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여행이었다. 나이는 속절없이 늘어가고 내일 일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지금부터라도 가야 할 곳과 가고 싶은 곳을 다니며 살아야 한다는 문우의 말이 이번에는 유난히 깊게 와닿았다. "갈 거면 함께 가자!"
국립중앙박물관과 인상파 거장들의 원화 전시회를 하루에 둘러보자는 제안이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평생 이런 작품들을 직접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냥 고고!"
날짜는 열흘 뒤로 정해졌고 전시회 표와 고속열차 예매도 순식간에 끝났다. 하루 만에 서울을 다녀오는 일정이라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새벽 기차라 아침을 거를 생각에 전날 삶은 계란을 준비했다. 그런데 네 명 중 세 명이 똑같이 가지고 왔다. 음식이 가득한 가방들이 한데 모이자 작은 이삿짐처럼 보였다. 종일 그 무게를 짊어지고 다닐 수는 없었다. 우리는 일부 짐을 차에 두고 가볍게 출발했다.
이번 여행에서 나를 가장 설레게 한 것은 전시회나 박물관보다 문우들과 함께 떠나는 여정 그 자체였다. 갑작스럽게 예매한 탓에 대부분 입석이었지만 그것조차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마주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몇 차례 눈치를 받았고, 마침내 승무원이 다가와 조용히 해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할 정도였다. 순간 학창 시절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들어 멋쩍었지만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마저 좌석 주인들이 나타나자 우리는 통로 쪽으로 밀려났다.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피곤했지만 대화는 좀처럼 끊기지 않았다. 그동안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생각들을 문우들과 쏟아내며 나는 내가 아직도 삶의 열기가 고여 있음을 새삼 확인했다.
드디어 서울에 도착했다. 용산역에서 택시를 타고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했다. 우리 마음은 들떠 있었지만 박물관 앞 풍경은 의외로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우선 가방부터 가볍게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편의점에 자리를 잡고 준비해 온 음식들을 해치웠다. 덕분에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도 한결 가벼워졌다. 무거운 짐을 비워내고 가벼워지는 것, 어쩌면 그것이 여행의 시작인지도 몰랐다. 생전 처음 들어선 국립중앙박물관은 규모부터 압도적이었다. 그 거대한 공간은 인류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품기에 충분해 보였다. 세계 각국에서 온 관람객들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전시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타국에서 자국의 유물을 마주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졌다.
한 점 한 점 유물과 눈길을 맞추다 보니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수없이 보았던 문화재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때는 시험을 위해 연도와 시대를 외우기에 바빴지만, 이제는 채점에서 벗어나 온전히 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정답 대신 감상이 남자 비로소 장인들의 섬세함과 시대의 숨결이 보였다. 서로 다른 문화권의 유물들을 둘러보며 문화란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삶 위에 각 민족의 예술성과 혼이 덧입혀지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중에서도 내 발길을 오래 붙잡은 것은 경천사지 10층석탑이었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석탑과 달리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탑은 놀라울 만큼 섬세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탑 전체를 뒤덮은 정교한 조각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서유기 부조상이 새겨져 있다는 설명을 읽으며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탑의 내력을 읽어 내려가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가 가까스로 돌아왔고, 심하게 훼손된 채 오랜 세월을 견뎌야 했던 탑이었다. 수많은 상처를 입고도 결국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개관과 함께 실내로 옮겨진 탑은 로비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모진 풍파를 견디고도 끝내 무너지지 않은 그 모습에서 문득 내 삶이 겹쳐 보였다. 세월 속에서 상처받고 깎여왔지만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 말이다.
탑 앞에 서자 석공들의 장인정신이 절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역사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은 그 당당함은 내게 묵직한 위로가 되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런 간절함과 경외심 앞에서 자연스럽게 두 손을 모으게 되는지도 모른다.
유물들을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다음 일정이 떠올랐다.
"김홍도 특별전도 봐야 해!"
누군가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홍도의 그림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벗처럼 반가웠다. 교과서와 달력 속에서 보던 작품들을 실제로 마주하니 익숙함 속에서도 새로운 생동감이 느껴졌다.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은 생각보다 훨씬 따뜻했고 생생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술이 채워주는 충만함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어느덧 서울에서의 짧고 강렬한 하루가 저물었다. 우리는 다시 고향으로 향하는 고속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번에는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온종일 걸어 다닌 탓에 몸은 피곤했지만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종일 함께 웃고 떠들던 문우들이 옆자리에 없다는 사실이 문득 허전하게 느껴졌다. 올라올 때의 피로가 내일을 알 수 없는 인생에 대한 두려움과 비장함이었다면, 돌아가는 길의 피로는 마음껏 살아낸 하루가 남긴 훈장 같았다.
가방은 편의점에서 음식을 비워내며 가벼워졌고, 가슴속 답답함도 문우들과 나눈 이바구 속에 털어냈다. 그 빈자리는 역사와 예술,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대견함으로 채워졌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인생이라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오늘 나는 여행지보다 먼저, 진짜 나를 만났기 때문이다.
나의 다음 여정도 망설임 없이.
"그냥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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