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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은 기쁜 날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기 위해 오신 날이니까요. 세상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크리스마스 시즌을 기뻐하는지 모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탄절은 기쁜 날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왜 기뻐해야 할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 이방인으로 있었을 것입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은 유대인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이방인은 '비유대인'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며 더러운 사람이기에 선택받고 깨끗한 유대인이 교제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종종 구원을 허락하셨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이방인들은 자주 푸대접을 받고 홀대를 받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남자들은 아침마다 유명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를 이방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노예도 되지 않게 하시고, 또한 여자도 되지 않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여기에서 이방인은 여자나 노예만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업신여겼고 교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런 금기(禁忌)가 깨졌습니다. 유대인들이 할 수 있으면 이방인 지역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이방인을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이방인 지역에 일부러 들어가셔서 이방인들과 함께 어울리셨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은 나병을 앓던 혼혈족 사마리아 사람을 치료해주셨습니다(눅 17: 11-19).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시면서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마 8: 5-13). 이방인인 백부장을 칭찬하실 때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극찬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들었을 때 민족적인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할 수 있는 발언이었지요.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이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셨습니다(요 4: 1-42). 그것도 밤중이 아닌 한낮에 대화를 나누셨는데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을 최초의 선교사로 지명하여 세우셨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들의 상당 부분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이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먼저 내린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이방인을 하나님의 구원 계획안에 적극 포함시키고자 했던 예수님의 뜻은 마지막 명령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 19). 유대인들만이 아닌 전 세계의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라는 명령이지요.
이러한 예수님의 정신이 사도들을 통하여 초대교회에서도 그대로 계승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당부하셨습니다(행 1: 8). 그리하여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신비한 환상을 본 다음 이방인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모든 집안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회심한 뒤 이방인을 위한 선교 사역은 요원의 불길처럼 활기를 띠고 복음은 전 세계에 땅 끝까지 두루 퍼져나가게 됩니다.
성탄절을 기다리는 우리가 기뻐해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방인인 우리가 살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바깥에 놓여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 덕분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만일 아직도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이방인'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을 기뻐해야 할 이유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누구나 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길이 열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인종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이방인' 개념을 말씀드렸지만 이번에는 윤리 도덕적 차원입니다. 어떤 사람이 깨끗하든 더럽든, 착하든 악하든, 의롭든 불의하든 우리의 신분이나 도덕적 상태와 상관없이 누구나 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서를 읽어보면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의롭고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 역시 의롭고 거룩해야만 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먹는 음식까지 정하고 부정한 음식을 가려서 아무 음식이나 함부로 못 먹게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물도 아무 것이나 바칠 수 없었습니다. 깨끗지 못하고 흠이 있는 동물은 희생 제사용으로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최고로 완전하고 흠이 없는 제물만 받으시기에 이른 바 불량품은 무조건 사절하신다는 논리입니다. 레위기 22: 21-25절을 보세요.
"만일 누구든지 서원한 것을 갚으려 하든지 자의로 예물을 드리려 하여 소나 양으로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리는 자는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 너희는 눈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습진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이런 것들은 제단 위에 화제물로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 소나 양의 지체가 더하거나 덜하거나 한 것은 너희가 자원제물로는 쓰려니와 서원제물로 드리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하리라 너희는 고환이 상하였거나 치었거나 터졌거나 베임을 당한 것은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너희 땅에서는 이런 일을 행하지도 말지며 너희는 외국인에게서도 이런 것을 받아 너희의 하나님의 음식으로 드리지 말라 이는 결점이 있고 흠이 있는 것인즉 너희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어디 제물용 짐승만 흠이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까지도 등급을 매겨서 흠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레위기 21: 17-21절을 보세요.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너의 자손 중 대대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니라 누구든지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곧 맹인이나 다리 저는 자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등 굽은 자나 키 못 자란 자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고환 상한 자나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 즉 나와서 그의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참으로 기가 막힌 율법이지요. 만일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더라면 우리 중 누가 신체에 장애가 있으면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발이나 손을 다쳐도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눈에 백내장이 있어도 예배드리러 나올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피부에 습진이나 버짐만 있어도 예배들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와 같이 기막힌 율법을 '정결을 빙자한 죽음의 논리'라고 불렀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구약의 율법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완전하시고 정하시고 거룩하시다는 생각 때문에 설령 그 사람이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더럽고 흠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로운 세상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흠이 많고 죄가 많은 이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율법대로 한다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는 일은 있을 수 없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나환자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받는 여성을 고쳐주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창기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셨고 기꺼이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스스로 깨끗하고 의롭고 온전하다고 떠벌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과 형식주의를 비판하셨습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모세의 율법 정신에 따를 때 마땅히 배제하고 버려야 할 흠있고 부정한 자들을 기꺼이 품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천국 잔치에 까지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큰 잔치의 비유'를 보면 초대한 사람들이 갖가지 핑계를 대고 잔치에 오지 않습니다. 밭을 샀으니 그것을 보러 가야 하고, 소를 샀으니 시험도 해봐야 하고, 장가를 가서 신혼의 단꿈에 젖어 못 온다고 변명을 해댔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주인이 어떻게 합니까? 누가복음 14: 21절을 보세요.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초대받았으나 거부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지요. 이제 예수님이 새롭게 초대한 사람들은 정통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한결 같이 더럽고 흠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세리나 창기, 이방인, 죄인들, 여자, 노예, 등등 흠 있고 부정한 자들도 천국 잔치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필립 얀시의 말대로 한다면 불량품을 사절한 것이 아니라 불량품도 O.K.라고 하셨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님 오신 날 성탄절을 기쁨으로 기다려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지성소에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1년에 단 한 차례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 빌기 위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도 발목에 줄을 매야만 했습니다. 혹시라도 잘못이 있어서 지성소 안에서 죽을 경우 다른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으므로 줄을 당겨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제 예수님이 새로운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셔서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던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습니다(마 27: 51). 예수님의 몸을 친히 찢으시므로 이제 대제사장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만인 구원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이지요!
이것을 히브리서 9: 24-2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이 오심으로 우리와 같은 이방인이요 흠이 많고 더러운 죄인도 살 길을 얻게 되었습니다. 감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히브리서 4: 14절과 16절의 말씀 그대로 '큰 대제사장"이신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뻐하고 소망 중에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불량품도 사절하지 않으시고, "O.K.! 하신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구약 사람들이 두려워한 것은 깨끗하지 못한 음식이나 짐승이나 사람들과 우리가 접촉할 경우 그 더러움에 오염되는 것이었습니다. 더러운 음식이나 시체, 부정한 짐승, 이방인 등과 접촉할 경우 더러움에 오염되어서 거룩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흐름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혈루증 앓은 여인이나 나병환자와 접촉하셔서 오염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병을 그 근원부터 깨끗하게 만드셨습니다. 세리나 창기나 죄인들, 소외된 여인들, 이방인들과 교제하셔서 오염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깨끗하게 만드셨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나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하여 세상 사람들과 일체의 접촉을 끊고 홀로 의로운 척 할 것이 아니라 저들을 거룩한 길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것을 필립 얀시는 살충 분무기를 함부로 뿌리는 행위와 향수 분무기를 뿌리는 것과의 차이로써 비유합니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다 불량품이므로 우리가 함부로 정죄만 한다면 우리는 바퀴벌레를 죽이기 위하여 살충제를 뿌리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흠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한 방울의 향수가 되어준다면 이내 그 사람에게서도 향내가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향수 분무기 보다는 살충 분무기를 든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의인들만 부르러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더럽고 때 묻고 흠 많은 불량품 인생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어떤 술주정뱅이가 지하철에 탔는데 신부님이 바로 옆에 앉았습니다. 남자는 술독에 빠졌다가 금방 나온 사람처럼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고 넥타이도 엉망으로 삐뚤어져 있었습니다. 룸살롱에 들렸다가 나왔는지 얼굴에는 빨간 립스틱 자국이 군데군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신문을 꺼내 읽기 시작하더니만 신부님을 돌아보며 물었습니다. "신부님, 관절염에 걸리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신부님은 순간적으로 이 술주정뱅이를 멸시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 그건 말이요. 매일 술독과 여자에 빠져 엉망진창으로 살게 될 때 그렇게 되지요."
그랬더니 남자는 "아, 그렇군요." 하면서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순간 신부님은 자기가 좀 지나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사 양반, 미안합니다.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소. 그래, 관절염에 걸린 지는 얼마나 됐소?" "신부님, 저는 관절염 따위는 안 걸립니다. 여기 신문에 보니까 교황님이 관절염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5만 원짜리 지폐는 아무리 더럽고 구겨져도 여전히 5만원의 가치가 있습니다. 누구도 더럽고 구겨졌다고 해서 버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말할 것도 없지요. 아무리 더럽고 흠이 많다고 해도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바로 그 더럽고 흠 많은 불량품 인생을 위해서 연약한 아기요 죄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도로시 데이는 말합니다. "내가 가장 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사랑. 나는 그 사랑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옳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볼 때 가장 많이 일그러지고 상한 영혼들을 뜨겁게 사랑하셨습니다. 불량품 인생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품어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정통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형편없는 불량품 인생들입니다. 이런 우리도 용납하시고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우리 모두 큰 기쁨과 소망으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립시다! 아멘.
주님께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이 한 주 앞으로 다가 왔습니다.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대강절에 연주 한곡 녹음했습니다.
오 홀리나잇(오 거룩한 밤) 앨토 색소폰으로 연주했습니다.
위 사진은 12.16. 두란노 아버지학교 춘천지부 송년축제에서의 연주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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