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하면 된다 / 서한석
나는 눈을 감고 생각을 했다. 내 나이
열일곱 서울 동대문시장 의류공장에 들어와서 재단 보조로 일한 지 일 년이 지났는데 재단사 기술은 안 가르쳐 주고 막일에 시다 일만 하고 있으니 " 이거 어느 세월에 재단 기술을 배워 월급을 타나"
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는 수공업 공장들이 많았고 명절이나 대목
때는 도매시장에 의류가 딸려 새벽까지 수시로 야근을 하였고 일하는 환경도 난방이 없어 차디찬 공장 바닥에서 일하다 보면 동상이 걸려 발이 간질간질 해진다 "기술도 잘 배울 수 없고 고생만 하는데 무슨 보람이 있나" 생각하며 나는 의류 공장을 그만 두고 무작정 시골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나는 5남 2녀의 막내이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에 가지 못한 나는 매일 소 먹일 풀을 한 지게 씩 베어 오고 열 마지기 시제답의 작은 농사를 짓는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거들며 수시로 근처 목공소나 공장에 다니기도 하였지만 힘만 들고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우리 논밭이 많으면 계속 농사를 지어도 되지만 남의 농사를 계속 지을수 없으니 기술을 배워야 먹고 살지" 주위 사람들이 하는 말에 수긍을 하지만 국민학교 졸업에 나이도 어린 나를 뽑아 줄 회사가 없다 보니 그럭저럭 18세가 되었다. 어느 날 마을 회관에서 놀던 중에 고등학교 다니는 친구가 하는 말 " 야 너도 놀지만 말고 검정고시 한번 봐라 접수가 모레 끝나니 빨리 접수 해봐" 말을 듣는 순간 "아 이거구나 뭔가 하고 싶었던 것이"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부랴부랴 서류를 마련하여 고입 검정고시 시험에 접수를 하였다.
교재를 구입하고 틈나는 대로 집에서
공부를 하다가 집에서는 공부가 잘 안되어 버스 타고 한 시간 넘게 걸리는 도립 도서관에 농사 일 없을 때마다 가서 저녁때까지 공부를 하였다. Ebs 교육방송 강의도 청취하며 4월과 8월 1년에 두 번 치르어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을 하니 그 기분은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선생님이 "하면 된다 공부도 혼자서도 하면 돼" 하며 나를 격려해 주시던 생각이 난다. 성적이 꼴찌 그룹에서 5등으로 오른것도 그 선생님 덕분이다 6학년 선생님도 "그래 공부는 집에서도 책 보고 할 수 있어 노력하면 안 되는 것이 없어" 하시던 말씀도 생각나고...
고졸 검정고시 교재를 사고 또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에만 전념하다 보면 머리가 복잡하고 아플때가 있다. 바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 나는 가끔 뒷 산 공터에 기타를 들고 가서 동네 형님들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으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면 정말 스트레스가 풀리고 머리가 맑아진다.
이듬해 상반기 시험은 전체 9과목 중 암기과목 6과목을 합격을 했다. "그래 하면 된다 난 할 수 있다 아니 꼭 해야 한다" 라는 문구를 써 놓았다. "이제 영어, 수학, 과학 3과목 남았네 아무래도 3과목은 혼자 공부하긴 어려우니 학원엘 다니면 좋겠는데 가난한 집안 형편에 학원비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떡할까 ?"...
나는 다음 시험 두 달 전까지 주경 야독
낮엔 학원 수강비 벌러 공장 다니고 밤엔 공부를 하며 두 달간 학원을 다녔으나 시험엔 과학 1과목만 합격했다 "영어, 수학이 기초가 없다 보니 정말 어렵구나" 나는 친구들도 안 만나고 시험에만 집중하여 공장과 학원을 번갈아 다녔지만 다음 시험엔 두 과목 다 불합격 했다. 나는 힘과 기운이 모두 빠졌다. "이러다 계속 떨어지면 어떡하지? 벌써 나이가 20인데 차라리 더 늦기 전에 기술을 배우러 취직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나는 풀이 죽어 용기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앞마당에서 소에게 소죽을 주며 책을 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엿 장수 아저씨 "무슨 책을 그리 열심히 보고 있나?" "예 검정고시 책입니다" "오 그래 배워야 살지 암 사람은 배워야 살고 말고 열심히 하게" 나는 다시 마음을 잡고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 "하면 된다 난 할수 있다 아니 꼭 해야 한다" 문구를 되뇌이며...
다시 돈을 벌어 학원 다니며 학원생들에게
시험공부 요령도 듣고 학원 특강도 청강
하는 등 시험에 몰두하여 그 해 8월 시험에 정말 아슬 아슬하게 평균 60점이상 합격을 하니 정말 날아 갈 듯한 기분이었다. 결국 3년만에 독학으로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자격 학력을 받은 것이다. "이제 고졸이상 뽑는 회사나 공장에 들어갈 수 있어 국졸이나 종졸이 들어가야 다 생산직 막일이지 뭐" 나는 형편상 대학은 꿈도 꾸지 않았고 석달 후 9급 공무원 시험이 있다는 걸 알고 바로 시험 공부하여 합격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개천에서 용났네" "의지의 한국인이야" 하며 집에 와서 축하를 해 주었다. 나는 "공무원 면 서기가 되면 어떤 생활을 하게 될까 " 기대를 하며 지난 생활을 회상해 보았다. 그동안 학원비 마련으로 다닌 공장이 8개소 이상 되는데 어느 벽돌 공장에서 일하던 생각이 난다. 작은 벽돌과 블럭을 차에 상차하는 일인데 블럭은 한개 씩 올려주면 힘이 덜 드는데 작은 벽돌은 6개씩 잡아서 흩어지지 않게 그대로 던져주면 차에 있는 사람이 받는 그대로 차에 쌓는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던지는 내가 힘들어 허리를 펴면 "젊은 사람이 그렇게 힘이 없어 어떡해 아무래도 보약을 좀 먹어야 겠어" 하니 나는 다시 벽돌 6개씩 잡아 던지고 남보다 몸이 좀 약한 나는 "그땐 그렇게 힘든 일을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니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촉촉해진다...
첫댓글 매우 감동적이고 멋진 소설 작품 잘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