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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는 야생
-이향지論
현재 어떤 직무에 종사하는 사람을 현역이라 하고, 일손을 놓거나 직무 관련성이 없어진 이들을 비현역이라 했을 때, 시 세계에서도 현역 시인과 비현역 시인을 가릴 수 있을까. 일테면, 등단 제도라는 관문을 통과한 모든 이가 현역일 리는 없다. 소위 등단 장사를 하는 문예 매체들에서 대량 배출되어 시의 전반적인 격을 떨어뜨리는 이들이 시인일 리 없고, 그들이 쓰는 게 시일 리 없다. 문단 행사마다 참석하여 저명한 시인과 사진을 찍는다고, 동인지 수준의 모지(母誌)에 작품이 가끔 실린다고, 그들이 시인이고 그게 시일 리도 없다. 그러나 그중 어떤 이가 자신과 자신의 시로부터 ‘치명적 도약’(옥타비오 파스)을 실천할 때 그/그녀는 비현역에서 현역으로 신분이 바뀐다. 반면에 한때 좋은 시를 많이 써서 독자층도 두꺼운 시인이 매너리즘에 빠진 시로 여러 지면을 낭비하고 있을 때 그/그녀를 현역이라 할 수 있을까. 등단이라는 제도적 틀을 거부하고 문제작들을 써내는 이들을 포함하여, 사망했다고 해서 김소월과 백석, 김수영을 비현역이라 할 수 있을까. 요컨대, 비현역은 자신에 안주하고, 현역은 자신을 갱신한다. 비현역은 시 세계를 과거에 비끄러매고, 현역은 미래로 펼친다. 그런 의미에서 이향지 시인은 현역이다. 아마도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근거 쪽으로 이 글은 흘러갈 것이다.
시인의 말
시인은 시로 말하고, 말해진 시는 쌓여서 시집으로 묶이며, 시집에는 대개 「시인의 말」(혹은 「自序」)이 실린다. 시집 한 권의 요약이면서 그 시편들을 쓰던 시기 시인의 삶과 생각이 응축되었으므로 그것은 시로 말해질 수 없는 산문적 진실과 시정신, 그리고 당시 시인의 근황에서 포부까지를 아우른다. 더욱이 그것이 몇십 년에 걸쳐 출간된 여러 권의 시집이라면 그 안에는 시인론과 작품론적 요소가 다 들어 있기 마련이어서 시인과 시의 궤적을 한눈에 파악할 수도 있다. 1989년에 등단한 이향지 시인은 그로부터 33년 만인 2022년에 여섯 번째 시집을 냈다. 짧게는 2년, 길게는 12년 만의 출간도 있고, 쓰인 순서대로 발간하지 않은 정황도 포착되는데, 육성에 가까운 음성을 직접 들어보자.
첫 시집 《괄호 속의 귀뚜라미》./ 저울과 자(尺)를 필요로 하지 않는/ 내 정신의 얼개를 빌어/ 물의 고향에 이르는 낮은 길을 보여주고자 한다.// 나는 오랫동안 길 밖에서 꿈꾸어왔다./ 슬픔에서 기쁨을, 속박에서 자유를/ 갈등에서 화평을 창출할 방법을……. 이 한 권은, 그 모색의 흔적이며/ 내 몽상의 裸身이며 原形質이다.// 이 한 권은, 내 시의 그릇 고르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생각과 삶이 어디 하나의 그릇에만/ 골라 담을 수 있는 것이던가?/ 앞으로도 내 시에 애써 굴레를 씌울 생각은 없다.
「독자를 위하여」 부분, 『괄호 속의 귀뚜라미①*』(1992)
*이하, 시집의 발간 순서를 시집, 혹은 시제 오른쪽에 원문자로 표기.
여름 마루에 앉아서 긴 겨울을 묶는다. 가당찮은 항구를 향하여 배를 저었던 것일까?/ 물은 보이지 않고/ 물결 가라앉지 않는다. 이것들을 다 떠나보내고 나면/ 내 생애의 멀미도 가라앉으리라!
-「自序」 전문, 『구절리 바람소리②』(1994)
첫 시집의 ‘시인의 말’ 격인 「독자를 위하여」는 척 봐도 대범하다. 시정신(“저울과 자(尺)를 필요로 하지 않는/ 내 정신”)과, 시적 지향점(“물의 고향에 이르는 낮은 길을 보여주고자 한다”), 시적 방법론(“슬픔에서 기쁨을, 속박에서 자유를/ 갈등에서 화평을 창출할 방법”)을 출사표처럼 던지며 기개를 드높이고 있다. “육신은 틀 속에서 이미 굳어졌으나/ 내 영혼의 그릇만은 수없이 허물고 고쳐 짓는/ 아름다움이고 싶”(「빈꿈-그릇」①)다는 대목에서 시인은 첫 시집 출간 전 이미 꽤 오랜 연금의 시간을 지나왔음을 암시한다. ②의 「自序」에서 “물은 보이지 않”는다고 토로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당찮은 항구를 향하여 배를 저었던 것일까?”하고 잠시 숨을 고르지만, 사실 ‘가당찮’을 리는 없다. 자신 안에 “물결 가라앉지 않”고 있기 때문이며, 기약 없지만 “이것들을 다 떠나보”내 “물의 고향에” 이를 때까지 시 쓰기를 멈출 수 없다는 다짐의 반의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3집의 「自序」는 결이 조금 다르다.
열두 해 동안 써온 山詩를 한데 묶는다. 오랫동안 전신을 실어온 것들이기에, 다음을 기약하며 잘라서 남겨둘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십오륙 년 전, 나는 혼자 힘으로는 세 발자국도 옮겨 놓을 수 없는 환자였다. 스스로 숟가락을 들 수도 단추를 채울 수도 머리를 빗을 수도 물을 마실 수도 없었다. 멀건 죽물조차 삭이지 못하는 날들이 숱하게 흘러갔다. (중략) 이상하게 정신만은 말짱했다. 그때 내 소원은 걷다가 죽는 것이었다.// 그 작은 소원이 가장 큰 것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그 소원을 지팡이 삼아 걸음마를 다시 시작했고, 부축받지 않아도 걸을 수 있게 회복되었다. (중략) 그 느린 전진을 3년쯤 계속하였을 때, 길 끝에 서있는 산을 만났다. 처음 오르던 날은 더욱 느리고 비틀거렸으나 허파꽈리가 한꺼번에 터질 듯이 고통스러웠으나, 새로운 빛과 공기를 만난 심신은 재생을 예감했다. 그 무렵, 오래 밀쳐두었던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고, 등단도 했다. 그러나, 세 끼에 나누어 먹어야 할 밥을 저넉 한 끼에 몰아먹는 사람처럼, 시도 산도 버거웠다. 막막하고 마음 바쁜 내게, 산은 천천히 쉬지 않고 걷는 것이 가장 오래 멀리까지 갈 수 있는 방법임을 깨닫게 했다.// 詩는 나의 종교이며, 山은 나의 예배당이다.// 내 발아래 이 벅찬 터전을 열어, 걷고 보고 느낄 수 있게 해준 자연에 감사한다. 山行이 곧 仙行이라는 말도 있으나, 나에게는 어느 길이나 사람이 가는 길이다. 내 山詩들도 사람살이의 비명소리에 다름 아니다. (중략) 詩 안에서만은 어떤 어루만짐에도 침몰하지 않고 늘 움직이며 허우적거리고 싶다.
-「自序」 부분,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③』(2000)
좀 길게 인용한 것은 「自序」를 참고하여 연대기를 작성함으로써 다음과 같이 시인의 과거와 현재를 단숨에 개괄할 수 있어서다.
1984~1985년 : 병으로 죽음의 문턱에 이름.
1986~1987년 : “걸음마를 다시 시작했고, 부축받지 않아도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됨.
1988년 : 등산과 “오래 밀쳐둔 시 쓰기”, 山詩 쓰기를 동시에 시작.
1989년 : 시 등단.
1992년ㆍ1994년 : 시집 1ㆍ2집 출간.
2000년 : 山詩集 『물이 가는 길과 바람이 가는 길③』 출간
이를 참고하면, 「독자를 위하여①」가 그리 비장했던 것은 아직 건강 회복기에 무게 중심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며, 「自序②」에서는 “물결”과 “멀미”가 의미하듯 건강보다 시적 열망 쪽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졌기 때문이다.
죽음을 극복한 이들은 대부분 이를 제2의 생으로 간주하여 이전 생과 다른 세계관을 갖게 된다. 이향지에게 생명과 시와 산행은 아주 신속하게 한 묶음이 되었다. 「自序③」에서 보듯 “詩는 나의 종교이며, 山은 나의 예배당”이 된 와중에 1ㆍ2집이 출간되었던 사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는 첫 시집의 「독자를 위하여」에서 대담한 출사표의 배후가 되었고, 내다보면 그 에너지는 네 번째 시집에서 다시 대담한 계시로 분출된다.
시가 覺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내 시는 낯설어보일 것이다./ 시가 言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내 시는 미래로 보일 것이다./ 나는 대답을 듣기 위해 시를 쓴 것은 아니다./ 내 시는 질문이다.// 얇디얇은 존재 하나를 뚫고 나오는 데 60년이 걸렸다// 겨울 해는 짧지만, 질문은 계속될 것이다.// 시에 감사한다.
-「自序」 전문, 『내 눈앞의 전선④』(2002)
이향지는 시를 “覺”이나 “言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짐작하건대 ‘感’이나 ‘말’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전자는 생각과 관계하고 후자는 몸과 관계한다. 전자가 문자언어 쪽으로 기운다면, 후자는 음성언어 쪽으로 기운다. 생명과 시와 산행이 한 묶음으로 가는 시인에게 “질문”은 날것으로서의 생체언어다. 그런데 「自序」의 어조와 맥락은 랭보의 「견자의 편지」를 떠올리게 한다. 견자를 자처한 랭보는, 시인은 감각의 오랜, 그리고 거대하며 논리적인 ‘착란’을 통해 견자가 된다고 하였다. 영혼의 오랜 연마 과정을 통한 시적인 순간이라야 미지와 만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는 “얇디얇은 존재 하나를 뚫고 나오는 데 60년이 걸렸다”는 이향지의 존재론적 몰두와 맞닿고 다시 시인의 시적 몰두와 맞닿는다. 4집을 출간한 해에 1942년생인 시인은 “60”세가 되었다. 시집 속에서 이미 그의 연마 과정은 충분히 입증되었다. 랭보로부터 영감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전적으로 시인 자신의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정황이 있다. 「自序」는 『내 눈앞의 전선』에서 한 편의 시와 직렬로 연결된다. “그날 그 새벽 숲에서-,/ 어두운 새벽 숲이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나는 내가 있는 곳을 알았다. 이 숲에선 내가/ 다만 바라보는 자라는 것도-, 나는 대답하지 않아도/ 대답을 듣는 자라는 것도-,”(「그림자의 언덕④」)에서 시인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깨닫는 체험을 한다. “존재 하나를 뚫고 나오는” 각성, 그리하여 “질문은 계속될 것”임을 아는 일, 곧 시를 쓸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그것을 ‘계시’가 아니라면 달리 무어라 할까. 이향지의 시가 4집을 분기점으로 더 젊어지고 더 깊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는 시기적으로 뜸을 들인 후 발간된 5집에서 이번에는 병렬로 연결된다.
詩가 있어야 할 자리와 詩가 할 일을 잊지 않았다. 12년 만의 시집이다. 시집 『내 눈앞의 전선』 이후의 詩들이다.// 자연 속의 자연이다. 맨발 맨손 맨머리로 흙과 함께해 온 말들이라, 다소 눅눅할 것이다. 覺하되 새로운 言으로 담으려 한 흔적들이다.// (중략) 이 시집이 나의 마지막 시집이 아니기를 빌며, 이 시집이 나 하나만의 역사로 묻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시인의 말」 부분, 『햇살 통조림⑤』(2014)
12년이 흐르는 동안 “詩”에 대한 시인의 엄중함은 여전하지만, “覺”과 “言”에 대한 태도는 조금 바뀌었다. 1집에서 “이 한 권은, 내 시의 그릇 고르기에 해당된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생각과 삶이 어디 하나의 그릇에만/ 골라 담을 수 있는 것이던가?/ 앞으로도 내 시에 애써 굴레를 씌울 생각은 없다.”(「독자를 위하여①」)라는 예견을 “잊지 않”은 것이다. 여전히 “맨발 맨손 맨머리로 흙과 함께해 온 말들”과 함께 “覺하되 새로운 言으로” 쓴 시들을 5집에 담았고, ‘천하의 여장부’(이향지의 시집을 두세 권만 읽어도 이런 수식을 누구나 붙이려고 할 것이다. 정서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성적이며, 대상을 직시하는 그의 시에서 동정이나 연민 등의 감상적 요소는 찾아보기 힘들다)인 이향지의 시에서 나이와의 상관관계는 상당히 중요한데, 시인이 나이로 인해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나이로 인해 더 공격적으로 세계와 대결하는 정신자세를 가지고 있고, 일반의 시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이와 시적 사유가 반비례 상태에 있어서 시인의 시적 젊음이 오히려 더 부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집이 나의 마지막 시집이 아니기를 빌며, 이 시집이 나 하나만의 역사로 묻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는 문장의 앞부분은 72세의 물리적 나이에 조금이나마 발을 걸쳤을지 몰라도, 뒷부분은 역시 그의 시적 기개의 변주다. 그리고 자신의 열망대로 시인은 8년 후인 80세에 6집을 냈다.
다가가기 위해 더듬이를 세웠으므로, 매 순간이 새싹이었다.// 나의 시, 나의 실천. 이루었거나 못 이룬 진수들. 미완성인 채로/ 언제 손을 놓아도 억울할 것 없을 포트폴리오다.
-「시인의 말」 전문, 『야생⑥』(2022)
대장정을 마친 후 허심탄회하게 손을 탁탁 터는 듯도 하고, 지나온 시간을 살갑게 쓰다듬는 듯도 하지만, 과거형과 현재형으로 이루어진 「시인의 말」은 고별사도, 닫는 말도 아니다. 일관된 것은 자신이 “이루었거나” 혹은 “못 이룬” 것 모두가 최선을 다한 “진수”였음을 밝히는 시인의 당당한 태도다. 에두르거나 회피하지 않고 대상을 정면 돌파하여 대상의 기원과 본질을 간파하는 방식으로 시를 써 온 시인은 “매 순간이 새싹이었”음을 6집의 “지금-에필로그”에서 ‘지금’으로 집약한다. “‘지금’은 언제나 새로 돋는 잎이다// 나는 시간 여행자/ ‘지금’이라는 간이역에 있다// (중략)// ‘나’를 따라 옮겨 다니는 ‘지금’이라는 삼각점/ 헤아릴 수 없는 ‘지금’이 산정의 삼각점 앞으로 나를 불렀다/ ‘지금’이 산맥을 이루었다/ 그 산 그 산맥 그 삼각점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나는 ‘지금’의 축적이다”. 죽음을 돌파해서 ‘지금’에 이른 시인은 “몸이 살기 위하여 숱한 이사를 감내”하였고, ‘지금’도 가지가지 병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 어느 병도 “쓴다는 것”으로서의 병을 능가하지 못했음을 같은 시집의 「부족하나 불평 없기를 ̄프롤로그」에서 고백하였다. 시에 대한 전심의 몰두가 자존감은 높이되 후회와 부끄럼은 상쇄했을 것으로 보아 여섯 편의 ‘시인의 말’들에서의 대담한 선언은 시에 대한 ‘자존’과 동의어이며, ‘현역’의 다른 말이다.
이향지는 “그 산 그 산맥”을 축적한 ‘지금’의 “시간 여행자”로서 자신을 ‘야생’에 풀어놓았다. “길들지 않으려고 끝끝내 달아나는/ 생긴 그대로를 풀어놓고 출렁거리고 휘청거리는 한때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야생」⑥)임을, 그리고 자신에게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는 야생’은 이향지 시의 생태적 시공간이다.
시정신
나는 오늘 저 구름에 불을 지르는
노을이 되리라
사위지 않는 불꽃처럼
하루를 간직하리라
-「남한강변의 하루①」 부분
얕은 화분 속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서 있는 작은 소나무는 뒤틀린 허리만큼이나 심사도 뒤틀려 얼마 안 남은 바늘잎을 바장바장 태우고 있습니다. 저 소나무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살살거리는 물이 아니라 망치. 아무리 뻗대고 용기를 내어도 제 힘으로는 뚫을 수 없는 화분을 한 방에 깨뜨려 줄 망치. 걷고 싶은 길에서 풍찬노숙하다 웃으며 죽게, 발과 다리를 돌려주는 일.
-「풍찬노숙⑤」 전문
구름에 불을 지르는 노을도, 사위지 않을 것 같은 불꽃도 현상적 세계에서는 소멸하고 만다. 그러므로 “나”가 “간직”하는 “하루”는 정신세계의 광휘 그 자체다. 그러나 현상적 세계는 대체로 개인적 의사와 상관없이 “나”를 폭력적으로 틀과 규제 속에 가두려 한다. “허리”가 뒤틀릴수록 상품 가치가 높아지는 “얕은 화분 속” “작은 소나무”처럼. 어떤 생을 살 것인가 하는 선택은 어느 만큼은 개인의 의지에 달려 있지만, “제 힘으로는 뚫을 수 없는 화분을 한 방에 깨뜨려줄 망치”를 찾는 고군분투는 누구나가 가는 길은 아니다. “걷고 싶은 길에서 풍찬노숙하다 웃으며 죽”기 위해 시인은 병마를 “깨뜨려” 부수고 살아난 것이리라.
안에서 문을 잠그고 전화선을 뽑는다. 얼마 동안 먹을 채소와 쌀 반 자루가 있다. 신문을 끊고, 티브이 코드를 뽑고, 시계와 달력을 내린다.
-「피난기④」 부분
자신을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세계로부터 격리시키는 방법도 있다. 이때 ‘나’로부터 소외된 세계가 “문”밖에서 갖은양념에 버무린 음식 냄새를 피울지라도 초연할 수 있다. 이향지의 시집 중 『야생⑥』을 먼저 접한 후, ‘문학동네’에서 복간된 『내 눈앞의 전선④』을 읽고, 나머지 절판된 시집들을 중고로 어렵게 구해 읽은 나의 사례가 시인의 「피난기」를 간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구독하고 있는 문예지들에서 그의 시를 발견한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과 그의 시집 속 역작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가 문단이라는 제도, 혹은 문학인의 무리로부터 늘, 혹은 어느 정도 자발적 ‘피난기’에 있었다는 반증일 듯도 싶다.
길은 어디에나 없는 편이 가장 좋은 것이며
무엇을 보았는가 무엇을 들었는가 무엇을 맡았는가 무엇을 만졌는가 어디로 가던 길이었던가
묻지 않아도 다 아는 길은 가지 않는 편이 더 좋은 것이며
부딪쳐서 깨어지면서 피 흘리면서 스스로 아물면서 가는 것
-「야생⑥」 부분
시정신은 이렇게 하여 오롯해진다.
기개
‘폭포 명창’이 있듯, 숱한 산행에서 툭 터져 얻은 것을 이향지의 기개라 할 수 있을까. 시인의 산시 모음집(③)에서만도 시인은 선자령, 옥갑산, 곰배령, 가지산, 월출산, 속리산, 댓잎산, 설악산, 석룡산, 도봉산, 상원상, 지리산, 조정산, 북한산, 소백산, 능동산, 간월산, 신불산, 취서산, 고루포기산, 문수산, 남해 금산, 두타산, 태백산, 운달산, 수피령, 운악산, 병무산, 주금산, 청옥산, 백운대, 용아산, 한북정맥 연릉, 오서산, 가리왕산, 오대산, 미륵산, 양자산, 한라산, 민주지산, 복주산, 상원상, 아미산, 매봉산, 수락산, 금강산, 동락산, 킬리만자로, 명사산, 금대봉, 좌구산, 덕유산, 불곡산, 백두산, 금정산 등을 등반하고 꼬박꼬박 산시를 썼다. 시로 기록되지 않는 산들이 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편들마다 기개가 오는 길이 밝히 보인다.
눈 내린 뒷날 해 돋을 때 보니 너는 뿔이더라 순금의 뿔이더라 스스로 광채를 다스릴 줄 아는 뿔이더라 억만년 꺾이지 않을 숱한 뿔이더라 햇살도 바람도 그림자도 깊이 허리를 꺾더라 눈 속에 선 나까지 늠름해지더라
-「雪嶽③」 전문
보십시오, 이 방주엔 좌측과 우측을 감싸는 현(舷)이 없습니다. 곰배골은 좌현의 닻, 강선골은 우현의 닻. 저 멧비둘기가 아무리 날아도 이 방주의 돛은 아닙니다.
(중략)
하현달 하나가 깊숙이 앉았다 일어서면서 동자꽃 수만 송이를 주홍빛으로 울립니다. 구름 속 태양이 눈부신 화살문을 한꺼번에 열면서, 쥐손이꽃 수천만 송이를 연보랏빛으로 물들입니다.
-「곰배령③」 부분
‘설악’의 봉우리들을 “뿔”에 비유한 앞의 시는 “해가 돋”는 시시각각에 따라 모양(“순금의 뿔”)과 의미(“스스로 광채를 다스릴 줄 아는 뿔”)와 위용(“억만년 꺾이지 않을 숱한 뿔”)이 달라지는 ‘설악’의 풍광을 묘사한다. 등반을 하기도 전에 “눈 속에 선 나까지 늠름해지”는,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으랴. ‘곰배령’의 형상을 ‘노아의 방주’에 비유하면서 “곰배골”이 품어 안은 생명체들을 신화적으로 환원하는 광폭의 스케일을 시인이 어디 두세 번 부려보고 말았으랴. 기개는 대상에 대한 우월감이 아니라 직관적 통찰의 힘으로 온다.
땅의 역사란 물의 역사이다
지도를 펼쳐 놓고 이치로 보아야 보인다
여기서 크게 멀지 않다 모두 천년 안에 있다
지명이건 인명이건 이름이란 얼마나 가짜가 많은가
혼돈을 피하자고 지었으나
지명(地名)은 지리(地理)를 크게 벗어나면 허구가 된다
-「죽전(竹田)⑥」 부분
인용하지 않은 시의 앞부분에서는 ‘竹田’에서 대밭을 찾는 일의 부질없음을 ‘죽전’이 애초부터 대밭과 관련이 없기 때문으로 치부한다. 다만 ‘죽전’에는 “여러 왕조”에 걸쳐 “군량미 기르던 군량전(軍糧田)”에 물을 대었던 “큰 못”이 여러 개 있었고, 이 “큰 못”들을 “댓줄기처럼 쏟아지는 빗물”이 풍부하게 채웠을 것이라 유추할 수는 있다. ‘댓줄기 같은 비’에서 ‘竹’을 따오고, ‘군량전’에서 ‘田’을 따와 조합했으므로, 대밭이라는 실제 의미와는 거리가 너무 멀어졌기에 “죽전[지명]에 들면 죽전[대밭]이 안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대지 고갯마루에 차를 세우면 저 아래 더 아득히 깊은 곳”은 물론 “불곡산 대지산 법화산 손가락 발가락 지맥들”이 “좁고 깊은 골짜기 감싸고 오그린 모습”이 “다 보인다”. 이때 ‘큰 못’의 자취를 확인하고 ‘댓줄기 같은 비’를 상상함으로써 비로소 ‘죽전’의 환유적 의미는 완성된다. 이 같은 내용 뒤에 이어진 위의 시에서 우리는 지리에 능통한 시인의 기개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보게 된다. “땅의 역사란 물의 역사”라거나, “지명(地名)은 지리(地理)를 크게 벗어나면 허구가 된다”와 같은 경구 차원의 문장들을 이향지의 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직관적 통찰에서 비롯된 기개의 힘이다.
기원
기개가 외부를 항한다면 기원은 내부를 향하지만, 둘은 시정신이라는 모체에서 태어난 쌍생아라 할 수 있다. 기개는 활력을 질료로 삼고, 기원은 지적 차분함을 질료로 삼는다.
사물이 발생한 근원으로서의 기원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내 증조할머니
산유골 일구실 때
보름달 떠오를 때마다 큰 나무통에 김 오르는 쌀밥을 담아
정지 뒷문 밖에다 내어놓고 돌아, 돌아,
아아들 놀랠라, 살째기 와서 묵고 가거라
대숲을 향해 소곤소곤 부르면
어흥 소리 나직하게 내며
나타났다는 호랑이
쫓기고 쫓겨서 내 어머니 배 속으로 들어갔는지
어머니 어느 날 내게 고백하시기를
네 넟*은 집채만 한 불호랭이였다
니는 바로 그 집에서 났다
그 후론 잠결에도 내 가죽을 쓸어 본다
-「가죽⑥」 전문
*‘넟’은 ‘넋’의 오자가 아닐까.
어느 가계든 증조할머니나 고조할머니 대에서 한 마리씩 키우던 호랑이에 관한 설화를 품고 있을 것이다. 호랑이들은 대체로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사람과 교감하는 존재였다. 심지어는 “김 오르는 쌀밥”도 먹었다. 대체로 선조 대 호랑이와의 유대는 후대로 이월되지 않았다. 아스라한 시공간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빛이 바래 낡아갔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어머니를 거쳐 “나”까지 호랑이에 연루되는 과정이 아름답고 담담하게 전개된다. “증조할머니”의 은덕이 할머니를 건너뛰어 “어머니”에게 태몽으로 현현하고 “나”는 “집채만 한 불호랭이”의 심리적 일가가 된다. 피부가 “가죽”으로 전환되는 시적 지점에서 시인의 행적에는 “호랑이”의 불도장이 찍히고, “증조할머니”적 “호랑이”의 성정을 가진 시인이 산야를 누비는 모습이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불도장은 전염성이 강하다. 이 시를 읽는 당신의 “가죽” 어딘가를 살펴보라. 화상을 입지 않았을 리 없다.
가끔 보는 중랑천을 물의 성경으로
중랑천 고수부지를 물의 성경 겉장으로
중랑천 고수부지에 번지는 불을 물의 성경 겉장을 태우는 불씨로
제 키만한 댑싸리를 들고 불을 잡으러 뛰어다니는 소년을 불의 아버지로
댑싸리를 맞을수록 몸을 나누며 길길이 뛰는 불을 불의 자식들로
(중략)
삽시간에 재가 되어 주저앉은 마른풀들을 불의 어머니로
날개도 달기 전에 타 죽은 벌레들을 날개교의 순교자들로
저무는 하늘로 검은 연기를 끌고 훨훨 치솟는 불길을 물의 성경 겉장에 둥지를 틀고 살던 불새들의 비상으로
몸 바꿔 바라보는 사이에 다리를 건너왔다. 왼쪽 옆구리에 붙어 있던 중랑천이 오른쪽 옆구리에 붙어 있다. 왼쪽에서 중랑천을 읽고 있던 왜가리가 오른쪽 중랑천을 뒤적거리고 있다. 오랜 가뭄으로 얇아진 중랑천. 왜가리의 두 발이 뒤적뒤적 뒷장을 들어올릴 때마다, 타는 모래의 말들이 중얼중얼 떠올라 하류로 간다.
-「풍경의 저쪽④」 부분
정월 무렵 쥐를 쫓기 위해 논이나 밭둑에 불을 놓던 농가의 ‘쥐불놓이’ 연례행사처럼, “중랑천 고수부지”에는 지금 땅속이나 마른풀에 붙어 번데기나 알의 형태로 겨울을 나고 있는 “벌레”들을 퇴치하기 위한 ‘벌레놓이’가 한창이다. 이 시의 주체는 “제 키만한 댑싸리를 들고 불을 잡으러 뛰어다니는 소년”이다. 건초 타는 연기 냄새를 맡으며 낮은 포복으로 불이 번져 나가는 풍경 속을 걷고 있는 시인에게도 곧 “소년”의 놀이가 전이된다. 사물을 “몸 바꿔 바라보”기다. “소년”의 동선을 따라 “불의 아버지”, “불의 자식들”, “불의 강강술래”, “불의 어머니”와 “물의 성경”이 “댑싸리를 맞을수록 몸을 나누며 길길이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놀이이므로, “물의 성경”이나 “불의 아버지”의 상징적 의미 따위를 찾는 노력일랑 하지 않아도 된다. 이 시는 ‘물’과 ‘불’의 기원이 아니라 ‘놀이’의 기원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연히, 우연히, 그 향기 끝에 앉았더니/ 전신에 창궐하던 어른이 사라”(침향(沈香)⑤)지는 찰나처럼 그렇게 잠시였을, 저 아득한 시공간을 거슬러 올랐던 “중랑천 고수부지”를 뒤로 한 채 시인은 “다리를 건너” 현실 공간으로 진입한다. “중랑천”은 “오랜 가뭄으로 얇아진” 일상을 흐르고 있다. 그러나 놀이의 여진은 남아 있어, “왜가리의 두 발이 뒤적뒤적” “물의 성경”의 “뒷장을 들어올릴 때마다, 타는 모래의 말들이 중얼중얼 떠올라 하류로 간다.” 누구도 번역하지 못하겠지만, “왜가리”의 말은 분명 “물의 성경”에 기록된 어떤 문장이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두 아이를 낳고 두 아이를 지웠다네. 그녀의 넋두리는 33년 동안 계속되네. 그녀의 가족들은 넌더리를 내며, 각자의 동굴 속으로 떠나버렸다네. 그녀는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먹고 자는 것이 일. 물렁물렁한 잠 항아리 속으로 지운 아이들이 돌아와, 엄마를 들어내자 엄마를 찢어버리자. 엄마를 키우는 데도 돈이 든다네. 땀 뻘뻘 흘리며 잠에서 빠져나오면, 바싹 마른 빨래 곁으로 낳은 아이들이 돌아와, 엄마를 줄에서 걷어버리자, 엄마를 개켜서 장 속으로 넣어버리자, 엄마를 치우는 데도 돈이 든다네. 자나 깨나 자나 깨나 아이들의 합창 소리. 잠 속에도 밥 속에도 아이들의 합창 소리. 엄마를 풍선에 매달아 날려버리자. 그녀는 풍선에 매달려 엄마를 찾아간다네. 엄마엄마 엄마의 풍선을 찾아다닌다네.
-「엄마의 풍선을 찾아가는 풍선의 노래④」 전문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 것은 실상 두려운 일이다. 인간의 외피를 벗기면 드러나는 하나씩의 용광로들. 데지 않고는 접근할 수 없는 삶의 비의들. 상처들. 자신이 먼저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게 되는 무늬들. “그녀”가 남이거나 자신이거나 결과는 마찬가지다. 종국에는 여자만 남는다. 이향지는 4집의 「개정판 시인의 말」(2023)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머의 말을 찾아다녔다. 가장 멀리, 가장 깊이 들어가 보았다. 막연하였으나 얼마쯤은 만났다. 21년 전, 그때의 뜨거움을 다시 만난다. 이렇게나 많은 여자가 내 안에 복작대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숨을 곳이 없다.” “그녀”는 시인의 ‘안에 복작대고 있’던 ‘많은 여자’ 중 하나일 것이다. “그녀”는 “두 아이를 낳고 두 아이를 지웠”으나, 낳은 두 아이와 지운 두 아이 모두에게서 버림받는다. “그녀”의 의식과 무의식을 네 명의 아이가 지배하고 있어서 “그녀”는 ‘숨을 곳이 없다’. 퇴행을 거듭해 아이가 된 “그녀”는 이제 “엄마엄마” 부르며 “풍선에 매달려 엄마를 찾아간다”.
비극적 현실을 드러내면서 그러나 이향지는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는다. 시인의 물기 없는 어조가 시인의 시적 의도를 강화하면서도 독자의 독해를 저해하지 않는 것은 꾸밈, 군더더기, 에두름과 같은 불순물이 섞여 있지 않기 때문으로, 시는 바로 우리의 내면으로 삼투압 되지만 평형을 이루지 못하고 감정의 파고는 독자에게서만 높아진다.
마루와 마당 사이에 난간이 있다.
(중략)
난간에는 나팔꽃 대신 녹이 잔뜩 피어 있다.
꽃 아니면 녹이라도 피어야 사람은 난간을 돌아본다.
죽도록 제 몸을 긁어 피우는 꽃을,
페인트와 붓을 들고 흔적도 없이 따버린다.
-「내 눈앞의 난간④」 부분
시인이 「지금-에필로그⑥」에서 밝혔듯, “‘지금’은 언제나 새로 돋는 잎”이지만, “자비가 없”으며, “언제나 에누리”도 없다. ‘지금’을 가감 없이 볼 때에만 ‘지금’다운 속성을 유지한다. 이는 첫 시집에서부터 일관되게 나타나는 이향지 시의 특성 중 하나다.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나팔꽃”을 “녹”이 대체했을 때 “나팔꽃”에 연연하는 노래를 짓지 않았으며, “녹”을 “페인트와 붓을 들고 흔적도 없이 따버”리는 행위에도 ‘자비’와 ‘에누리’가 없다. 시에 흔들리는 것은 독자의 몫일 뿐.
가로세로 포개진 칸칸마다 암탉들이 고고거린다
철망 속의 미혼모들
태어났다는 말에는 태어나게 하겠다는 무언이 얽혀 있다
교미한 적 없는 암탉들이 낳은 달걀은 생명인가 식자재인가 오토 품품인가
집란 회로에 무정란 한 알씩 꼬박꼬박 떨어뜨려 주는 양계장 암탉은 천치인가 천사인가 AI 노예인가
입으로는 쉴 새 없이 물과 사료를 취하고 산도로는 알을 밀어내는 오토 컨베이어벨트
실수로도 병아리 한 마리 걸어 나오지 않는 무정한 무정란 컨베이어벨트
날개 달린 원금은 철망에 감금시켜 놓고 갓 낳은 이자만 집어 가는 오토 컨베이어벨트
달걀은 암탉의 자식뻘인데 허기 채우기에만 급급한 닭대가리들
금욕주의자들의 지구에 메마른 산란이 계속되고 있다
논물에 풀어놓은 숫개구리들의 합창만 귀 따갑게 흰 구름 휘젓는다
-「오토 컨베이어벨트⑥」 전문
자, 양계장 닭의 모든 것이 여기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 고뇌 없는 영혼과 절망 없는 맹목과 태어난 죄로 평생 지게 된 일수(日收) 빚까지. 인간이 육식을 멈추거나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이 거대한 자동시스템은 해제되지 않을 것이므로, 암탉은 계속 “허기 채우기에만 급급한 닭대가리”로 살아가야 한다. 시는 “오토 컨베이어벨트”를 기획하고 “암탉”을 착취하는 인간을 비판하거나, “집란 회로에 무정란 한 알씩 꼬박꼬박 떨어뜨려 주는 양계장 암탉”에 값싼 연민을 보내지 않는다. 다만 ‘너는 천치니, 천사니, AI 노예니’라고 묻고 있으며, “교미한 적 없는 암탉들이 낳은 달걀”에 ‘너는 생명이니, 식자재니, 공산품이니’ 물을 뿐이다. 암탉과 달걀에게 던진 질문은 인간이 받아서 하게 되어 있다. 달걀만이 존재 이유라는 비애를 암탉이 모르듯, 문득 소스라쳐 우리는 서늘해진다. “내 시는 질문이다”(「自序④」)의 명제는 그렇게 성취된다.
이향지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을 기다리며, 절벽 끝이듯 두렵고 현기증 나는 젊음의 시를 읽고 또 읽는다.
-《시와문화》 202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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