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산자락마다 붉고 노란 물감으로 물들어가는 만추의 계절이다. 청운의 꿈을 품었던 옛 선비들의 발자취가 서린 곳, 문경 새재로 향하는 길이다. 이번 나들이는 육사 27기 동기생 65명과 부부 동반으로 함께하는 여정이었다. 양재역을 출발한 관광버스 2대가 고속도로와 국도를 달려 새재로에 접어들자 옛 선비들이 한양길을 오르내리며 쉬어 가던 신혜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백 년 전 이 길을 걸었을 선비들의 희망과 근심을 떠올리니, 오늘의 우리 역시 인생길을 함께 걷는 여행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령산 관리사무소에서부터 제3관문 조령관까지 이어지는 길은 울긋불긋 물든 단풍으로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다. 새도 쉬어 넘는 고개라는 문경새재는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의 꿈과 사연을 품고 있는 길이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은 이 길을 걸으며 장원급제를 꿈꾸었고, 우리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건강과 우정이라는 또 다른 소망을 품고 같은 길을 걸었다. 책바위 앞에서는 모두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예부터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제는 벼슬을 꿈꿀 나이는 아니지만,
가족의 건강과 친구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만은 옛 선비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제2관문 조곡관에서는 문경시 문화관광해설사 홍연경 여사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관문 아래로 흐르는 계곡과 조곡폭포, 그리고 조선 후기 산림보호의 정신을 담은 불조심 표석은 자연과 역사가 함께 살아 숨쉬는 공간이었다. 교귀정에서는 신임과 전임 경상감사가 압무를 인계하던 옛 이야기를 들으며 세월이 흘러도 이어지는 책임과 인연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왕건교를 지나 오픈 세트장과 해국사에 이르자 고려와 조선의 시간이 겹쳐지는 듯했다.
과거길을 오르던 유생들은 장원급제를 기원했고, 보따리장수들은 장사가 잘 되기를 빌었으며, 나라가 위태로을 때는 승병들이 이곳에서 나라를 지켜냈다. 문경새재는 단순한 고갯길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삶과 희로애락이 켜켜이 쌓인 역사였다. 천천히 숲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제1관문 주흘관에 도착했다. 세 개의 관문 가운데 가장 옛 모습을 잘 간직한 주흘관은 늦가을 단풍과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이루고 있었다. 가로수길을 따라 내려오며 바라본 풍경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을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문경새재는 '한국인이 가장 걷고 싶은 길'이라는 이름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부드러운 흙길은 발걸음을 편안하게 했고, 숲은 마음을 쉬게했다. 자연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지만, 가을의 문경새재는 유난히 사람의 감성을 따뜻하게 감싸안아 주는 길이었다. 여행의 마지막은 문경관광호텔에서 산채비빔밥과 오미자 막걸리를 곁들인 점심이었다. 권커니 잣거니 잔을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는 동기생들의 모습은 단풍잎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부산에서 올라온 박석룡 동기와 문경에 살고 있는 오흥록 동기가 함께해 반가움은 더욱 컸다.
특히 전인구 동기의 재치 있는 입담은 여행 내내 웃음을 선사했다. 문경새재와 얽힌 장원급제 이야기와 전설을 실감 나게 들려주어 걷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10년만에 다시 찾은 문경새재는 같은 길이연서도 전혀 다른 감동을 안겨 주었다. 여름의 푸름 대신 가을 깊은 색채가 있었고, 무엇보다 세월을 함께 걸어온 동기생들과 나누는 웃음과 대화가 있어 더욱 따뜻했다. 인생도 문경새재의 과거길처럼 천천히 걸어갈수록 더 많은 것을 품게 되는 길인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에서 남는 것은 2만보의 발걸음이 아니었다.
붉게 물든 낙엽을 밟으며 함께 걸었던 친구들의 웃음,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 그리고 아름다운 가을 풍경 속에서 다시 확인한 소중한 우정이었다. 그래서 문경새재는 단순히 넘는 고개가 아니라,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걸어가게 하는 인생의 길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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