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 24
권영옥 문학박사의 현장 시평 (21) 윤은성 시인
불안과 슬픔의 볼레로 - 『주소를 쥐고』
윤은성 시인의 시는 젊은 시인들이 갖는 전복적 상상력이나 활달한 상상력이라기 보다는 사랑하는 타자를 상실하는 데서 오는 불안과 슬픔의 상상력으로 씌어졌다. 주체는 가난과 죽음 때문에 가까운 타자들과 이별하고 그로 인해 상처를 받는데, 세계 속에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그는 믿을 대상이 없고, 자신을 보호해 줄 대상도 없다는 점에서 슬픔과 불안을 느낀다. 타자를 끌어안지 못하고 눈물로 떠돌다가 귀가하는 주체의 행위는 비열의 또 다른 이름이고, 다시 겨울 속에서 홀로서기를 감행해야 하는 고통이다. 따라서 주체의 슬픔과 불안은 세계 속에서 혼자 추는 볼레로라고 할 수 있다. (「해解와 파열」)
『주소를 쥐고』(문학과지성사 2021)는 시인의 첫 시집이다. 이제 첫 시집을 세상에 내놓은 작품을 두고 ‘불안과 슬픔’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시집 군데군데에 사랑하는 타자들이 남긴 얼룩이 주제를 이루고 있어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계기」,「의자 밑에서 듣는다」, 「주소를 쥐고서」, 「원탁 투명」, 「공원의 전개」, 「2월의 눈」, 「일단락」) 그녀의 시를 보면, 주체는 사랑하는 타자들과 가난하다는 이유로, 또는 “피구공이 어디선가 튀어나왔다”는 이유로 한쪽이 떠나갔고, 남은 자신은 상실감에 젖어 있다고 말한다. 최근 들어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는 속도전을 방불케 하는 사랑과 거기에 부응하는 빠른 이별이 자주 거론되곤 한다. 단순 레시피적 사랑에는 기대할 것이 없어 우리는 작은 사랑, 일회용 사랑, 즉 이탈의 욕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윤은성 시의 주체가 의미하는 사랑은 타자와의 불화, 부조화 때문에 생긴 이별일지라도 그 사랑은 오랜 시간 숙성된 관계여서 자신을 불안케 하고 슬픔에 오래 머물게 한다는 것이다. 주체가 느끼는 불안은 사랑하는 타자의 상실로 인해 기댈 대상이 없고, 가림막이 없으니 자신을 스스로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자기방어이고, (「밤의 엔지니어」) 슬픔 역시 사랑하는 타자를 상실한 데서 오는 비애의 감정이다. (「유월의 숨」) 과거 오해와 싸움이 빚은 혼란은 인생무대를 불행으로 만들고, 합리적이지 못한 이별 역시 반성과 후회로(「겨울을 보내고 쓴다」, 「커튼 사이로 흰」)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시의 주체는 세계와 담을 쌓고 자신이 자신을 떠맡을 수밖에 없는 홀로서기를 하고 있다. 다음은 사랑의 상실로 인해 주체가 불안을 느끼는 시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중략>…
하루 중 한 순간은 기대어 손을 편다
벽과 손 사이에 화흔火痕인 두 개의 눈이 있다
갈라지는 손바닥, 두 마리의 코끼리와 그 사이의 코끼리
포트가 끓어오르고 손등 위로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휘발유 냄새가 끼쳐오고 사라지는 기나긴 오후
이런 오후로부터 바닥의 청중들은 생기지
어느 벽으로든 튀어 오르고 싶다
점심을 먹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의자 밑에서 듣는다」 일부분
현대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불안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불안이 어떤 상황에서 생기느냐 하는 점이다. “불완전한 겨울 개수”(「커튼 사이로 흰」)를 셀 때, “‘과거’로부터 선로가 망가져 앞으로 믿을 수 없는”(「정확한 주소」) 상태에 놓일 때 불안이 온다. 불안한 주체는 무력감에 젖어 있다. “두 마리의 코끼리와 그 사이의 코끼리”는 사랑하는 타자들 사이에 한 코끼리가 끼어든 행위다. 이로 인해 사랑하는 타자의 “손등 위로 오트바이가 지나가고”/“휘발유 냄새가 끼쳐오고” 누군가는 사라진다. 서로 간의 싸움이 자못 폭력적인 상황이다. 이때 의자 밑에서 어른들의 폭력 행위를 본 주체는 무력감과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주체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주체는 전제에 의해 상황을 예견하고 무력감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 무력감이 다시 “물속에 잠긴 돌을 보고 돌이 불씨를 품고” 있어서 “흙탕물”이 될 수 있고, “모래 위에 가지가 될 수 있어서”(「라플라타에서」) 타자와의 인연이 날아가거나 식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행 역시 주체가 상황을 예견, 예측한 상태에서 느끼는 불안이다. 고립된 상태에서 스스로 자신을 방어해야 하는 일은 무섭다. 결국 불안이란 자아를 지키고자 하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상황이 가족 간 사랑의 파탄 때문에 주체가 불안을 느끼는 것이라면 아래 시는 사랑하는 타자의 죽음 때문에 주체가 느끼는 슬픈 감정의 반응이다.
거기는 지금 어떠니, 여기는 텅 비어 있어, 손을 뻗는
순간 사그러지는 문들, 기온이 섞였는데 새들은 어디로
가서 바람을 다시 가져보니.
…<중략>…
문을 열고 또 다른 문 앞으로 가고,
숨을 쉬지. 물론 그래, 창밖의 사람들은 단정히 검은
옷을 챙겨 입고 자신들은 모르는 행렬을 이루고 있어.
이런 장면들만이라도 간직해보라고 했니.
-「겨울을 보내고 쓴다」 일부분
‘주체’는 자신의 공간이 텅 비어 있다고 하는 점에서 타자의 상실로 인한 슬픔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 비록 주체가 병리적인 상태는 아니지만, “손을 뻗는 순간 사그러지는 문들”이나 “창밖의 사람들은 단정히 검은 옷을 챙겨 입고” 행렬을 지어가는 과정으로 볼 때 사랑하는 타자의 죽음으로 인해 한 공간에 머물면서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사랑하는 타자의 부재에 대한 주체의 반발심이라는 반응 때문이다. 그러나 부재의 세계에 대해 빈곤을 느낀 주체는 소비한 에너지를 회복하며 외부세계로 시선을 돌린다. “문을 열고, 또 다른 문으로 가고” 있다라고 하는 시행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슬픈 감정은 이 시의 경우 ‘사라지는 문’, ‘새들’, ‘울음’, ‘물의 빛깔’, ‘검은 옷의 행렬’을 중심으로 드러난다. ‘사라지는 문’에 시인의 슬픈 감정이 투사되었고, 새들이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는 것은 안식처가 없어 기댈 곳이 없다는 걸 주체가 암시하고 있다. 이런 슬픔은 ‘물의 빛깔’이나 ‘검은 상복’을 입고 행렬을 따르는 모습에서 주체가 가까운 타자들을 잃은 죽음과 맞물려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결국 그가 보는 세계는 암울이고, 빈곤이고, 낙망이다. 하지만 주체는 “손이 망가질 정도로 그의 소지품을 버리기”(「정확한 주소」, 「전제와 근황」)에 이젠 불안과 슬픔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삶이란 새로운 대상을 만남으로서 과거가 치유된다. 마치 자신을 보호해줄 수리공이 “스패너를 들고 담을 고치러”(「계기」) 오는 것처럼 말이다.
윤은성의 시는 부재의 상황에 처한 주체의 불안과 슬픔의 소산이다. 그녀의 『주소를 쥐고』에서 시라는 것은 기댈 곳 없는 무기력한 상황에서 오는 상처다. 이 불안과 슬픔은 중첩된 사랑의 대상들에 대해 주체가 세계 속의 빈곤을 환기하는 데서 생겨난다. “겹쳐서 적는다 우리는 어째서 서로와 더불어 회귀해지지 못했는가?” 윤은성이 말하는 시는 직접 드러내지는 않지만, 암시를 통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관계가 협화음이나 조화가 아닌, 불협화음과 대상 상실이라는 이중구조 속에서 생성된다. 다른 세계로 떠나가는 원심력과 새 가족이 되고자 안으로 들어오는 구심력에 대해 그녀는 “주소를 쥐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세계에 홀로 내던져진 존재에게 “테이블(가족) 위에 철골 새 주인이” 빛을 가져 온다. 주체는 새 주인 때문에 불안이 느슨해지고 슬픔이 극복되고 있다.
이 외에도 그녀의 시는 언어의 장벽과 자유를 드러내는 (「여름 뚫기」, 「무한 사선」, 「농담」, 「밤의 결정」) 모순된 진리의 특징도 나타난다. 각각의 특징들이 시편 여러 곳에 나타나 있는 만큼 귀 기울이고 세밀하게 시를 읽으면 그녀의 시는 몇 가지의 주제를 통해 다양한 관찰의 장을 열어준다. 잔잔하면서도 내밀한 아픔, 『주소를 쥐고』는 읽는 것만으로도 새 지평을 열어주는 느낌이 든다.
[윤은성 시인 약력]
□ 전남 해남 출신 2017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 시집 『주소를 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