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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3장 1-7절. 목회자는 범죄자가 회개하고 선을 행하기를 원함. 요약설교
1-2절. 일부 범죄 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 사도의 책망을 듣고, 회개해야 하는데, 오히려 말씀을 비판하고 대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세 번째 갈 때는, 율법의 재판 규정대로, 두세 증인을 세워서, 범죄자들의 범죄행위를 밝히고, 책벌하겠다고 했습니다.
1절.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엘리콧(Ellicott)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 번의 방문이란 첫째 사도행전 18장 1절에 고린도에 가서 전도하고 고린도 교회를 설립한 것이고, 둘째는 에베소에서 머물면서 고린도에 방문한 것인데, 실제 기록은 없고, 셋째는 지금 가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세 증인의 입으로 확증하겠다고 한 것은 민수기 35장 30절 등을 인용한 것이고,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8장 16절에서 말씀한 것입니다.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1. 바울 사도가 첫 번째 고린도에 간 것은 사도행전 18장 1절에 말씀한 대로, 처음 고린도에 가서 전도한 때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고린도에 간 것은 고린도후서 1장 15절에 말씀한 대로 소위 ‘중간방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전도하는 동안에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고린도전서를 써서 디모데를 보냈는데, 디모데가 고린도에 가서 울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직접 고린도에 갔습니다. (중간방문)
그러나 바울이 갔어도 분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위 ‘중간편지’ 혹은 ‘혹독한 편지’ (혹은 ‘눈물의 편지’)를 써서 디도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디도가 고린도 교회의 분쟁 문제를 잘 해결하여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를 바울에게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에게 깊이 물든 그리스도파는 바울을 대적하고, 바울을 거짓 사도니 선교헌금을 도적해먹은 도둑놈이니 하고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서 이 고린도후서를 써서 디도에게 보내면서, 바울은 오늘 고린도후서 13장 1절에서 곧바로 세 번째 고린도 방문을 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1.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하기를 촉구하고, 이번에 만날 때에는 서로 기쁜 마음으로 만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범죄 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 사도의 책망을 듣고, 회개해야 하는데, 오히려 말씀을 비판하고 대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세 번째 갈 때는, 율법의 재판 규정대로, 두세 증인을 세워서, 재판을 통해서 범죄자들의 범죄행위를 밝히고, 책벌하겠다고 했습니다.
즉 신명기 19장 15절에 모세의 율법에는, 범죄자를 재판하여 처벌할 때는, 두세 증인의 증언을 근거로 처벌하도록 재판 규정이 되어 있습니다.
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15절 이하에서, 좀 더 신중한 재판 규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 18장 15절에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먼저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첫째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했다면, 동네방네 소문내면서, 욕하고 다니지 말고, 조용히 단둘이서만, 회개하도록 권유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권면을 듣지 않거든, 두세 사람을 데리고 가서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8장 16절에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즉 범죄 사실에 대해서 두세 증인을 데리고 가서, 회개하도록 촉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두세 증인의 증언도 무시하고, 피해자가 장로님 같은 다른 한 두 분을 모시고 갔는데도, 확실한 증인의 말도 무시하고, 회개하지 않고,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제 정식으로 교회에 재판과 처벌을 청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8장 17절에 “만일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했습니다.
즉 두세 증인의 증언을 토대로 회개를 권유해도 권면의 말을 순종치 않으면, 교회의 정식 재판에 회부하여 치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정식 재판에서 정죄를 당하면, 이방인과 세리 같이, 출교하고, 교회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아무 기관에서도 봉사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재판 규정은 소위 <형사소송법>이나 <민사소송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에서도 교회 헌법을 규정해서 헌법 제6장 <권징 조례>로써 재판에 관한 절차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3. 물론 이처럼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 처벌하는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범죄자로 하여금 회개하여, 올바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교회에 범죄가 누룩처럼 번지지 못 하게 하여,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복 주시기 위함입니다.
4. 그런데, 오늘날은 교회에서 <치리>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의 성결과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서는 <치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마치 다리가 썩어가면, 다리를 잘라내야 살 수 있듯이, 치리는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는 <치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치리>하려고 하면, “이 교회 아니면, 교회가 없나?”하고, 다른 교회로 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결을 위한 <치리>가 올바로 이루어지려면, 한 지방에서 다른 교회로부터 어떤 교인이 옮겨오면, 먼저 ‘왜 교회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보고, 다시 본 교회로 돌아가서, 회개하고 해벌을 받도록 권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현대 교회는 <치리>가 사라져서, 교회의 성결이 사라지고, 불신자들에게 교회가 범죄 집단으로 오해받고, 전도가 잘 안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말씀 따라서 법대로 형제를 권고하고, 분쟁과 다툼을 성경대로 잘 해결해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형제를 살리고, 성도님들도 복된 교회 생활을 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2절.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1. 바울은 이미 범죄자들을 용서하지 않고 책벌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2절에서도 범죄자를 왜 쫓아내지 않았냐고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방문했을 때도 범죄자들에 대해서 용서하지 않고 책벌할 것을 이미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시 이번에 세 번째 가면, 이미 말한 대로 반드시 범죄자들과 동조자들을 처벌하겠다고 미리 말해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용서와 사랑의 사도이지만, 무조건 용서와 사랑만 행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지 않고 처벌하고 쫓아내기도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1. <지금 떠나 있으나>라고 한 것은 지금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나 빌립보 교회에 머물고 있으면서, 이 고린도후서를 쓰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란 소위 ‘중간 방문’할 때를 가리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첫 번째 방문한 것은 사도행전 18장 1절에서 처음 고린도에 가서 전도할 때를 가리킵니다.
그 후에 바울은 사도행전 19장 1절에 말씀한 대로 에베소에 가서 3년간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글로애 집 성도들 편에 들어보니, 바울이 전도하여 설립한 고린도 교회가 4파로 분열하여 싸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편지를 써서 디모데 편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이 디모데를 울려 보냈습니다.
그러자 바울 자신이 직접 고린도 교회를 방문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방문이고, 소위 ‘중간방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회개하지 않고, 바울마저 울려 보냈습니다.
그러자 바울 사도는 북쪽의 마게도냐에 갔다가 두 번째 고린도 교회를 심방하겠다는 애초의 방문 계획을 취소하고, 곧바로 에베소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랬다고, 고린도 교회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봐라. 바울이 거짓말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또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다시 편지를 써서 이번에는 디도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이 편지는 소위 ‘중간편지’ 혹은 ‘혹독한 편지’(혹은 ‘눈물의 편지’)라고 합니다.
이 편지를 썼다는 증거는 고린도후서 2장 4절에 “눈물로 편지를 썼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디도가 고린도 교회에 가서 중재 역할을 잘하여, 바울파와 아볼로파와 게바파를 바울에게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하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에게 선동받은 그리스도파만은 돌아오지 않고, 끝까지 바울을 거짓 사도니 헌금을 횡령해 먹은 도둑놈이니 하고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 이에 동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에서 이 고린도후서를 써서 디도에게 먼저 보내고, 자기는 곧이어서 고린도에 가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번에 가면 죄지은 사람들은 용서하지 않고 반드시 처벌하겠다고 미리 엄포를 놓습니다.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1. <전에 죄지은 자들>이란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한 분열 죄를 지은 자, 고린도전서 5장에서 말한 음행 죄 지은 자, 고린도전서 8장에서 말한 우상 제물 먹은 자,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말한 예배 방해죄를 지은 여자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남은 모든 사람>이란 아직도 바울을 거짓 사도요 도둑놈이라고 대적하고 있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그에 동조하고 있는 일부 고린도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2. 그런데 바울은 이 사람들에게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이번에 가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미리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가기 전에 어서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말입니다.
3. 이처럼 바울이 심판을 미리 경고한 것처럼 우리 예수님께서도 재림하시면 심판하시겠다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즉 마태복음 25장 32절에서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한 것같이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1. 바울은 다시 고린도 교회에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보통은 우리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가 용서와 사랑만 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과 같이 용서하지 않고 처벌하겠다는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주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이처럼 바울 사도는 세 번씩이나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디모데와 디도를 보내서도 회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런데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 바울을 거짓 사도요 도둑놈이라고 대적하고 있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이번에 가면 용서하지 않고 처벌하겠다고 단호히 선포합니다.
3. 우리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8장 15-18절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잘 말씀해주셨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범죄 하면 우선 개인적으로 가서 회개하도록 권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거든 두세 사람을 데리고 가서 회개하도록 권고하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같이 여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22절에서 만일 범죄자가 회개하거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회개를 기초로 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회개를 촉구하는 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무조건 용서할 것이 아니라, 처벌의 순서대로 처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값싼 용서>(cheap forgiveness)를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눈물과 콧물로 회개할 때, 우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고 ‘값싼 회개’(cheap repentance)를 하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용서도 있을 수 없습니다.
4.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가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용서와 사랑의 종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처벌할 자는 반드시 처벌한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도 벌할 자는 결단코 용서하지 않고 반드시 처벌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민수기 14: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리라.
예레미야 51:56.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
고린도후서 5:10.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행한 대로 받으리라.
시편 94편 1절에는 하나님을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조건 용서만 능사가 아닌 줄 아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님과 동행하시고 행복한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1. <이는>이란 2절에서 바울 사도가 이번에 가면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를 밝히는 것입니다.
즉 <왜 바울이 범죄자들을 용서하지 않고, 처벌하겠다>고 하느냐 그 이유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범죄자들이 바울을 거짓 사도로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서 말씀하시는 바울이 참 사도임을 입증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가 참 사도임을 입증하는 것은 바로 바울 사도가 ‘사도적 권징’을 행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이 ‘사도적 권징’이란 이전에 베드로 사도가 사도행전 5장 1-11절에서 행한 그런 권징을 가리킵니다.
즉 베드로 사도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 판 값을 절반은 감추고 절반만 헌금하고, 그것이 전체인 양 거짓말을 하면서, 베드로 사도가 진짜 성령의 사람인가를 시험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당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고 거짓말하는 것을 즉각 처분으로 처벌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책망할 때, 그들이 즉시로 넘어져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모든 예루살렘 교인들이 무서워하면서, 베드로 사도의 권징에 복종했습니다.
2. 뿐만 아니라 모세도 민수기 16장 1-2절에서 고라당이 모세를 거스려 대적할 때도, 모세가 권징을 행해서, 고라당 250명이 땅에 파묻혀서 죽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도 바울을 대적하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범죄자들에게 이번에 가면 용서하지 않고, ‘사도적 권징’을 행사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3.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란 바울이 참 사도로서 바울 안에서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지금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고린도후서 편지를 쓰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서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12장 19절에서 말씀한 대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대적자들은 바울이 또 변명한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계속해서 바울의 말을 꼬투리 잡으면서,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비난하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범죄자들에게 대해서 바울은 단호하게 ‘사도적 권징’을 행사하겠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끝까지 대항하고, 반항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할 수 없이 용서 차원을 넘어서, 처벌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4.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도 볼 수 있는 것은 용서와 사랑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결을 위해서는 이단자와 목회자에게 대항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결국 권징을 행사해서 처벌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 헌법에도 제6장에 <권징 조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5. 또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한다>는 말씀은, 바울 사도의 책망을 듣는 범죄자가 회개할 생각을 않고, 도리어 <저 바울이 하나님의 사도가 맞나?> 하고, 하나님의 사역자를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당장 범죄자에게 병들게 하거나 사고를 당하게 하거나, 당장 간섭하시지 않는 것은, 사랑 때문에 오래 참고 회개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죄를 징벌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급하지 않으시고, 너무도 좋으신 분이기 때문에,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후서 3장 15절에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처벌하시기 전에 길이 참으실 때, 주님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을 멸시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2장 4절에 “하나님의 인자와 회개케 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성도들은 교회의 지도자가 늘 인자하게 대한다고,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교회 목사가 사회적으로 아무 힘이 없다고 말을 함부로 하고 멸시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비록 사회적으로 권력은 갖지 못하더라도, 축복권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민수기 6장 24-27절에 말씀한 대로, 구역의 제사장이나 신약의 목사가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그 축복대로 복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사가 늘 성도들을 축복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목사를 근심하게 하고 괴롭히면, 어찌 축복이 가겠습니까?
그래서 목회자가 근심으로 목회하면 성도들에게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왜 우리 자녀는 잘 풀리지 않느냐고 한탄할 필요가 없습니다.
늘 목사가 축복해주는 가정은 자녀들이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를 늘 괴롭히는 가정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비록 목사가 벌을 주라고 기도하지는 않지만, 목사가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6. 바울 사도도 그랬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4절에 말씀한 대로 ‘알렉산더’라는 사람은 바울의 말을 대적하고, 바울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알렉산더’에게 하나님이 벌로 갚으시리라고 했고, 심지어 디모데에게도 알렉산더를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14-15.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그러나 디모데후서 1장 16절에 오네시보로라는 사람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힘들고 어려울 때 자주 찾아와서 도와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원하건대 주께서 그날에 그로 하여금 긍휼을 입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1-17.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네, 주의 종의 축복 기도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결코 주의 종이 하나님께 처벌해달라고 기도하는 그런 악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종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기고, 순종하고 도와주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의 종들이 축복함으로 복된 가정과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1. 우리 성도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무력하신 분이 아니시고, 무섭도록 강하신 분이시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마귀와 죄와 사망을 이기신 강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장 18절에 말씀한 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장차 재림하셔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주의 종들을 통해서 권징을 행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모세나 베드로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를 통해서도 권징을 행사하시고, 오늘날 목사를 통해서도 권징을 행사하시는 분이십니다.
2.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30절에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내가 내 백성을 심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0장 31절에 말씀한 대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저 들어가는 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혹시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는 죄는 범할지라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종을 괴롭히는 일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에게 대해서 범죄하는 것은 하나님께 용서를 빌 때 용서를 받을 수 있으나, 하나님께 범죄하면 용서받을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2장 25절에서 엘리 제사장은 그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에게 대적하는 죄를 범하지 마시고, 하나님 잘 섬기고 하나님의 종들에게 잘 협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늘 축복 기도를 받고, 하나님께 큰 복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4절.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시니>
1. 예수님은 육신으로 계실 때 늘 죄인들을 위해서 속죄 사역을 감당하시려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섬기고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지금 살아계시고, 장차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2.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바울 사도의 모습과 같습니다.
즉 바울 사도는 예전에 고린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도행전 18장 1절 이하에서 말씀한 것처럼 일 년 반 동안 죽을 위험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 사례비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목회했습니다.
이처럼 전도하고 목회할 때 바울은 무슨 빚진 죄인처럼 섬기고 겸손하고 약한 사람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가면 하나님의 권능으로 범죄자를 재판하고 처벌하겠다는 것입니다.
3. 이처럼 사람이 겸손하게 섬기면, 무시하고 괴롭히는 악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강하게 대항하면 오히려 무시하지 않고, 존경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마치 바울 사도가 그랬습니다.
바울은 사도이지만, 보수를 받지 않고 겸손히 섬기니까, 오히려 보수도 안 받는 거짓 사도라고 비방한 악인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번에 가면, 용서하지 않고, 반드시 증인들을 세워서 재판하고 처벌하겠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4. 이처럼 이 세상에서는 정말 유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겸손히 섬기면 정말 존경하고 협조해야 하는데, 오히려 무시하고 짓밟으려고 하는 악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바울은 대적하는 사람들을 달래기만 하였지만, 이제 가면 용서하지 않고, 증인들을 세워서 처벌하겠다는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우리들도 겸손히 섬기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무시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정말 바울에게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어디 상대나 됩니까?
세상적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지요.
그런데 주 안에서 바울이 겸손히 섬기니까, 못된 사람들이 오히려 바울을 거짓 사도니 도둑놈이라고 비방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바울은 단호하게, 그런 악인들을 용서하지 않고 증인들을 세워서 처벌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껏 길이 참았으나 이제는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6. 우리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에 말씀한 대로 “우리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이처럼 우리 하나님이 오래 참으심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지금까지 길이 참으면서, 디모데를 보내고 디도를 보내고 자기가 중간 방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 번째 가면, 용서하지 않고 증인을 세워 재판하고 처벌하겠다는 것입니다.
7. 그러므로 겸손히 잘해줄 때 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지나치게 교만하고 못된 짓을 하면, 용서하지 않고 처벌당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1. 이 말씀을 쉽게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지금까지는 약한 모습으로 너희를 대했으나, 이제 가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반대자들을 처벌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거짓 사도니 도둑놈이니 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을 현혹시켜서 자기들이 교회의 주도권을 잡고 이득을 취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참지 않고, 바울을 동조하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와 함께 힘을 합쳐서 반드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그를 추종하는 악인들을 처벌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소수의 악인들이 교권을 장악하고, 교회를 온통 좌지우지하고, 성도들을 괴롭혔으나, 이제 대다수가 나서서 그런 악인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이번에 우리나라도 소말리야 해적들에게 대해서 군사작전을 펴서 단호하게 해적들을 죽이고 납치된 선원들을 되찾아 온 것은 참 잘했습니다.
저 나쁜 해적들이 이전에도 선원들을 납치해서 많은 보석금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래서 의례껏 해적질을 하면, 우리나라가 돈을 줄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군사작전을 펴서 해적들을 소탕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3. 이것은 교회에서도 똑같습니다.
즉 어떤 악인들은 교회에서 섬기지 않고, 자기들이 교권을 장악하고, 교회의 인사와 재정과 행정을 모두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착한 성도들은 단호히 이런 소수의 악인들을 처벌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소수의 악인들을 몰아내고, 아름다운 교회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참된 평강과 성령님의 은혜 가운데서 복된 믿음 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5절.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1.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말씀에서, ‘믿음에 있는가’란 예수님(성령님)을 모시고 있는가를 성찰해보고, 확인해보라는 뜻입니다.
즉, “정말 구원받은 믿음이 있고,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다면, 계속 죄짓고는 못 살텐데..”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조그마한 죄만 들어와도, 마음이 괴로워서 회개하고, 자기를 죄인 괴수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자신을 죄인 괴수라고 한 것은 죄를 점점 더 짓기 때문이 아니라, 성결의 도수가 높아지니까, 죄에 대한 감각이 민감해져서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2. <너희 자신을 시험해보라>고 말씀하신 것은, 고린도전서 12장 3절 말씀대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부르고’, 로마서 8장 14절 말씀대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고백하는가’를 확인해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참 자녀라면, 범죄를 회개하지 않고는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자꾸 권고하시고, 근심하시기 때문에, 성령님 모신 성도가 범죄를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이 없고 괴로움이 없다면, 과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죄를 지으면, 성령님께서 속에서 탄식하시면서 죄를 회개하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2장 8절에 말씀한 대로 죄를 지었는데도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어떤 분(서*옥 시아버지 신**)은 어찌나 독하고 죄를 많이 짓든지 저런 분은 전도에 방해가 되니까 교회에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 정도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분이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서, 통풍으로 살을 에이는 듯한 큰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했는데, 놀랍게도 그분이 눈물로 눈물로 회개하면서, 날마다 성경 읽고 기도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에 집사였다고 고백하면서, 심방대원들이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참으로 구원받은 백성은 죄짓고 못 살고 회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고, 또한 성령님께서 권고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 28절에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고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1. 성령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탄식함으로 성도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도록 권고하십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시시때때로 체험하면서 살아갑니다.
2. 그러나 큰 죄를 짓고도 양심에 가책이나 죄책감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입으로 아무런 말을 해도, 성령님이 그 속에 안 계신 사람입니다.
아무리 교회 생활을 오래 했더라도, 입으로만 고백하고, 성령님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서 도무지 회개할 줄을 모르는 사람은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1. 이처럼 죄를 짓고도 성령님께서 회개하도록 촉구하지 않는 사람은 버린 자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양심이 화인 맞아서 성령님의 감동이 전혀 없고, 마귀의 종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2. 바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게 그랬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중에는 바울의 책망을 듣고, 회개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버림받은 사람들이 아니고,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신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3. 그러나 어떤 이들은 양심을 버렸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히브리서 6장 6절 말씀처럼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5.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이 마비되지 않도록, 늘 회개하고, 성령님이 역사하도록 기도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호세아 10장 12절에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이나 돌짝밭 같은 마음이나 가시밭 같은 마음을 가지지 말고, 부드러운 옥토밭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6. 그리고 세례 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회개를 외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예수님도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5:3-4)
그리고 바울 사도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그래야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래야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완악한 마음을 회개하시고, 옥토밭 같은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여 아름다운 믿음 생활을 하시고, 큰 복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6절. 우리가 버림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1.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 계시는 것을 고린도 교인들이 알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사도적 권징’을 행할 능력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사도행전 5장 5절에서 베드로 사도가 ‘사도적 권징’을 행하여,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즉석에서 죽게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고린도후서 13장 3절에서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는>이란 2절에서 말씀한 대로 바울 사도가 이번에 고린도 교회에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이유를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늘 6절에서 “바울이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서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고린도 교인들이 알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2. 이처럼 가끔 교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과연 하나님의 종인가 시험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7장 2절에서 백성들은 모세에게 “광야에서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고 했고, 모세와 다투면서 “모세가 하나님의 종인가”를 시험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7장 7절에서는 백성들이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를 시험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14장 22절에서는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열 번이나 시험했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6장 16절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도 마귀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했을 때, 마태복음 4장 7절에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사도행전 5장 9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19장 9절에서는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우리는 광야 백성들처럼 시험하지 말자”고 엄중히 권면했습니다.
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을 하나님의 종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똑같은 사람으로 무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인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전에 모세나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종들이었습니다.
4. 마찬가지로 오늘날 목회자나 교역자들도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인간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사람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칭찬하면서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했습니다.
즉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모세나 바울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말씀을 전해도, 듣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받지 않고, 불신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2절에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5. 이처럼 믿어주는 것, 사람의 말을 신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구원해주십니다.
즉 요한복음 1장 12절에 “믿는 자 곧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6.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 믿음의 조상 된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믿고,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은 로마서 8장 24절 말씀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전에 믿음의 선조들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27절에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하면, 애굽의 바로 왕을 무서워하지 않고 참고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26절에서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더 큰 보화로 여겼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11장 16절에서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자신이 돌아갈 참된 본향은 하늘나라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은 히브리서 11장 6절에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행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늘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함께 하셔서 놀라운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가시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7절.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1. 바울 사도가 ‘사도적 권징’을 말한 것은 고린도 교회의 적대자들을 처벌하고 싶어서 말한 것이 아니라, 오직 고린도 교인들이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를 거짓 사도요 도둑놈이라고 비방한 것을 못 하게 하려는 것은 그 목적이 고린도 교인들이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지, 바울 자신에게 잘해주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누구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비난하지 않고, 칭찬해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참 하나님의 종인 바울 사도를 진정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알아서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은혜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영적인 아버지의 마음’(mind of spiritual father)입니다.
물론 성도들이 목사에게 잘하는 것은 목사에게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성도들이 목사에게 열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고 받아서 은혜 생활을 하고, 신앙이 성장하고 하나님께 복 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 이것은 가정에서 부모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물론 자식들이 부모에게 돈을 주고 선물 주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그보다도 자식들이 부모의 말을 잘 들어서 곁길로 가지 않고, 복된 길 가는 것을 부모는 더욱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자식이 부모에게 돈도 잘 주고 선물도 잘 사주지만, 부모 말을 안 듣고, 부부싸움을 하고, 이혼하고, 술 먹고 방탕 한다면 그것은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목사도 아무리 성도들이 돈을 주고 먹을 것을 주고 선물을 잘 주어서 목사를 기쁘게 하더라도, 목사가 설교할 때 듣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성도들을 섬기지 않고 억압하고, 싸우고, 죄지으면, 목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3. 지금 바울 사도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대들고 도둑놈이라고 욕한다고 기분 나쁜 것보다도, 오히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받지 못하고, 계속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을 따라 잘못된 길을 가고, 참 사도인 바울을 대적하는 악한 길로 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1. 지금 바울 사도는 바울 자신이 옳은 사람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길에서 올바른 신앙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 책망한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을 따라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따라 신앙생활 하게 하려고 책망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바울 사도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참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전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바울을 대적하는 것은 바로 이단을 따라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날 우리 같은 사람은 이단을 따라가지 말고, 성경 말씀을 따라가라고 말하기가 쉽지만, 초대교회 당시에는 신약성경 책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바로 바울 사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사람의 말로 알기 쉽고, 또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거짓 사도요 도둑놈이라고 비난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참된 종이요 참 사도라고 믿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2. 그렇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곁에서 바라보는 사람을 하나님의 종으로 믿기가 어렵고,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곁에서 날마다 보는 사람은 결점이 보이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으로 존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옛날에 들은 이야기인데, 한참 조용기 목사님이 세계적으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외국인들이 조용기 목사님을 너무나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알고, 조용기 목사님이 계신 한국 사람조차도 흠모하면서 한국에 찾아왔답니다.
그런데 비행기로 한국에 와서 서울에서 택시를 탔답니다.
그런데 외국인이 택시에서 조용기 목사님 이름을 대니까, 택시 기사가 누군지 모르더랍니다.
그래서 너무나 실망하고 낙심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외부에서는 위대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막상 곁에 있는 사람은 존경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4. 지난번에 강사 목사님 곁에 있는 사람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사를 받고 죽을 사람들을 살리고 다니시는 강사 목사님이 너무도 존경스럽고,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어떤 곁에 있는 사람(황*경)은 이 목사님에게 말도 함부로 하고, 뒤에서 주먹질도 하고, 눈 앞에서도 손가락질을 하면서 핀잔주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 사도를 존경하는데, 막상 고린도 교인들을 바울 사도를 거짓 사도요 도둑놈이요 설교도 못 하는 말더듬이고, 자기 병도 못 고친 무능력자요, 환상도 못 본 신령하지 못한 사람이요, 못 생겨서 쳐다보기조차 혐오스럽다고 비난한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버림을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1.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 계시지 않고, 버림받은 자 같은 대우를 받을지라도, 오직 고린도 교인들만은 올바른 믿음의 길을 가고, 하나님 말씀 순종하여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하여 책망의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 사도의 태도는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성도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영적 부모의 심정’(mind of spritual father)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17절에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이 헌금한 선교헌금을 받고, “내가 내 몸을 희생제물로 바치더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자기가 전도한 고린도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권위나 이해타산이 온전히 멸시되고 사라질지라도, 오직 고린도 교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참으로 대단히 겸손하고, 겸허한 사도였습니다.
이런 바울 사도의 모습을 볼 때, 오늘날 우리는 눈물이 날 정도로 안쓰럽고 지극한 감동과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지극히 성도를 섬기는 성자 바울 사도의 모습에 감탄과 존경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 놀라운 바울 사도이시여! 주님의 큰 축복을 받으소서!’
바울 사도가 이방인 전도를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같은 이방인이 어찌 구원을 받았겠습니까?
마치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보답하려는 것처럼, 우리는 바울 사도에 대해서 감사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찬송가 3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 빌립보 교인들처럼 성도들이 목회자를 믿어주고, 따라주면, 목회자는 성도들을 위해서 희생하고자 하는 헌신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처럼 바울 사도를 불신하고, 거짓 사도요 도둑놈이라고 비난하면, 바울처럼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도도 낙심이 되고, 용서하지 않고 처벌하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히브리서 13장 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믿음으로 순종하고, 근심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큰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