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현장의 다른 표정을 만나다.
영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의 작업이다.
그리고 배우나 스탭들이 노력해 만들어낸 그 많은 공동 작업의 결과들이 극장에 걸린다.
<씨네21>은 한 해 동안 극장에서 관객과 만난 영화들의 면면을 되돌아보면서
그동안 여러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던 미공개 촬영현장 스틸컷을 매년 살펴보고 있다.
해당 사진을 한장 한장 훑어보면서 현장 스틸컷을 촬영한 작가들과 일일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개봉 당시에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영화의 새로운 매력을 또다시 발견하기도 한다.
올 한해 관객을 울고 웃게 만든 <더 킹> <청년경찰> <박열> <범죄도시> <특별시민>
<택시운전사> <싱글라이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꿈의 제인> <남한산성> <석조저택 살인사건>
<여배우는 오늘도> <장산범> 이상 13편의 영화 촬영현장을 다시금 살펴보면서
이 영화들의 성공 요인과 배우들의 매력을 되짚어보자.
<더 킹>
어차피 센터는 정우성! 조인성마저 이 순간만큼은 옆에서 그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클론의 <난>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을 위해 정우성은 틈나는 대로 복도나 대기실에서 안무 연습에 매진했다.
정재구 스틸 작가는 외모와 성실함, 배려심까지 갖춘 배우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원래도 정우성 선배의 팬이었다. 이번 현장에서 처음 함께 작업했는데 역시 그냥 막 찍어도 사진이 잘 나온다.
더 놀란 건 그의 인성이다. 테이크가 반복되면서 짜증을 낼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한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정우성의 주위에 있으니 근사한 깃털처럼 보이는 장식은 마트에서 사온 휴지로 만들었다고.
<박열>
후미코(최희서)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변호사 후세(야마노우치 다스쿠)에게 전해들은 박열이 오열하는 장면은
<박열>의 마지막 촬영이었다.
후반의 감정 연기를 위해 이제훈은 실제 박열처럼 끼니를 거르며 체중 조절에 들어갔다.
식사 시간에 이제훈이 차 안 혹은 대기실에서 따로 식사를 할 거라 생각했던 민성애 스틸 작가를 포함한 스탭들은,
그가 정말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인터뷰를 보고서야 알았다고.
예민할 수 있는 현장에서 전혀 티를 내지 않은 것이다.
“감정 신을 촬영할 때도 스틸 작가가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줬다.
그래서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순간이 많았다.”
“저희 사진 찍어주세요!” 최희서와 하쓰여 역의 윤슬이 먼저 스틸 촬영을 요청했다.
민성애 스틸 작가는 “일제강점기에 청춘을 불태웠던 불령사처럼,
젊은 배우들이 모인 현장에서 그들만의 추억 거리를 사진으로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언제든지 배우들의 사진을 찍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렇게 <박열> 현장은 불령사처럼 반짝반짝 빛나던 순간을 기록으로 남겼다.
<청년경찰>
“저 표정은 어떻게 준비한 거야? 진짜 감전된 것 같아.”
“유튜브에서 영상 찾아보면서 연습했어. (웃음)”
자신들의 이야기를 믿어줄 거라 생각한 경찰에게 도리어 테이저건을 맞고
희열(강하늘)과 기준(박서준)이 기절하는 신을 촬영하던 날.
혼신의 힘을 다해 감전 연기를 펼친 두 배우가 촬영분을 모니터링하다가 결국 폭소를 터뜨렸다.
이 사진 속 모습처럼 <청년경찰> 촬영장은 내내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
영하를 오가는 겨울날 얇은 옷만 걸치고 골목을 뛰어다니느라 지칠 만도 했는데, 역시 젊음이 좋긴 하다.
재미있는 사진을 남기기 위해 배우들이 먼저 나서기도 했다.
라희찬 스틸 작가는 “박서준씨가 사진을 찍고 있으면 어느새 강하늘씨가 뒤에서 쓱 나타나 앵글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고는 웃긴 표정을 짓는다”고 전했다.
<범죄도시>
장첸이 무방비 상태로 웃는 모습이라니.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현장에서도 드문 광경이었다.
기본적으로 윤계상을 주축으로 한 흑룡파 배우들은 항상 한데 모여 앉아 심각하게 연기 얘기를 나누고 있어서
차민정 스틸 작가가 쉬는 시간에 사진을 찍기 왠지 미안할 정도였다고.
농담도 거의 하지 않고 캐릭터에 푹 빠져 있던 윤계상을 활짝 웃게 만든 이날은
훠궈집에서 마석도(마동석) 형사 일행과 흑룡파가 신경전을 펼치는 장면을 촬영 중이었다.
작은 식당에 많은 배우가 모여 북적거리는 분위기가 매사에 진지했다던 그에게 활짝 웃을 여유를 준 것 같다.
적과의 동침?
마석도가 위성락(진선규)에게 장첸의 위치를 알려주면 중국이 아닌 한국 감방에 넣어주겠다고 회유하는 장면을 찍던 날
마동석이 진선규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차민정 스틸 작가는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재미있는 표정을 지어줬다”며 마동석의 적극적인 면을 설명했다.
마동석의 옆에 위성락의 비주얼로 활짝 웃는 진선규의 모습이 왠지 낯설다.
영화 속 위성락은 섬뜩한 눈빛으로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촬영장의 진선규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사람들을 대했다고.
“평소 아픈 스탭이 있으면 촬영 끝날 때까지 걱정하더라. 스탭들에게 무척 상냥한 배우였다.”
<특별시민>
현장에서 제일 선배일 법한 최민식이 벌서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니!
영화 초반 군사통제구역 안에 들어가려는 서울시장 변종구(최민식)의 앞을 눈치 없게 이등병이 가로막는 장면이다.
크랭크인이기도 했다는 이날, 최민식은 잔뜩 긴장하고 있을 단역배우 앞에서 직접 연기 시범을 보였다.
군인들이 손을 흔들면 어떨까, 손을 번쩍 들면 어떨까, 하며 연기에 유머를 섞으며 한껏 분위기를 띄웠다고.
정경화 스틸 기사는 “너무 대단한 대배우라 다가가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매회 먼저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줬다”고 전했다.
옆에 변종구의 수행 비서를 연기한 진선규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최민식에게 상추쌈을 받아먹던 그가 몇 개월 후 <범죄도시>의 위성락이 되다니, 역시 배우의 변신이란….
<택시운전사>
뭐든 신기하게 다가오는 어린아이의 눈에 외국인은 또 얼마나 신기했을까.
황태술(유해진)의 집에 김만섭(송강호)과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치만) 등이 모여 앉아 저녁을 먹던 장면.
황태술의 아들을 연기한 아역배우 윤석호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의 팔에 난 털을 만지작거렸다.
이런 자연스러운 케미를 놓칠 리 없는 베테랑 배우 송강호다.
조원진 스틸 작가에 따르면 아역배우에게 “촬영 들어간 후 똑같은 행동을 해도 된다”고 조언해줬다고 한다.
하필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던 2016년 여름에 한국을 찾은 토마스 크레치만.
비포장 검문소에서 엄태구가 연기한 군인이 김만섭 일행이 탄 택시를 그냥 보내주는 신을 촬영하던 9월도 여전히 더웠다.
타지에서 고생 중인 그를 위한 깜짝 이벤트가 마련됐다.
컷이 나옴과 동시에 연출부가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떡으로 만든 케이크를 건넸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멋쩍어하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정도인데, 외국인들은 표현을 잘하지 않나.
무척 놀라며 계속 웃고, 감독님이랑 포옹도 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계속 하더라.”
<남한산성>
인조(박해일)는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청나라의 칸(김법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노주한 스틸 작가는 당시 현장에 대해 “배우들끼리 감정이 흐트러질까봐 서로 말도 안 하고
황동혁 감독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을 정도로 긴장감이 감도는 촬영현장이었다”고 말한다.
미술팀의 숨은 노력이 담긴 세트를 포함해서 배우 박해일의 연기가
당시의 치욕적인 역사적 순간을 영화적으로 잘 담아낸 장면이었다.
미술 세트 양옆으로 대신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도 더 넓게 담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칸 일행이 올라선 미술 세트만 앵글 가득히 들어오도록 찍었다.
노주한 스틸 작가는 “영화의 의미가 한 장면에 담긴 것 같았다. 내가 딱 소화할 수 있는 컷이었다”고.
<싱글라이더>
극중 재훈(이병헌)이 아내 수진(공효진)이 머무는 호주의 집을 몰래 찾아가서는
자신 없이도 화목하게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을 훔쳐보는 장면이 있다.
영화에서 배우 이병헌과 공효진이 가장 가깝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시나리오 전개상 늘 떨어져 있어야 했던 두 배우에게는 호흡을 나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었던 셈이다.
“수진이 설정상 능숙하게 바이올린을 켜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소리가 잘 나지 않아 당황해했다.
그래서 이병헌씨에게 ‘선배도 좀 해보라’고 권하니 마치 늘 켜온 사람처럼 어색하지 않게 하기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석조저택 살인사건>
경성의 부자 남도진 역은 그동안 배우 김주혁이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이었다.
해방 후 경성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함께 거대한 저택에 살며 뭔가 수상한 낌새를 풍기는,
태생적으로 그냥 악역인 인물.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지닌 캐릭터라는 설정이라 최창훈 스틸 작가에 따르면,
김주혁은 “남몰래 피아노 연습을 정말 열심히 했다”고.
영화에서는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어설프게 보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영화나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익히 봐왔던 그의 모습은 실제로도 “너무 진지하고 차분한 편이라
촬영장 분위기도 조용했다”고 한다.
현장에서 동료 배우들과 날 것의 느낌이 나는 영화 현장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는 그는
늘 연기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배우였다고 한다.
피아노 앞에 서서 자신의 연기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을 그의 모습이 스틸 작가의 카메라에 잡혔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을 촬영하던 순간을 찍은 것이 아니다.
김주혁은 영화 촬영현장에 있는 스스로가 반갑다면서,
게다가 이렇게 멋진 의상을 입고 시대극의 주인공이 된 모습이 보기 좋다며 최창훈 작가를 따로 불러 자신을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최창훈 작가는 “민규동 감독의 <허스토리> 촬영을 이유영씨에 참여하던 도중 사고 소식을 접해
더욱 만감이 교차했다”라며 이 사진을 보내왔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 같은 사진이다.
<꿈의 제인>
올해 많은 관객과 평론가들이 <꿈의 제인>의 제인, 즉 구교환 배우에게 매혹됐다.
“감독이자 배우인 구교환은 내 학교 후배다.
현장에서 속옷부터 겉옷까지 여성 의류를 처음 입고 고생했던 모습, 밥도 굶어가면서 살을 빼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조명감독으로서 현장 스틸까지 겸했던 추경엽 조명감독은 저예산 독립영화의 특성에 발맞춰
역할 구분 없이 본인 휴대전화로 현장을 기록했다.
이 공연 장면은 영화에도 실제 등장하는 차세빈 배우가 운영하는 바에서 촬영했다.
세트가 아닌 진짜 공간에서 찍길 원했던 조현훈 감독과 추경엽 조명감독은
“상실감에서 오는 슬픔이 느껴지는 현장이었다”고 전한다.
추경엽 조명감독에게도 이 영화가 유독 특별한 의미가 있다.
“최근까지도 지인들이 개인적으로 연락해와 감상평을 들려주곤 한다.
영화제에서 상도 받고 뒤풀이 자리를 가졌는데 감독이 아닌 배우들이 준비해서 인상적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여배우는 오늘도>
촬영현장의 ‘실상’을 담은 B컷을 요청했더니 문소리 감독이 직접 2막의 한 장면이었던 ‘술이라도 줄여요’ 신을
촬영할 당시의 모습이 담긴 컷을 골라서 보내왔다.
“문소리 감독이 장준환 배우에게 연기 디렉션을 주는 아주 희귀한 상황”이라면서.
당시 촬영장 분위기에 대해 문소리 감독은 “배우의 연기에 매우 만족해하며 오케이를 외쳤는데,
장준환 배우가 계속 한번만 더 가자고 연기 욕심을 부리는 것을 스탭들이 다 같이 말렸다”고 전한다.
영화제에서 처음 단편영화가 공개되던 당시 인터뷰에서 문소리 감독은
“촬영 전날까지도 출연을 고민하기에 잘 찍을 수 있을지 속으로 걱정했다.
그런데 막상 촬영장에 가보니 장준환 배우가 등만 나오는데도 정말 열심히 메이크업을 받고 있어서 놀랐다”는
감독만 느낄 수 있는 고충을 들려줬던 기억이 난다.
따로 스틸 작가를 고용하기 어려웠던 현장이라 이날 촬영은 제작부 스탭이자 타이틀 영상까지 만든 이상훈씨가 맡았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그의 총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올해 수많은 ‘불한당원’들의 심장을 저격한 배우 설경구, 아니 한재호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마지막 장면을 찍던 순간,
노주한 작가는 서둘러 셔터를 눌렀다.
“연기에 관해서는 워낙 베테랑이라 촬영장이 추웠던 것 빼고는 다 좋았던” 이 장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설경구가 쥔 권총이 향하고 있는 위치였다.
예를 들면 “상대의 머리를 겨눌지,
심장을 겨눌지에 따라 느껴지는 미묘한 뉘앙스를 모두 잡아내려고 노력했던 순간”이었던 것이다.
오래전 <공공의 적>에서 처음 만나 오랫동안 그와 함께했던 노 작가 역시
“왜 그동안 배우 설경구에게서 이런 매력을 끌어내지 못 했을까?”라는 의문을 품었을 정도로
설경구의 새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촬영현장이었다고.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계속 보여줬다.
팔뚝이 두텁게 나오면 아주 좋아했다. (웃음)”
이 현장 컷에 담긴 또 하나의 숨겨진 사실.
저 날카로운 턱선, 그러니까 한재호의 옆얼굴 라인을 만들어준 것은 숱하게 받았던 경락 덕분이란다.
<장산범>
올해의 B컷 중 가장 충격적인(?) 반전이다.
<장산범>을 보고 누군가 무섭다고 느낀다면
귀신 들린 분장을 한 배우 이준혁이 거울 뒤에서 튀어나오는 화장실 장면 때문일 것 같다.
그런데 사진에 찍힌 그의 모습은 무서움과는 정반대다.
한편으로는 오랜 시간을 공들여야 가능한 특수분장을 하고도 불편한 기색 없이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는 그의 모습에서
평소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 자신이 찍는 것도 좋아하고 찍히는 것도 좋아하는터라 카메라를 갖다대면 호의적이다.
언제나 현장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하는 개구쟁이 같은 스타일이라 이날도 어김없이 장난을 많이 쳤다”라는
민성애 스틸 작가의 말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이준혁은 어떤 배우냐고 물었더니 민성애 작가에게서 “늘 웃음을 잃지 않는 배우”라는 대답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늑대소년>과 <미스터 고>의 동물 연기를 거치면서 이제는 한국의 앤디 서키스라 불리는 그의 귀신 들린 깜찍한 포즈는
당시 현장 스탭뿐만 아니라 기사를 준비하는 기자들에게도 훈훈한 웃음을 선사했다.
[씨네21] 글 임수연/ 2017-12-28 한겨레 신문/
첫댓글 왜케 길우요~?
읽느라 하루 해 가겠어라유~~^^
김주혁 사진 나오는 부분 석조저택 살인사건만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