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운데 1976년 명동 3·1 구국 선언 사건이 있습니다. 아마 민청학련 사건과 더불어 70년대 최대의 반유신 운동이자, 가장 주목된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정일형, 이태영 등과 함께 천주교 신부님들(함세웅, 윤반웅, 김승훈), 그리고 기독교 목사님들(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서남동 등)이 대거 참여했습니다. 그 일을 성사시킨 중심에 문익환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 개인적으로 볼 때, 종교로부터 사회 현장, 그리고 감옥으로 첫 발을 내딛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홍성우 변호사님은 문익환 목사님의 담당 변호사로서, 문 목사님이 옥중에 계실 때, 면회를 했습니다. 그때 문 목사님이 "내가 한 소절을 불러 줄 테니까 잘 기억하라"고 하여, 홍 변호사님이 그걸 암송했습니다. 당시는 변호사도 필기구 지참이 허락되지 않을 때입니다. 그것을 적어서 문 목사님의 가족에게 전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찬송가의 3절입니다.
그러니 582장의 작사자는 김재준+문익환 목사님이 되는 거지요. 스승(김재준)이 1~2절을 쓴 것을 이어받아, 제자(문익환)가 옥중에서 쓴 게 3절입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아!" 하고 탄성이 나왔습니다. 3절의 앞부분은 바로 문익환 목사님이 자신의 고향을 떠올리면서 쓴 구절로 보였거든요. "맑은 샘 줄기 용솟아"는 바로 그의 고향 북간도의 용정이고요. ('선구자'에서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가 떠오르지 않나요) “거칠은 땅에 흘러 적실 때"는 그의 고향 마을 앞을 흐르던 해란강의 줄기입니다. "기름진 푸른 벌판이 눈앞에 활짝 트인다"는 것은 그의 심상 속에 새겨진 고향의 풍경을 압축한 것이지요. 옥중의 고통을 겪을 때, 사람들은 꿈속의 고향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요.
'고향' 하면 누구나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지요. 그런데 자신의 그 이미지는 다른 사람과 절대 같을 수 없습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하는 시인과,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는 시인의 고향은 완전히 다르지요.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의 고향과 "박꽃 피는 내 고향, 담 밑에 석류 익은 아름다운 내 고향"도 다 다릅니다.
문익환의 고향은 북간도 용정의 명동촌이라고 합니다. 제가 2004년 6월, 제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느낌은 "넓은 들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6월이어서 들녘이 푸르고 무성해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문익환의 고향, 명동촌으로 가면, 우리는 한 인물을 반드시 만나게 됩니다. 윤동주입니다. 윤동주의 집과 문익환의 집은 저녁 연기를 서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습니다. 윤동주는 문익환과 동갑이고, 갓난아기 때 문익환의 모친의 젖을 같이 빨고 자랐습니다. 명동소학교 같은 반이었고, 은진중학교도 같이 다녔습니다. 평양숭실학교에도 같이 다니다가, 신사참배 물결에 반대하여 자퇴하여 고향에 돌아와 다시 용정 광명학원 중학교에 편입한 것도 같았습니다. 둘 다 공부를 아주 잘 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