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의 뿌리
이 홍사
달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 인마! 달은 본디 뿌리가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셔요. 세상에 뿌리가 없는 게 어디 있어요?
뿌리가 없다니?
뿌리를 지니지 않은 것이 어떻게 저렇게, 하루가 다르게 자랄 수가 있을까? 달의 뿌리는 항아리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주 과학적인 근거로 따지면 태양이 지구에 가려진 그림자가 달에 어쩌고, 운운하며 거기에 뿌리가 있다고 하겠지만 그런 이론은 항아리 앞에서 싹 무시당한다.
달의 뿌리는 누가 뭐래도 항아리에 있다.
달의 기원은 항아리에 있다?
이건 말이 되는 소리인가?
동지가 가까워지니 해가 상당히 짧아졌다.
석양이 물드는가 싶더니, 골짜기 동쪽에 산을 깎고 부지를 밀어서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 사이로 둥근 항아리 하나가 하늘가에 떠오른다. 보름달이다.
저 아파트 이름이 뭔지 모르겠다.
요즘은 아파트 이름이 참 어렵다. 옛날에는 광명, 태왕, 현대, 신화, 대충 이런 이름이었는데 지금은 그린빌, 휴먼시아, 우미린, 듀클라스, 에버빌,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식이 유행이어서 외우기가 상당히 어렵다.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하나 전세를 놓은 공단동의 아파트 이름이 갑자기 기억나지 않는다. 그 옛날 주공 아파트에 살다가 그 아파트를 재개발해서 다시 분양받았는데 이름이 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푸르지오인가? 파라디아인가? 확실하지 않다. 이름을 모른다고 전세를 준 아파트가 달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달항아리다.
사무실에 앉아서 새로 지은 아파트 사이로 떠오르는 그 항아리를 나는 보고 있다.
* 달이 있는데 세상은 왜 이리 어두운가?
누나는 아궁이에서 붉은 달을 꺼내 자궁으로 넣었다.
달은 누나의 자궁 속에서 자꾸 커간다.
누구의 시인지 모르지만, 그 구절이 갑자기 입에서 맴돌았다. 달이 있는데 세상은 어둡기만 하다. 암울한 심정이어서 더 어둡게 여겨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치판에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다. 머지않은 옛날 국민을 현혹하던, 찬란한 공약사항은 길거리의 개가 물고 다닌다.
달을 항아리로 비유하는 것은 골동품 경매장에 다니면서 들어서다. 아주 둥근 항아리를 달항아리라고 했다. 달항아리라는 말을 듣고 나니 적절한 비유이구나. 공감하며 감탄했다. 누가 도자기의 종류에 이름을 붙인 것인지 모르지만 적절한 비유가 참 많다. 참외 도자기. 주판알 도자기. 달항아리. 듣고 보면 모양이 그렇구나 싶다.
달항아리라는 말을 듣고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그렇구나. 달의 뿌리는 항아리에 두고 있구나.
그걸 이제야 알았구나.
달의 뿌리가 항아리에 있다고 생각했던 날. 미색으로 된 달항아리를 사서 안고 돌아왔다. 정말 달을 연상시키는 물건이었다. 어느 도공의 손길이 이토록 둥글까? 감탄하며 항아리를 몇 번이나 쓰다듬어 보았다. 세상에 모가 난 것은 정을 맞는다. 모름지기 사람살이는 이렇게 둥글둥글해야 한다는 것도 그날 알았다. 여태 뭘 보고 살았는가? 달항아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항아리나 도자기를 유약을 칠하여 두 번 구운 매끈한 것을 나는 선호하지 않는다. 질감이 우선이다. 초벌구이한 것이 질감이 좋고 정감이 간다. 유약을 입힌 항아리는 금세 싫증이 난다.
그 달항아리를 사긴 했는데 사무실에 놓을 곳이 마땅치 않아 대기 선배에게 선물이라며 주었다. 사람은 저마다 취향이 달라서 선배는 골동품에는 관심이 없고 난초를 가꾸는데 취향이 있다. 골동품에 관심이 없다는 사람이 단박에 알아보았다.
어? 달항아리네? 이걸 나를 주려고?
달항아리를 아셔요?
이 항아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거야. 하늘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달항아리를 땄지?
누나의 자궁에서 나온 거예요.
그렇게 선문답을 하면서 달의 뿌리에 대해서 생각했다.
달을 따면 허연 실뿌리가 있겠지.
달을 따려면 하늘을 보아야 한다. 그건 불변의 진리다. 그러나 지금은 하늘을 볼 수가 없다. 누군가 손바닥으로 철저하게 하늘을 가리고 있다. 그래서 세상은 암흑이다. 이 암흑 속에서 사람들은 출구가 어디인지 더듬는 실정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택시를 타면 이 말은 누구나 쉽게 듣는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행되면 또 욕이 나온다. 뭘 숨기고 싶어서 이렇게 하늘을 가리고 있는가?
* 누군가는 지난밤에 또 이력서를 쓰다가 잠이 들었다.
일거리가 없다. 찾아도 일거리가 없는 세상이다. 일이 취미인 자는 미칠 지경이다. 이력서를 쓰는 게 일인 세상이 되었다. 이 땅에 들어온 외국인은 일이 있는데 정작 자국민은 일자리가 없다.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난초를 가꾸거나 골동품을 닦는다.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평소보다 늦게 만나기로 한 선배는 지금쯤 창에 비닐을 다 설치하고 난초를 닦고 있을지도 모른다. 선배와의 약속 시간을 기다리며 사무실에서 불도 켜지 않고 나는 달을 보고 있다.
선배는 언제 골동품상에 들르거든, 글씨나 그림이 없는 매끈한 백자가 있으면 하나를 사 오라고 주문했다. 자신이 쓰겠다는 것이 아니라 백자에 난초를 붙여주겠다는 것이다. 난초가 도자기에 뿌리를 내리나?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붙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직 마땅한 도자기를 찾지 못했다. 그 마땅한 도자기를 찾아 매주 골동품 경매장을 다닌다. 골동품 경매장에 가보면 한숨이 나온다. 골동품은 차 순위이고 공산품을 먼저 경매한다.
공산품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공산품은 매우 싸다. 싸게 팔려고 경매장에 가지고 나온다. 폐업한 도매상이나 망해버린 공장의 물건을 들고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망해버린 공장은 지천에 늘려있다. 공장은 죽을 수밖에 없다. 갖가지 규제로 죽고 있는 게 기업이다.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보따리를 싸 들고 해외로 나가는 실정이다. 이 땅에서 기업을 한다는 것은, 제 무덤을 파는 일이라고 공공연히 떠벌리는 세상으로 둔갑했다. 이 나라에는 희망도 미래도 없다.
이번 정부가 출범하면서 일자리 창출을 공약사항으로 내걸었다. 일자리가 얼마나 없었으면 그런 걸 공약사항으로 내걸어? 희한하게도 그게 먹혀들었다. 요즘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백수가 된다. 취준생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긴 마당이다. 그러나 기업은 타도나 척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세금의 삼 할 이상을 한 대기업에서 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못 갈라 안달이다. 그러면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 기업을 죽이면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지랄하지 마세요
일자리는 전부가 정부의 취업률에 붉은 그래프만 올리는 단기성 일자리다. 세금을 풀어서 일자리를 만든다. 일주일에 세 시간을 일해도 취업률에 잡힌다. 빈 강의실 불 끄기. 꽁초 줍기. 공원의 잡초 뽑기. 그래도 감지덕지다. 아들이 집에서 노니까 그것이라도 벌어야지.
젊은이들은 모두가 이력서만 쓰는 백수고 노인 일자리만 늘어났다. 그래도 취업률은 상승하는 그래프가 그려지고 있다. 염병할, 그래도 달은 뜬다.
선배는 오늘도 노인 복지회관에서 점심 식사에 밥을 푸는 당번을 했다고 했다. 자신도 초로의 노인에 해당하면서 그런 봉사를 한다.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거의 삼백 명이 점심을 드신다고 했다. 정말 복지국가다. 선배는 노후 대비라고 해놓은 것이, 정책이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다고 투덜거렸다. 세금 폭탄이라 세를 놓은 집을 팔지 않을 수가 없노라고 했다.
선배는 집이 두 채였다. 서울 강남의 노른자위에 있는 집이 아니라 구미, 구미에서도 변두리에 있는 집이다. 한 집은 선배가 살고 한 집은 세를 놓아 고정수입원을 만들어 노후를 대비한다고 평생에 걸쳐 장만한 것이다. 그런데 일 가구 이 주택에 걸려 세금이 폭탄이다. 징벌적 과세, 엎어놓고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배보다 배꼽이 크다. 지난해만 해도 그게 계산상으로 가능했는데 법이 바뀌니 계산이 나오지 않는다. 선배의 말을 듣고 주먹구구식으로 계산해도 그랬다.
* 달이 허공에서 툭 떨어졌다.
달이 떨어지다니? 현실로는 불가능한 계산법이다. 집을 팔던 날 선배는 나를 불렀다. 술을 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오랜만에 시내의 비싼 요릿집에 갔다. 쇠고기 스테이크를 먹었다. 먹는 게 남는 것이다. 먹고 죽자는 말을 하며 술에 만취가 되어 울먹였다. 최소한 내 눈에는 울먹이는 것으로 보였다. 울먹이며 노후 대비를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나에게 하소연했다. 대책이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나이를 거꾸로 돌리면 되잖아요?
그 소리가 목을 간지럽혔지만 뱉어내지 못하고 다른 소리를 했다.
“그냥 살면 돼요. 육군 하사가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선배는 하사 출신이다. 둘이서 술을 마실 적에는 군대 이야기를 가끔 한다. 선배는 호적이 늦게 등재되었고 또 군에 늦게 가서 나랑 비슷한 시기에 군 생활을 했다. 엄밀하게 따지면, 나보다 조금 일찍 가서 조금 늦게 전역을 했다. 그래서 군대 이야기가 나오면 할 말이 참 많다. 나는 병장 출신이고 선배는 하사 출신이다. 병장과 하사의 친화적이지 못한 관계가 이야기 속에서 툭툭 불거지며 여실히 드러난다. 평소에는 그랬지만 그날 나는 선배 편에 서서 육군 하사가 안 되는 게 무엇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선배는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그래서인지 나보다는 핸드폰의 기능을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유용하게 쓴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아날로그 세대이지만 선배는 스마트 세대다. 내가 모르는 기능이 있으면 선배에게 묻는다. 그냥 알고만 지내던 선배인데 친밀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선배는 혼자서 여행을 자주 하는 여행 마니아다.
절친하게 지내게 된 것은 한 사오 년이 되었나?
사실 선배라고 명명하지만, 학연이나 지연으로 걸리는 부분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인생의 선배일 뿐이다.
애써 연결고리를 찾자면 친구의 친구가 되는 진기 씨의 친형인데 진기 씨보다는 더 자주 만나고 친하다. 구미라는 좁은 바닥에 살다 보면 그렇게 연결이 되어 친해지게 된다. 물론 죽이 맞아야 그렇게 되는 것이긴 하지만.
선배가 미얀마 여행을 계획하고 있을 적에 선배와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물론 다른 지인들도 있었던 술자리였는데 그 자리에 들러리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선배는 미얀마의 내 전화번호를 물었다. 중국을 갔다가 대략 언제쯤 미얀마에 건너갈 것이라고 했다.
선배가 말한 그 시기는 내가 미얀마에 있을 시기다. 나는 대략 한 달은 미얀마에서 일하며 머물고 한 달은 한국에서 일한다. 일에 대해 욕심이 많은 나는 그래도 일에 만족하지 못한다. 짬을 이용하는 일이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아무튼, 미얀마에 오시면 여행을 돕겠노라고 했다. 선배는 그 말을 들으려고 전화번호를 물었다고 담백하게 말했다.
선배는 중국을 거쳐서 가는 것이니 미얀마에 도착하는 날이 정확하지 않다고 했다. 상관없는 일이다. 공항은 사는 집의 지척에 있으므로 비행기 도착시간만 알려주면 나가겠노라고 했다. 물론 숙식은 성실히 제공하겠노라고 했다.
나는 미얀마에 들어가서 그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날 연락이 오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중국에서 차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연락이 올 때가 되었는데? 나는 혹시나 전화를 못 받을까 봐 전화를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틀 후에 연락이 왔다. 어디냐고 물으니 쿤밍이라고 했다. 쿤밍은 우리 발음으로 곤명으로 불리는 중국 운남성의 성도다. 양곤에서는 비행기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다. 몇 시에 도착이라는 말을 듣고 오토바이를 타고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선배가 사교성과 더불어 여자에게 끌림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거기서였다.
어떻게 사귀었는지 미얀마의 여자 경찰을 비행기에서 알아서 연인처럼 공항 로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 여자 경찰은 쿤밍에 연수차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미얀마를 여행하는 내내 그 여자 경찰과 연락을 취하고 그 여경이 동료 경찰, 둘을 데리고 내 숙소에 와서 저녁을 먹고 가는 일까지 생겼다. 잠시 만났다가 그걸로 끝을 내는 선배가 아니었다. 관계의 지속! 그것의 필요성을 아는 선배였다. 그게 벌써 몇 년이 되었지만, 선배는 지금도 미얀마의 그 경찰과 메신저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 눈치다. 나이가 스무 살이 넘게 차이가 나지만 친구처럼 지낸다. 어느 식당에 가서 특별한 음식이 나오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 어디론가 날려준다. 그리고 그 음식에 대한 가격과 설명도 곁들인다. 누구에게 보내는 것일까?
*합리적인 의심은 불안정한 현실보다 더 넓은 평수의 불안을 경작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 여경과 무슨 일을 내는 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는데, 내 걱정은 부질없는 기우였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얀마에서 외국인이 일반 가정에서 숙식할 때는 출입국관리소에 신고를 꼭 해야 한다. 그러나 여경들이 다녀간 후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후진국일수록 경찰의 권위가 높은 법이다. 여경들이 바로 앞집의 통장을 만나 그 점을 얘기했기 때문에 마음대로 선배가 들락거릴 수가 있었다. 확실히 선배는 여행 마니아였고 프로였다. 옌타이, 그러니까 연태에서 이틀을 쉬고 쿤밍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나흘을 머물다가 양곤에 도착했는데 항공료가 직항으로 가는 것보다 싸게 날아온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나는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 후로 내가 항공기를 이용할 일이 있으면 선배의 도움을 지금도 받는다. 선배가 도착해서 이틀을 쉬고 미얀마의 지방 여행을 하는데 가이드로 내 매니저의 남동생을 붙여주었더니 일주일에 걸쳐 돌아왔는데 후일담을 들으니 가이드를 오히려 데리고 다녔던 눈치였고 혼자서 시내 관광을 하는데 잔소리를 할 것이 없었다. 일주일간 지방을 돌아다니며 사귄, 외국 관광객들과 합쳐서 교통비와 식비를 아끼며 많은 것을 보고 돌아온 것이다. 내가 예상했던 경비의 절반도 쓰지 않고 잘 돌아다니다가 온 것이다.
숙소에 머무는 열흘 간도 잔소리할 것이나, 참견할 것이 없었다. 초저녁잠이 많은 나는 자는데, 어디를 돌아다니는지 혼자 나가서 잘 놀고 잘 찾아와 자고 신경을 쓸 거리도 없었다. 그렇다고 경비가 많이 드는 게 아니었다. 미얀마의 통신 사정이나 교통 사정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이었다.
*달을 밤마다 글을 쓴다. 반어법으로.
선배가 달을 보고 뱉은 말이다. 미얀마에서 선배와 옥상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미얀마 달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미얀마의 달은 한국의 달보다 낮게 뜬다. 나는 달의 뿌리가 있다고 했고 선배는 달의 뿌리가 없고 달은 밤마다 우주를 여행하며 후기를 쓰는 것이라 했다. 거기에서 선배에게 반한 것이다.
거기에 왜 반어법이 나와? 무엇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의심보다는 감탄이 먼저 나왔다.
아!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구나
오랜만에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구나. 참으로 오랜만에 쉬는 안도의 한숨이었다.
남을 위하는 배려가 있고 상대의 눈치를 먼저 읽는 선배였다. 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사람을 옆에 두고 살 필요가 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상대를 가장 빨리 알 수 있는 척도는 바로 여행을 같이 가는 것이다. 사흘을 같이 먹고 자면 그 사람이 단박에 보인다. 식습관부터 남을 배려하는 마음, 속속들이 알 수가 있다. 그냥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여행마저도 함께 해 본 다음에 평가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행은 넷이서 가지 마라, 는 말이 있다. 돌아올 적에는 둘씩 나뉘어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하는 말이다. 셋이서 가면 한 명이 나머지 두 명의 의사를 따르는데 넷이 가면 의견이 팽팽해져 갈라서 돌아온다는 말이다. 그 사람들을 너무 잘 알게 되어 그렇게 된다는 말이 있다. 극단적인 예로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바로 권태를 느끼는 이도 있다는 조사가 있다.
*굽은 소나무가 도래솔 되어 선산 지킨다.
달을 보던 날, 옥상에 맥주를 마시며 미얀마의 사업이 전반적으로 잘 풀리지 않는다는 소리를 하자 선배가 한 말이다. 한국이 지금 경제정책으로 미루어보면 망하게 생겼으니 그때 미얀마로 오라는 말이겠지.
돌이키니 정말 한국은 갈 만큼 갔다. 낭떠러지를 향해 폭주하는 기관차다. 돌이킬 수도 없고 제동장치도 없는 나라다.
그날 선배에게 인도를 여행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타지마할을 꼭 보고 싶었는데 혼자서는 자신이 없다.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혼자서 여행하는 기간에 찾아오는 고독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같이 열흘 이상을 살다 보니 선배라면 같이 가도 되겠구나 싶었다.
다행히 인도를 여행한 적이 없노라고 했다.
그렇다면 언젠가 같이 가자고 덜컥, 약속했다.
날짜는 정하지 않았다. 언젠가, 언젠가, 라고 약속을 했다.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갈 수가 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한국에 들어와서도 선배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아기 못 낳는 년이 밤마다 태몽을 꾼다.
선배를 만나면 늘 인도 여행에 관해서 얘기한다.
오늘도 만나면 분명히 그 이야기를 할 것이다.
어디로 가는 것이 싸게 먹히면서 볼거리가 많은지 선배가 늘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나온다. 전자공학도 출신이라 그런지 인터넷은 확실히 선배가 나보다 잘한다. 사실 나는 인터넷으로 물건을 구매할 줄도 모른다. 반면 선배는 검색도 잘하고 비교해서 싸게 사는 방법도 알고 외국에 있는 물건을 직접 구매하는 방법도 안다. 나는 늘 선배가 끊어주는 항공권으로 미얀마를 싸게 다녔다. 지금은 미얀마뿐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곳으로든 하늘길이 열리지 않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인도 여행에 관해서 얘기한다. 그게 엄혹한 시대의 가련한 희망이다. 선배와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달도 뿌리가 있다고 말하고 싶어 입이 간질간질하다.
달이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선배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은데 방법이 없이 전전긍긍하는 편이다.
“인도의 달은 뿌리가 있을까요?”
“인도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미얀마에 나갈 생각이나 해. 재산의 반이 미얀마에 나가 있다며?”
달의 뿌리에 관해서 얘기하고 하는데 선배는 현실을 일깨워 준다. 생각하면 막막하다. 거의 일 년이 되도록 하늘길이 열리지 않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는 형국이다. 미얀마는 지금 우한 폐렴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세 곱절이 넘는 확진자가 매일 쏟아지는 형국이라 생필품을 사러 나가는 사람 이외에는 모두가 집에만 있단다. 학교도, 관공서도 문을 닫은 지 오래되었고 길거리에는 집 나간 개만 어슬렁거리는 상황이라고 했다. 봉쇄령에 통행금지가 내려졌단다. 경제보다 국민의 목숨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나라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다. 우리와는 달리 농토와 물이 좋아 쌀이 넘쳐나는 나라이니 굶어서 죽을 일이 없고, 열대지방이니 얼어서 죽을 일은 없다.
“어느 개새끼가 담뱃갑에 이런 그림을 박아 넣게 했을까요? 담배 맛 떨어지게.”
현실을 직시하자 화풀이할 대상이 없는 나는 말머리를 딴 곳으로 돌린다. 늘 그런 식이다. 생각하면 약이 오른다. 달에도 뿌리가 있다는 사실은 선배에게 인식시키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그걸 어떻게 설명하나? 그렇다고 천기를 누설할 수는 없는 문제이고.
달은 분명히 뿌리가 있다.
달의 뿌리는 분명히 항아리에 있는 것이라 나는 믿는다.
세상에 뿌리가 없는 게 어디 있어?
나의 뿌리는 아버지고 나를 뿌리로 삼는 대상은 오늘도 이력서를 쓰고 있다. 그 대상 말고 나를 뿌리로 삼는 대상이 또 있을 것이다. 그 녀석이 자라서 지금쯤 군대는 갔다가 왔을지 모르겠다.
*달의 뿌리에 대해 역사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 당시 내가 임차한 사무실 옆에 시의원 선거 사무실이 차려졌다. 선거기간이 되어 주유소 이 층에 있는 빈 사무실을 어느 후보가 두 달 남짓 빌려서 썼다. 그 후보의 선거 운동원으로 뛰러 온, 꽉 조이는 청바지를 입은 여인 중에서 하나와 눈이 맞았다. 그녀가 바로 달이었다. 나중에 따지고 보니 초등학교의 이 년 후배가 되는 여자였는데 그녀의 자궁에 나는 달을 심었다. 그녀의 얼굴에 달맞이꽃이 피는 걸 분명히 보았다. 달의 자궁을 빠져나온 것은 분명 달이다. 그녀가 잉태한 달의 뿌리는 분명히 나에게 있을 것이다.
달의 뿌리는 그렇게 은밀하게 시작이 된다. 역사는 그렇게 창조되지만, 그 뿌리에 대해서 역사는 결코,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꼬리표나 부연 사설을 달지도 않고. 그게 마땅한지도 모른다.
천기누설, 그 점을 명심하고 나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물론 선배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다.
내가 만든 달이 어디에선가 자란다? 뿌리도 모르고. 뿌리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된다. 보이지는 않지만,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행인지도 모른다.
*인식의 지평을 넓혀야 세상이 보인다.
뭘 숨기고 싶어서
도대체 뭘 숨기고 싶어서
그 난리를 떨었는가?
또 어떤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질지.
건전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여!
정치판을 기웃거리면 이런 탄식이 나온다. 작금의 정치판을 보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말이나 공약의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하는 정책을 보면 더 가관이다.
그러나
선배 앞에서 정치에 관해서 얘기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게 묵시적 약속이다. 누구도 정치에 관해서 얘기하지 말자고 이야기한 바가 없다. 그러나 선배와 안줏거리로 정치를 얘기를 꺼내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럽다. 언제나 그렇지만 정치에 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의견이 충돌된다. 어딘가 모르게 틈이 생기다가 이견이 나오는 것이다. 항상 남의 술자리를 보면 술자리에서 정치 이야기가 안줏거리로 상석을 차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여행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여행을 하면서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견문을 넓히는 데는 여행보다 좋은 교육이 없다. 콕 찍어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선배의 의견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길이 막혀있지만 언젠가는 선배와 타지마할을 갈 것이다. 세상을 보러 가는 일이다.
아파트 사이로 떠오른 항아리가 벌써 중천에 솟았다.
달을 본다.
보름달인데 세상은 밝지 않다.
사무실에 불을 켜지 않아서 그런가? 전등과는 상관없이 창을 통해 보름달 달빛이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게 밝지 않다.
저 달에는 분명 뿌리가 있다.
저 달의 뿌리에 대해 뭐라고 설명을 해야 선배가 알아들을까? 답답하기만 하다. 오늘은 어디서 말을 꺼내 달의 뿌리는 항아리에 있다고 떼를 쓸까? 선배는 오늘도 난초에 손길을 주고 있는 모양이다. 난초를 키우는 방에 영하로 기온이 내려가면 낭패라고 난초를 키우는 방에 비닐로 방한을 설치하느라고 오늘은 늦게 만나기로 했다. 오늘도 만나면 싸구려 주점에 앉아 달을 보며 탁주를 마실 것이다. 약속한 장소가 싸구려 주점이다.
선배는 언젠가 말했다.
고독한 서정의 사나이가 보는 달은 언제나 고독하고 처량한 법이라고.
저게 고독한 달인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천으로 떠오른 달을 보며 뿌리를 찾고 있는데 사무실 문이 닫히고 전자자물쇠가 철컥 잠겼다,
“누구야?”
“사무실에 불도 안 켜고 뭘 하세요? 나는 나간 줄 알았는데.”
다시 문이 열리고 아내가 얼굴만 문안으로 디밀고 물었다.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야. 잠깐 들어와 봐.”
아내가 전등을 켜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저 달을 좀 봐.”
“보름달이네요. 보름달 처음 봐요?”
“저 달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달에 무슨 뿌리가 있어요?”
“아니야 달은 분명히 뿌리가 있어. 나를 뿌리로 삼는 아들 녀석이 어디에선가 저 달처럼 자라고 있을 거야.”
“뜨신 밥 먹고 무슨 쉬어 터진 소리를 하고 있어요? 누가 자란다구요?”
“천기를 누설하면 안 돼. 그런 게 있어. 달은 본디 뿌리가 있는 거야.”
“술은 먹기도 전에 취했어요? 저녁 먹을 거요, 안 먹을 거요?”
저녁?
안 먹는다고 했다. 아내는 마트에 잠깐 갔다 오겠다면서 나갔다. 달은 달항아리의 도자기를 자궁 삼아 그 안에서 둥글게 자란 것을 누가 항아리를 갈라 하늘에 박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오늘은 이 얘기를 선배에게 들려주어야 하겠는데 어떤 논리를 앞세워 설명할까? 달의 뿌리가 항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달의 자궁이 바로 달항아리라고 하면 짐작을 하고 알아들을까? 답답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의 뿌리는 본디 항아리에 있다.
이건 명제다. 살아가면서 이 명제를 거역하지 말지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