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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 과 목 명 |
1주차(9.3) | 인천의 역사와 지명 유래 |
2주차(9.10) | 인천 중구의 문화유산 |
3주차(9.17) | 인천 중구의 한국최초·인천최古 |
4주차(9.24) | 인천 중구의 근대 개항장에서의 기억들 |
1주차(9.3)는 「인천의 역사와 지명 유래」의 주제」로 인천중구자원봉사센터(센터장 배동수) 4층 대강당에서 자원봉사자 25명이 참여한 가운데여 장미희 중구 역사문화 해설사의 강의가 있었다.
인천 최초의 지명인 미추홀(彌鄒忽)의 유래에서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아들인 비류가 남하하여 현재의 인천에 정착하여 미추홀국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인천이 고구려의 영역으로 되었을 때는 매소홀(買召忽)이라고 하였으나, 미추홀과 매소홀은 모두 ‘물의 고을’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데, 미추홀의 ‘미’나 매소홀의 ‘매’는 ‘물’을 뜻하고, ‘홀’은 ‘성(城)’과 ‘골(고을)’을 뜻한다고 한다.
매소홀이라 불리던 인천은 후기 신라의 경덕왕 16년(757)에 소성현(邵城縣)이라 불리는데, 인천의 막걸리인 소성주가 소성현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소성현은 고려 숙종(1095~1105)때 경원군(慶源郡)으로 바뀌어 승격되었는데, 이는 인천이 숙종의 어머니 인예순덕태후의 친정이었기 때문이며 이를 계기로 인주이씨(인천이씨)는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여 가문의 영광을 누렸고, 그 뒤 인종(1122~1146) 때에는 왕의 어머니 인주이씨 인예순덕왕후의 고을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승격되었다 한다.
그러나 인주이씨의 번성은 이자겸의 난으로 끝이 나는데, 이자겸은 자기의 외손자요 사위이기도 한 인종을 폐위하고 왕이 되려고 꾀하다가 반란에 실패함으로써 인주이씨는 몰락하고 말았단다.
인천은 고려말기인 공양왕 2년(1390)에 다시 ‘경원부(慶源府)’로 환원 승격되는데, 그 이유는 ‘칠대어향(七代御鄕)’이기 때문이며, 칠대어향이란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인천이 왕의 외가댁이거나 왕비의 고향이었으므로 붙여진 말이라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원년(1392)에 다시 ‘인주(仁州)’로 강등되었다가, 태종 13년(1413)에 이르러 오늘날의 명칭인 ‘인천군(仁川郡)’으로 인천의 이름이 시작되었다 한다. 이는 모든 군이나 현에 ‘주(州)’가 들어 있는 고을을 ‘산(山)’자나 ‘천(川)’자로 바꾸는 과정에서의 일이라 한다.
세조 6년(1460년)에는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로 승격했으니, 이는 인천이 세조의 어머니이자 세종의 왕비인 소현황후의 외가댁이었기 때문이며, 고종 20년(1883)에는 외세에 의한 개항이 이루어졌고, 고종 32년(1895)에는 ‘인천부(仁川府)’로 개편되어 일제강점기에도 인천부의 지명은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해방이 되고 1949년에는 ‘인천시(仁川市)’로, 1981년 7월 1일에는 ‘인천직할시(仁川直轄市)’로, 1995년 1월 1일에는 ‘인천광역시(仁川廣域市)’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