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codex vaticanus | ||
2)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B사본)
17세기 이후에는 킹제임스 성경의 독주 시대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권위있는 킹제임스 성경외에 또 다른 성경번역이 필요하게 되었을까요? 15세기(1475년) 바티칸 학자들은 바티칸도서관에서 오래된 도서들을 정리하고 분류하다가 한 사본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사본이 양피지에 기록된 대문자체 중에 가장 오래된 사본으로 판명되는데, 이 연대는 4세기 경, 즉 AD 325-350년경으로 밝혀집니다. 이 사본을 ‘바티칸사본’이라고 부르는데, 이 사본은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으로 대부분의 구약과 신약, 일부 외경까지 거의 완벽한 책의 형태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70인역(LXX)이라는 것을 간략하게 설명드리자면,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디아스포라를 겪으면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다른 언어인 헬라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원전 250년경 이집트의 왕인 프톨레미 2세의 명령에 따라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말합니다. 즉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가르킵니다.
이 바티칸 사본은 거의 완벽한 칠십인역으로서, 거의 대부분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신약에서는 마가복음 16:9-20과 요한복음 7:58-8:11이 누락되어 있었는데, 그 외에는 거의 완벽한 보존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이 사본이 그 당시에 발견된 가장 오래된 대문자 사본으로, 일명 B사본(Codex B)이라고 불리워지며, 전 세계의 성경학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게 됩니다.
![]() |
||
| ▲ Codex Sinaiticus | ||
3) 시나이 사본(Codex Ainaiticus, Aleph)
또 그후 19세기 중엽에 성경사본의 역사 중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독일의 성경학자인 티센도르프가 1844년에 시내산에 있는 성캐더린 수도원에 묵고 있을 때에, 그 방에서 난로의 불을 붙이는데 사용되는 불쏘시개 중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의 일부분인 역대상, 예레미야, 느헤미야, 에스더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어디에서 구하였는가”라고 묻는 티센토르프에게 성캐더린 수도원의 수도사는 “이미 많이 태워 버렸다”고 말하였습니다.
티센도르프는 이 사본을 독일로 가져와 번역하여 이 사본에 관한 책을 출간하게 됩니다. 그 후 1859년, 그는 다시 수도원을 방문하여 거의 완전히 보관된 300년대에 필사본 되어진 성경사본을 발견하는 금세기 최대의 쾌거를 이루게 됩니다. 물론 티센도르프로를 통하여 그 양피지가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된 수도사들은 더 이상 그에게 양피지를 내놓지 않았는데, 티센도르프가 자신이 발간한 사본의 책을 어느 한 수도사에게 선물하자, 그 수도사도 자신이 갖고 있는 한 권의 완벽한 성경 필사본을 티센도르프에게 보여줍니다. 티센도르프는 그날 밤을 새워 그 성경 필사본을 읽는데, 훗날 그는 “잠을 자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 같았다”라고 고백할 정도였다고 훗날 증언합니다. 다음날 티센도르프는 그 사본을 돈을 주고 사려고 했으나, 그 수도원은 완강히 그것을 거부하였고, 결국 티센도르프는 수도원에서 차용증의 각서를 써주고 그것을 잠시 빌려오게 됩니다. (훗날 수도원측은 티센도르프가 성경을 잠시 빌려간다고 서명날인한 문서를 제시하며, 차용한 것이므로 돌려 주어야만 한다고 하며 대영박물관에 주장하게 됩니다)
이 사본이 ‘시나이사본’이라고 불리우는데, 마가복음 16:9-20, 요한복음 7:58-8:11을 제외한 신약성경 전체와 일부 구약 외경과 구약의 절반 이상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티센도르프는 이것을 갖고 와서 러시아 황제에게 선물하였고, 그 대가로 성캐더린 수도원은 러시아 황제로부터 훈장과 약간의 돈을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훗날 러시아는 혁명 후 재정이 궁핍하여지자 돈이 필요하였고 성경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이것을 영국에 팔기로 작정하였고, 영국정부는 1933년 크리스마스 전날에 러시아로부터 십만루블(US$ 500,000)에 그 사본을 사들여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 |
||
| ▲ codex alexandrinus | ||
4) 중립 본문에 입각한 성경 발간의 필요성
이 시나이 사본은 많은 성경학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는데, 앞서 언급한 바티칸 사본(B사본)과 매우 유사한 내용을 갖고 있으며, 그 뒤에 발견된 알렉산드리아 사본(A사본, 대영박물관 보관)과 에브라임 사본(C사본, 파리국립박물관 보관)등과 함께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사본’ 혹은 ‘중립사본’이라고 불리워지는데, 이러한 사본들과 킹제임스성경에 차이점이 발견됨에 따라, 다른 성경번역본을 발간하여야 할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헬라어 성경사본은 우리가 지금 보는 개역성경과 NIV 영어성경의 근본이 되며, 그 신약성경의 본문비평은 성경학자인 티센도르프, 웨스트코트, 호르트등이 이루어 놓은 작업으로, 그 외에도 많은 자료들을 총괄하여 검토한 결과, 알렉산드리아계열의 본문이 가장 원문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이집트 땅속에서 파피루스 더미가 발견되었는데, 체스터비티 파피루스(P)라고 불리는 신약의 많은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연대는 놀랍게도 AD 200년대로 보며, AD 125년경으로 추정되는 라일란드 파피루스는 비록 작지만 신약본문에 대한 아주 가치있는 증거자료가 됩니다. 이것도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본문과 일치하며, 보드머 파피루스라고 불리는 요한복음 본문들도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본문을 증거하여 주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본들의 발견이 킹제임스외에 또 다른 성경의 발간을 필요로 하였던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과 이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사본들이 차이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본문비평의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최근에 발견된 사본들로부터 원문에 더욱 접근하려는 본문비평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만일 최근에 발견된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사본보다 다 연대가 오래 되고, 더 보존상태가 좋으며, 더 많은 중립적인 성경사본들과 증거자료들이 발견된다면, 당연히 또 다른 성경의 발간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경원본이 있다고 할지라도, 지금의 번역 성경과 거의 차이점이 많지는 않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1881년 본문비평작업에 직접 참여한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비교적 사소한 것들을 제쳐 둔다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여전히 의심을 받고 있는 표현들은 전체 신약성경의 0.1%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레어드 해리스, 성경이란 무엇인가, 84쪽)
그러나 세계 최고의 신약성경사본을 티센도로프에게 빌려주었다가 그만 빼앗긴 성캐더린수도원은 얼마나 억울하였을까요?
그런데 그 후 1975년 9월, 수도원 측은 보수공사를 하기 위하여 한쪽 벽을 허물고 공사를 하던 중에, 벽과 벽 사이의 작은 틈에서 거의 완전하게 보존된 성경을 무려 수십 상자를 발견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수도원 측은 이것을 외부세계에 극비로써 엄격히 통제하였으나, 1977년 독일의 한 신문이 이 사건을 알게 되어 기사화한 후로부터 외부로 알려졌으며, 그로부터 수도원측은 이 성경사본들을 철저히 경계하며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5) 구약성경의 사본
신약성경에 비하여 연대가 오래된 구약성경의 사본은 사실 보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필사할 때에 거의 실수나 오류가 없도록 극도의 주의를 기울이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기에, 필사본에 의한 오류가 극히 적다는 것입니다.
신약과 달리, 이 구약성경사본을 필경하는 전문 필경사가 있었다는 것도 오류가 적다는 이유를 입증하여 줍니다. 성경필경사는 성경을 필사하고 있는 도중에 왕이 들어와도 그것을 중단하지 않았다고 전하여 집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약성경 자체가 곧 거룩한 유일신 여호와의 말씀이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였으며 낡아지고 파괴되어진 성경은 그 자체가 모독적이었으므로, 그들은 그 성경을 필사하였을 때에 낡고 상한 성경을 폐기처분시켜 나갔기에, 사본의 발견이 용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장 권위가 있는 구약의 맛소라사본이 AD 10세기 이전의 것이 단지 몇 편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권위를 갖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에 있습니다. 또한 이 맛소라 사본의 완전성을 지지하여 주는 다른 이유는, 주전 3세기와 2세기 사이에 제작된 70인역과 비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70인역은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이며, 예수님과 사도들이 직접 사용한 성경이라는 점이며(기원전 250년경부터 번역되어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널리 사용되었으므로), 또 실제로 예수님과 사도들이 신약성경에서 인용한 많은 구약의 헬라어 구절은 이 70인역의 본문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구약성경사본은 10세기 이전의 것이 거의 발견되어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바티칸사본이나 시나이사본은 AD 4세기의 연대를 가지므로서, 신약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아주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일부는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구약 중간 시대에는 헬라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또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들과 유대 경전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헬라어 구약 성경의 필요가 절실하게 요청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바로 70인역(LXX)입니다.
![]() |
||
| ▲ 70인역 | ||
이것은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알렉산드리아 지역에서 번역이 되었는데, 전승에 의하면 프톨레미 필라델푸스 왕(주전 285-246)의 요구로 70인의 장로들이 번역에 참여했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또 12지파에서 6명씩의 장로들이 대표로 선택되어 72명이 모여 70일 만에 번역을 마쳤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모두 그리스어로 번역되기까지는 그 후 한 세기 이상이 걸렸다고 봅니다. 적어도 기원전 1세기까지는 구약성경의 번역이 완료되었으리라고 보며, 기독교의 전파에 큰 비중을 차지하였을 것입니다.
그 후 기독교가 칠십인역을 자기들의 성경으로 받아들이면서, 반대로 유대교에서는 칠십인역을 배척하고 자기들의 히브리어 본문 성서에 관심을 보이게 되는 일이 나타났습니다. 제 2성전 파괴 이후, 새로운 히브리어 본문이 편집되면서, 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 사이의 차이점들이 점점 많이 나타나게 되자, 헬라어로 구약을 읽던 이들 쪽에서는 최신 히브리어 본문을 대본으로 하는 새로운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 |
||
| ▲ 오리겐의 헥사플라 | ||
6) 오리겐의 헥사플라(Hexapla)
오리겐은 주후 2세기에 태어났으며, 그는 젊어서부터 히브리어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오리겐은 히브리어 성서를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칠십인역에 히브리어 표준 성서와 다른 점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에 올바른 성서 문서와 그 원래의 뜻을 확인시켜 주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결과로 생긴 것이 헥사플라입니다.
기원후 230-240년 경에 가이사랴에서 활동을 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겐(Origen)이 ‘여섯 본문 대조 성서’를 편집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헥사플라’(Hexapla)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즉 (1) 히브리어 본문 (2) 히브리어 본문의 헬라어 음역 (3) 아퀼라역 (4) 심마쿠스역 (5) 칠십인역 (6) 테오도션의 개정역 등 그당시 사용되었던 여섯가지 성경역본을 서로 대조하고 비교한 것을 말합니다.
오리겐은 이 여섯권의 성경을 서로 평행으로 편집하여 동시에 비교해 볼 수 있게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오리겐의 주요 관심은 다섯째 난의 칠십인역이었습니다. 그는 칠십인역 본문을 히브리어 본문과 비교하여,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는데 칠십인역에만 있는 첨가된 본문에는 앞과 뒤에 의구 표식을 달았고, 히브리어 본문에는 있는데 칠십인역에 그 본문이 번역되어 있지 않는 곳에서는, 다른 그리스어 번역에서 그 부분을 가져와서 칠십인역에 삽입시키고 앞뒤에 의구 표식을 붙여 놓았습니다.
이러한 시도 자체가 성경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한 믿음의 선배들의 노력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역사적 문헌의 기록으로 보면, 아쉽게도 헥사플라의 원본은 600년 경까지는 존속되었던 것 같으나, 오늘날에는 단편만 남아 있습니다. 만약 그 헥사플라가 지금 발견된다면 그 가치는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헥사플라는 주후 240년에서 245년경에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헥사플라의 칠십인역은 주후 300년 경 팜필루스(주후 310년에 순교)와 가이사랴 감독 유세비우스(주후 338년 사망)에 의하여 가이사랴에서 필사되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바티칸사본과 시내사본은 이 유세비우스가 필사한 칠십인역 100권 중에 하나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 |
||
| ▲ 쿰란동굴 | ||
7) 사해사본
1947년 3월, 모하메드 아디브란 아랍의 양치기 소년이 여리고 남쪽 사해서편에서 잃어버린 염소를 찾다가 여태껏 발견되지 않았던 수직동굴을 발견하게 되고, 혹시 그 구멍에 염소가 빠지지 않았는가 생각이 들어 돌을 던져보게 되는데 항아리가 깨지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호기심이 들어서 그 동굴 입구를 찾게되고, 그곳에서 고대 히브리어가 기록된 몇 개의 가죽 두루마기를 찾게 됩니다. 그 양치기 소년은 몇푼의 돈을 받고 그 가죽 두루마리를 한 아랍의 골동품 상인에게 팔았고, 1947년 11월23일, 아랍상인은 그것을 귀한 가치의 성경사본임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팔기 위하여 성경학자를 찾던 중, 히브리대학의 수케닉이라는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그와 접촉하게 됩니다.
그 당시는 전쟁이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수케닉교수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그 아랍상인을 만나서 그 두루마기를 흥정하게 되며, 그 두루마리를 구입한 후에, 수케닉교수는 훗날 누군가에게 4개의 두루마기가 더 있다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그 후에 그 4개의 두루마리가 시리아정교회의 사무엘 대주교에게 전하여지고, 그에 의하여 수백만 달러를 홋가하며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지만 너무 비싼 가격으로 소문만 무성하게 됩니다.
수케닉교수는 1953년 죽고, 마침 수케닉교수의 아들, 야딘이 아버지의 뒤를 받아 고고학자가 되어 1954년 미국에 건너가게 되었다가, 아버지의 염원이며 꿈이었던 그 4개의 두루마리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것을 25만 달러에 흥정하여 구입을 눈앞에 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거액의 돈이 없었던 그는 이스라엘 정부에 급히 전보를 치게 되며, 이스라엘 수상으로부터 “이스라엘 정부에서 지불을 보증할 것”이라는 전보문을 받음으로, 마침내 그것을 구입하게 됩니다. 야딘이 구입한 이 사본들은 현재 사해사본 박물관의 ‘책의 전당’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수케닉과 그의 아들 야딘의 성경에 대한 성경말씀에 대한 열정과 집착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감히 본 받을만 합니다.
그로부터 학자들은 1956년까지 11개의 동굴을 정밀하게 탐사하여 수천 개의 필사본 단편을 포함하여 대략 600부의 성경필사본을 발견하게 되며, 구약성경사에 한 획을 긋는 엄청난 발견이 시작되어 집니다. 그 동굴은 유대인의 한 종파인 엣세네파의 도서실로 판명되어지는데, 그들은 서기전 1세기부터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던 소위 종말론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결국 AD68년 로마에게 멸망 당하는데, 이들은 로마가 쳐들어오자 대대로 보관하던 구약성경과 문헌들을 질그릇항아리에 넣어 동굴 속에 감추어 놓은 것입니다.
![]() |
||
| ▲ Manuscript found at Qumran byThe DeadSea | ||
현재 히브리어 구약성경 사본은 서기 10세기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인데, 이 사해사본은 구약의 역사를 약 1천년을 앞당긴 희대의 발견이 된 것입니다. 이 사해사본에는 BC 4세기경의 것으로 보이는 사무엘서 단편도 발견되어지며, 주후 1세기의 연대의 것입니다.
이 사해문서가 발견된 직후, 많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학자들은 현재의 성경이 ‘혹시 조작되고 변질될 수도 있는 가능성’ 때문에 상당히 두려운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사해문서의 조사에 참여한 아셔라는 학자는 “제1동굴에서 찾은 이사야서는 지금의 성경과 95%가 동일하며 그 5%의 다른 점도 대부분 약 일천 년간에 걸쳐 변화되어진 철자법의 차이로 야기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밀러 부로우스는 그의 저서 ‘사해두루마리(The Dead Sea Scrolls)’에서 “거의 일천년이나 되는 기간에서 변경된 것이라고는 거의 미미할 정도”라고 감탄하고 있습니다.
많은 안티기독교와 이단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성경이 조작되었고 편집되었다고 주장을 하여 왔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존되어 왔던 것입니다.
8) 유기적 영감에 의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당연히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의 영감(Inspiration)에 대한 정의는 “선택된 사람들을 감동시켜 하나님의 말씀을 오류없이 각자의 언어적 표현으로 기록하도록 하신 성령의 역사”를 뜻합니다.
하지(Hodge)라는 학자는 “계시의 목적과 전달은 지식의 전달에 있다. 영감의 목적과 의도는 가르침에 있어서 무오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느 학자는 “성경의 저작권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은 축자영감설을 따르고 있었지만, 지금의 가톨릭은 오히려 자유주의에 가깝습니다. 또 합리주의가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때에, 어떤 학자들은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기도 하였고, 어느 학자들은 부분적인 영감설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간혹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성경의 영감에 대한 주장을 ‘축자영감설’(하나님의 말씀을 선경기자가 그대로 받아쓰기 했다는 설)로 착각하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자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것은, 기록자의 인성이나 문체, 나름대로의 습관, 판단을 갖고 기록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때로는 어떤 문헌과 전승을 조사하고 탐구하기도 하며, 자료와 문헌을 참고하고 인용하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두 포괄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성경기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과정에서 ‘영감(Inspiration)의 감동’이라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지만, 하나님이 직접 불러 주신 것을 그대로 받아쓰기로 기록하게 하였다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위적인 점이 50%, 하나님의 것이 50%라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러한 것은 더욱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수많은 오류가 발견되어질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성경기자들을 도구로서 이용하시되, 인간의 요소를 전혀 배제한 것이 아니라, 그들 성경기자들의 완전하고 독자적인 영감 그대로 사용하면서, 성령께서 감동과 조명으로 역사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유기적영감설(Organic Inspiration)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모두 기록한 사람들과 시간적, 환경적, 사건적인 상황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성경은 오직 한 가지 주제, ‘하나님의 구속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서로 다른 성경의 기자들이 똑같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1)
본문에서 ‘성령의 감동하심’은 “Moved by Holy Spirit (KJV) / Carried along by Holy Spirit (NIV)”라고 번역되며, 마치 물 위에 떠있는 배가 물에 따라 함께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희 교회는 예배시간에 인도자가 성경봉독을 한 후에 항상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며, 성도들은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필자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혹시 성경이 인간의 기록이라고 생각되거나, 인위적인 편집이라고 생각되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교회나 공공 장소에서 자신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자랑하거나 선전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주장은 자신의 눈에는 당당함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장성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눈과 귀에는 그러한 주장이 모두 미성숙한 불신앙으로 인식될 뿐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무수히 많은 성경 사본
1. 성경의 보존
성경이 어떻게 쓰여졌고, 어떻게 필사되었거나 번역되었으며 보존되었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역사를 알아야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려는 무신론자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고, 바른 성경 번역본을 통해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으로 이끄는 성경말씀을 보존하려고 했고, 사탄을 이를 변개시키려고 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께서 아시느니라, 하니 (킹제임스 흠정역 창3:4~5)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는데, 뱀(사탄)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켜서서 타락시켰습니다.
또한 사탄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신과 같이 된다고 거짓말까지 해 죄의 근원인 교만한 마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여기서 사탄은 인간이 구원 받지 못하도록 하나님 말씀을 변개하거나 삭제하거나 첨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까지 서양 기독교에서는 1611년 영국 킹제임스 왕의 명령에 의해 영문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KJV)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54명의 명망 있는 학자에 의해 원문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은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고, 수 많은 신학자가 그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에 '권위를 부여 받은 성경'이라는 의미에서 '권위역 성경'이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NIV나 NASB 같은 많은 다른 번역판이 나오고 서로 자신이 가장 정확한 성경이라고 선전해 우리에게 혼돈을 줍니다.
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개역성경이 널리 읽혀지고 있지만, 뜻이 모호한 경우가 많고, 있는 구절을 삭제한'없음'이란 구절이 103개나 되 정확한 이해를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은 필사본 중 99%나 되는 '다수 본문'(표준 원문)을 번역한데 비해 NIV나 NASB나 개역한글 성경 등은 필사본 중 1%밖에 안되는 '소수 본문'(천주교의 바티칸 사본이나 시내 사본)을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과 다른 성경의 가장 큰 차이는 번역한 원문이 틀리다는 점입니다.
루터나 칼빈 같은 종교 개혁자들은 '표준 원문'을 사용하였습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단련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이 말씀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킹제임스 흠정역 시12:6~7)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도가니에서 일곱 번 단련한 순수한 은 같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시고 영원히 보존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두 주류 중 어느 것이 하나님이 보존하신 말씀인지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 판단 기준은 얼마나 정확하게 번역되었고, 삭제나 변개가 없었으며, 번역한 사람이 바른 신앙을 가졌는지입니다.
물론 숫자가 많다고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므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성경 원문은 모두 소실되고 필사본만 남아 있는데 크게 두가지로 나뉩니다.
표준원문은 터키 지역의 안디옥 교회에서 필사된 것이고, 소수본문은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필사되었습니다.두 도시의 특징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안디옥
안디옥은 B.C. 300년에 셀레쿠스 1세가 셀레쿠스 왕조의 수도로 세운 곳입니다.
안디옥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까지, 아라비아에서 소아시아까지 고대 무역 항로의 십자로에 세워졌기 때문에 복음을 전파하기 매우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게다가 안디옥은 오론테스 강에 인접한 항구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안디옥은 로마로부터 박해 받는 기독교인의 피난처 역할을 하였고, 가장 먼저 부흥이 된 곳입니다.
안디옥은 신약시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파했던 곳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사도 바울의 이방인 전도 기지였으며, 처음으로 그리스도인(크리스쳔)이란 명칭을 쓴 곳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자와 싸웠고, 예루살렘 공회에서 이에 대해 승리를 관철했습니다.
사도행전 11장부터는 선교의 중심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으로 옮겨졌으며, 하나님은 바울, 바나바, 실라, 마가 등 안디옥에 정착한 사람만 사용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안디옥은 신약 선교의 중심지였으며, 선교를 위해 필연적으로 성경 원문을 많이 필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북부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이집트에서 카이로 다음으로 큰 도시입니다.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에서 이집트 지역을 통치하기 위한 도시였고, 신 플라톤 철학 등 학문이 발달한 곳입니다.
이집트는 성경에서 주로 사탄의 왕국으로 묘사되었고, 바울도 이집트에 직접적으로 선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유대인 필로가 플라톤 철학과 구약성경을 접목시킨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이단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A.D. 180년경 팬태누스라는 사람이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에 교리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A.D. 190년에는 클레멘트가 교리 학교를 인수했고, 그는 성경을 철학적, 비유적으로 해석했고, 문자가 주는 의미보다는 이면에 숨겨진 신비한 의미를 찾기 위해 힘을 기울였습니다.이들의 사상을 이어 받아 성경을 변개시킨 신학자 오리겐(A.D. 185~254)이 등장하는데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2. 성경 필사본
성경 원문인 '자필 원본'은 너무 낡아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성경을 필사한 사본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는 '자필 원본' 그 자체보다는 정확히 보존된 말씀에 더 가치를 두었습니다.성경 필사본은 크게 복사본과 번역본의 두 그룹으로 나뉩니다.
a) 복사본
1.) 초서체 사본
이 사본은 현재 남아 있는 고대 사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알파벳의 소문자와 비슷한 그리스어의 '초서체 문자'(Miniscules, 미니스큘)로 기록되었습니다.
주로 비싸지 않은 재질인 파피루스(Papyrus)에 기록되었고, 서로 꿰매어 두루마기 형태로 보관하였습니다.
일부 문서는 동물 가죽으로 만든 값 비싼 벨룸(Vellum)에 기록되었는데, 벨룸은 보다 내구성이 좋았습니다.초기 사본에는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빈 공간이 없이 기록하였습니다.처음에는 단어 사이의 간격을 띄지 않고 붙혔지만, 후기에 읽기 쉽도록 단어 사이를 띄었습니다.또한 A.D. 125년부터 두루마기 형태가 아닌 책의 형태로 만들어진 코덱스(Codex)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초서체 사본 중 신구약 전체를 담고 있는 사본은 없습니다.
2.) 대문자(엉셜) 사본
대문자 사본(A.D. 300~900)은 알파벳의 대문자와 비슷한 대문자(Majuscules, 마주스큘) 또는 엉셜(Uncials)로 기록되었고, 글자 사이의 간격이 없습니다.
대문자 사본은 초서체 사본보다 그 수가 훨씬 적고, 4세기 이후에 나타납니다.
현재 남아 있는 5200여개의 필사본 중 3000개가 그리스어 필사본입니다.
b) 번역본
신약 성경의 원본과 사본은 주로 당시 공용어였던 그리스어로 쓰여졌지만, 다른 나라 사람에게 전파하기 위해 외국어로 번역된 번역본(Versions)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시리아어 번역본인 '페시토'(Peshitto)는 A.D. 150년에 그리스어로부터 번역되었고, 라틴어 번역본인 '구 라틴 벌게이트'(Old Latin Vulgate)는 A.D. 157년에 번역되었습니다.
3. 바른 사본과 변개된 사본
성경 필사본은 크게 '다수 본문'(Majority Text)과 '소수 본문'(Minority Text)으로 나뉩니다.
a) 바른 사본 (다수 본문)
'표준 원문'이라고도 불리는 '다수 본문'은 현존하는 필사본 중 99%를 차지합니다.
또한 내용면에 있어서도 서로 일치하고,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를 모두 지지합니다.
'다수 본문'은 '종교개혁 본문'(Reformation Text) 또는 '전통 본문'(Traditional Text)라고도 불리웁니다.
'다수 본문' 중 백미는 킹제임스 성경의 원본이 된 '그리스어 본문'입니다.
당시 세계 표준어였던 그리스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비잔틴 본문'(Byzantine Text)라고 불리웁니다.
'다수 본문' 학자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보편적 본문'(Universal Text)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성경 이외의 역사서나 문학작품도 원문이 없는 경우 다수 사본이 원문과 같은 것으로 인정됩니다.그리스어 '다수 본문'은 안디옥에서 시작해서 유럽을 거쳐 영국에까지 퍼져 나갔습니다.이와 함께 시리아어 번역본인 '페시토'(Peshitto)와 라틴어 번역본인 '구 라틴 벌게이트'(Old Latin Vulgate)도 A.D. 150년 이래로 유럽에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현재에도 약 350개의 '페시토' 역본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구 라틴 벌게이트'는 왈도파(Waldeness), 골파(Gauls), 켈트파(Celts), 알비파(Albigeneses) 등 유럽의 성경을 중심으로 한 근본적 믿음을 지키는 교회에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벌게이트'란 단어는 라틴어의 '공통적인'(Common)이란 의미를 갖는 '벌가'(Vulgar)로부터 나왔는데 교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교인은 나중에 나온 로마 카톨릭의 역본인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는 카톨릭 신학자 제롬이 A.D. 380년에 부패한 사본으로부터 번역한 것인데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13세기에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쳔을 박해하면서 강제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유럽에서 '다수 본문'을 금서로 지정하고 불사른 다음 부패한 성경으로 유럽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b) 변개된 사본 (소수 본문)
'소수 본문'(Minority Text)은 숫자도 적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처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스도의 대속,
삼위일체, 지옥, 재림 등에 대한 구절을 삭제하거나 변개했습니다.
'소수 본문'은 1881년 웨스트 코트와 호르트의 '영국 개역 성경'이 나온 이래 출간된 모든 성경(개역 성경 포함)의 번역 원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성경대로 믿는 기독교인은 한번도 '소수 본문'을 사용한 적이 없고, 오직 로마 카톨릭만이 무력으로 '소수 본문'을 사용하였고 지지하였습니다.
'소수 본문'은 '이집트 본문'(Egyptian Text)이나 '알렉산드리아 본문'(Alexandrian Text)로도 불리웁니다.
1881년 웨스트 코트와 호르트가 '소수 본문'을 편집한 '개정 그리스어 본문'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성경의 번역 원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소수 사본'도 종류가 있는데 '엉셜 사본',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입니다.
A.D. 4~5세기에 만들어진 '엉셜 사본'은 오류로 가득차 있고, 자신들 간에도 내용이 달라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티센도르프 박사(Dr. Tischendorf)가 1859년 시내산에 있는 카톨릭의 '성 까트린 수도원'(St. Cathrine's Monastery)의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한 '시내 사본'입니다.'시내 사본'은 주후 4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오래된 것일수록 좋다'는 선입관념에 따라 정통 사본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시내 사본'은 겉 보기에도 훌륭하여 두루마기가 아닌 코덱스(책의 형태)로 되어 있고, 재질도 값 비싼 벨룸이었습니다.
이 사본은 148장으로 되어 있고, 한 면은 38cm×32cm이고, 매 면마다 48개 줄이 4개의 난으로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본은 '허니스의 목자'나 '바나바의 서신' 같은 위조 문서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국개역성경'의 편집위원을 지낸 그리스어 학자 스크리브너 박사(Dr. Scrivener)조차도 '시내 사본의 정밀 조사'에서 시내 사본에는 수정된 부분이 많아 믿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시내 사본'을 발견한 티센도르프 박사조차도 시내 사본이 무분별한 것들로 가득차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발간한 '그리스어 신약 성경 제7판'을 시내 사본에 근거해서 3500군데나 고쳐 버렸습니다.
그는 한 때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 제 7판'이 더 이상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고 했는데도 말입니다.'시내 사본'은 많은 단어가 삭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어와 문장이 2번 이상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시내 사본'의 신약성경에서는 어떤 절이 바로 앞에 있는 절과 같은 단어로 끝나기 때문에 삭제해 버린 큰 실수가 115번 이상 발견됩니다.
마지막으로 로마 바티칸 도서관에 1841년부터 소장되고 있는 '바티칸 사본'(Vaticanus)이 있습니다.
'바티칸 사본' 역시 '시내 사본'처럼 코덱스로 되어 있고, 값 비싼 벨룸에 쓰여져 있습니다.
사본의 크기는 25cm×26.3cm이고, 759쪽으로 되어 있으며, 매 쪽에는 3단으로 41행의 글이 쓰여 있습니다.
'바티칸 사본'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표시하는 많은 구절을 삭제하였습니다.
'바티칸 사본'은 창세기, 시편, 마태복음, 바울의 서신서, 계시록 등에서 자신들의 교리에 맞지 않은 많은 구절을 삭제했습니다.
특히 '바티칸 사본'은 카톨릭의 미사와 고해성사를 쓸모 없이 만드는 예수님의 대속에 관한 히브리서 9장14절과 10장10~12절을 삭제하였습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위로부터 너희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킹제임스 흠정역 히9:14)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모든 사람을 위해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 제사장마다 날마다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물들을 드리되 이것들은 결코 죄들을 제거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하여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 (킹제임스 흠정역 히10:10~12)
카톨릭의 미사 의식은 성만찬 때마다 예수님이 실제 빵과 피가 되어서 제사가 드려진다는 것으로 예수님이 단 한번의 희생으로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렸다는 성경구절과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천주교가 신자를 교회 안에 붙잡아 두고 카톨릭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위협해 돈을 벌게 해 주는 수단은 미사와 세례와 고해성사와 연옥 교리입니다.이 모든 것이 성경에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배되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을 필사적으로 '다수 본문'을 없애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변개되거나 삭제된 '소수 본문'을 보급한 것입니다.로마 카톨릭은 또한 성경에 자신들에 대해 예언된 계시록 17장의 음녀(로마 카톨릭)의 멸망 대한 구절을 삭제했고, 시편 22편의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대한 예언도 삭제했습니다.'바티칸 사본'은 자체에도 오류가 많아 같은 단어를 두 번씩 연달아 쓴 구절도 발견됩니다.
'바티칸 사본'은 주후 10세기 경 카톨릭 서기관들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티칸 사본'은 4복음서에서만 무려 1491번이나 단어나 전체 절을 삭제하였습니다.
이러한 '소수 사본'은 대부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에 의해 자행되었습니다.
4. 오리겐과 성경 부패
'소수 본문'의 원류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들어진 '국지적 본문'입니다.
가이사랴의 주교 유세비우스는 로마 콘스탄틴 황제의 명령에 따라 50개의 성경 사본을 만들었습니다.
불행이도 유세비우스는 순수한 본문이 남아 있는 안디옥으로 가지 않고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학자들이 쓴 수정판을 얻었습니다.
유세비우스가 알렉산드리아로 간 이유는 그가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겐을 열렬히 추종했기 때문입니다.
오리겐의 정식 본명은 아드만티우스 오리게네스(A.D. 185~254)으로 대부분의 신학교에서는 오리겐을 위대한 신학자요 가장 영향력 있는 성경 학자로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리겐은 실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성경을 뜯어 고친 성경 부패와 잘못된 교리의 장본인입니다.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의 부유한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 교육을 받았고, 젊은 나이에 교사로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오리겐이 17세때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193-211 A.D.)가 박해를 일으켰고, 이때에 아버지가 투옥되어 결국 순교했지만, 오리겐은 어머니의 만류로 순교하지 않고 살아 남았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난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의 교장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를 계승하여 A.D. 203년에 18세의 나이로 교리학교 교장이 되었습니다.
오리겐은 수 많은 책을 모으고 수천권의 책을 저술할 정도로 천재였고, 열정적이고 엄격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였던 암브로스의 책들을 소장했고, 신 플라톤주의를 창설한 사커스 밑에서 공부하면서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맨 땅에서 잠을 잘 정도로 금욕적인 생활을 했고, 성욕을 억제하기 위해 스스로 거세하였습니다.
오리겐은 교리학교에서 하루종일 가르쳤고 밤에는 성서를 연구하는 일로 지샜고, 수면은 최소한으로 취했습니다.
오리겐은 약 6000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중요한 책으로는 여섯개의 언어로 된 구약성서를 모아 각 구절을 대조한 유명한 '헥사플라'(Hexapla), 각종 성경주석들, '제1원리'(De Principiis:이 책은 조직신학이라 할 수 있다),
'이단 셀수스를 반박하여' 등이 있습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오리겐은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그대로 믿지 않고 비유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의 성서해석 방법은 철저히 알레고리적(풍유, 은유적)이었고 항상 현상적(physical) 해석을 너머 영적 해석에 더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는 주기도문을 읽을 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부분을 "오늘날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읽었습니다.
오리겐은 '성경이란 기록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에겐 거의 쓸모가 없다.'라고 말함으로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고, 자신이 느끼는 바가 곧 성경이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리겐은 감독에 의한 죄의 용서 즉 감독의 사죄권을 말하기도 했으며, 세례를 중요한 구원의 표지로 생각했는데,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리겐은 전통 교리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은데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기사를 부인했고, 영혼이 영원한 과거부터 존재했다고 믿었으며(영혼 선재설), 별들과 행성들도 혼을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는데, 사람이 죽으면 그의 혼은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고등 생명이나 하등 생명으로 귀속된다는 혼의 윤회를 믿었습니다.
그는 또한 사악한 자도 형벌을 받은(연옥에서의) 후에는 결국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을 믿었는데 심지어는
마귀들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리겐은 대부분의 초기 교부들이 전천년주의자(chiliasts)였던 반면 후천년설을 지지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A.D. 232년에 가이사랴에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에 버금가는 학교를 세웠고, 데시우스트라얀 황제의 박해로 인해 가이사랴에서 A.D. 254년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b) 맛소라 본문과 70인역
오리겐의 대표작인 헥사플라에 대해 알기 위해선 먼저 맛소라 본문(MT)과 70인역(LXX)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맛소라 본문(Massoretic Texts)은 주후 450년 이후 정착된 유대인 고유의 히브리어 구약성경입니다.
70인역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으로 알렉산드리아의 70명 또는 72명의 유대인 번역자(장로)가 번역했다고 해서 70인역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번역자들이 100년 이상 걸려서 번역한 것입니다.
기원전 2-3세기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디아스포라)이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히브리어로 기록된 자기들의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70인역 구약성경은 주후 450년 이후 정착된 히브리 성서인 마소라본문(Massoretic Texts; MT)에 없는 경전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개신교에서는 이를 외경(apocrypha)이라고 부릅니다.
70인역 번역자들은 언어학이나 번역이론에 대한 인식 없이 번역했기 때문에 번역 기술을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사용했다기보다는 직관적으로 번역에 임했습니다.
70인역은 문자적 번역과 의역을 병행했는데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극단적인 의역을 하였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그 의미가 불분명해질 정도로 지나치게 문자적인 번역을 고집하기도 하였습니다.
번역작업에 있어 그들은 의식적인 번역철학이나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는 않고 의미 전달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미 전달”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규정짓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그들 이전에 존재했던 사본을 이해하지 못했고, 잘못 읽기도 하였으며, 틀린 모음을 붙이거나,히브리 원본(Vorlage)의 단어들을 잘못 분할하기도 했습니다. 70인역에는 때로는 맛소라 본문보다 적은 양의 책을 포함하기도 하는데, 70인역의 예레미아서는 맛소라 본문의 예레미아서보다 1/8이 적습니다.
70인역은 카톨릭 성경에 큰 영향을 주었고, 개신교에서도 정경의 범위에서 마소라본문을, 책배열 방식으로는 70인역 구약성경을 따르고 있습니다.
b) 헥사플라와 구약성경의 변개
헥사플라(6주성경)는 여섯 개의 난에 여섯가지 언어로 구약성경 역본을 담은 책입니다.
헥사플라는 6500페이지, 50권의 매우 큰 책으로 A.D. 250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오리겐은 7명의 속기사와 7명의 필사관과 함께 일했습니다.
첫 번째 난은 히브리 본문으로 맛소라 본문과 거의 같습니다.
두 번째 난은 히브리어를 소리나는대로 그리스어로 음역한 것을 담고 있습니다.
세 번째 난은 아퀼라(기독교로 회심한 후에도 점성술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문을 당한 후 다시 유대교로 돌아감)가 A.D. 128년에 번역한 그리스어 역본을 담고 있습니다.
네 번째 난은 시마쿠스가 A.D. 200년에 번역한 그리스어 역본을 담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난은 오리겐이 주도해 만든 70인역으로 그리스어 역본입니다.
여섯 번째 난은 테오도티온이 A.D. 180년에 번역한 그리스어 역본을 담고 있습니다.
헥사플라는 A.D. 638년까지 가이사랴의 도서관에 있었으나 그 뒤 모슬렘의 침략으로 원본은 소실되었습니다.
헥사플라는 일부분만 복사되었고, 다섯 번째 난인 70인역은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에프레미 사본' 등에 남아 있습니다.
c) 성경 본문 변개에 미친 오리겐의 영향
오리겐은 '가정하여 수정하는 기법'이란 기법을 이용하여 자기 생각에 이해되지 않는 성경 구절을 마음대로
뜯어 고쳤습니다.
즉 성경을 그대로 필사하거나 번역한 것이 아니라 소설책 쓰듯이 자기 생각에 부합되게 내용을 삭제하거나
변개하였습니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 버리면 하나님께서 생명 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몫을 빼 버리시리라. (킹제임스 흠정역 계22:18~19)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를 더한다면 성경책에 기록된 모든 재앙이 임할 것이고,하나님의 말씀을 고의로 삭제하면 그는 생명책의 이름이 지워지고 모든 축복까지 뺏기게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실제로 킹 제임스 성경을 만들고 세계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던 대영제국은 중세 이후 세계를 누비며 번성하였지만 웨스트 코트와 호르트가 변개된 '영국 개역 성경'을 만든 19세기 후반 이후로는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근대에 번역된 변개된 성경은 주로 시내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에 근거하는데 두 사본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원류는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의 저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틴이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위해 가아사랴의 주교 유세비우스에게 50권의 그리스어 성경을 주문했고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은 이 50권중 2권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은 그동안 오래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권위를 인정받아 왔는데, 이는 이들 책이 당시 값 비싼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벨룸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킹 제임스 성경의 기초가 된 '다수 본문'의 수 많은 사본 중 주후 2세기 이전에 쓰여져 초대교회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페시토 역본'이나 '구 라틴 벌게이트' 또한 발견되고 있습니다.
5. 로마 카톨릭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박해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한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고 구원이 나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합니다.
믿음 이후에 따르는 죄사함이나 거듭남이나 의로운 행위조차도 믿음을 온전케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또한 바른 믿음은 오직 성경을 중심으로한 진리 말씀을 통해서만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킹제임스 흠정역 엡2:8~9)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세례, 성만찬, 각종 성사, 교황과 마리아 숭배 등으로 통해 천주교회 안에서만 구원 받는다고 가르치니 성경과 모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금서로 지정하고 불태웠으며, 성경이 자국어로 번역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하였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변조된 성경을 보급하였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카톨릭의 신학적 기반을 마련한 사람은 카톨릭의 대표적인 교부 신학자인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은 일부 신학적 업적을 이루긴 했지만, 연옥이라는 성경에 근거 없는 거짓 교리를 만들어 내었고,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했으며, 천주교의 일곱가지 성사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로마 카톨릭의 권위를 높히기 위해 하나님의 왕국이 로마 카톨릭을 통해 세상 권력과 연합해 이루어 진다는 정교일치적 사상을 가졌고, 이 세상에 천년왕국이 먼저 이루어진다는 '후천년주의'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카톨릭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어서라도 믿게 해야 한다고 했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카톨릭에서 이단으로 정죄한 이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주후 4~5세기 경에도 회개와 믿음을 구원에 요소로 여기고, 성직자 중심이 아닌 회중 중심의 교회를 이끌며,성경대로 믿는 도나티스트(Donatists)라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천주교회에서 주는 세례는 유효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들의 교회에서 성경적 방법에 따라 다시 침례를 준다
하여 '다시 침례를 주는 자들'이란 의미에서 '재 침례교도'(ana baptist)라고 불리웠습니다.도나티스트들은 카톨릭의 교회관과 교리를 거부했기 때문에 세상 권력과 손을 잡은 카톨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귀양을 가거나 순교하였습니다.
유럽에 성경이 보급되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 늘어나자 로마 카톨릭은 '제롬'이란 신학자를 통해 '소수 본문'을 라틴어로 번역해 14권의 외경을 포함한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란 변개된 성경을 내 놓았습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쳔은 수백년 동안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를 사용하지 않았고, 주로 '구 라틴 벌게이트'를 보았습니다.
고대로부터 중세 유럽은 라틴어가 세계 공용어였기 때문에 주로 라틴어가 읽혀졌고, 중세 이후 영국 독일 등의 지역 언어가 정착했을 때부터 자국어로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대로 믿었던 또 다른 그룹은 6세기부터 로마제국 동부의 알메니아 지방에서 활동한 바울파(Paulicians) 교회로 지도자는 콘스틴티누스 실바누스(Constontinus Sylvanus)였고, 바울의 서신서를 소중히 여겨 바울파로 불리웠습니다.
이들은 카톨릭의 교권을 거부했고, 침례를 시행했으며, 교회안에 인간 지도자를 두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인정했습니다.
바울파는 A.D. 845년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큰 박해를 받아 재산은 몰수 되었고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되었습니다.
그들의 성경은 불 태워졌으며, 지도자 콘스타니누스는 A.D. 690년에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이후의 지도자도 살해되었지만 남은 사람들이 유럽 각 나라로 피하여 갔고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바른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온전한 믿음을 통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왈덴스파(Waldenses)교회(A.D. 426-1686년)는 북부 이태리, 스위스, 남부독일, 프랑스지방 등에서 활동하던 교회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박해를 피하여서 알프스의 골짜기에 내려와서 붙여진 이름(골짜기의 사람들)입니다.
지도자 피터 왈도(Peter Waldo)는 동료와 함께 신약성경을 번역했고, 당시 교황이었던 알렉산더 3세에게 자신들이 번역한 성경을 인정해 줄 것을 요수하였으나 거절당했습니다.
피터 왈도는 원래 프랑스 리용 출신의 상인이었으나 카톨릭의 모순과 타락에 실망하고, 자기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준 뒤 성경을 연구하기 위한 연합체를 형성했습니다.
그들은 피드몽 골짜기에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정착했고, 당시 남부 유럽의 공통어였던 로망어(RomauntLanguage)로 번역된 성경을 읽고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17세기에 왈덴시안에 대한 박해가 있을 때 왈덴시안 교회의 목사였던 레거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고대 사본은 거짓으로 가득차다."고 기록했습니다.
왈덴시안들은 성경을 독일어와 프랑스어로도 번역했고, 신구약 성경의 많은 부분을 암송했으며, 구원 받기 위해서는 성경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는데 많은 이들이 얼어 죽거나 절벽에서 떠밀려 죽었고,동굴이 갇혀 질식사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목 매달려 죽었고, 배를 가른 채 죽었고, 익사했으며, 말에 사지가 묶여 사지가 찢어져 죽었고,매 맞아 죽거나 칼에 막아 죽었고, 개 밥이 되거나 화형을 당했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계속되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왈덴시안들은 성경을 들고 유럽으로 퍼져 나갔고,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에는 주후 14세기 경 거의 모든 사람들이 왈덴시안의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서기 1686년 로마 카토릭교회는 프랑스왕 루이 14세를 움직여 그 군대를 파견하여 알프스 골짜기의 왈덴스파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하여 그들을 알프스의 골짜기에서 추방하고 말았습니다.
A.D. 1517년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비덴부르크 성당의 문에 역사적인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못 박음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성경적 진리에 의해 로마 카톨릭의 권위는 크게 흔들렸고, 마침내 유럽의 2/3가 종교 개혁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루터의 무기는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독일어 신약성경'이었고, 이로 인해 보편적 다수 본문이 진리에 굶주린 크리스쳔에게도 돌아갔습니다.
이에 대항해 로마 카톨릭은 A.D. 1545년에 '트랜트 공회'를 구성해 종교 개혁을 비판하고, 카톨릭의 전통을 성경과 같은 권위로 만들었으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도 부정했습니다.
6. 예수회의 음모
예수회(Jesuit)는 A.D. 1534년 스페인 사람 로욜라가 조직한 단체로 교황에게 충성하고, 카톨릭을 옹호하며,개신교도를 박해하거나 음해하기 위해 만든 단체입니다.
예수회 회원이 되려면 교황의 명령에만 순종하게 되기 위해 14년동안 고난의 훈련을 겪어야만 합니다.
예수회의 우두머리는 '검은 교황'(Black Pope)으로 불리는데 현재는 오히려 교황청의 실세가 되었습니다.
예수회는 비밀 결사로 바티칸의 사복경찰 노릇을 했으며, 주로 정계나 재계, 종교계에 침투하여 영향력 있는 사람을 포섭하거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리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세 이후 약화된 교황청의 권위와 권력을 회복하고, 급기야 다시 중세시대 같이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입니다.
1572년 예수회는 프랑스 헨리 3세의 도움으로 카톨릭 신자인 마가렛 공주와 위그노(프로테스탄트) 신자인 헨리 사이의 결혼식에 모인 위그노교도들에 대한 대 학살을 감행했습니다.
예수회는 카톨릭 교도를 선동하여 위그노 지도자는 물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만명이 넘는 대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예수회는 헨리 3세도 더 이상 쓸모 없게 되자 1589년에 클레멘트 수도사를 통해 암살했습니다.
영국에서도 예수회는 카톨릭에 순응하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흠정역 성경을 발간한 제임스 왕을 살해하기 위한 '건 파우더 음모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카톨릭 교도인 포크스는 영국 의회 지하실에 잠입해 36통이나 되는 화약으로 의사당과 국왕 관저를 폭파시켜 날려 버리려다 적발되었습니다.
음모자들은 의사당 옆 건물 지하에서 일년동안 터널을 뚫어 의사당 지하에 잠입했습니다.그들은 제임스 왕을 죽이고 스페인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었습니다.음모자 8명은 모두 교수형을 당하였고, 영국 예수회의 수장이었던 헨리 가넷(Henry Garnet)도 사형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회는 카톨릭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학살이나 테러, 반란 같은 일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회의 과업은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을 부추켜 제발로 로마 카톨릭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일입니다.
개신교도가 순수한 믿음을 져 버리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순수한 킹제임스 성경을 부패한 성경으로 대체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다수 본문'이나 킹제임스 성경이 믿을 수 없거나 오류가 있다고 선전하게 해 권위를 떨어뜨려야 합니다.
그리서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해 '본문 비평'(Textual Criticism)이란 것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본문 비평은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한 듯이 느껴지지만 하나님의 보존된 말씀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평가하려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본문 비평은 이미 오래 전에 성경을 변개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서기관들이 행하던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신학교에서 성경을 제대로 알려면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고는 내용이 조작된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사전을 주어 주고, 킹제임스 성경이 잘못 번역되었다고 알려줍니다.
미국의 개정표준역성경(RSV)는 이사야 7장 14절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를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고 변개했는데, 히브리어의 '처녀'를 나타내는 단어(alma)가 '젊은 여자'를 나타낼 수도 있다는 추측 때문입니다.
예수회에게 있어서 '다수 본문'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소수 본문'의 권위를 높히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자행한 학자는 그리스바크, 웨스트코트, 호르트 등입니다.
그들은 '다수 본문'이 고의적으로 수정된 것이고, 시내사본 같은 '소수 본문' 정통 본문이라고 주장하였고, 현재 대부분의 신학교에서 이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영국 성공회를 로마 카톨릭의 수중에 넣어 변개된 성경을 만들게 한 장본인은 와이스먼 추기경(Cardinal Wiseman,1802~1865)입니다.
그는 영국의 개신교 정치인이나 종교인을 포섭해 카톨릭의 권위에 순응하게 만들었고, 결국 150명의 영국 성공회 목사와 유명한 교인들이 카톨릭 교회에 합류했습니다.
7.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소수 본문'의 권위를 높히고 영국을 배교로 이끈 가장 큰 인물은 그리스어 학자인 웨스트 코트(Brooke Foss Westcott,1825~1903)와 호르트(Frenton John Anthony Hort, 1828~1892)입니다.
웨스트 코트와 호르트는 '본문 비평'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알렉산드리아와 카톨릭의 '소수 본문'을 지지해 그리스어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호르트는 다수 본문인 '안디옥 본문'이 소수 본문인 '시내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과 연대가 비슷하다는 것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시내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이 오래됐기 때문에 정통본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호르트는 또한 '소수 본문'이 자기들끼지도 일치하지 않을 정도로 오류가 많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 본문의 엉셜체(대문자체)를 기초로 '개정 그리스어 본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믿음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자유주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호르트는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성경의 무오성을 믿지 않았습니다.
호르트는 에덴동산이 실제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을 존경하였습니다.그는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았고, 고통스러운 지옥의 존재를 부인하였으며, 천주교와 같이 연옥을 믿었습니다.
호르트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지 않았고, 로마 카톨릭의 '유아 세례'에 의해 거듭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인종차별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공산주의와 신비주의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호르트는 근본주의적인 목사의 설교를 진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비록 뛰어난 그리스어 학자일지는 몰라도 성경을 번역할 만한 자격은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번역자 웨스트 코트는 호르트보다 더 심한데 그는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믿지 않았고, 모세나 다윗이 신화적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실제적인 재림을 부인했고, 천국의 존재 또한 부정했습니다.
웨스트코트는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했고, 사회주의를 통한 후천년주의를 신봉했습니다.
웨스트 코트는 성경을 무오성을 부인했고, 로마 카톨릭의 교리에 동조했습니다.
그는 카톨릭의 연옥 교리를 믿었고, 요한 복음 14장 2절의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저택(mansion)이 많다.'를'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places)이 많다.'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에 동조했고, 카톨릭 교회에 들어찬 성상을 동경했습니다.
호르트가 '다수 본문'의 권위를 실추시킨 이론은 '다수 본문'이 주후 4세기에 안디옥에 있던 시리아 교회가 마음대로 편집한 것이고, 오히려 '소수 본문'이 정통 본문이란 주장입니다.
이런 근거가 희박한 호르트의 주장은 다윈의 진화론과 같이 온갖 추측과 억측으로 이루어져 있고,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무신론자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본문 비평'이란 것은 '다수 본문'에 흠집을 내서 킹 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지만 이들의 이론은 명확히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영국 교회는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이론을 받아 들여 킹제임스 성경을 버리고 변개된 성경을 채택했고,다시 로마 카톨릭화 했습니다.
1870년 영국 국교회 협의회는 킹제임스 성경의 개정판을 만들기로 결정했고,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는 '시내 사본'과'바티칸 사본'을 손질해서 만든 '개정 그리스어 본문'을 내 놓았습니다.
성경 개정 위원회는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개정 그리스어 본문'을 비밀리에 받아들였고, 성경 개정자들은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지침을 따랐습니다.
성경 개정 위원회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유일교도인 스미스 박사(Dr. Vance Smith)도 참여했는데 그는 예수님의 처녀 탄생이나 재림을 믿지 않았고, 자신의 사상에 맞게 성경을 개정했습니다.
이렇게 웨스트코트와 호르트가 카톨릭의 '소수 본문'의 권위를 높히고, 영국이 참된 성경을 버리고 변개된 성경을 채택해 배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카톨릭의 비밀 임무를 전담하는 예수회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8. 킹제임스 성경
성경의 원본은 소실되었지만 하나님은 섭리로 말씀을 보존하셔서 1611년 무오한 킹제임스 성경을 만드셨고,
오늘날 세계 공용어인 영문 킹제임스 성경을 접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수 많은 성경 역본이 있지만 킹제임스 성경만이 표준원문인 '다수 본문'을 가장 정확하게 번역하였고,
다른 성경은 거의 모두 변개된 '소수 본문'을 번역하였으며 수 많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굳이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공부해 원문 성경을 볼 필요도 없는데, 이는 킹제임스 성경이 뛰어난 원문 학자들에 의해 가장 잘 번역되었기 때문입니다.
카톨릭과 기독교 내 카톨릭 동조 세력은 질로 안되니까 양으로 승부했는데, RV, ASV, GNMM, LB, AB, JB, NIV,NASV 등 비슷비슷한 성경을 최신 성경이라며 대대적인 광고를 힘입어 출시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성경이 한결 같이 KJV보다 쉽고 정확하다고 하지만 결국 살펴보면 더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거나 기독교의 기본 교리도 뒷받침 하지 않는 변개되거나 삭제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변개된 성경은 예수님의 신성과 대속, 고통스런 지옥과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한 인물은 한결 같이 뛰어난 원문 학자일 뿐만 아니라 매우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반해 NIV나 RSV를 번역한 인물은 한결 같이 성경을 무오성을 믿지 않고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9. 킹제임스 성경의 제작과정
오늘날의 킹 제임스 성경은 안티오크 교회가 번역한 “올드 라틴어 성경”(The Old Latin Bible) 혹은 “원(原) 라틴
벌게이트 역본”(The Latin Vulgate)을 그대로 전수한 것으로서, 현재 부분적으로만 남아있는 구 라틴어 성경 본문은
학자들에 의해 킹 제임스 성경 본문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a) 킹 제임스 성경 번역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시대가 끝나갈 무렵(1558-1603) 새로운 성경 역본을 만들기 위한 의회의 조례안이 나오게 됩니다.
“영어로 되어 있는 성경들의 다양성을 줄여서 원문으로부터 번역된 단 하나의 영역본을 만들기 위한 조례”가 바로 그것입니다. 1568년에 나온 비숍 성경(The Bishop's Bible)이 비록 그레이트 성경(The Great Bible)을 압도하기는 했으나 제네바 성경과는 여전히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통치하던 때에는 이 조례안이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다가 1603년 튜더 왕조에서 스튜어트 왕조로 영국 왕조가 바뀌면서 제임스 1세가 37세로 왕위를 잇게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남겨 놓은 것은 집권 초기 지독히도 가난하고 무방비상태에서 45년이 지난 이후 부유하고 막강한 나라로서 광대한 제국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제임스 왕이 권력을 잡은 지 정확히 일 년이 된 후, 왕은 “교회 안에 잘못된 점들을 논의하기 위하여 햄프톤 코트 궁전으로 크고 작은 정당들로 구성된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이 때, 옥스퍼드에 소재한 Cortus Christi 대학 학장이며 청교도인 존 레이놀즈(John Reynolds) 박사가 새로운 영어 성경 역본을 만들 것을 제안했습니다.
왕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의 가장 학식 있는 학자들이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이 때 예수회 요원들이 회의장에 폭탄을 설치하여 제임스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었으나 시작 전에 발각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승인되고 1604년 2월 10일에 공포된 결의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어인 히브리어와 희랍어에 철저히 일치하는 전체 성경의 번역을 시행한다.
이 성경은 난외주 없이 제작 출판되어 영국의 모든 교회에서 예배 시에 사용될 것입니다.” 성경 번역의 다음 단계는 번역위원을 선정하는 작업이었습니다.
1604년 제임스 왕은 뱅크로프트 감독에게 편지를 써 자신이 성경의 번역을 위해 54명의 학자를 임명하였다고 알렸습니다.
이들은 당시의 최고의 성경 학자요 언어학자들이었습니다.
제임스 국왕에 따르면 다른 인물도 찾았는데 이는 “우리가 시도하는 번역이 우리 왕국 안에 있는 모든 주요한 학자들의 도움과 참여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함이라”고 했습니다.
b) 번역과정
번역은 6개 그룹으로 나누어 실시되었고,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캠브릿지, 옥스퍼드 세 곳에서 각각 모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에서는 10명의 학자가 창세기부터 열왕기하까지, 일곱 명의 학자가 로마서부터 유다서까지의 번역을 담당하였습니다.
캠브릿지에서는 8명의 학자가 역대기상에서부터 전도서까지, 그리고 일곱 명의 다른 학자는 외경을 담당했습니다.
옥스포드에서는 일곱 명이 이사야에서 말라키까지 다른 여덟 명이 사복음서, 사도행전 및 요한계시록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따라야 할 세밀한 규칙과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이들 중 일부를 예를 들면
ⓐ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읽히는 흔히 감독 성경이라 일컫는 성경을 따라야 하며 가능한 원본의 진리가 허용하는 정도에서만 변경한다.
ⓑ 대언자와 성경 저자의 이름과 본문에 나오는 다른 이름들은 가능한 대중들이 사용하는 대로 그대로 따른다.
ⓒ 틴데일, 메튜, 커버데일, 대성경, 제네바 성경 등이 감독 성경 보다 훨씬 더 원문에 일치 된 경우는 언제든지 그것들을 사용해야 한다.
드디어 이 여섯 그룹의 작업이 완전히 끝난 후에야 그 결과가 6인 위원회(번역을 맡아서 세 그룹에서 각각 2인씩)에 보내져서 최종적인 교정과 출판을 위한 준비를 하게 했습니다. 개개의 번역자들은 먼저 개인적으로 주어진 성경 한 장이나 적은 부분을 번역하여 그의 동료들에게 검토와 수정을 하도록 제출합니다.
결코 개인적인 생각에 치우침이 없이 수많은 상담자들의 집단적인 지혜를 끌어 모아 개개의 집단은 어느 책 한권의 번역이 집단적으로 완성되면 즉시 원고를 다른 5개의 집단에 차례차례로 송고합니다.
이 작업은 결코 부주의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후 최종교열은 마일스 스미스와 토마스 빌슨에 의해 완료되었고, 서문은 스미스가 작성하였습니다.
c) 번역 대본과 출판
번역 작업은 1604년에 시작하여 1611년에 끝났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성경은 이전 영어 번역판 뿐만 아니라 트레멜리우스와 베자의 라틴역, 스페인역, 프랑스역, 이태리역 판들도 포함됩니다.
원칙상으로는 킹제임스 역본은 주로 감독성경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감독성경이 “원어 성경의 진리를 조금도 변경할 수 없다”는 조건이었습니다.
만일 틴데일, 매튜, 커버데일, 대성경, 제네바 성경이 본문의 의미에 더 가까울 경우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베자의 제5판과 순수하게 보존된 올드 라틴 벌게이트가 중요한 대본이 되었습니다.
1611년 킹제임스 성경이 로버트 바커(Robert Barker Press)출판사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안티오크 이래 수많은 사본들이 있었으나 킹제임스 성경만이 유일하게 “권위를 인정받은 성경”(The Authorized Version Bible)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받았습니다.
번역자 중 한 사람인 마일즈 스미스 박사는 말하기를 “우리가 행한 개역을 우리가 경멸하지 않도록 했고 우리가 두들긴 망치질이 침골(砧骨)을 다시 들어가지 않도록 하였다. 느린 것은 꾸짖지 않았고 빠른 것은 지나치게 칭찬하지 않고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하였다. 그 결과 오늘 날 영어권의 모든 사람들이 당당히 여기는 자랑스런 권위성경이 나온 것이다.”
이후 권위역으로 알려진 이유는 교회나 국가의 어느 한 편의 공적인 행동에 기인된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의 위대한 본질적인 장점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성경은 1629년과 1638년에 두 번의 적은 부분의 오탈자가 수정되었습니다.
1653년의 의회는 또 다른 개정 요구안을 제기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킹제임스성경>은 초판에서는 그레이트 성경 (Great Bible)보다도 그 크기가 더 컸습니다.
검은 활자로 인쇄된 이 성경은 원어에 없는 낱말들은 작은 이탤릭체로 된 로마 타입 활자로 표시했습니다.
번역자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가 더욱더 알려지도록 하는데 쓰임받은 부족한 도구에 불과할 뿐”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이들은 “교황의 추종자들”(Popish persons)이 사람들을 “무지와 어두움” 가운데 가두어 놓으려고 한다고 분별 있게 지적하였습니다. - 창골산 봉서방 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