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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매력. キリスト者の魅力。(2024년 4월 7일 주일예배)
본문: 사도행전 4장 32절~35절
행 4: 32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34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32. 信じた人々の群れは心も思いも一つにし、一人として持ち物を自分のものだと言う者はなく、すべてを共有していた。33. 使徒たちは、大いなる力をもって主イエスの复活を証しし、皆、人々から非常に好意を持たれていた。34. 信者の中には、一人も貧しい人がいなかった。土地や家を持っている人が皆、それを売っては代金を持ち寄り、35. 使徒たちの足もとに置き、その金は必要に応じて、おのおのに分配されたからである。
지난 주일은 부활주일로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찬양하며, 또한 전도도하며 귀하고 복된 주일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성서일과의 본문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이 담대하게 전도하며 초기 기독교회는 날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초기 교회의 특별하고 매우 고유하고 매력적인 모습을 증언하고 있는데요. 그 모습을 통해 주님 다시 오실 마지막 날까지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으로 지켜야 할 태도와 자세에 대해 배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본문의 말씀 중에 주요한 구절들을 짚어 가며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는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뜻으로 모이게 됩니다. 바로 사도들이 전하고 가르쳤던 내용이 한 마음과 한 뜻의 중심인데요. 사도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이루었던 것이죠. 사도들의 가르침은 곧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단과 정통을 구별할 때 기준은 그 가르침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사도의 가르침, 곧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일한 것인지의 여부로 분별하게 됩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회사업을 하고 나라에서 상을 받았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의 가르침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면 교회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봉사하고 칭찬 받아야 합니다. 세속의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여러 사회봉사 사업에 동참해야 하지요. 하지만, 교회의 교회다움은 그런 봉사활동이나 사회사업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복음으로 하나 됨을 지켜 가는 것이 교회의 교회다움, 그 아름다움을 지켜 가는 것인 줄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1-22)
예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을 품는 것은 곧 예수님의 기도제목이요 소망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구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뜻으로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아름다움과 매력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바로 예수님의 소망과 소원을 성취한 곳임을 믿습니다.
다음으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많은 오해를 합니다. 마치 모든 것을 공동체의 공동소유를 해야만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으로 말이지요.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이 구절은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공동소유를 하는 것이 교회의 이상향적 모습이라고 말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이 구절의 핵심 내용을 34절과 35절에 보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없었던 이유는 땅과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왔고, 사도들은 그것을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순종과 섬김은 자원하여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한때 사회제도적으로 공동소유를 통해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 보려는 시도와 집단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실패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 이유는 사유재산의 분배를 제도적으로 강압하고 강제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인간의 자율적 선택에 의한 자기부인과 섬김, 그리고 헌신이 상실되어 있었던 단순한 이론과 제도, 그리고 시도였기 때문에 현실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기교회의 성도들은 그렇다면 어떻게 자원하여 자신의 재산과 소유권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배경에는 첫째로 구약의 율법에 기록된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레 25:2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개별적으로 소유하게 하신 땅을 사유재산이라고 해서 함부로 자기 임의대로 사고 팔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땅의 주인은 땅문서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와 같이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의 결단을 고백하며 자신의 모든 재산의 소유권을 교회 공동체에 자원하여 드리게 되었던 것이지요.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을 만났던 삭개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오로지 돈을 모으는 일 밖에 모르던 삭개오는 예수님과 만나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단하지요.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눅 19:8)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선언한 것은 구약의 율법이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의 것으로 선포한 것과 동일한 태도였습니다. 이렇게 삭개오가 변화된 것처럼 사도들의 가르침을 믿은 성도들도 변화되었습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자기 삶의 소유권과 주도권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 드린 것입니다.
분배의 정의를 강조하고 제도화한 공동체라고 오해했기에 어쩔 수 없이... 천국에 가게 해 준다고 하니까... 아깝지만 자기 살을 떼어내듯 하는 태도가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에 은혜를 입어서 자원하여 자신의 소유권과 재산에 대한 통제권을 양도하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모든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이들입니다. 그 증거로서 수입의 첫 번째 십분의 일을 먼저 구별하며 드리지요. 십일조 헌금은 자신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가장 먼저 예배를 드리고 한 주간을 사는 것이지요. 십일조는 내게 있는 소유권, 통제권, 주도권을 하나님께서 맡기셨음을 인정하고, 재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순종인 것이지요.
초기 기독교 성도들의 매력은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는 것에서 생겼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사유재산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서 나눠 쓰는 것을 자원하여 선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곧 이제 모든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바쳐야 천국에 간다는 뜻으로 오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은 헌금을 많이 해야만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의 35절에 보시면 성도들이 사유재산에 대해서 까지도 자신의 통제권을 주장하지 않고 사도들의 발에 가져다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의 모든 소유와 인생과 생각과 비전, 그리고 일상의 기회들이 곧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그 모든 재정의 사용처를 사도의 가르침에 합당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합당하게 돈을 모으고, 재산을 사용했다는 것이지요.
좀 더 넓은 의미로 말씀을 드리면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사용하고 실천하며 순종하였다는 뜻입니다. 단지 얼마나 헌금을 해야 하는가?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의 차원을 뛰어 넘는 것이지요.
이들이 이렇게 자원하여 헌신할 수 있도록 사도들이 증언하였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성도들로 하여금 이렇게 자원하여 헌신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속죄와 영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속죄라는 교리를 증언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다는 사실도 우리의 영생이라는 교리를 증언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도들의 증언은 곧 속죄와 영생이라는 교리를 눈으로 보여주는 실제 사건에 대한 증언이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속한 교회를 세우고 있는 한 지체들입니다.
본문의 33절에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본어 신공동역 성경은 이 구절을 “人々から非常に好意を持たれていた”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원어 성경은 “카리스 테 메가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직역하면 ‘매우 큰 카리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성도들이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 부활의 증언으로 인하여 큰 ‘카리스’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헬라어 ‘카리스’는 기쁘다, 외적으로 좋다, 매력적이다는 ‘카라’라는 단어에서 유래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대부분 ‘은혜’로 번역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 은혜가 바로 매력적이라는 뜻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으로 볼 때, 원어의 뜻으로부터 헤아려 보면 사도들의 부활증언을 듣고 믿었던 이들에게 ‘매력적인 무엇인가’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 매력으로 인해 사람들의 행실이 변화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사유재산의 소유권과 통제권을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도들의 권위에 맡겼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변화는 세속의 가치관에 찌들어 살던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세속의 가치관은 보다 많이 갖고, 보다 넓게 누리고, 보다 높이 올라가기에 힘을 씁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원하던 것을 이루며 사는 것을 성공이라고 부르지요. 하지만, 예수 부활의 증거를 믿고 소유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보다 특별한 매력이 생겼습니다. 세속적인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부활과 영생을 소망하는 매력인 것이지요. 이러한 매력은 사람의 노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생겨나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이 주시는 은혜로운 매력을 가진 사람이 맺는 열매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여러분 우리는 이미 매력적인 사람들입니다. 매력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쓰고 노력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외적인 매력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오셔서 예수 부활의 증거를 심어 주시는 성령께서 채워 주신 영적인 매력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흔히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삶에서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 어려움을 당하시는 분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기에 기도하는 것은 나의 필요가 아니라, 성령님의 생명력을 지키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안에 영적인 매력은 나의 노력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하라는 대로 순종할 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놀랍고도 매력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을 믿습니다. 이런 매력적인 삶을 허락해 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것이야 말로 너무도 기쁘고 자부심 넘치는 일이 아닐까요? 물론 주님의 부활하신 것이 믿어진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기를 쓰면서 하루를 돌이켜 보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시선을 얼마나 의식하며 살았나, 내가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궁금해 하면서 살았나, 내가 얼마나 주님의 의지하며 말하고 생각하였는가 말이지요...
오직 주님을 바라 볼 때만 우리의 영적인 매력을 지킬 수 있는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매력적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이 외모를 잘 가꾸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성공적인 인생을 자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 맘에 오신 것을 믿고 주님을 바라보고 일상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대체로 고통스럽고 고생스럽습니다. 우리 일상에 위기가 없던 적도 없고, 염려가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즐겁고 유쾌한 기억도 사실 따지고 모면 순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지리멸렬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매력적인 존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신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 내 맘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매력포인트는 외모에 있지 않고 우리 내면세계 안에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든 소유와 장래희망, 그리고 일상의 소소한 바람들을 주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는 참 매력적인 인생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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