나정 터에서 발굴된 8각의 신전 터나 백제 하남의 이성산성二城山城에서 발굴된 8각의
터에 금성의 태양공전주기를 반영한 신전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산성을 팔성산성八城山城의 와전으로 볼 수 있다.
초기백제인은 경기북부 포천 등지에 집단주거지 터를 여자형呂字形의 터로 만들었는데, 주거지의
형상에도 금성의 태양주기형상과 마고가 태어난 팔여의 음의 형상인 8자형상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고가 태어났다고 하는 팔여八呂의 음音에서 팔八과 여呂를 같은 뜻으로 볼
수도 있다.
배달나라시대에 물을 다스리는 신이나 임금을 하백河伯이라고 하였다.
백伯이 임금을 의미함으로 하백은 물을 다스리는 임금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왕검이라는 최고 지위와 비교할 때 그의 차상위자인 맏이 정도의 뜻을 가지고 있다.
신라시대엔 이런 왕을 갈문왕이라고 하였다.
우리역사에서 하백으로 불리던 분을 우리 무교巫敎에서는 용왕龍王으로 불렀다.
용은 땅이서는 우리의 조상 풍이족風夷族을 상징하는 뱀(巳)이 되고, 물에서는 미리내를 상징하는
물고기가 되고, 하늘에서는 용龍이 되었다.
하백의 딸을 하백녀河伯女라고 하였다. 하백녀를 풀이하면 물아기씨로 풀린다.
그러므로 하백녀는 물아기씨-무당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물아기씨에서 아기씨는 하백의 딸을 의미하는 공주의 의미로 쓴다. 공주의 공은 곰(熊)의 음차가 된다.
하백녀는 하백을 지낸 비서갑菲西岬(부소갑扶蘇岬)의 따님이자 단군왕검의 부인이다.
단군왕검의 첫 도읍지 천평天坪을 지금의 지나支那 땅에 있는 해성海城으로 보는데, 단군조선이
진시황 8년에 진에게 멸망하면서, 해성과 닮은 지명인 해주로 내려와 자리를 잡고, 신당을 수영산에
짓고, 여기에 하백녀를 모시면서 수영산 물아기씨로 불리게 된 듯하다.
물아기씨 무신도에는 세 분의 여신을 있는데, 가운데에 아기씨가 있고, 아기씨 양쪽에 물아기씨가
각각 한 분씩 있다.
물아기씨가 하백녀라면, 하백녀가 모실 수 있는 분이 신의 위계상 마고가 될 것이므로, 아기씨는
마고의 변신으로 본다.
우리 신화시대나 상고시대 역사에서, 여자 무당을 배출한 집안으로 불 수 있는 집안은 9900년 전
한국시대에 한인의 비가 된 항영의 집안, 4300년 전 단군왕검시대에 단군왕검의 비가 된 하백녀의
집안이다.
항영은 풍이족 출신의 한인과 혼인한 오이족烏夷族 출신이다.
오이족은 발해연안과 황해 도서에 흩어져 살던 인종이다.
기묘년에 항영이 풍이족 출신의 한인의 비가 됨으로써 풍이風夷와 인종 통합이 일어났고 풍이에
흡수되었다. <부소보서扶蘇譜序>, <사기史記 주> 항영은 해마지하는 무당이라는 뜻이다.
백제百濟를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서 백제伯濟라고 하였다.
伯 은 청구국의 치우천왕시대 사람 유망의 나라인 유백국楡伯國을 의미한다.
이 시대를 배달나라시대라고 하는데, 청구국과 유백국은 모두 배달나라에 속해 있었다.
백제의 역사가 유백국역사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단군왕검은 14살 때 웅심국녀(웅심국왕의 딸)와 혼인했고, 서기전 2333년에 배달나라(조선의 전신)를
건국하면서 하백녀를 맞아들여 비로 삼았다.
(<朝鮮紀>)
우리 역사에서 하백이 처음 등장하는 때는 단군왕검에 비가 된 하백녀(하백의 딸)의 아버지 때이다.
당시에 가장 큰 세력가는 단군왕검이었고, 그 다음의 세력가는 하백이었다.
이들은 모두 단국檀國을 구성하는 양대 지주였다.
단국의 주인은 홍제洪帝였다. 단군왕검은 홍제의 태자太子로 있었다.
그러나 단군왕검이 홍제의 적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웅심국왕으로서 단국제檀國帝를 겸직할 처지에 있었다.
(<조선기>, <부소보서扶蘇譜序> 등)
하백은 황하의 지류인 수분하의 동쪽에서 숙신肅愼(요동遼東)에 이르는 거대한 땅을 다스리고
있었다.
하백이라는 관직은 홍제 8년에 수분하 동쪽으로 침범한 제곡고신帝嚳高辛을 격퇴함으로써 홍제로
부터 받은 관직이었다.
단군왕검이 단국을 승계하려면 하백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하백은 원래 한국桓國을 세운 풍이족 출신으로 적제赤帝(양자강 남쪽을 다스리는 임금)로서 축융
祝融(불의 신에 제사지내는 제관)의 지위에 있던 한인천제의 61세 직계후손이었다.
그를 곤오昆吾라고 하였고, 치우천왕의 대를 이어 청동기문명을 발전시킨 분으로 중국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청동 솥을 만들었다고 전해 온다. 솥은 소성蘇姓 집안에서 만들었으므로 솥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하백河伯의 백伯은 풍백風伯과 같은 계열임을 나타낸다. 풍백은 원래 배달나라를 세운 한웅천왕
때부터 제사를 관장하던 집안이었다.
그는 풍물패(길굿패)를 이끌고 천왕이 이동할 때 길굿을 하였다.
이들을 풍이馮夷라고 하였다. 풍馮은 인종이 마가馬加임을 나타내는 문자이다.
마가가 물가(황하)에서 살았으므로 마馬자 앞에 빙冫자를 붙였다고 볼 수 있다.
곤오의 다음 대의 관직도 또한 하백이었고, 하백에게 딸이 있어서 하백녀라고 하였다.
하백녀는 단군왕검과 혼인하여 조선왕검의 비妃가 되었다. 단군왕검이 그의 비가 된 하백녀가 굿을
할 때 동참하여 함께 함으로서 검儉자가 생겨났다고 생각되는데, 인人이 여자를 의미하는 문자이고,
첨僉이 처음을 뜻하는 문자로 볼 수 있으므로, 단군왕검이 처음으로 여신에게 제사지내는 여자제관
을 도와서 제사를 함께 주관하였으므로 검儉(남신을 의미)이라는 문자가 생겨났을 것으로 본다.
소서노는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우는데 주도적으로 관여한 여인으로 우리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호족 연타발의 딸로서 떠돌이 고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세우게 하였고, 고주몽이 그에게 인간
적인 배신의 기미를 보이자, 온조와 비류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 소래에 상륙하여 한성
으로 들어와, 온조를 도와주어 백제를 세우게 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상 두 나라를 세우는 데에 깊숙이 간여한 여성은 오직 마고-하백녀를
이은 소서노 한 사람 뿐이다.
소서노의 이름에서 그의 내력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그의 이름을 분석함으로써 그가 명실상부하게
여왕이었음을 추론해 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학문을 문자고고학이하고 한다.
소서노召西弩의 소召는 입에 칼을 물고 있는 형상의 문자이다. 입에 칼을 무는 사람은 무당이다.
굿에서 타살거리를 할 때와 작두거리를 할 때, 칼이나 작두를 입에 물어 칼날이 혀를 상하게 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신명이 자기를 보호하고, 또한 굿에 참여한 참여자들의 액들도 물리쳐 준다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소서노라는 이름에서, 그가 여자무당집안 출신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소서노가 한반도의 서쪽에서 한반도로 온 무당이므로 이 또한 풍이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인 연타발이 연주兗州와 관련이 있다.
연주의 연은 연다는 뜻이다. 백제를 처음에 십제十濟라고 하였는데, 연과 십은 연다는 의미를 가진
같은 뜻의 문자이다.
연주는 제수濟水와도 관련이 있다. 백제에는 제수를 건너온 사람의 나라라는 뜻이 있다.
소서노가 서쪽에서 왔으므로 소서노라고 하였다고 본다.
그가 발해를 떠나 황해를 건너 한반도 미추홀彌鄒忽에 상륙하였다.
미추홀의 의미는 “추모왕이 너를 보낸 고을”이라는 뜻이다.
추모왕이 고주몽이므로, 너(彌)를 소서노로 보면, 미추홀은 “고주몽이 소서노를 보낸 땅”이라는
의미가 된다.
소래蘇來의 지명유래를 보면,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치기 위하여 이 곳으로 상륙했기
때문에, 그가 온 곳이라고 하여 소래가 되었다는 뜻인데, 이는 신라에서 과거의 역사를 없애려고
소정방에게 갖다 붙여 견강부회한 것이다.
조선의 전신인 단국의 제2세 홍제 때 비서갑菲西岬(부소갑扶蘇岬)이 황하를 다스리는 하백을 맡고
있었는데, 부서갑의 족성族姓이 소성蘇姓이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때의 역사와 신라역사의 시간의 간극을 비교하면, 거의 3000년의 차이가 난다.
신라보다 이미 3000여 년 전에 이 곳이 소성蘇姓 집안의 판도였다고 볼 수 있다.
소서노가 그의 아들 비류·온조와 함께 이곳 소래(미추홀)에 상륙하여 정벌을 시작함으로써, 한강
이남의 시흥·영등포·부천·인천과 경기도 북부의 양주 일대가 그의 세력권으로 돌아갔다.
고구려 때 미추홀을 포함해서 서소노가 평정한 지명을 매소홀현買召忽縣이라고 하였는데, “소서노가
고구려로부터 돈을 주고 산 땅”이라는 뜻이다.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이곳의 지명을 소성邵城으로 바꾸었다. “소씨나라 땅”이라는 뜻
이다. 그러므로 이 곳이 소정방이 온 곳이라는 뜻의 소래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소서노는 미추홀을 확보하고, 한강을 건너 삼각산 밑에서 그의 아들 온조로 하여금 국도 한성漢城을
선포함으로써 500년 한성백제시대를 열었다.
이런 이유로 소서노가 고주몽과 온조를 도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우게 한 공이 있다고 한
것이다.
소서노가 통과한 지명에 부천의 노고산, 서울 마포의 노고산이 있다.
이들 두 노고산은 소서노가 그곳의 원주민들을 평정한 이후에 마고에게 제사지냄으로서 생겨난
지명으로 본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동이족의 시조 마고로부터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마고제사를 지냈다고
보는 것이다. 사냥하여 산체로 잡은 짐승을 죽이는 타살굿을 했을 것이다.
소래에서 부천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비리고개라고 한다.
소서노의 아들 비류가 그곳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생긴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보면, 마고에서 시작된 물가기씨의 기능이 항영으로 이어졌고, 항영에서 하백녀에게 이어
졌고, 하백녀에게서 소서노에게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물의 힘이 이어진 것이고, 그 물은 은하수의 물이다. 그리고 천일생수 한물이다.
지금도 무당은 천일생수한 물을 가지고 천수치기를 한다.
따라서 이 물에 무巫의 기운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은하수를 우리의 고유어로 미리내라고 하는데,
미리는 물의 원음으로 볼 수 있는 말이다.
미리내는 물이 흐르는 내라는 뜻이다. 무자의 어원이 바로 미리내에 있다고 볼 수 있는 말이다.
(노중평)
첫댓글 강원도 춘천에서 전방후문형 무덤이 발견됐는데 시기도 그렇고 그럼 그곳이 소서노의 무덤일 확률이 높겠네요? 전방후원형 무덤 양식은 얼마전까지만해도 고대 일본에만 있는 무덤이라 알고 있었는데...이런 중요한 곳을 그깟 레고랜드 만든다고 훼손한 박근혜정부에 치가 떨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