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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2)김창록**
목 차
Ⅰ. 머리말
Ⅱ. 신권천황제의 제도와 사상
1. 문제의 소재
2. 신권천황제의 등장
3. 신권천황제의 전개
4. 신권천황제와 강점기 한국
5. 신권천황제의 자리매김
Ⅲ. 상징천황제의 제도와 사상
1. 문제의 소재
2. 상징천황제의 등장
3. 상징천황제의 전개
4. 상징천황제와 과거청산
5. 상징천황제의 자리매김
Ⅳ. 맺음말
〔국문요약〕
이 글은, 1889년 「大日本帝國憲法」의 제정과 함께 神權天皇制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 이 논문은 1997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해외지역연구 연구비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부산대학교 법과대학 조교수:mailto:chrkim@hyowon.pusan.ac.kr.
1945년에서 1946년 사이에 연속과 전환의 과정을 거치고, 1947년 「日本國憲法」의 ‘출현’과 함
께 象徵天皇制로 모습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일본의 천황제를, 한국 연구자의 입장에
서 역사적으로 되짚어 보고 그 현재적 의미를 밝힘으로써, 일본의 특수한 군주제인 천황제에
대한 한국적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다.
I. 머리말
이 글의 목적은, 1889년 「大日本帝國憲法」의 제정과 함께 神權天皇制의 모
습으로 등장하고, 1945년에서 1946년 사이에 연속과 전환의 과정을 거치고, 1947
년 「日本國憲法」의 ‘출현’과 함께 象徵天皇制로 모습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일본의 천황제를, 한국 연구자의 입장에서 역사적으로 되짚어 보고 그 현재
적 의미를 밝힘으로써, 일본의 특수한 군주제인 천황제에 대한 한국적 이해를 도
모하는 것이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징의 하나는 천황제라고 하는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다
는 점이다. 천황제는 일본의 법 및 정치를 특징지워 온 군주제일 뿐만 아니라, 일본
의 사회와 문화까지도 규정해 온 기본적인 사회제도이며, 그 모두를 포함한 일본의
역사의 핵심에 위치해 온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천황제에 대
한 이해를 빼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1889년에 시작된 신권천황제와 1947년에 시작된 상징천황제는 근현대 일본의 핵심
으로서, 일본의 근현대사 및 현재의 일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살펴보지
않으면 안될 제도이다.
또한 이 양자는 일본이라는 지역을 우리나라와 연관지워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깊이 연구해보지 않으면 안될 제도이다. 그것은, 일본에 의한 35년간의 강점
이 천황의 이름 아래 강행된 것이며, 광복 후 일본에 대한 우리의 과거청산 요구가
지금까지 관철되지 못하게 한 결정적인 원인 또한 천황제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위와같은 문제의식 아래, 신권천황제와 상징천황제 각각의 등장과정과
전개과정을 역사적으로 되짚어 보고, 그 각각이 가지는 문제상황을 점검해 봄으로
써, 한국적 시각에서의 자리매김을 시도해 보기로 한다.1)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3
II. 신권천황제의 제도와 사상
1. 문제의 소재
「대일본제국헌법」아래에서의 천황제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그것이 제도와 실질 모두에 있어서 일본에 특유한 절대적・신권적인 군주제였다는
것2)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적으로는 절대적 권력이 보장된 군주제였지만, 실질적으
로는 천황이 상징의 존재에 머무르는 입헌군주제였다는 것3)이다.
이와같이 「대일본제국헌법」아래에서의 천황제가 제도적으로는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가가 나뉘는 것은, 천황의 전쟁책임이라는 패전후의 실제문
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천황의 책임을 인정하는 입장
을 취하는 사람들은 전자의 평가를, 그 책임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후자의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역으로 전자의 평가를 하는 사람들은 천황
의 전쟁책임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후자의 평가를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부정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중 어느 평가가 옳은 것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아래의 두 가지 작업
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 하나는, 일본 근대 천황제의 제도와 실태에 대해 보다 파
1) 천황제에 관한 기존의 연구문헌에 관해서는 赤坂憲雄他編, 天皇制・入門 , JICC出版局,
1990;齊藤憲司, 「象徵天皇制文獻・分類目錄」, ジュリスト 938, 1989.7.15 참조.
2) 이 입장을 대표하는 것으로 家永三郞, 歷史のなかの憲法 上, 東京大學出版會, 197
7;같은 이, 戰爭責任 , 岩波書店, 1985;藤原彰, 昭和天皇の十五年戰爭 , 靑木書
店, 1991 참조.
3) 이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천황 히로히토(裕仁) 자신이다. 천황 히로히토는,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결정할 수 있었으면서 왜 개전은 저지하지 못했는가라는 비판에 대해,
“헌법상 명기되어 있는 국무 각대신의 책임의 범위 내에서는, 천황이 그 의사에 따라 멋대
로 용훼, 간섭, 제지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치든 외교든, 헌법상의 책임자
가 신중하게 심의를 하여, 어떤 방책을 정해, 그것을 규정에 따라 제출하여 재가를 청한 경
우에는, 나는 그것이 뜻에 맞든 맞지 않든 좋다라며 재가하는 외에는 취할 방도가 없다”(藤
田尙德, 侍從長の回想 , 中央公論社, 1987, 206면)라는 변명을 패전 후 줄곧 관철했는
데, 바로 그 속에 ‘로보트군주’론이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고들어 살펴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일본에서의 연구 성과들은 위에서 지적
한 배경 때문에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성과
들이 매너리즘 때문에 간과하고 있는 부분에 주목함으로써, 위의 대답이 구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식민지에서의 천황제의 의미와 기능에 대해 살펴보는 것
이다. 식민지는 말하자면 대일본제국의 변경이었다. 그리고 모든 변경이 그러하듯
이, 식민지는 본국의 모순이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식민지에
서의 천황제의 모습에 주목함으로써, 그 핵심이 보다 잘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2. 신권천황제의 등장
근대 이전의 천황제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왔다. 그것은, 어떤 시대
에는 강대한 군주제로서의 모습을, 그리고 다른 시대에는 권력은 박탈된 단순한 권
위의 원천으로서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근대의 천황제가 등장하기 직전인 幕府
時代에는, 천황은 쿄오토(京都)의 구중궁궐 속에 안치된 권위의 작은 샘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4)
그러한 상황에서, 1853년의 페리(Commodore Perry)의 黑船으로 상징되는 서양세
계의 외압 아래 일본의 근대를 형성해 나가야 했던 정치세력에게, 천황제와 관련해
서는 두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었다. 하나는 천황을 일체의 권한이 집중된 강력
한 군주로서 옹립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천황을 근대적인 제도 속에 포섭하
기는 하되 막부시대와 마찬가지로 권위의 상징으로 머무르게 하는 것이었다. 전자
는 尊皇攘夷운동을 추진하여 메이지(明治)유신을 이끌어냄으로써 일본 근대의 핵
심적인 추진그룹이 된 하급무사계급 출신의 관료들에 의해 지향되었고, 후자는 公
武合體운동을 추진한 막부세력에 의해 지향되었다.5) 그런데 양 세력의 다툼은 결
국 전자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며, 그리하여 일본 근대 천황제의 형성은 강력한 군주
제를 지향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게 되었다.
4) 근대 이전의 천황제에 관해서는 石上英一他編, 講座・前近代の天皇 (全5卷), 靑木書
店, 1992―95 참조.
5) 橋川文三他編, 近代日本政治思想史 1, 有斐閣, 1971, 75~107면 참조.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5
애당초 존황양이운동의 지사로서 출발한 메이지의 관료들6)은 위와같은 자신들의
입장을 정치적 투쟁 속에서 관철하는 한편, 그것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서양으로
부터, 특히 당시의 일본과 사정이 비슷하다고 여겨진 프로이센으로부터 관련된 제도
와 사상을 적극 수용했다.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1882년 3월부터 1년 2개월
이나 독일・오스트리아・영국 등 서양의 국가들을 돌아다니며, 독일에서는 베를린
대학 교수 그나이스트(Rudolf von Gneist ; 1816―95)와 그의 제자 모쎄(Albert Mosse ;
1846―1925)로부터,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는 비인대학 교수 슈타인(Lorenz von Stein
; 1815―90)으로부터 강의를 듣는 등, ‘헌법조사’를 한 것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7)
그 이토오가 서양으로부터 배워와, 대일본제국의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가
장 먼저 내세운 것은, “君權을 機軸으로 하고, 오로지 그것을 훼손하지 않도록 하
는데 노력”8)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강력한 군주제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토오 등은 천황제를 단순한 군주제로서만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이토오
에 따르면, 오랜 역사적 경험에 입각한 헌법정치를 시행하고 있는 서양에서는 인민
이 그 제도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종교가 기축이 되어 인심에 침윤하고 인심 또한
이에 귀일하지만, 일본에서는 “종교의 힘이 미약하여, 하나도 국가의 기축이 될만
한 것이 없(고)・・・기축으로 삼을 만한 것은 오직 황실이 있을 뿐”9)이었다. 즉 이
토오는 무엇보다도 서양 국가들의 크리스트교에 대신할 만한 국민의 정신적인 통
합기능을 일본이라는 국가의 기축으로서의 천황에게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
하여 천황은 절대적인 권력의 실체임과 동시에 신화에 토대를 둔 종교적・윤리
적・정신적인 절대 권위까지 체현한 ‘살아있는 신(現人神)’이라는 모습으로 확립되
게 된 것이다.10)
6) 松本三之介, 「尊攘運動における近代的政治意識の形成」, 天皇制國家と政治思想 ,
未來社, 1969, 65~67면 참조.
7) 이에 관해서는 淸水伸, 明治憲法制定史 (上), 原書房, 1971, 25~105면;稻田正次,
明治憲法成立史 (上), 有斐閣, 1960, 568~597면 참조.
8) 淸水伸, 明治憲法制定史 (下), 原書房, 1973, 105면.
9) 淸水伸(註8), 103~105면.
10) 바로 이 점이 「대일본제국헌법」의 제정과정에 많은 영향을 미친 독일인 법률고문 헤르만
뢰슬러(Hermann Roesler;1834―94)를 당혹하게 한 것이었다. 법률가인 뢰슬러에게는 “萬
世一系의 天皇이라고 하는……막연한 문자를 헌법의 첫머리에 규정함으로써 세상의 논
이렇게 해서 제정된 「대일본제국헌법」11)은, 우선 전문에 해당하는 上諭에서
“짐은, 祖宗의 遺烈을 이어받아 萬世一系의 帝位에 올라”라고 하여, “만세일계의
천황”이 헌법을 제정했음을 선언하고, “제1장 천황”의 제1조에서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라고 하여 특수 일본적 가치로서의 천황의 지배를 기
본원리로 내걸고, 제3조에서는 “천황은 신성하여 범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여 천황
의 신성불가침을 규정하고, 제4조에서는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
며 이 헌법의 조규에 따라 이를 행한다”라고 하여 국가의 원수 겸 통치권의 총람자
로서의 천황의 지위를 명확하게 하고, 제5조에서 제16조에 걸쳐서는, 제국의회의
협찬에 의한 입법권을 비롯하여, 법률의 재가・집행・공포, 제국의회의 소집・개
회・폐회・정회 및 중의원의 해산, 긴급칙령의 발포, 육해군의 통수, 선전・강화・
조약체결 등 광범위한 천황의 대권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권력과 권위의 통합체로서
의 천황을 제도화했다.
그리고, 천황이 이와같은 절대적인 존재로서 자리매김됨으로써, 나머지 국가기
구와 인민은 절대적인 복종을 해야 하는 존재로서 자리매김되었다. 즉 제국의회는
천황의 입법과 예산 의정에 관해 “협찬”하는 기관에 불과했으며(제5, 27, 38, 62, 64
조), 국무대신은 천황을 “보필”하는 기관에 불과했으며(제55조), 재판소도 “천황의
이름”으로 재판을 하는 기관이었으며(제57조), 나아가 인민은 천황이 정하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만 권리를 누리는 “신민”으로 자리매김되었던 것이다(제2장).
3. 신권천황제의 전개
「대일본제국헌법」에 의해 일단 형성된 근대 천황제는 이후의 역사 속에서 확립
과 변형과 재편성의 과정을 걷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한편으로는 무쯔히토(睦
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결코 得策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稻田正次, 明治憲法成立史 (下), 有斐閣, 1962, 248면.
11) 원문 및 영역문은 阿部照哉他編, 憲法資料集 , 有信堂, 1966, 429~440면 참조. 국역문
은 金昌祿, 「日本에서의 西洋憲法思想의 受容에 관한 硏究」(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4.8.의 부록 1 참조.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7
仁;明治天皇), 요시히토(嘉仁;大正天皇), 히로히토(裕仁:昭和天皇)로 이어
지는 천황의 교체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뒤이은 일본 자
본주의의 형성,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한 그 비약적 발전, 세계대공황을 전후한
그 위기로 이어지는 경제적 및 정치적 세대교체에 의해 규정되었다.
먼저 천황에 주목하면, 천황 무쯔히토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이끈 ‘대원수’라
고 하는 강력한 이미지에 의해 일본의 인민에게 각인된 존재였다. 뿐만 아니라, 일
본의 근대 국가의 수립자라고 하는 강력한 이미지가 또한 그의 권력과 권위를 뒷받
침했다.12) 그리하여 그의 존재는 번벌정부에 의한 의회권력의 압도라고 하는 정치
적 실재를 낳았다. 그에 대해 천황 요시히토는 뇌질환 등 거듭되는 질병으로 국가
원수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없는 존재였다.13) 그리하여 그것이 ‘타이쇼오(大正) 데
모크라시’라고 하는 상대적으로 의회의 권한이 강대한 시기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천황 히로히토의 등장은 천황제를 재확립하는 하나의 계기
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요시히토와는 달리, 나름대로의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히로
히토14)는 확산된 ‘데모크라시’의 공간 속에서 입지가 좁아진 세력의 새로운 중심으
로 등장했으며, 결국 그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신권천황제의
새로운 번성을 구가하게 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경제적 및 정치적 측면에 주목하면, 「대일본제국헌법」의 제정으로 체
제를 정비한 제국주의 국가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등 대외전쟁에서의 승리
를 통해 얻어 낸 배상금과 할양받은 영토, 그리고 대한제국 등의 식민지화를 토대
12) 천황 무쯔히토에 관해서는 明治天皇 (別冊歷史讀本1990年4月號), 新人物往來社,
1990.4.;遠山茂樹, 明治維新と天皇 , 岩波書店, 1991;飛鳥井雅道, 明治大帝 ,
ちくま學藝文庫, 1994;岩井忠雄, 明治天皇 , 三省堂, 1997 참조.
13) 천황 요시히토에 관해서는 朝日新聞社出版局年鑑事典編集部編, 明治・大正・昭和
天皇の世紀1900―1945 , 朝日新聞社, 1996 참조.
14) 천황 히로히토에 관해서는 激動の中の天皇像 (別冊歷史讀本79號), 新人物往來社,
1988.12.; 昭和天皇 (別冊歷史讀本1990年5月號), 新人物往來社, 1990.5.;色川大吉, 昭和史と天皇 , 岩波書店, 1991;山本七平, 昭和天皇の硏究 , 祥傳社, 1995;升
味準之輔, 昭和天皇とその時代 , 山川出版社, 1998;眞崎秀樹談/讀賣新聞社編,
昭和天皇の思い出 , 中央公論新社, 1999;小堀桂一郞, 昭和天皇 , PHP硏究所,
1999;尾崎勝敏, 人間․昭和天皇裕仁 , 原書房, 1999 참조.
로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루어 제국주의국가로 성장했다. 그런데 그 성장은
위로부터 강력하게 추진된 ‘식산흥업’정책의 결과였다. 무쯔히토 지배기의 강력한
군주권은 그러한 경제적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15) 다음으로,
제국주의국가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의 특수경기를 계기로 다시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달성하여, 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독점자본주의 단계에까지 도달했다. 그런
데 이러한 자본주의의 일정한 발전은 부르죠아지의 성장을 유발하지 않을 수 없었
고, 힘을 키운 부르죠아지는 보다 많은 권리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것이 표면화된
것이 두 차례에 걸친 ‘헌정옹호운동’이었으며, 그 결과 ‘정당내각’이 출현하여, 이른
바 ‘타이쇼오 데모크라시’의 시대가 전개되었다.16) 요시히토 지배기의 신권천황제
의 약화는 그러한 시대의 요청에 따른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차
례에 걸친 ‘헌정옹호운동’은 결국 ‘부르죠아정당의 지도권 획득을 위한 반항운동’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었다. 1925년 護憲三派내각의 주도 아래 남자
보통선거를 인정한 「중의원선거법」이, ‘국체의 변혁’과 ‘사유재산제도의 부인’을
엄벌하기 위한 「치안유지법」과 함께 의회를 통과한 것은 그 전형적인 표현이었
다.17) 나아가 일본의 정당정치는 부르죠아지의 정치로서도 한정된 의미만을 가지
는 것이었다. 바로 그 ‘정당정치’의 핵심인 정당들이 뒤를 이은 군부 중심의 위로부
터의 파시즘의 전개과정에서 앞장 서 투항해 버리는 ‘비정당정치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그 전형적인 표현이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후반에 밀어닥친 일본 내부의 공
황과 1929년에 시작된 세계대공황의 충격 속에 일본제국주의는 ‘자연스럽게’ 군국
주의파시즘으로 내달려 갔다. 일본정부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거듭되는 일제검거,
사형과 무기형을 추가한 「치안유지법」의 개악과 특별고등경찰제의 신설 등18)을
통해, 노동쟁의는 물론 사상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정치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해
갔다. 그리고 그러한 탄압은 ‘신민의 권리’조차도 칙령에 백지위임한 1938년의 「국
15) 宮地正人, 國際政治下の近代日本 (日本通史3, 近現代), 山川出版社, 1987 참조.
16) 三谷太一郞, 大正デモクラシ―論 , 中央公論社, 1974;坂野潤治, 大正政變 , ミ
ネルヴァ書房, 1982;松尾尊兌, 大正デモクラシ―の群像 , 岩波書店, 1990;太
田雅夫, 大正デモクラシ―硏究―知識人の思想と運動 , 新泉社, 1990 참조.
17) 奧平康弘, 治安維持法小史 , 筑摩書房, 1977 참조.
18) 松尾洋, 治安維持法と特高警察 , 敎育社, 1996 참조.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9
가총동원법」의 성립 이후에는 그 극단을 향해 치달았다. 나아가 그러한 토대 위에
서 군부가 전면에 등장했으며, 전면에 나선 군부는 1931년의 만주침략을 기점으로
고립주의와 침략정책을 관철하여, 1933년의 국제연맹 탈퇴, 1937년의 중일전쟁 그
리고 1941년의 하와이 기습으로 파국의 길을 치달아갔다.19) 히로히토 지배기의 신
권천황제의 재강화는 바로 그러한 경제적 및 정치적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기 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근대 천황제는 천황 개인의 퍼스넬리티와 경제적 및 정치적 상황과 연
계를 맺으면서, 시기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어 갔다.20) 그리고 그 변화를 잘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 헌법사상의 변화이다.
근대 일본의 헌법사상은 크게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흔히 군권주의
헌법사상과 ‘입헌주의’ 헌법사상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전자는 호즈미 야쯔
카와(穗積八束)와 우에스기 싱키찌(上杉愼吉)에 의해 대표되는 것으로서, 천황에
관한 헌법규정을 절대시하고, 여타의 헌법규정을 거의 의미없는 것으로 자리매김함
으로써, 절대적 천황제 나아가 신권천황제를 주창한 사상이었다. 그리고 후자는 미
노베 타쯔키찌(美濃部達吉)와 사사키 소오이찌(佐佐木惣一)에 의해 대표되는 것
으로서, 천황에 관한 헌법규정을 가능한 한 제약적으로 해석하고, 제국의회 및 신민
의 권리에 관한 규정을 가능한 한 확대해석하여, 「대일본제국헌법」의 틀 내에서나
마, 최대한의 입헌주의를 확보하고자 한 사상이었다.21)
이 중, 군권주의 헌법사상은 일본제국주의 성립기, 즉 무쯔히토의 지배기에 지배
적이었던 헌법사상으로서, 이후 「敎育勅語」22)를 중심으로 한 국민교육과 「軍人
19) 久田榮井, 帝國憲法崩壞史 , 法律文化社, 1970;東京大學社會科學硏究所編, 戰時
日本の法體制 , 東京大學出版會, 1979;渡邊洋三, 法と社會の昭和史 , 岩波書店,
1988 참조.
20) 신권천황제의 정치사적 분석으로는, 또한 江口圭一, 日本帝國主義史硏究 , 靑木書店,
1998;須崎愼一, 日本ファシズムとその時代 , 大月書店, 1998;安田浩, 天皇の
政治史 , 靑木書店, 1998;岩井忠熊, 近代天皇制のイデオロギー , 新日本出版社,
1998;增田知子, 天皇制と國家 , 靑木書店, 1999 참조.
21) 이들 헌법사상에 관해서는 金昌祿(註11), 제3・4장 참조.
22) 吉田熊次, 敎育勅語釋義 , 弘道館, 1930;海後宗臣, 敎育勅語成立史の硏究 , 原
德社, 1965;稻田正次, 敎育勅語成立史の硏究 , 講談社, 1971;片山淸一編, 資
勅諭」23)를 중심으로 한 군부교육의 기본으로서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
헌법사상의 기저를 형성했다. 그에 대해 ‘입헌주의’ 헌법사상은 ‘타이쇼오 데모크라
시’기, 즉 요시히토 지배기에 지배적이었던 헌법사상으로서 그 시기의 이른바 ‘정당
정치’의 이론적 배경을 형성한 것이었다. 즉 무쯔히토의 지배기에는 군권주의 헌법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데 대해,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 풍조가 활발했던 요시히토의
지배기에는 ‘입헌주의’ 헌법사상이 영향력을 키워갔던 것이다. 하지만, ‘입헌주의’
헌법사상 그 자체가 많은 문제를 내포한 사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요시히토 지배기
의 짧은 기간 동안의 그 영향력은, 히로히토 지배기에 들어서면서 차츰 약화되기
시작해서, 대일본제국이 군국주의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35년
의 ‘천황기관설사건’24)을 계기로 ‘國禁’의 사상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후는, 오로지 군권주의 헌법사상만이, 그것도 극단적으로 신비주의적인 색채
가 덧칠해진 형태로만25)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근대 천황제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어 간 것이 된다.
하지만, 적어도 제도상으로는, 「대일본제국헌법」이 한번도 개정되지 않았던 까닭
에, 패전에 이르기까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도란 모두가 가능성으로
서 존재하는 것이다. 즉 제도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에 의해 실현될 때 비로소 의미
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뒤집어서 말하면, 어떤 제도가 존재하는 이상, 사람
들이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 천황제가, 비록 요시히토 지배기의 짧은 기간 동안 절대적・신비적
料・敎育勅語―渙發時および關連諸資料 , 高陵社書店, 1974;久保義三, 天皇制
國家の敎育政策 , 勁草書房, 1979;山住正己, 敎育勅語 (朝日選書154), 朝日新聞
社, 1980 참조.
23) 里見岸雄, 軍人勅諭玄理 , 錦正社, 1939;大江志乃夫, 國民敎育と軍隊―日本軍
國主義敎育政策の成立と展開 , 新日本出版社, 1974 참조.
24) 이에 관해서는 宮澤俊義, 天皇機關說事件 (上)・(下), 有斐閣, 1970;金昌祿(註11),
제5장 제1절의 2 참조.
25) 그 전형적인 예로서 筧克彦, 大日本帝國憲法の根本義 , 岩波書店, 1936 참조. 또한 이
시기 일본의 ‘신비주의적’인 법사상은, 단지 헌법사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법사상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우선, 白羽祐三, 「日本法理硏究會」の分
析 , 中央大學出版部, 1998 참조.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11
군주제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절
대적・신비적 군주제로서의 성격이 바뀐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히로히토 지
배기의 새로운 호의적인 토양 속에서 어김없이 그 가능성을 현실 속에 실현시킴으
로써, 그 본질이 절대적・신비적 군주제임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었다.
4. 신권천황제와 강점기 한국
위에서 살펴 본, 일본 국내에서의 천황제의 확립・변형・재편성 과정은, 바로 위
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 본질에 있어서 일관된 것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요시히토
지배기의 실태를 과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근대 천황
제가 입헌주의적이었다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매달리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하지만, 한 걸음 물러나 근대 천황제에 그와같은 여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국내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이야기이며, 식민지의 사정을 염두에
두는 한, 천황제의 본질은 오로지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80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집요한 침략은, 청일전쟁과 러일전
쟁을 거치면서, 그 강도를 더욱 키워갔는데, 바로 그와같은 전쟁을 이끈 것이 다름
아닌 천황이었다. 일본의 병사들은 “世世천황이 통솔하시는”26) 군대로서, 천황의
이름 아래, ‘황군’이라는 미명 아래, 그 침략을 정당화했으며, 따라서 기꺼이 전쟁에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1910년의 이른바 ‘합병’이라고 하는 형태의 강점도, 한국의
황제가 일본의 천황에게 통치권을 양도한다는 형식을 취해 이루어졌다.27) 다시 말
해 한국이 나라를 빼앗기는 그 순간 한국인들을 짓눌러 왔던 것은 다름아닌 천황이
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강점기에 있어서는 천황의 비중이 더욱 커졌다. 이 점에 관해서는 먼
26) 「軍人勅諭」, 阿部照哉他編(註11), 391면.
27) 「韓國倂合에關한條約」제1조(“韓國皇帝陛下는韓國全部에關한一切統治權을完全且永
久히日本國皇帝陛下에게讓與함”), 神川彦松監修・金正明編, 日韓外交資料集成
第6卷(下), 巖南堂書店, 1965, 1413면 참조.
저 「대일본제국헌법」과 강점하의 한국의 관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강점기 한국
에서는, 외견적으로나마 입헌주의를 인정하고 있던, 즉 군주임과 동시에 신이기도
한 천황에게 절대적으로 종속된 의미에서이기는 하지만 의회제도와 ‘신민’의 권리
를 인정하고 있던 「대일본제국헌법」은, 적어도 그 ‘입헌적’인 부분은, 시행되지 않
았다.
「대일본제국헌법」의 ‘外地’에서의 시행여부라는 문제는, 대만에서의 이른바
‘63문제’28)에서 시작된 것으로서, 강점기 한국의 경우 조선총독에게 법률의 효력
을 가지는 명령을 발할 권한(制令制定權)을 부여하는 것29)이 「대일본제국헌법」
제5조의 천황의 입법권행사에 대한 제국의회의 협찬권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라
는 것이 그 핵심이었는데, 이 문제에 대한 당시의 일본의 대표적인 헌법학자들의
주장은 비록 외견상으로는 적극설과 소극설・절충설로 나뉘었지만,30) 그 모두의
결론은 ‘무제한의 권력을 가지는 절대자인 천황에 관한 규정만이 외지에도 당연히
적용되며, 그 이외의 외지지배법규는 전적으로 천황의 자의에 맡겨져 있다’라는
것이었다. 호즈미와 그의 제자 우에스기에 의해 주장된 적극설은, 천황이 “왼쪽으
로 가라고 하시면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시면 오른쪽으로 가는 것
이 일본인의 활동의 법이고 道이다. 감히 의심하지 않고, 감히 묻지 않고, 단지 그
것에 따를 뿐이다”31)라는 특수 일본적 ‘국체론’에 입각한 그들의 헌법사상과 연관
지워 생각할 때, 천황의 자의적 지배 이외의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없었
던 것이다. 또한 미노베에 의해 주장된 소극설 및 절충설은, “헌법 이전부터 이미
圓滿無制限”인 천황의 권력32)의 한국에서의 자의적인 행사를 주장하는 것에 다
28) 中村哲, 植民地統治法の基本問題 , 日本評論社, 1943, 72~112면. 그리고 中村哲, 「植
民地法」, 鵜飼信成他編, 日本近代法發達史 5, 勁草書房, 1958도 참조.
29) 1911년 3월 24일의 법률 30호 「朝鮮에 施行할 法令에 관한 法律」, 朝鮮總督府官報
(전142권, 아세아문화사 영인, 1984―1988) 제3권, 743면.
30) 淺見登郞, 日本植民地統治論 , 巖松堂書店, 1928, 124~133면;平野武, 「日本統治
下の朝鮮の法的地位」, 阪大法學 83, 1972.12., 45~54면;鈴木敬夫, 法을 통한 朝
鮮植民地支配에 관한 硏究 , 高大民族文化硏究所出版部, 1989, 52~56, 360~371면
참조.
31) 上杉愼吉, 「敎育勅語ノ構成」, 國體憲法及憲政 , 有斐閣書房, 1915, 83면.
32) 美濃部達吉, 「律令と憲法との關係を論ず」, 憲法及憲法史硏究 , 有斐閣書房, 1908,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13
름아니었던 것이다.33)
이것은 일본에서 일단 제약됨으로써 왜소화된 ‘입헌주의’가 강점기 한국에서는
다시 한번 더 제약되어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입헌주
의의 배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오히려 「대일본제국헌법」에서 그 ‘입
헌주의’를 공제하게 되면 오로지 신권주의만이 남게 되며, 바로 그 특수 일본적 신
권주의가 강점기 한국에 대한 지배이데올로기의 전부였다는 것이다. 요컨대 강점기
한국에서는 천황은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것은, 「대일본제국헌
법」에서, 몹시 부족한 형태로나마 인정되고 있던 제국의회에 의한 협찬이라고 하는
제약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나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강점기 한국에서의 천황의 이와같은 절대적인 지위는, 말하자면 ‘小天皇’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총독의 지위와 권한을 살펴보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1910년 9
월 30일의 칙령 제354호 「조선총독부관제」34)에 따르면, 조선총독은 “친임으로 하
고 육해군대장으로 충원”하며(제2조), “천황에게 직예”하며, “제반 정무를 통할하고
내각총리대신을 경유하여 上奏하고 재가를 받는”(제3조) 한국 지배의 최고기관이
었다. 이러한 총독의 지위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19일 「조선총독부관제 중
개정」35)에 의해 그 제2조의 “육해군대장으로 충원”하며라는 부분이 삭제됨으로써
형식상으로는 바뀌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후 한번도 문관총독이 임명된 적이 없
었을 뿐만 아니라, “천황에게 직예”한다라는 총독의 근본적인 지위는 강점이 끝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특수한 지위를 가진 조선총독은 제령제정권이라는 독자적인 입법권을 가
지고 있었으며, 그의 하부기관을 통해 조선총독부령 등 각종의 명령을 발할 수 있
었다. 또한 조선총독은 강점기 한국의 최고 행정관청으로서 “육해군을 통솔하고 조
선의 防備를 관장”할 권한과 “제반의 정무를 통할”할 권한(제3조), 소속관청의 명령
269~271면.
33)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분석은 金昌祿, 「일본제국주의의 헌법사상과 식민지 조선」, 法史
學硏究 제14호, 1993.12. 참조.
34) 朝鮮總督府官報 제1권, 185면.
35) 朝鮮總督府官報 제40권, 1025면.
또는 처분을 “취소 또는 정지할” 권한(제5조), 소속관리의 감독, 임면에 관한 권한과
“所部文官의 位勳을 上奏”할 권한(제6, 7조) 등의 행정에 관한 권한과, 「조선총독
부재판소령」36)에 의해 인정된 한국에서의 재판소의 설립・폐지, 관할구역 및 그
변경, 판사의 신분보장 및 징계 등과 관련된 광범위한 사법에 관한 권한을 한 손에
장악한 절대권력자였다.
하지만 조선총독은 이와같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국의 민중
에 의해서는 물론 일본의 의회나 정부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고37) 오로지 천황에
게만 복속될 뿐이었다. 요컨대 조선총독은 천황 이외에는 어떠한 제약원리에도 구
애되지 않는 절대적인 군림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조선총독의 지위와 권력
은 다름아닌 천황의 절대성과 신비성에서 유래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강점기 한국의 인민들은 완전한 노예상태 속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었
다. 그들은 천황과 그 분신인 조선총독이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따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은 강점기 한국의 법령의 구조를 살펴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강점
기 한국에서 시행된 법에는 우선 일본의 법령이 있었다. 즉 ‘특히 조선에 시행할 목
적으로 제정된 법률 및 칙령, 칙령으로 조선에 시행된 법률, 규정의 내용상 당연히
조선에 그 효력을 미치는 법률 및 칙령’이 그것이었다. 일본이 주장하듯 1910년에
한국이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면, 강점기 한국에도 일본의 법령이 당연히 시행되었
어야 할 터이다. 그러나 일본의 법령은 원칙적으로는 강점기 한국에서 시행되지 않
았으며, 단지 예외적으로 위와같은 일정한 경우에만 시행되었다. 그리고 그 예외적
인 시행을 결정하는 기준은 오로지 “각 법령에 대해, 그 내용을 보고 규정의 성질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다”38)라는 것이었다. 결국 일본의 법령 중 어떤 것이 얼마만
큼 강점기 한국에 대해 적용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법집행자의 자의적인 판단에 맡
겨져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조선총독부의 법령, 즉 制令・朝鮮總督府令・道令등이 있었다. 일
본의 법령이 예외적으로만 강점기 한국에 시행되었던 결과, 강점기 한국의 법령의
36) 1909년 칙령 제236호, 朝鮮總督府編, 朝鮮法令輯覽 上卷1, 1940, 第3輯, 73~75면
37) 이 점에 관해서는 金昌祿, 「植民地被支配期法制의 基礎」, 법제연구 제8호, 1995 참조.
38) 松岡修太郞, 朝鮮行政法提要(總論) , 東都書籍, 1944, 17면.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15
대부분은 이들 법령이었다. 그 중에서 특히 제령에는 「조선민사령」, 「조선형사령」
등 다수의 중요한 법령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35년간 총 676건으로, 구제령의 개폐
에 관한 것을 제외해도 270건에 달했다.39) 조선총독은 강점기 한국에서, 일본 본국
에서라면 법률로 규율해야 할 인민의 권리의무와 사법 및 조세에 관한 사항을, 이
제령으로 규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같이 중요한 사항을 규율하는 제령의 제정
에 있어서 조선총독에게 가해진 제약은, 내각총리대신을 경유하여 천황의 勅裁를
얻어야 한다는 것과, 한국에 시행된 법률 그리고 특히 한국에 시행할 목적으로 제
정된 법률 및 칙령에 위배될 수 없다는 것 두 가지 뿐이었다.40) 그런데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후자는 극히 예외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제약은 전자 하나 뿐이었
다고 할 수 있으며, 강점기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는 조선총독의 판단이 가장 우선
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총독의 제령제정권에는 사실상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강점기 한국에서의 법은 전적으로 조선총독의 판단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와같이 만들어진 법이 올바른 절차를 통해 집행되고 적용되었던
것도 아니다. 재판소는 조선총독에게 예속된 행정관청 중의 하나로서, 그 안에 檢
事局이 倂設되어 있었다. 그리고 법정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일본인인 판사와 검
사41)가 한국인을 내려다보며 일본어로 된 법령을 동원하여 일본어로 재판을 진행
했다. 하지만 그나마 정식 재판에 회부되는 사건은 극소수였다. 민사분쟁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건은, 태형을 수반하는 즉결처분권이 부여된 경찰과 헌병에 의해 처리
되었다. 그리고 태형은 감옥 또는 즉결관서에서 은밀하게 집행하도록 되어 있어서
고문이 합법적으로 행해질 수 있었다.42)
39) 이에 대해 35년간의 강점기간 동안 한국에서 시행된 일본 법령의 수는 130건에 불과했다.
條約局法規課, 日本統治時代の朝鮮 ( 外地法制誌 第四部の二), 1971, 64면.
40) 1911년 법률 제30호 「朝鮮에 施行할 法令에 관한 法律」제2조, 제5조.
41) 예를 들어, 한 통계에 따르면 1939년 현재 조선총독부 재판소 235명의 재판관 중 46명만이
한국인이었으며, 120명의 검사 중 8명만이 한국인이었다. A. J. Grajdanzev, Modern Korea:
Courts, Prisons, Police, N. Y.: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1944. 안진, 미군정기 억압기구 연
구 , 새길, 1996, 190면에서 재인용.
42) 申東雲, 「日帝下刑事節次에 관한 硏究」, 朴秉濠敎授還甲紀念論叢發刊委員會編,
韓國法史學論叢 (朴秉濠敎授還甲紀念論文集Ⅱ), 朴秉濠敎授還甲紀念論叢發刊委
그와같은 상황 속에서, 한국인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경찰과 헌병에게 끌려가 채
찍질을 당하고,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그리고 심지어는 성을 제공하기 위해 끌려
가고,43) 나중에는 언어와 이름마저도 일본식으로 바꿀 것을 강요당하고,44) 천황에게
매일아침 인사를 할 것까지 강요당했다.45) 그것은 모두가 조선총독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그와같은 조선총독의 명령이 가능했던 것은 그 뒤에 천황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강점기의 한국에서는, 그 강점이 시작된 때부터 끝날
때까지, 천황은 문자 그대로 ‘무소불위’의 절대적이고 신비적인 군주였던 것이다.
5. 신권천황제의 자리매김
일본의 근대 천황제는 제도상 절대적・신비적인 군주제였다. 그리고 그것은 대
일본제국 국내에서 기본적으로는 현실 속에서도 마찬가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천황 개인이 능력을 갖추지 못했고, 때마침 자유주의적 분위기도 확산되고 있
던 요시히토 지배기에는, 현실에 있어서는 그 절대성・신비성이 구체화되어 나타나
지 않았다. 하지만, 그 요시히토 지배기에도 천황제는 여전히 가능성으로서 존재하
고 있었으며, 그 가능성이 히로히토 지배기의 경제적 상황의 변화에 편승하여 급속
하게 현실화되었고, 그것이 다시 정치적 군국주의화를 급속하게 실현시켰다. 그 점
에서 일본의 근대 천황제는 본질적으로 절대적・신비적인 군주제였다고 할 수 있
는 것이다.
이 점은 식민지에서의 천황제를 살펴 볼 때 더욱 명확하게 된다. 강점기 한국에
員會, 1991 참조.
43) 일본군‘위안부’에 관해서는 金昌祿외2, 「한국 및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 일
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국제법적 검토를 중심으로」, 法學硏究 (釜山大學校法科大
學․法學硏究所) 제37권 제1호, 1996.12. 참조.
44) 창씨개명에 관해서는 宮田節子他, 創氏改名 , 明石書店, 1992 참조.
45) 황민화정책에 관해서는 宮田節子, 朝鮮民衆と「皇民化」政策 , 未來社, 1985;磯田一
郞, 「皇民化敎育と植民地の國史敎科書」, 大江志乃夫他編, 統合と支配の論理 ( 岩
波講座近代日本と植民地 4), 岩波書店, 1993 참조.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17
서의 천황제는 문자 그대로 절대적・신비적 군주제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천
황의 분신인 조선총독은 강점기 한국에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조선총독의 지위는 강점이 시작된 순간부터 일본의 패망으로
강점이 끝날 때까지 한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나아가 1930년대 이후의 일본 국내
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발흥은 사실은 식민지에서 이미 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
던 것이 일본 본국으로 역확산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뒤집어
서 말하면, 강점기 한국에서의 천황제야말로 그 본질을 압축한 형태였다는 것이 되
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의 근대 천황제는 그 국내적 제도와 실태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특히 식민지에서의 제도와 실태에 비추어 볼 때, 본질적으로 절대적・신비적인 군
주제였다고 할 수 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바람이 가득찬 풍선과 같은 것
이었다. ‘타이쇼오 데모크라시’란 그 풍선의 허리에 가해진 약간의 압력에 불과한
것이었다. 풍선의 양쪽, 다시 말해 일본 국내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식민지에서의
천황제는 그 압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본래의 둥근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
고 그 압력이 사라지는 순간, 그것은 급속하게 나머지 부분에도 퍼져 나가 풍선의
원래의 ‘원만한’ 모습을 복귀시켰던 것이다.
III. 상징천황제의 제도와 사상
1. 문제의 소재
1946년 11월 3일에 공포되고, 1947년 5월 3일부터 시행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일본국헌법」46)은, 「대일본제국헌법」과 마찬가지로 천황을 그 제1장에 규정하고
있지만, 그 규범적 내용은 「대일본제국헌법」의 신권천황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선언”한(전문) 「일본국헌법」에서, 천황은
46) 원문 및 영역문은 阿部照哉他編(註11), 3~40면 참조. 국역문은 金昌祿(註11), 부록 2
참조.
이제 더 이상 신이 아니라, 단지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제1조)
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다. 또한 천황은 일체의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가지지 않”으
며, 오로지 “헌법이 정하는 國事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도록 되었다(제4조). 천황은
헌법이 정한 12개의 국사행위, 즉 국사에 관한 행위의 위임(제4조 2항), 내각총리대
신 및 최고재판소장인 재판관의 임명(제6조), 헌법개정・법률・정령 및 조약의 공
포, 국회의 소집, 중의원의 해산, 국회의원총선거 시행의 공시, 국무대신 및 법률이
정하는 다른 관리의 임면, 전권위임장과 대사 및 공사의 신임장의 인증, 大赦・특
사・감형・형집행의 면제 및 복권의 인증, 영전의 수여,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 외교문서의 인증, 외국의 대사 및 공사의 접수, 의식의 거행(제7조)을 행하지
만, 그 모든 행위는 헌법과 법률에 정해진 대로 행하지 않으면 안되며, 또 반드시
“내각의 조언과 승인”(제3조)에 따라 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리고 천황의
지위는, ‘세습’에 의해 계승되지만, 그 상세한 내용은 국회가 의결하는 「皇室典範」
으로 정해지게 되었다(제2조).
이와 같이 「대일본제국헌법」의 신권천황제와 「일본국헌법」의 상징천황제는 그
권한과 지위의 면에서 명백하게 대비된다. 그리하여 「일본국헌법」은 “천황의 존재
그 자체를 법적으로는 무의미한 것으로 하는 데까지, 군주제의 명목화를 궁극적으
로 밀어 부치”고 있는 것이다47)라고 주장되고 있다. 적어도 표면적인 제도의 면에
서 양자 사이에 단절이 존재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 1947년을 기점으로 천황제는 완전히 환골탈태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전반적으로 소극적이다. 그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아래에서 살펴보는 상징
천황제 등장과정의 애매성에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본의 헌법학자들이 “국민주
권을 헌법의 기본원칙으로서 파악하고, 국민주권원칙과 원리적으로 모순되는 천황
에 관한 규범을, 가능한 한 이 원칙의 틀 내에서 이해”하고 “천황조항을 엄격하게
해석”하면 천황제가 “현실의 헌법운용에 있어서 유익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무해
하다고 하는 인식” 아래, 천황제는 “정치적으로 無의 존재”라고 하는 주장에 매달
려 온48) 것이 또 하나의 이유로서 주목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의 헌법학자들이
47) 樋口陽一, 憲法I , 靑林書院, 1998, 117면.
l48) 橫田耕一, 「 國民統合 と象徵天皇制」, 世界 2000年1月號, 75・77면.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19
천황제의 ‘전환’을 당연한 것으로 처리하고, 헌법 제9조(전쟁방기)의 경우와는 달리
천황제의 문제상황에 충분히 주목해 오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천황제가 패전 이후에도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인 역할을 해 왔다는 점을 고
려한다면, 지나치게 현실과 동떨어진 것일 뿐만 아니라, 심하게 말하면 현실을 호도
하여 책임을 방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상징천황제의 신권천황제와의 ‘연속’의 측면에 주목할 필요성이 생긴
다. 아래에서는 그 ‘연속’의 측면을 상징천황제의 등장과 전개, 그리고 상징천황제
와 과거청산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2. 상징천황제의 등장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에게 있어서 절대절명의 과제는 ‘國體의 護持’, 다시
말해 천황제의 고수였다. 이것은 우선 패전에 이르는 과정에서 명확하게 확인된다.
연합국측이 「포츠담선언」을 발표한 것은 전쟁의 판도가 확실해진 7월 26일이었다.
이 선언에 접한 일본정부는, 논란 끝에 7월 28일 “묵살”한다는 입장을 밝혔다.49) 이
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시에, 그리고 8월 9일 나가사키(長崎)시에 원자폭
탄을 투하했으며, 소련은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급박한 사태의 전개 속에서도 일본정부는 「포츠담선언」을 선뜻 수락하지
않았다. 그들이 망설인 것은 ‘국체 호지’라고 하는 지상명제가 「포츠담선언」의 수
락 이후에도 충족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 때문이었다. 8월 9일 일본정부는 논
란 끝에 “(포츠담)선언은 천황의 국가통치의 대권의 변경이라는 요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라는 이해 아래, 수락한다”50)라는 회답을 보냈다. 이에 대해 연합국측은 8
월 11일자로 통고한 회답에서, “항복의 시점부터 천황 및 일본정부의 국가통치권은,
항복조항의 실시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는 연합국최고사령관에
게 종속되어야 한다(subject to)”51)라고 대답했다. 일본정부는 이 회답을 놓고 다시
49) 外務省編, 終戰史錄 , 新聞月鑑社, 1952, 501~503면.
50) 外務省編(註49), 560~600면.
논란을 벌였으나, 최종적으로는 8월 14일 천황 히로히토가 “나는 이 회답문의 文意
를 통해, 상대가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한다.・・・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 전체의 신념과 각오”이다52)라며, ‘국체 호지’가 담보되었다는 희망섞인 판단
을 내림으로써, 「포츠담선언」의 수락이 결정되게 되었다. 요컨대 일본정부는, 유래
가 없는 원자폭탄의 투하에 의해, 그리고 전장에서의 열세에 의해 수많은 자국민의
희생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도 ‘국체 호지’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정부가 천황제의 단절 내지는 전환을 스스로 추진할 리는 없었다.
“국체 호지는 이론이나 감정을 초월한 견고한 우리들의 신앙”이므로, “1億總懺
悔”53)를 통해 지켜 나가자라고 외친 히가시쿠니 나루히코(東久邇稔彦)의 황족내
각54)은 물론이고, 1920년대에 대 서방 협조외교를 추진함으로써 군부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시데하라 키쥬우로오(幣原喜重郞)의 내각 또한, 1931년 이후의 군국주의는
“헌정의 大道가 문란해”진 것, 다시 말해 단순한 일탈에 불과하므로, 개헌은 필요
없다55)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리하여 결국 개헌작업은 ‘밖으로부터의 압력’, 다시 말해 점령군사령관 더글라
스 맥아더(Douglas MacArther)의 ‘시사’에 의해 시작되지 않을 수 없었다.56) 맥아더는
10월 11일 자신을 찾아 온 시데하라에게 “헌법의 자유주의화”를 “힘주어 충고”했
다.57) 그 결과 10월 25일 헌법문제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설치의 시점에
서 위원회의 책임자인 마쯔모토 죠오지(松本烝治)가 밝힌 바에 따르면, 위원회는
51) Government Section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Political Reorientation of Japan―
September 1945 to September 1948, 1968, p.415.
52) 外務省編(註49), 696~709면.
53) 이것은, 대일본제국의 신민 모두가 참회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실상 침략에 대한 천
황 등의 구체적인 책임을 애매하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1억’이라는 숫자
는 일본인 7천만 외에 그 침략에 의해 피해를 입은 한국인과 대만인 3천만을 포함시킨 것
이었다는 사실이다.
54) 憲法調査會, 憲法制定の經過に關する小委員會報告書 , 1964, 123~125면 참조.
55) 佐藤達夫, 日本國憲法成立史 1, 有斐閣, 1962, 177면.
56) 이 시기의 천황제를 둘러 싼 사고방식의 차이에 관해서는 武田淸子, 天皇觀の相剋 , 岩
波書店, 1978;中村政則, 戰後史と象徵天皇 , 岩波書店, 1992 참조.
57) Government Section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upra note 51, p.91.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21
“반드시 헌법개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학문적인 조사연구
를 주안으로 하는”58) 모임이었다. 또한 마쯔모토가 12월 8일 의회에서 밝힌 기본방
침의 첫 번째 항목은 “천황이 통치권을 총람하신다고 하는 대원칙에는 어떠한 변경
도 가하지 않음”59)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보다 확실한 ‘밖으로부터의 압력’이 필요했다. 1946년 2월 1
일 마이니찌(每日)신문 에 특종보도된 마쯔모토 위원회의 「시안」에 접한 맥아더
는, 그 “극히 보수적인 성격”을 확인하고 “지침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60) 2월 3일
맥아더의 지시를 받은 총사령부는 4일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12일에 이르러 국민주
권의 원리를 명시한 개헌안을 확정하고,61) 13일에 이를 일본측에 전달했다. 총사령
부의 안은 ‘국체 호지’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던 일본측을 실로 “망연자실”하게
하는 것이었다.62) 하지만, 일본정부로서는, 당시 일본의 실질적인 주권자였다고 할
수 있는 총사령부의 안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당시 연합국 내에서는 천황의
전쟁책임에 대한 추궁이 거세어지는 등 일본의 변화를 요구하는 압력이 점점 높아
지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정부가 ‘국체 호지’를 선뜻 포기한 것
은 아니었다. 일본측은 자신들의 생각과 총사령부의 안이 “근본적인 主義에 있어
서는” 다르지 않다63)라는 궤변으로 총사령부측을 설득하려 하기도 하고, 총사령부
의 안을 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국민주권에 관한 부분을 가능한 한 애매하게 하
고 대신에 천황의 권한을 부활시키는 등 실로 집요한 ‘일본화’의 시도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대부분 총사령부측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으며, 결국 일본
정부는 “눈물을 흘리면서”,64) “天子님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라고 하는 사태에
직면하여… 어쩔 수 없이 사령부측의 안을 승인”했다.65)
58) 每日新聞 1945.10.26.
59) 佐藤達夫(註55), 423~424면.
60) 高柳賢三他編著, 日本國憲法制定の過程 1, 有斐閣, 1972, 40~42면.
61) 그 경과에 관해서는 鈴木昭典, 日本國憲法を生んだ密室の九日間 , 創元社, 1995 참조.
62) 高柳賢三他編著(註60), 322면.
63) 江藤淳編, 占領史錄 3, 講談社, 1989, 204~211면.
64) 憲法調査會(註54), 416면.
65) 入江俊郞, 憲法成立の經緯と憲法上の諸問題 , 第一法規, 1976, 262면.
이렇게 해서 신권천황제는 상징천황제로 바뀌었다. 그러면 ‘국체 호지’는 폐기된
것인가? 일본정부에 따르면 국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 이유는, 국체란 “황
실의 존재”66) 내지는 “국민전체의 마음 속에 살아 움직여, 떨쳐 버리려 해도 떨쳐
버릴 수 없고 변화시키려 해도 변화시킬 수 없는” “천황을 동경의 중심으로 하는
국민의 마음의 연계”이며, 그러한 의미의 국체는 “근본에 있어서 …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67) 요컨대 일본정부는 국체의 의미를 ‘현인신 천황의
절대적 지배’로부터 ‘동경의 중심으로서의 천황’으로 바꿈으로써 국체는 바뀌지 않
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와같이 천황을 포함한 일본정부는 국체, 즉 천황제를 고수했다. 「포츠담선언」
을 수락한 것도, 총사령부의 안을 받아들인 것도 모두가 ‘국체 호지’를 위한 것이었
다. 물론 그들은 신권천황제를 그대로는 지키지 못하고, 상징천황제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밖으로부터의 압력’이 그들의 예상보다 훨
씬 강했기 때문에 ‘차선’을 선택한 것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
었다. 단지 ‘밖으로부터의 압력’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뿐이었다. 따라
서 결국 국체는 호지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밖으로부터의 압력’에 의한 외견상의
제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있어서 천황제는 그대로 연속된 것이었다.
이 점은 나머지 일본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당시의 일본에도 천황제의
폐지를 주장하는 세력이 있기는 했다. 그때까지 천황제에 의해 핍박받아 온 공산주
의자들68)과 좌파지식인들이 그들이었다. 하지만, 천황제 폐지론자는 숫적으로 극소
수에 불과했고, 그들의 주장의 영향력 또한 미미했다. 이에 대해 다른 모든 정당은
사회당까지 포함해서 ‘국체 호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69) 뿐만 아니
라, 「대일본제국헌법」에 의해 천황제 절대주의가 성립된 이래 ‘국체’교육을 받았
고, 특히 1930년대 이후에는 국체의 본의 와 신민의 도 에 의해 상징되는, 한층
강화된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아 온 일본 신민들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
66) 淸水伸編著, 逐條日本國憲法審議錄 1, 有斐閣, 1962, 900, 861~862면.
67) 淸水伸編著(註66), 862면.
68) 1945년 11월 11일의 일본공산당의 「新憲法의 骨子」, 阿部照哉他編(註11), 250면 참조.
69) 金昌祿(註11), 212~214면 참조.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23
였다.70) 그리하여 결국, 일본인 전체를 통해 천황제는 실질적인 단절 없이 형태만
이 바뀐 것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 천황제는 ‘실질적으로 연속’되었던 것이다.
3. 상징천황제의 전개
상징천황제의 등장과정에서의 천황제의 ‘연속’은 이후의 상징천황제의 전개과정
을 규정했다. 그것은 우선 1950년대의 ‘과거로의 복귀’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1951년 9월 8일 「대일강화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의
점령으로부터 독립하게 되면서, 과거 일본군국주의와 관련하여 공직에서 추방되었
다가,71) 점령군의 개혁에 의해 만들어진 각종의 민주적 제도들을 복고적으로 개편
해 가는 이른바 ‘역코스’과정에서 속속 복귀하게 되는 일본의 지배층은, 「일본국헌
법」의 개정을 통한 천황제의 부활을 시도했다. 1954년 3월 A급 전범 키시 노부스케
(岸信介)를 회장으로 발족한 자유당헌법조사회가, 같은 해 1954년 11월에 완성하여
공표한 「헌법개정안요강」에서 “천황은 일본국의 원수이며, 국민의 총의에 의해 나
라를 대표하는 자로 한다”라고 개정하고, 천황이 행하는 행위로서 예산의 공포, 국
회의 정회, 선전강화의 포고, 비상사태의 선언 및 긴급명령의 공포, 조약의 비준, 대
사・특사・감형・형의 집행면제 및 복권을 규정하고, “헌법개정의 발의에 천황의
인증을 요하는 것”으로 규정하여, 천황을 국가통합의 요체로서 재정위할 것을 주장
한 것72)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같은 당의 「요강설명서」에 따르면, 그것은 “상징이
라고 하는 의의가 불명료한 천황의 지위를 보다 명확하게 함과 동시에” “국민이
(천황을) 정신적 의지처로 삼고자 하는 요망에 응하고자 하는 취지”에 따른 것이었
다.73) 요컨대 천황이 ‘상징’이라고 하는 애매한 지위에 머물러 있어서는 일본재건
70) 歷史敎育者協議會編, 日本國憲法を國民はどう迎えたか , 高文硏, 1997 참조.
71) 공직추방에 관해서는 浦部法穗, 「公職追放」, ジュリスト 900 (法律事件百選), 1988,
12~13면;增田弘, 「公職追放の衝擊」, 中村政則他編, 戰後日本占領と戰後改革
2 (占領と改革), 岩波書店, 1995 참조.
72) 憲法調査會事務局編, 憲資・總第三十九號日本國憲法改正諸案 , 1959, 145면.
73) 憲法調査會事務局編(註72), 154면.
의 심벌이 될 수 없고 일본의 민족적 단결의 정신적 중핵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일
본의 국가‘원수’로서 부활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74)
다만, 이 시기의 개헌론이 전면적・복고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기는 했지만, 그렇
다고 해서 패전 전으로의 완전한 복귀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복고적 성격이 가
장 짙었던 자유당의 「헌법개정안요강설명서」에서조차 “천황주권의 구체제에 복귀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 국권이 국민에게서 발한다는 것과
민주주의・평화주의・인권존중주의의 이상은 명시할 필요가 있다”75)라고 주장하
고 있었다. 천황에 관해서도, 원수에의 복귀가 지향되기는 했지만, 자유당의 「헌법
개정안요강」에서도 “과거에 체험한 천황정치에 수반되는 폐해에 빠지지 않도록 배
려”76)하는 것이 강조되었으며, 1952년 2월 8일 결성된 改進黨의 헌법조사회가
1954년에 발표한 「현행헌법의 문제점 개요」에서도, “원수는 반드시 국내적 실권자
일 필요는 없다… 구헌법의 천황주권에의 복원은 의도하지 않는다”라고 주장되었
다.77) 이러한 유보는 국민주권・군에 대한 문민통제・인권존중이라고 하는 시대의
헌법사상과 변화된 일본국민의 의식에 의해 강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래에서 살펴보는 것처럼, 그것이 곧바로 일본의 지배층 나아가 일본국민이 새로
운 가치들을 체화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의 개헌 기도는, 1955년 11월 15일 ‘보수합동’을 통해, “현행헌법의 자주
적 개정”을 명기한 「정강」78)에 입각하여 자유민주당이 결성됨으로써, 그 정점에
달했다. 의회에서 안정과반수를 얻게 된 자민당은, 곧바로 “헌법에 검토를 가해, 관
계문제들을 조사・심의하고, 그 결과를 내각 및 내각을 통해 국회에 보고”하게 하
기 위한 기관으로서의 헌법조사회의 설치를 위한 법안을 제출하고, 의회 내에서 개
헌 발의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소선거구제의 도입을 도모함으로
써, 개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소선거구제의 도입은 사회당과 시민운동측
74) 이와 거의 대동소이한 내용의 개헌안은 학자들에 의해서도 제시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憲
法硏究會編, 日本國自主憲法試案 , 勁草書房, 1955 참조.
75) 憲法調査會事務局編(註72), 153면.
76) 憲法調査會事務局編(註72), 154면.
77) 憲法調査會事務局編(註72), 127면.
78) 宮本吉夫, 宮本吉夫, 新保守黨史 , 時事通信社, 1961, 421면 이하.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25
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으며,79) 1956년 5월에 성립된 「헌법조사회법」에 의해
1957년 키시정권 아래에서 발족된 헌법조사회 또한 그 활동이 몹시 더딘 속도로 진
행되었다. 또한 1956년 여름의 참의원의원선거 이래의 일련의 선거에서 자민당은
결국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거기에 1960년 5월 키시정권
에 의해 개정안보조약의 비준이 중의원에서 강행 채택된 것을 전후하여 전개된 ‘안
보투쟁’80)에서 폭발적인 형태로 표출된 일본 국민의 헌법의식의 변화도 가세하여
1950년대의 개헌의 기운은 급속히 약화되어 갔다.
이른바 ‘명문개헌’의 시도가 좌절된 1960년대 이후, 일본의 지배층은 ‘차선’을 택
하게 된다. 이른바 ‘해석개헌’이 그것이다. 즉 그들은 「일본국헌법」의 조문은 그대
로 둔 채, 해석에 의해 천황제 및 자위대의 강화라고 하는 자신들이 바라는 위헌적
인 정책을 정당화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개헌을 한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실현하
려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다시 말해 “‘法源으로서의 헌법’은 바꾸지 않고서,
해석활동에 의해 ‘제도로서의 헌법’을 반동화하는 방향”81) 즉 “해석개헌”82)의 방향
을 취한 것이었다. 이러한 해석개헌의 흐름의 배경으로는, 일본의 전후민주주의의
진전과 더불어 국민들의 호헌의식이 강해짐에 따라 개헌 세력이 개헌에 필요한 국
회 3분의 2 의석을 확보할 수 없었다는 것과, 일본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국민들 사
이에 현상고수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해석개헌’이 지배적이 되었다고 해서 ‘명문개헌’이 완전히 포기된 것은 아
니었다. 예를 들면, 1964년 이후 동면상태에 있던 자민당 헌법조사회가, 1970년대에
들어와 활동을 재개하여 1972년에 완성한 「헌법개정대강초안」83)은, “헌법개정의
79) 자세한 내용은 長谷川正安, 憲法現代史 下, 日本評論社, 1981, 462~468면;渡辺治,
「保守合同と自由民主黨の結成」, 坂野潤治他編, 日本近現代史 4, 岩波書店, 1994
참조.
80) 長谷川正安(註79), 513~533면;渡辺治, 日本國憲法「改正」史 , 日本評論社, 1987,
337면 이하;渡辺治, 戰後政治史の中の天皇制 , 靑木書店, 1990, 225~234면.
81) 渡辺洋三, 一九八○年代と憲法 , 岩波書店, 1981, 33면.
82) 渡辺洋三, 「護憲運動の理論的反省」, 有倉遼吉編, 憲法調査會總批判 , 355면. 해석
개헌의 이론적 문제점에 관해서는 栗城壽夫, 「 解釋改憲 というとらえ方の理論的問
題點」, 法律時報 68~6, 1996 참조.
83) 長谷川正安他編, 憲法改正論 (文獻選集日本國憲法13), 三省堂, 1977, 257~258면.
기본방침”에서 “현행 헌법은, 점령 하에서 국민에게 아직 주권이 없고, 또 자유로운
의지의 표명이 허용되지 않았던 때, 연합국점령군의 강한 지도 아래, 극히 단시일
동안 작성된 것”이며, 따라서 “독립된 민주국에 어울리는 헌법을 가지기 위해” 개
헌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여, ‘강요된 헌법’론과 ‘자주헌법’을 위한 개정론의 입장
을 유지하면서, 천황과 관련해서도, 일본의 “역사와 전통에 기초하여, 천황이 국가
를 대표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천황은 국민통합의 중심으로서 국가를
대표한다는 취지를 규정”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1980
년대에 들어와 ‘전후정치 총결산’을 소리 높여 외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
弘) 정권에 의해, 그리고 동서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에 들어와 ‘국제공헌’을 외친
오자와 이찌로오(小澤一郞) 등에 의해, 명문개헌의 시도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이어
지고 있다.
다만 전쟁방기를 규정한 「일본국헌법」제9조와 비교할 때, 상징천황제에 관한
헌법조항을 개정하려고 하는 움직임은 시간이 갈수록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자민당의 헌법조사회가 1982년 8월 11일에 작성한 「중간보고」84)의
경우, 제3조 이하의 개정을 통한 천황의 실질적인 원수화를 기도하고 있기는 하지
만, “상징천황은 현재로서는 국민들 사이에 널리 친숙해져 있어, 현행규정의 기본
정신을 바꿀 필요는 없다”라는 입장을 제시하면서, “이에 대해 천황이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천황이 일본국의 상징이라
고 하는 표현은 의미도 불명확하고,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천황이 원수로서의 지위
에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라는 반대의견을 병기하고 있
으며, 그 결과 천황에 관한 제1조와 제2조는 “현행대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1994
년 12월의 요미우리(讀賣)신문 헌법문제조사회의 「요미우리개정시안」85)의 경우에
84) 1973년 이래 동면 중이다가 1980년에 활동을 재개한 자민당 헌법조사회가 1982년 8월 11일
에 작성한 「중간보고」, 渡辺治(註80), 1987, 650~664면 참조.
85) 「特輯日本國憲法を考える時が來た」, THIS IS 讀賣 1994년 12월호. 특히 64~66면
참조. 이 시안에 대한 비판으로는 「緊急企劃讀賣憲法改正試案のねらいは」, 法學セ
ミナ― 481, 1995;黑田淸, 「 改憲試案 は驕りそのもの」, 法學セミナ― 483,
1995;大久保賢一, 「讀賣改憲試案にみる好戰性と反動性」, 같은 책;浦部法穗, 「
最高法規 の章を削除した 讀賣改憲試案 のお粗末」, 法學セミナ― 484, 1995;
「座談會讀賣新聞改憲試案とメディアの役割」, 法學セミナ― 486, 1995 참조.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27
도, 천황은 제1장의 ‘국민주권’에 이어 제2장에서 규정하도록 되어 있으며, 그 내용
도 현재의 헌법과 큰 차이가 없다. 나아가 오자와 이찌로오의 일본개조계획 86)에
서는 천황제는 거의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이와같이 상징천황제에 관한 한, 1950년대의 명문개헌을 통한 원수화의 시도가
좌절된 이후, 근본적인 틀의 변화를 추진하는 움직임은 상대적으로 적다. 이렇게 된
데는, 1958년 11월에 현재의 천황인 황태자 아키히토(明仁)와 쇼오다 미찌코(正田
美智子)의 약혼발표를 계기로 일어난 밋찌(ミッチ―) 붐으로 상징되는 ‘대중천황
제’의 전개과정에서,87) 일본국민의 천황관이 권위주의적인 색채를 조금씩 잃어 가
고 있는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
으로서는 해석을 통한 상징천황제의 형해화를 지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의 헌법학자들은 상징천황제에 관한 헌법조항들을 엄격하게 해석하여, 천황
이 상징이라고 하는 규정에는 어떠한 특별한 법적 의미도 없으며, ‘국민통합의 상
징’이라는 규정도 천황에 의해 국민을 통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통합되어 있는 실태를 천황이 상징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며, 천황은 행정의 장도
아니며 일본국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존재도 아니기 때문에 ‘원수’라고 할 수도
없으며, 천황의 존재는 ‘국민의 총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의 총의’(예를
들면 헌법개정)에 의해 천황제를 폐지하는 것도 가능하다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적지 않은 헌법학자들과 그들의 도움을 얻은 일본정부에 의해 상
징천황제를 형해화하는 해석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그들은 ‘상징’이라는 법적
으로는 명확하게 자리매김하기 어려운 애매성을 가지는 용어를 매개로 천황에게
신비적인 요소를 부여함으로써, 천황에 관한 조항이 「일본국헌법」에서도 제1장에
규정되어 있고, 천황 및 황족에 관한 법의 이름이 여전히 「황실전범」인 것으로 매
개로 「대일본제국헌법」의 천황제 해석을 끌어옴으로써, 그리고 천황의 공적 행위
를 “이 헌법이 정하는 국사에 관한 행위만”(제4조)으로 명확하게 한정하고 있음에
도 불구하고, 內奏, 국회개회식에의 출석, 외국원수와의 친전 교환 등을 ‘상징으로
86) 小澤一郞, 日本改造計劃 , 講談社, 1993 참조.
87) 상징천황제의 역사에 관해서는 橫田耕一, 憲法と天皇制 , 岩波書店, 1990 2장;針生
誠吉他, 國民主權と天皇制 , 法律文化社, 1983. 2부 4장 참조.
서의 행위’ 혹은 ‘공인으로서의 행위’라고 자리매김함으로써, 상징천황의 실질적인
원수화를 추진해 왔다.88)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그에 상응하는 실질이 ‘관행’이라
는 이름 아래 반복됨으로써 점점 더 힘을 얻게 되었다. 국회개회식의 주재자는 국
회로 바뀌었지만, 천황은 여전히 참의원에 마련된 ‘玉座’에 앉아 개회식에 참석하
며, 비록 ‘勅語’에서 이름은 바뀌었지만, 공산당의원을 제외한 모든 의원이 깊이 고
개를 숙인 가운데, ‘말씀’(おことば)을 낭독하며, ‘말씀’문을 전해 받은 중의원의장
은 천황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등을 보이지 않은 채 조심조심 내려오며, 혹
시나 천황의 ‘말씀’문을 받을 때 실수라도 하면 중의원의장은 사직하거나 사죄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몰리게 되며, 외국의 원수를 맞아 개최되는 만찬회에서 천황은
명실상부한 국가원수로서 ‘말씀’을 낭독하며, 내각총리대신을 비롯한 대신들의 외
국방문 일정 또한 천황가의 일정이나 그 동정에 의해 중지・연기되기도 하는 것 등
이 그 예이다.
요컨대 상징천황제는 거듭되는 ‘해석’과 ‘관행’ 속에 실질적인 ‘원수화’를 달성하
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오자와 이찌로오 등이 천황제에 관한 개헌을 적극 주
장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즉 그들에 따르면, “지금의 문장대로라도 천황은 국가원
수로 자리매김되어 있”으며, 따라서 “국가원수가 천황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89) 이것은 ‘단절’ 없이 시작된, 그리고 끊임없는 ‘연속’의 시도로 점철
된 상징천황제의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상징천황제는 이 정도의 수준에서 고착되는 것일까? 적어도 이러한
상황을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방기”90)로 파악하는 것은 지나치다. 상징천황제의 역
사는 오히려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새로운 주목을 촉구하고 있다. 우선 고려해야 하
는 것은 상징천황제가 전쟁방기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는 점이다.
‘상징천황제’와 ‘전쟁방기’는 말하자면, 천황제의 유지 즉 ‘국체의 호지’를 위해 지
불된 비용이었다. 「일본국헌법」이 흔히 ‘피뢰침헌법’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여기에
88) 橫田耕一(註48);小林武, 「天皇條項の解釋をめぐる若干の問題」1・2・3, 南山
法學 13―3, 14―1, 2・3・4, 1990―1991;針生誠吉他(註87), 2부 5장 참조.
89) 小澤一郞, 「日本國憲法改正試案」, 文藝春秋 1999年9月號, 97면.
90) 渡辺治, 現代日本の帝國主義化形成と構造 ( 講座現代日本 1), 大月書店, 1996,
343면.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29
있는 것이다.91) 그런데 전쟁방기를 규정한 「일본국헌법」제9조의 개헌은 점점 더
실현가능성을 더해가고 있다. 그렇다면 ‘전쟁방기’가 폐기될 경우 ‘상징천황’도 변
화될 것이라고 상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유주의・민주주의체제”의 옹
호가 외쳐지고 있지만, 일본의 군대는 일찍이 이러한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싸운 경
험이 없으므로, “데모크라시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자위대
원’들이, 명목상으로도 ‘군인’이 될 경우, 기꺼이 목숨을 바칠 대상은 그들의 선배인
“帝國軍人”들이 그러했듯이 “말을 타신 천황폐하”92) 이외에 찾기는 어렵기 때문이
다. 한걸음 더 나아가 뒤에서 살펴 볼 현대 일본의 내셔널리즘의 재발흥 또한 ‘상징
천황제’의 강화를 부추기는 요인으로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내셔널리즘은
‘민족의 핵심’을 찾게 마련인데, 일본의 경우 ‘민족의 핵심’은 천황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4. 상징천황제와 과거청산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상징천황제의 전개과정은 기본적으로 패전 전후의 연속
으로 특징지워진다. 그런데 이 점은 무엇보다 과거청산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출
때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천황제의 연속은 곧 패전 전후의 일본의 연속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패
전 전의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일본에서
주체적인 과거청산이란 애당초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우선 일본 국내적으로 주체적인 과거청산은 전혀 없었다. 그 전형적인 표현이 천
황 히로히토의 면책이었다. 「대일본제국헌법」상 주권자이며, 최고권력자이며, 통수
권자이며, 게다가 신이기까지 했던 히로히토야말로, 청산되어야 할 과거의 핵심이
91) 金昌祿(註11), 7, 8장 참조. 또한 渡辺治, 「戰後改革と法」, 長谷川正安他編, 講座・
革命と法 3 (市民革命と日本法), 日本評論社, 1994도 참조.
92) コワルスキ―, 日本再軍備 , サイマル出版會, 1969. 渡辺治(註80), 1990, 248면에서
재인용.
었다.93) 하지만 일본의 전범을 처벌한 ‘토오쿄오(東京)재판’94)의 법정에 히로히토
는 피고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증인으로서도 서지 않았다. 물론 히로히토의 면책은,
일본의 점령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격화되는 냉전 속에서 일본을 대소방파
제로 만들기 위해 천황을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미국의 정치적 고려의
산물이었다. 특히 보수적인 인물이었던 맥아더는, “만일 천황을 재판하게 된다
면・・・틀림없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격렬한 동요가 일어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최소한 백만의 군대”와 “아마도 수십만에 이르는 행정사무관”이 필요할 것이다95)
라는 논거를 내세우며, 연합국 내의 반발을 누르고 히로히토의 전범 기소를 저지했
다. 하지만 히로히토의 면책은 단지 미국의 결정에만 의한 것은 아니었다. 위의 맥
아더의 논거에서도 확인되듯이, 그것은 애당초 천황제에 대한 일본 신민들의 압도
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 결과 천황제의 단절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천황 히로히토의 면책은 일본 국내에서의 과거청산 전반을 방해했다. 최
고의 범죄자가 처벌받지 않는 상황에서 다른 범죄자를 처벌한다는 것은 논리적으
로 맞지 않는 일이었다. ‘토오쿄오재판’이 토오죠오 히데키(東條英機) 등 7명의 교
수형 집행만으로 종결되고 그것을 전후하여 연금상태에 있던 A급 전범들이 모두
석방된 것이나, 패전 후의 독일이 9만명이 넘는 나찌 관계자를 재판하여 7,000건에
가까운 유죄판결을 내린 것96)과는 대조적으로, 그 후에도 일본인 자신에 의한 어떠
한 전범재판이나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 점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히로히토의 면책은, “천황과 공범의식을 공유하고” 있던, “천황에 들이대어진 칼은
93) 특히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에 관해서는 千本秀樹, 天皇制の侵略責任と戰後責任 , 靑
木書店, 1990;井上淸, 天皇の戰爭責任 , 岩波書店, 1991;山田朗, 大元帥昭和天
皇 , 新日本出版社, 1994 참조.
94) 토오쿄오재판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은, 우선 박원순, 아직도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 , 한겨
레신문사, 1996;東京裁判ハンドブック編集委員會編, 東京裁判ハンドブック ,
靑木書店, 1989;粟屋憲太郞, 東京裁判論 , 大月書店, 1989 참조.
95) ロバ―トE. ウォ―ド, 「戰時中の對日占領計劃」, 坂本義和他編, 日本占領の硏究 , 東京大學出版會, 1987, 65~66면.
96) 望田幸男, 「 戰爭責任・戰後責任 問題」, 粟屋憲太郞他, 戰爭責任・戰後責任 , 朝
日新聞社, 1994, 7면.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31
실은 자기 자신에게 들이대어진 칼이다라는 것을 잠재의식으로 느끼”고 있던 일본
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면책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함으로써, “주체적인 전쟁책임
의식의 형성, 즉 ‘과거의 극복’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 것이다.97)
한편 천황제의 연속은 일본의 대외적인 과거청산의 부재로도 이어졌다. 천황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건재하다는 것은, 그 천황의 이름으로 자행된 ‘침략’ 또한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배상할 것이 없다라는 ‘책임회피의
논리’가 성립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지적되듯이, 독일은 패전 후 과거의 잘못에 대해 철저한 배상을 했고, 그 배
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데 대해,98) 일본은 약간의 ‘보상’을 했을 뿐이다. 특히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99)에 의해 지불한 무상공
여 3억 달러와 장기차관 2억 달러의 성격에 대해, 일본측은 결코 과거의 잘못에 대
한 ‘배상금’이 아니라 한국에 대한 ‘경제협력자금’ 혹은 ‘독립축하금’이라는 주
장100)을 관철해 오고 있다. 또한, 일본군‘위안’부를 강요한 행위와 관련해서도, 그것
이 명백한 국제법위반의 범죄행위로서 지금도 처벌되어야 하고 배상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101) 처벌은 물론 배상조차도 거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문
제에 관해 일본의 국가기관이 일본의 책임을 인정한 유일한 예라고 할 수 있는 「시
모노세키(下關)판결」조차, 원래의 침해행위에 대한 배상을 직접 명령하지는 않고
97) 粟屋憲太郞, 「東京裁判にみる戰後處理」, 粟屋憲太郞他(註96), 93면.
98) 廣渡淸吾, 「ドイツにおける戰後責任と戰後補償」, 粟屋憲太郞他(註96);田中宏,
「日本の戰後補償と歷史認識」, 같은 책 참조.
99) 한일기본조약 및 청구권협정의 체결과정에 관해서는 이원덕,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 ,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6;高崎宗司, 檢證日韓會談 , 岩波書店, 1996 참조.
100) 이러한 입장은, “새롭게 발족하는 한국에 대해, 축하라고 하면 어폐가 있지만, 잘 자라 달
라라는 취지로, 주로 이 경제협력의 문제는 고려되고 있다”라는, 1965년 조약 및 협정의
비준을 위한 일본 중의원 특별위원회에서의 시이나 에쯔사부로오(椎名悅三郞) 외상의 발
언에서 시작된다. 日本衆議院「日本國と大韓民國との間の條約及び協定等に關す
る特別委員會會議錄第十號」(1965.11.5.), 21면.
101) 국제연합의 ‘무력분쟁하의 조직적 강간・성노예제 및 노예제 유사 관행에 관한 특별보고
관’인 게이 맥두걸(Gay J. McDougall)이 1998년 6월 ‘차별방지・소수자보호소위원회・노예
제의 현대적 제형태에 관한 작업부회에 제출하여 수리된 보고서, E/CN.4/Sub.2/1998/13;
金昌祿외2 (註43) 참조.
있는 실정이다.102)
이와같이 일본이 한국 강점에 대한 청산에 적극 나서지 못하고 있는 배경에는,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 한다고 하는 “재정적 공포”와 함께, “일본제국과 천황의
침략책임을 인정”하게 된다고 하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103) 즉 적극적인 청산
을 하려고 하면 천황을 통해 패전 전과 연결되어 있는 ‘전후 일본’의 정체성이 심각
하게 흔들리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천황제의 연속
이야말로 한국 나아가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과거청산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다.104)
나아가, 일본의 대내적・대외적 과거청산의 부재를 초래하고 있는 천황제의 연
속은, 1952년의 「대일강화조약」에 의해 점령이라는 외압이 사라진 후에는, 오히려
청산되어야 할 과거와 천황제의 적극적인 방어 내지 부활이라는 퇴행적인 모습들
을 만들어 내고 있기도 하다.
히로히토의 재위 기간 동안만에도, 위에서 살펴 본 천황의 국가원수화를 위한
1950년대의 헌법개정 시도 외에도, 元號제도를 부활시킨 1979년의 「원호법」의 제
정,105) 침략을 ‘진공’으로 바꾸도록 한 1982년의 교과서 검정, 일본 각료들의 참배
를 본격화시킨 1985년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공식참배, 1988년 9월 히로히토의 중병 발표를 계기로 일본 전역에 비정상적
으로 확산되어 당시의 총리가 ‘과잉’을 우려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른바 ‘자숙’의
광풍,106) 1988년 12월 시의회에서 천황의 전쟁책임에 언급한 나가사키시의 모토지
마(本島) 시장에 대한 총격 등의 형태로, 단죄되지 않은 천황제는 일본의 지배층과
국민들 속에서 여전히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했다.107)
102) 「시모노세키판결」의 문제점에 관해서는 김창록, 「일본군‘위안부’문제의 법적 해결을 위
한 하나의 모색―시모노세키판결을 중심으로」, 人權과 正義 제167호, 1998.11. 참조.
103) 伊藤成彦, 「日韓基本條約を見直す好機だ」, 論座 1998년 11월호, 20면.
104) 그 점에서 “아시아에 대한 가해성의 인식, 전쟁책임의 자각” 자체가 “천황제적 정신구조
와의 대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라는 지적은 적확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尹健次, 「戰
後思想の出發とアジア觀」, 中村政則他編, 戰後社會と社會意識 ( 戰後日本占領
と戰後改革 第3卷), 1995, 153면.
105) 渡辺治(註80), 1990, 339면 이하 참조.
106) 岩波新書編集部編, 昭和の終焉 , 岩波書店, 1990 참조.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33
이러한 상황은 1989년의 천황 아키히토의 즉위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과거의
잘못을 부정하고 나아가 그것을 정당화하는 망언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108)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역사의 날조”라고 강변하는 코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
のり)의 만화가 특히 일본의 젊은 세대들에게 대량으로 팔리고 있는 것,109) 토오죠
오 히데키를 찬미하는 영화 「프라이드, 운명의 순간」이 버젓이 일본 전국에서 상영
된 것, 교과서에서 침략의 사실을 기술하는 것을 “자학사관”이라고 부르고, 그래서
전후 일본 민주주의의 진전을 “오욕의 근현대사”라며 ‘자학’하는 후지오카 노부카
쯔(藤岡信勝) 그룹의 “자유주의 사관”이 여전히 발호하고 있는 것,110) 1999년 7월
히노마루(日の丸)와 키미가요(君が代)111)를 각각 국기와 국가로 하는 법이 이렇다
할 저항에도 부딪히지 않고 오히려 절대다수의 국회의원들의 찬성을 얻어 제정된
것,112) 1999년 11월 12일 패전 전에도 없었던 정부주최의 ‘천황폐하재위 10년 기념
식전’이 정・재계 인사 1만 3000명이 참석하여 히노마루가 게양되고 키미가요가 제
창되는 가운데 거행된 것, 같은 날 황거 앞 광장에서 열린 ‘천황폐하 재위10년을 축
107) 金昌祿, 「 일본국헌법 의 역사에 대한 법사상사적 고찰」, 法史學硏究 제17호,
1996.12.;이노우에 타쯔오 저 / 김창록 편역, 리버럴리즘, 일본 그리고 아시아 , 부산대
학교 출판부, 1999 제2장 참조.
108) 강창일, 「전후 일본인의 역사인식과 망언」,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현대사연구팀 편,
일본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 한길사, 1996;이원덕, 「역사인식과 한일관계」, 하영선 편, 한국과 일본 , 나남출판, 1997;姜萬吉・安江良介, 「對談日韓― 妄言の50年 を
越えるために」, 世界 1995.12. 참조.
109) 上杉聰, 脫ゴーマニズム宣言―小林よしのりの「慰安婦」問題 , 東方出版, 1997
참조.
110) ‘자유주의 사관’에 관해서는 藤岡信勝, 汚辱の近現代史 , 德間書店, 1996;같은 이, 「自虐史觀」の病理 , 文藝春秋社, 1997 참조. 그리고 ‘자유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으
로는 G. 매코맥, 「일본 ‘자유주의사관’의 정체」, 창작과 비평 1997년 겨울호;藤原
彰・森田俊男編, 近現代史の眞實は何か , 大月書店, 1996;松島榮一・城丸章夫
編, 「自由主義史觀 の病理 , 大月書店, 1997 참조.
111) 이에 관해서는 田中彰, 明治維新と天皇制 , 吉川弘文館, 1992, 202~220면;歷史敎
育者協議會編, 日の丸・君が代 , 大月書店, 1999;古川純, 「天皇・日の丸・君が
代」, 橫田耕一・江橋崇編, 象徵天皇制の構造 , 日本評論社, 1990 참조.
112) 그 의미에 관해서는 서경식, 「‘히노마루’・‘기미가요’의 법제화, 죽어가는 일본민주주의」, 당대비평 1999년 가을호, 1999. 9. 참조.
하하는 국민제전’의 축하행사에 2만 5000명이 모여 히노마루를 흔들고, 키미가요를
부르고, ‘聖壽萬歲’를 거듭 외친 것113) 등이 그 사례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천황 아키히토의 시대에 들어와 천황제의 과거회귀가 오히려
더 심화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아키히토는 히로히토와는 달리 침략과 전
쟁의 과거와 직접 관련이 없다. 따라서 그러한 아키히토의 시대에 들어와 과거회귀
가, 다시 말해 천황제의 연속이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는 것은 언뜻 이상하게 보인
다. 하지만 이것은 천황제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히로히토의 시대에는 히로히토 자신이 바로 청산되어야 할 과거의 핵심이었
기 때문에, 천황제의 연속이 그만큼 ‘자제’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측면이 있었다.
히로히토의 죽음은 그러한 ‘자제’가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
론 히로히토의 시대에 천황제의 단절이 있었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과거의 천황제
에 대한 명확한 부정적인 평가가 일본인들에 의해 내려졌다고 한다면, 그의 죽음은
분명 천황제의 보다 확실한 단절의 계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절되기
는커녕 끊임없이 연속되었던 천황제의 역사 속에서 ‘때묻은 천황’의 죽음은 오히려
거침없는 연속을 위한 발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냉전 이후의 혼미 속에서의 국민
적 아이덴티티의 위기라고 하는 새로운 맥락에 있어서 일본 ‘고유의 國情’이라는
테마가 재부상하고 있는”114) 상황 속에서, “쇼오와(昭和)천황을 비롯한 지금까지의
천황을 생각하며 … 천황의 직무를 다할 것”115)이라며 천황의 자리에 오른 아키히
토 시대의 천황제의 미래를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
문인 것이다.
5. 상징천황제의 자리매김
상징천황제는, 패전전의 신권천황제에 대한 명확한 부정 없이, 오히려 ‘국체의
113) 橫田耕一(註48), 73면.
114) 姜尙中, 「アジアからみた改憲論」, 法律時報 67―6, 1995, 53면.
115) 小林武, 「天皇制論の五○年」, 法律時報 66―12, 1994, 10면.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35
호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서, 바로 직전까지 신권천황이었던 동일한 인
물이 자리를 이어가는 형태로 출범했다. 뿐만 아니라 출범 이후에도 과거와의 단절
은 적극적으로 시도되지 않은 채, 한편으로는 과거를 잘라 낸 ‘엄격 해석’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인 과거에로의 복귀의 움직임 속에서 신권천황제와의 실질
적인 연속이 이어졌다. 헌법의 조문을 형해화하는 해석과 그 해석을 뒷받침하는 관
행이 거듭되는 가운데 실질적으로 원수화가 이루어진 것은 그 당연한 귀결에 해당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와의 단절을 필수조건으로 하는 대내적・대외적 과
거청산이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상징천황제는 ‘제도적’으로는 신권천황제와 명백히 다르다. 그리고 패전 이
후의 일본 사회는 신권천황제 그대로의 천황제가 부활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변화를
겪었다. ‘신화’로부터 ‘과학’으로의 시대의 전환도 ‘살아있는 신’으로서의 천황의 설
자리를 빼앗아 버렸다. 하지만, 일본이, 과거와의 명확한 단절 없이, 「일본국헌법」
의 가치의 체화를 이루어내지 못한 상황에서, 내셔널리즘의 강화라는 방향으로 내
달릴 경우, 그 핵심으로 삼을 만한 가치는 천황 밖에 없는 것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상징천황제는 신권천황제라는 풍선에 약간의 바람을 빼낸
것이었다. 게다가 형식적으로는 미국의 압력, 실질적으로는 아시아국가들의 압력에
의해 잔뜩 찌부러든 모습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이후의 전개과정은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하는 내부의 끊임없는 압력이 외부의 압력을 밀어내는 과정이었다. 아
직 그 원래의 모습은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하지만, 안으로부터의 압력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여기에 밖으로부터의 압력마저 줄어들게 된다면, 그 풍선은 비록
신권천황제보다는 작은 형태이기는 하지만, 또 다시 원만한 모습을 회복하게 되고
말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만들지 않을 가능성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안으로부터의
압력을 점점 더 줄여 나가 결국 풍선의 형태를 없애 버리는 것, 다시 말해 일본인들
자신에 의해 천황제를 폐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황은, 국민주권원리・인권원
리와 원리적으로 모순”되며, “헌법의 기본원칙과의 모순은, 적어도 천황제를 헌법
으로부터 배제하지 않는 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원칙에 따라 모순을 없애
기 위해서는 천황제를 폐지하는 수밖에 없”116)기 때문이다.
116) 橫田耕一, 「天皇の存在意義」, 樋口陽一編, 講座憲法學 2, 日本評論社, 1994, 251
IV. 맺음말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신권천황제는 본질적으로 절대적・신비적인 군주제였으
며, 그 점은 강점하의 한국에서 천황제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가
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상징천황제는 본질적으로 신권천황제의 연속선상에 위
치하는 것이며, 그 점은 일본의 과거청산의 부재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두 가지 사실이 명확하게 되어 오지 못한 것이 일본 자체와,
일본과 아시아의 관계에 있어서의 가장 큰 맹점이었다. 스스로의 어두운 과거에 대
한 명확한 인식에 기초한 단절 없이 “전제와 예종, 압박과 편협을 지상으로부터 영
원히 제거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국제사회에서, 명예로운 지위를 차지”117)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의 뿌리를 덮어두고서 바람직한 미래를 함께 건설해 갈 수는 없
는 일이다.
바로 여기에 일본의 학자들과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해 가야 하는 국가
들의 학자들이 천황제에 보다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다. 신권천황제의 어두운 모습
을 보다 적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과제이다. 상징천황제의 ‘연속’의 측면을 보다 깊
이 추궁하는 것이 과제이다. 그리고 이 과제들은 신권천황제와 상징천황제의 문제
점이 농축되어 있는 식민지에서의 천황제와 과거청산 속에서의 천황제를 파고드는
것을 통해 가장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면, 268면 각주 (50).
117) 「일본국헌법」전문.
일본의 근현대 천황제에 관한 법사학적 고찰 37
日本の近現代天皇制に關する法史學的考察
118)金昌祿*
この小論は、1889年の「大日本帝國憲法」の制定とともに神權天皇制とし
て登場し、1945年から1946年の間に連續と轉換の過程を經て、1947年の「日
本國憲法」の「出現」とともに象徵天皇制へと姿を變え今日に至っている日
本の天皇制を、韓國の硏究者の視點から歷史的に檢討し、またその現在的意
味を明らかにすることによって、日本の特殊な君主制である天皇制に關する
韓國的理解を試みるものである。
今日まで、神權天皇制に關しては、天皇の戰爭責任の問題と關連して、
これが、制度・實質ともに日本特有の絶對的・神權的な君主制であったとす
る解釋と、制度上においては絶對的な權力が保障されている君主制であった
が、實質的には天皇は「ロボット」にすぎない立憲君主制であったという解
釋とに、解釋が分かれてきた。もちろん、神權天皇制は、個々の天皇のパー
ソナリティーや經濟的․政治的な狀況によって規定された結果、その時代時
代によってそのあり方が異なった。しかし、神權天皇制は、本質的には絶對
的・神秘的な君主制であったといえる。それは、神權天皇制の登場やその展
開過程においても確認できることであるが、何よりも强占期の韓國において
神權天皇制がどのような意味を持っていたのかを檢討することによって、
もっとも鮮明に現すことができる。
象徵天皇制は、少なくとも制度的には、神權天皇制とは少くなからず違う
* 釜山大學校法科大學助敎授.
といえる。しかし、これがそのまま兩者間の斷絶を意味するわけではない。
むしろ、象徵天皇制は、本質的には神權天皇制の延長線上に位置するものな
のである。それは、象徵天皇制の登場過程における、敗戰という名の外壓に
よる象徵天皇制の强要や日本人の全面的な天皇制への支持、また獨立以後の
天皇制强化への絶え間ない企てや解釋と慣行による實質的な强化等によって
も確認できることであるが、何よりも日本の對外的․對內的過去淸算の不在
を檢討することによって、もっとも鮮明に現すことができる。
歷史を振り返ってみれば、神權天皇制と象徵天皇制のこのような本質的な
性格を明確にしてこなかったことこそ、日本と韓國、ひいては日本とアジア
の關係における一番大きな盲點であったのである。まさにここに、日本の學
者たちと、日本との友好關係を構築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アジア諸國の
學者たちが、天皇制にもっと注目しなければならない理由があるのである。
神權天皇制の暗い姿をもっと的確に表すことがわれわれの課題なのであり、
象徵天皇制の「連續」の側面をもっと執拗に追窮していくことが課題なので
ある。そして、これらの課題は、神權天皇制と象徵天皇制の問題點が凝縮し
ている、植民地における天皇制と過去淸算における天皇制をもっと深く掘り
下げることによって、もっともよく解決できるであ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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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침저녁으로 선선한바람이불어오는 게절 주일잘보내시구
즐겁고행복가득한 주말보내시길 바람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