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프의 향기
이방주
하늘재에도 초미세먼지가 자욱하다. 미세먼지는 하늘재 너머에서 오는 봄을 부옇게 가려놓고 있었다. 장엄한 백두대간도 작은 먼지 알갱이들이 흐려놓은 그 안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포함산이 바위벽인지 미세먼지인지 분간조차 어렵다. 주흘산에서 부봉으로 달려온 용틀임에 붓으로 툭툭 찍어놓은 것 같은 낙락장송들이 흐릿한 장막에 가려 하늘재로 내려서지 못하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한 나들이이다. 연풍 소조령 터널을 지나 지릅재를 넘기로 했다. 미세먼지 때문에 내 끼인 동양화처럼 구름 위에 앉은 신선봉을 바라보며 소조령 터널을 지나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나온다. 느티나무에서 우회전하면 지릅재로 오르는 길이다. 지릅재 올라가는 길에 작은 카페가 있다. 이름도 향기로운 ‘램프의 향기’이다. 램프의 향기는 바로 길가에 있어서 속도를 줄일 필요도 없이 핸들만 오른쪽으로 15도 정도 돌리면 주차장에 차를 댈 수가 있다. 주차공간이 여남은 되는데 한두 대 들어설 만큼 늘 비어 있다. 그러니 카페도 한두 자리는 늘 비어 있다. 우리네 삶의 공간도 늘 그만큼 여백이 있었으면 좋겠다.
램프의 향기에는 오래된 램프가 있다. 아주 오래된 서구식 램프를 보고 있노라면 동유럽 어느 카페에 앉아있는 느낌이 든다. 1970년대 젊은 시절에 카페에 들어가면 비엔나커피를 주문했다. 커피에 아이스크림을 얹은 비엔나커피는 커피향과 함께 달달한 아이스크림 맛이 좋았다. 하얗게 아이스크림이 묻은 그녀의 입술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막상 오스트리아 빈의 번화가라고 하는 게른트너 거리 오래된 카페에는 비엔나커피가 없었다. 커피에 우유와 아이스크림을 얹어 멜랑쥐(Melange)라고 했다. 램프의 향기에도 멜랑쥐가 있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이다.
오스트리아 빈의 게른트너 거리에서도 보지 못한 오래된 램프를 돌아보며 아내와 커피를 마셨다. 멜랑쥐커피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냥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램프의 향기에서는 아메리카노 향기도 멜랑쥐만큼 향기로웠다. 창 너머로 들려오는 물소리 새소리가 달달한 맛을 대신해 주었다. 나는 커피를 들고 오래된 유럽풍의 램프를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작고 앙증맞은 놈도 있고, 벽을 반쯤 차지할 만큼 커다란 램프도 있었다. 한 5세기쯤 전에 어둔 방을 밝혔을 법한 이 램프들은 대체 어떤 사람에게 빛을 주었을까. 당신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 2세기쯤 전에 벽에 커다랗게 걸렸을 법한 저 램프는 또 어떤 권력자의 흥청거리는 카니발을 밝혀 주었을까. 아름다운 옥이 아직도 초록으로 빛나는 작은 램프는 어느 젊은 부부의 침실에 은은한 빛을 주었을 것 같다. 한 50년이나 60년 전쯤 우리를 밝혀주던 석유램프도 있다. ‘어둠 가운데 빛이 있으라.’라고 했던 창조주의 말씀을 들어 어둠을 밝혀 밝음을 주었다. 램프는 기쁨과 슬픔에 빠져 있는 미몽을 밝혀 교만하지도 지나친 애상에 젖지도 않도록 우리의 영혼에 희망과 위안을 주었다.
램프의 향기에는 커피향이 추억의 향기를 불러준다. 한 40여 년 전 나는 석유램프 아래 있었다. 시골 초등학교 초임교사로 부임하여 향기롭지 않은 석유의 그을음 아래 밤을 새웠다. 혼자 자는 방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램프를 밝혀놓고 야학을 열었다. 지금은 램프가 추억이지만, 어두웠던 70년대 산골 젊은이들에게는 희망이었다. 램프는 추억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도 담고 있다.
연풍에 한 이년 근무한 적이 있다. 저녁에는 사택에서 승용차로 15분쯤 걸리는 램프의 향기로 차를 마시러 다녔다. 커피를 마실 때도 있었고 달달한 향이 진한 페퍼민트를 마실 때도 있었다. 낡은 피아노가 한 대 있었다. 차를 마시다가 분위기에 취하면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그집 앞’을 부르기도 했다. 램프의 향기는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거친 내 노래에도 박수를 보내주는 그런 향기로운 카페였다. 램프는 내게 그런 추억도 있다. 그런데 그때 그 낡은 피아노가 십년도 더 지난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십년이 넘었는데 주인도 옛 주인, 램프도 옛 램프, 낡은 피아노도 옛날 그대로다. 차향은 더 은은하고 주인의 눈빛은 더 따사롭다. 주인과 장작난로 앞에서 지금은 옛날이 된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 간 음악선생님의 피아노 반주 맞추어 그집 앞을 부르던 이야기에서 주인은 나를 기억해 냈다. 주인도 이제 중년의 정숙한 부인이 되어 있었다. 늘 차향만 맡으며 오래된 램프가 불을 밝혀주어서 그런지 ‘내 누님 같은 여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램프의 향기를 느끼고, 그녀가 우리에게서 또 다른 향기를 느껴주기를 소망한다.
머리가 하얀 노부부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고결하다. 할아버지는 점잖게 엄숙하고 할머니는 다소 수다스러운 듯해도 하얀 머리가 커피 향처럼 곱다. 커피향이 온몸에 스미고 인정에 가슴이 따뜻해질 즈음 밖으로 나왔다. 주인 남자가 마당에서 난로를 덥힐 장작을 패고 있었다. 봄볕이 마당에 가득하다.
차를 몰아 미륵사지로 향한다. 지릅재를 넘어서면 하늘재로 오르는 길옆에 미륵사지가 있다. 미륵사 복원공사를 하느라 가림막을 쳤다. 차를 세우고 그냥 하늘재로 걷는다. 소나무가 하늘을 찌른다. 낙락장송으로 척척 늘어진 가지여야 소나무다운데 붉은색 기둥만 하늘을 떠받치듯 솟아있다. 그런대로 나도 하늘로 솟는다. 해토머리 오솔길은 얼음이 풀리기 시작하여 말랑말랑하다. 발목이 참 편하다. 소나무가 가려 주어 뿌연 하늘도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좋다. 봄을 맞아 조금 더 푸르러진 솔잎이 향기롭다. 램프의 향기에서 향기가 여기까지 따라온 것인가.
하늘재에서 문경을 바라보며 저기 저 아래로부터 재를 올라와 서울로 향하던 영남의 문인들을 생각한다. 하늘재 아래 경상도는 숲이 아니라 사과밭이다. 우리 충청도 사람들은 하늘재에 와서 영남의 사과밭을 보고 영남 사람들은 하늘재에 와서 충청의 소나무를 본다. 하늘재는 영남에서 충청도를 지나 서울로 통하는 길이다. 옛날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만나던 곳이다. 마중 나온 김유신이 김춘추를 만나던 계립령이 바로 여기이다. 나는 역사를 통해 김유신이 섰던 자리에서 김춘추를 맞아본다. 하늘재는 경계이기도 하고 소통의 길목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이 여기 하늘재이고 현재가 미래로 향하는 곳이 여기 하늘재이다. 민중이 권력이 되려고 넘던 고개도 하늘재이고 권력을 내려놓고 낮은 세상으로 넘어가던 고개도 하늘재이다.
하늘재에서 걸어 내려오면서 램프의 향기 같은 과거를 생각한다. 과거는 그냥 그리움일 수도 있고 미래로 이어가는 디딤돌일 수도 있다. 램프는 과거를 살던 사람들에게는 어둠을 밝혀 미래를 열어주더니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영혼의 어둠 밝혀 감성을 일깨운다.
돌아오는 길 램프의 향기에는 아직도 승용차 몇 대가 서 있다. 마당도 주변 소나무도 봄을 맞는 램프의 향기에 젖어 고요하다.
첫댓글 램프의 향기가 이곳까지 전해지는것 같습니다.
커피향과 함께하는 나들이는 언제나 행복입니다.
그윽한 향기속에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빼놓지 않고 회원들의 글에 댓글을 다는 정성은
충북수필에 대한 사랑이고 수필문학에 대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아침에 제가 답글을 올린 것 같은데 사라져서 다시 올립니다.
낭만이 가득합니다
램프를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설파하고 추억과 희망, 비움과 고요를 만끽합니다
램프의향기 잘 느끼고 갑니다^^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힐링캠프도 한 번 구상해 봐야 하는데
다른 곳만 갔는데도 좋은 말씀 해주셔서 더 감사합니다.
10여년전 직장동료들과 경상도에서 하늘재를 넘어 충청도로 오며
태어나서 하루동안에 가장 많이 걸은 날로 기록되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해냈다는 기쁨으로 가슴 벅찼습니다.
물론 램프의 향기에서 차도 마시며 낭만 가득한 하루를 보냈지요.
그때를 회상하며 행복에 젖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괴산청 관리과장으로 계실 때
저희 학교에 오셨을 때 램프의 향기 생각을 했지만
교사들은 늘 수업에 얽매어 있어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작품을 읽고 가보지 않은 분위기 좋은 카페 램프의 향기와
가수 우정덕의 노래로 알게된하늘재가 그려집니다.
기회가 되면 찾아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예, 회장님
하늘재로 오르는 소나무 숲길을 천천히 걷고 내려와 램프의 향기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도 운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늘재에서 바라보면 멀리 동로로 넘어가는 천주교 대미 성지가 보이고요.
한 번은 가볼만한 길입니다.
오래된 찻집 램프의 향기,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않는 정겹고 여여한 찻집이 한폭의 그림으로 그려집니다.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여기 가면 낡은 피아노가 한 대 있습니다. 10년전 그자리에 그냥 그모습으로 앉아 있습니다. 다른 램프들도 그렇고 탁자도 의자도 낡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커피맛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