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 일지1)에서 발췌한 동학군의 북상과 청일전쟁의 기운과 일본군의 궁궐 습격
대부분의 역사 기록은 승자의 기록이다.
패자의 기록이 있지만 그것은 정사를 증언하는 보조적인 사료로 쓰일 뿐이다.
동학군과 청일전쟁은 청나라, 일본과 조선 삼국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각자 나라들은 자기들 이익과 이해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기술하고 있다. 특별히 동학에 대해서는 동학 측과 일본과 당시 조선의 정치인들이 말하는 것과 사가들이 기록한 것들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소 다르다. 자이니치 역사학자 강덕상이 기록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배운 내용과 사뭇 다르다. 우리는 과거 역사의 팩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의 기록에 의거하여 과거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힘을 가진 어떤 학자나 학파나, 집단이나 단체 또는 나라와 민족이 자신들의 필요나 이익에 따라서 얼마든지 팩트가 아닌 날조된 이야기, 왜곡 과장된 이야기를 역사라는 이름으로 주장할 수 있고 그 주장이 막강한 인기를 끌게 되면 실제 역사로 둔갑할 수도 있는 것이 역사의 현실이다.
19세기 조선말에서 식민지로부터 해방되기 까지 근 100년의 역사는 망국과 직접 관련된 사람들의 입김이 아직도 살아있고 망국과 간접적으로 관련된 양반 관료들이 다 애국지사로 탈바꿈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역사 서술이 나오려면 앞으로도 백년이나 이백년이 지나야 할 것이다.
그 시대를 살은 조선 백성들은 수탈과 억압, 굶주림과 삼강오륜에 매여서 공자왈 맹자왈 하며 충효에 살고 죽었으므로 역사를 고민하고 연구하며 기록하지 못하였다. 일반 백성들의 기록이 나오지 않는 것은 양반상놈의 카스트가 사대주의와 계급주의, 충효정신으로 역사의식을 근본적으로 말살하였기 때문이다. 어디에 숨어있는 글들이 발굴될지도 모르지만 고난의 백성들은 역사를 눈물과 탄식으로 절규하며 강자들의 리그인 역사에서 바람처럼 이슬처럼 사라져갔다.
오늘 발췌하여 올리는 글은 매티 윌콕스 노블의 일지에 나오는 글로 그가 사실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그는 20세의 나이에 조선에 와서 오자마자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겪었다. 외국인인 자신들과 관련되는 내용을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간단하게 적고 있다. 그는 조선인도 아니고 일본인이나 청나라인도 아닌 제삼자로서 요동치는 조선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1893.5.17. 동학군의 북상2)
거의 두 달 동안 수도에서는 커다란 동요가 있었다. 남쪽 사람들이 새로운 종교를 시작했는데, ‘동학’이라고 불리는 종교였다. 이들은 왕에게 동학을 국교로 채택하고 모든 외국인들을 이 나라에서 내보낼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왕은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들은 자신들이 직접 외국인들을 내보내겠다고 위협했다. 남쪽 지역에서 이들이 결집하여 서울 근처로 점점 다가오고 있다. 여러 차례에 걸쳐서 외국인들이 살해될 특정 날짜가 정해졌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날들은 별다른 동요 없이 지나갔다. 현재 들리는 소문은 이들 남쪽지방 사람들은 외국인을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 중에서 새 왕을 선출하여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 온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국정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 고위층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고, 가난한 이들은 그것을 피할 길이 없다, 이것이 가난한 나라를 가난하게 만들고 국민들을 비참하게 만든다. 남쪽 사람들의 무리는 상당히 커지고 있다. 그들의 깃발에는 ‘외국인은 물러가라’는 글씨가 씌여 있다. - 매티 일콕스 노블 저 ⌜노블 일지 1892~1934⌟,57쪽
1894.6.30. 청일전쟁의 기운
우리의 결혼 2주년 기념일이다. 날은 더웠다. 아서3)의 부축을 받아 식당으로 나와 저녁을 먹었다. 6월 14일에 우리 아기 루수가 태어난 뒤 처음으로 식당에 나왔다.
우리는 조용하고 즐거운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주변 사람들은 전쟁이 임박했다며 두려워하고들 있다. 일본인들이 제물포에 포함들을 여러 척 정박시켰고 한국 땅 여러 군데에 많은 수의 군인들을 배치시켰다. 중국 군인들도 곧 한국에 들어올 것이라고 하는데. 일본은 중국에 200만 달러의 돈을 요구하는 한 편 한국에 대한 권리도 포기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 과연 전쟁이 일어날지, 또한 다른 나라들이 전쟁에 참여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러시아는 한국 땅에 부두를 확보하고 싶어한다.
아서는 전쟁이 일어나서 쌀값이 오를 때 우리에게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하기 위해 쌀 다섯 가마를 사두었다.
- 매티 일콕스 노블 저 ⌜노블 일지 1892~1934⌟,71쪽
1894.7.23. 일본군의 궁궐 습격
총소리에 잠이 깼다. 아서는 창가에 선 채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일본인들이 궁궐을 손에 넣기 위해 싸웠고 그 와중에 10명이 죽고 여러 사람이 부상을 당했지만, 결국 일본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중국 사람 하나가 떨면서 우리 부엌으로 들어와 소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숨어 있었다. 중국 군인들은 아직 서울에 도착하지 못했지만 얼마 전 수천 명이 평양에 다다랐다고 한다. 우리는 아직까지는 집안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지만, 전쟁이 정말로 일어나면 폭도가 생겨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에는 목사님(언더우드 또는 아펜젤러)이 우리를 군인들이 지키는 공사관으로 부를 것이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나는 아기와 우리의 옷가지들을 여행 가방에 챙겨넣고 있다. (제물포에 정박 중인 미국의 군함) 볼트모어 호의 관리들의 행동에는 문제가 많다. 전에 (미국 공사 존 M) 실 씨가 그들을 불렀지만 그들은 오지 않은 채 제물포에서 계속 머무르고 있다. 그들은 떠나고만 싶어하는 것 같다. 그들은 조선이 싫은 것이다. 하지만 미국 시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가 아니던가.
일본인들이 전선을 끊어버렸다. 우리는 메이4)가 보내준 국기(성조기) 두 개를 내걸었다. 한 개는 우리집에 걸고 한 개는 상동병원에 걸었다.( 메이, 이것이 보호용으로 쓰이게 될 줄은 너도 몰랐지?). 오후에 들어서 총소리가 더 자주 들리고 있다. 한국의 병기고와 병영이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하녀는 아들들을 데리고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한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고 있고, 중국 사람들은 모두 잠적하거나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저녁에 밖에 나가보니 일본 군인들이 거리와 주요관문들을 순찰하고 있었다. 우리 병원에는 부상당한 조선 군인들이 여덟 명 있다. - 매티 일콕스 노블 저 ⌜노블 일지 1892~1934⌟,72,73쪽
각 주
1) 1892년에 남편 아서노블 선교사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매티윌콕스 노블이 목격한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 42년간의 기록에서 발췌하여 강선미와 이양준이 번역, 이마고에서 펴낸 책이다.
2) 1893년에 있었던 동학도들의 서울 복합상소와 3월과 4월에 있었던 보은집회를 동학농민군의 북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보은집회는 시간이 경과되면서 최제우의 신원은 일단 유보하고 척왜양창의와 탐관오리 처벌을 전면에 내걸었다.
3)아서 노블(노을지) – 저자인 매티 노블의 남편으로 미국 감리교파송 선교사로서 1892년 도착, 1934년까지 조선에서 선교사로서 활동하였다.
4) 메이 – 저자인 매티 노블의 여동생.
2022.12.30.금요일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