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꽃
최원현
감자 꽃이 피었다. 하얀색 꽃이다. 그러면 저놈은 분명 하얀 감자다. 감자 꽃을 본 게 얼마만인가.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고 피어있는 감자 꽃, 옆집 할머니의 작품일 것이다. 손바닥만한 땅에 상추며 고추며 가지에 감자까지 심어놨는데 그것들이 얼마나 옹골지게 커가는 지 보고만 있어도 장한 생명력이 느껴지더니 오늘 아침에는 보니 이렇게 감자 꽃까지 피어있는 게 아닌가.
사실 감자 꽃은 피게 하면 안 되는 거였다. 꽃이 피게 되면 그 꽃에 양분을 다 빼앗겨 뿌리인 감자가 실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해서 꽃 봉이 맺히려 들면 그걸 뚝뚝 끊어내어 주는 것이 농사법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숨어있던 게 있어 사알짝 꽃을 피우곤 하던 것이 어린 날의 기억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어린 날 우린 곧잘 감자꽃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것이 학교엘 다니고 나서야 권태웅 시인의 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파 보나마나 자주감자/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파 보나마나 하얀 감자/
<감자 꽃>은 시로서보다 우리의 놀이노래였다. 그런데 노래처럼 하얀 꽃 핀 것엔 하얀 감자가 달리고, 자주꽃 핀 것엔 자주감자가 달리는 것이 당연하련만 왜 이 동시가 노래가 되면 그리 슬퍼졌던 것일까. 아마도 시인의 삶이 <감자 꽃>이란 시 속에 스며있어서였을까. 그렇고 보면 시인에게 있어서 감자 꽃은 단순한 감자 꽃이 아녔을 것 같다.
후에 안 일이지만 권태웅 시인은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 했다가 독서회 사건으로 투옥이 되자 퇴학을 당했고, 설상가상으로 폐결핵을 얻게 되자 출감되어 인천적십자요양원에 입원을 했었다고 한다. 다행히 많이 호전되어 결혼을 하게 됨과 함께 퇴원을 했으며, 1948년에 이 <감자 꽃>이란 동시집을 내게 되었지만 3년 후인 33살의 아까운 나이로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단다.
그런 시인의 일제 강점기 때 마음이라도 읊듯 어린 날 우린 누가 그렇게 지었는지도 모르는 후렴을 목청껏 불러대곤 했다.
조선꽃 핀 건 조선감자/파 보나마나 조선감자/왜놈꽃 핀 건 왜놈감자/파 보나마나 왜놈감자/
뜻도 모르고 불러대던 우리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어르신들은 악몽같은 지난 세월을 생각하며 얼마나 속이 아리고 아팠을까. 노래는 그렇게 불렀지만 나는 하얀 꽃 핀 하얀 감자밖에 보지 못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노래만 그렇겠지 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요즘은 감자가 채소로 반찬거리지만 옛날에는 주식이었다. 여름, 가을은 감자로 끼니를 때웠고, 겨울, 봄은 고구마로 끼니를 때웠었다. 그러니 그때 감자에 물린 아이들은 지금도 감자 소리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터였다.
그런데 얼마 전엔 강원도 사는 문우가 밸리감자라는 걸 보내왔다. 속까지 보라색인 감자인데 날로 먹으라 했다. 깎아 맛을 보니 사근사근한 맛이 먹을 만했다. 영양가도 보통의 감자보다 몇 배나 된다고 했다. 보라색 감자가 달리는 이 감자 꽃도 보라색일지 궁금하다. 나는 고구마도 감자도 비교적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종종 먹어보지만 왠지 옛날에 먹던 감자 맛은 느낄 수 없다.
시골에 사는 후배 문인이 마당가에 감자를 빙 둘러 심었다며 소식을 보내왔다. 그런데 감자농사가 아니라 감자 꽃 농사라 했다. 그녀의 말로는 감자 꽃은 서럽도록 아름다운 꽃, 가장 수수한 꽃이라고 했다.
오늘 아침 감자 꽃을 보니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다. 하기야 감자를 꼭 뿌리농사로만 지어야 할 이유는 없다.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때 꽃보다 열매였겠지만 지금이야 꽃이 더 귀할 수 있다.
하얀 감자 꽃, 손을 뻗쳐 만지니 수줍듯 온몸을 떠는 것 같다. 내가 심고 가꾸지도 않았으면서 남이 해놓은 것에 취해있는 내가 참 못 됐다 싶으면서도 오랜만에 감자 꽃 한 송이에 출근길이 한없이 가벼워진다. 나도 내년쯤엔 시골에 있는 내 작은 땅뙈기에 뿌리농사 아닌 감자 꽃 농사나 지어 한 번 감자 꽃이 흐드러지게 저네 맘껏 만발하게 해 볼까. 어린 날인 양 권태웅 시인의 감자 꽃노래가 나도 모르게 흥얼흥얼 입가에 열린다.
계간 <부싯돌> 2005.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