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몇 해 전의 일이다. <한겨레신문> 축구 담당 기자와 점심 약속이 있어 공덕동 남부지원 뒤편 먹자 골목의 어느 음식점에 갔는데, 다른 일행들이 있어 동석하게 되었다. <한겨레신문>의 시니어 그룹이었다. 이 신문사의 '시니어 그룹'이라 하면, 최고참 원로들로 저 70년대 중반의 동아, 조선 해직기자들이 있고 그 아래에 80년대에 강제 해직 당했던 중견 그룹이 있는데, 그들이었다.
그날 두 가지 일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첫 번째는 예닐곱 명의 시니어 그룹이 보여준 놀라운 술 솜씨였다. 내 주량은 맥주 150cc 정도 마시면(다시 말씀드리지만 1,500cc가 아닙니다) 적당히 취해서 기분이 꽤나 좋아지는 우스꽝스런 정도지만 그래도 이 세상 나와서 한 20년 정도는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리지 않고 숱한 주연석에 가보았는데, 그날처럼 진풍경인 경우는 달리 없었다.
그들은 '자, 이제부터 우리는 술이라는 것을 마십니다' 하는 그런 예비 동작 자체가 없었다. '어이, 오래만이야, 한 잔 받지', '야, 이거 대낮부터 한 잔일세' 뭐 그런 의례적인 간투사도 생략된 고수들의 주연이었다. 연체동물처럼 그들의 양 팔은 끝없이 좌우로 횡행하면서 술잔을 받고 또한 넘겼다. 마치 영화 <색.계>의 뒤엉킨 남녀 주인공처럼 어느 손이 자신의 손이고 또 어느 잔이 상대에게 넘겨야 할 잔인지 그 경계조차 희미해진 절륜의 경지였다.
옥스포드 대학 시절 조정부에서 활동한 스티븐 호킹 (오른쪽) 말하는 입이 따로 있고 술 마시는 입이 따로 있었다. 한 손으로는 해물찌개 떠먹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술잔을 받아 마치 밥그릇 앞에 있는 콩나물 반찬 집어 먹듯이 하고는 곧 다른 손이 되어 옆사람에게 술을 따랐다. 그러면서, 역시 원로 기자들답게, 끝없이 그날의 대소사에 대해 언술을 펼쳤다. 그러다가 맞은 편에 앉은 분이 내게 잔을 건넸다. 나는 말했다.
"저는 술을 못하는데요."
그 순간, 일행의 모든 동작이 잠시 멈췄다.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던 순간 "그러면 할 수 없지, 뭐" 하면서 그 잔이 내 옆으로 넘어갔고 다시 잔들은 포석정의 물 위를 하늘거리는 리듬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아무 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술잔이 흡사 신체의 일부인 양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또 저곳으로 넘나드는 이런 얘기, 술 좋아하고 잘 마시는 분들은 '그 까짓......' 하겠지만, 나로서는 드문 경험이었다.
첫번째 부인과 결혼 당시의 스티븐 호킹 그날,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시니어 그룹이 회고한 활판 인쇄 시절의 과거지사였다. 지금은 이름을 잊어먹었는데, 어느 노련한 기자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송건호, 임재경 같은 연배의 원로급 기자였을 것이다.
그 분이 취재도 잘 하고 기사도 잘 쓰고 칼럼이며 논평을 쓰면 그 문장이 강건하고 또한 아름다웠는데, 아쉽게도 천하의 악필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의 글을 판독하기가 어려웠는데, 문선공 한 분이 있어 유독 그 분만이 정확하게 그 글을 해독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원로기자(현역일 때는 원로가 아니었겠지만)의 기사는 그 문선공이 반드시 담당해야 오탈자 없이 깔끔한 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라 언론의 수레바퀴가 두어 차례 역사의 진창에 빠졌다가 헤쳐나오는 격랑을 겪으면서 이 기자 역시 해직을 당했다가 복직을 했다가 다시 해직되었다가 출판사 일을 좀 하다가 다시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하였다가 정년 퇴직하는 등의 부침을 겪게 되었는데, 바로 그 문선공 역시 이 기자의 인생 역정을 함께 했다는 것이다. 그의 글을 판독하여 독자들이 알아볼 수 있는 기사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문선공이 유일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만이 판독할 수 있는 그 기자의 거친 행로와 함께 퇴직과 복직의 한 생애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 사이의 깊은 골짜기를 느낄 수 있는 얘기였다. 그 문선공은 단지 그 기자만의 필체에 익숙해진 것만이 아니라 그날 그날의 기사나 논평에서 어떤 감정의 떨림이나 분노를 공감하면서 납활자 하나씩을 뽑아냈을 것이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므로 원고 매수가 넘치거나 모자라면 인쇄 막판까지 기다리다가 다급하게 한두 문장씩을 가감하면서 최종고를 뽑아냈을 것이다. 그렇게 뽑아낸 납활자의 행렬이 신군부에 의하여 시커멓게 칠해진 채로 검열이 되곤 하면 기자는 물론 그 문선공 역시 생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함께 겪었을 것이다.
딸 루시와 스티븐 호킹 조금 다른 얘기지만, 내 경험으로 보건대, 유능한 편집자는 대체로 강력한 '사디스트'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남의 정성껏 쓴 원고에 빨간 펜을 죽죽 그으며 가학의 쾌감을 맛본다. 오탈자를 잡아내는 정도는 그저 채찍이나 혁띠를 어루만지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 문장 전체의 주술 관계를 주물러대거나 아예 한 문단을 통째로 날리는 데서 오는 쾌감은 기묘하고도 짜릿한 흥분을 준다. 그 흥분의 어떤 요소에는, 어릴 적부터 유일무이한 글을 써보고 싶었으나 이제는 남의 글을 어루만져야 하는 데서 오는 회한도 조금은 섞여 있다.
그래도 놀랍게도 좋은 글이나 책은 바로 이 사디스트들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이다. 우선 그들은 유일무이성을 갖춘 필자를 발굴하는데 노련하다. 그들을 설득하고 함께 책의 구성을 논하고 초고의 집필을 '당부'할 때의 노회한 미소와 협상력은, 그 필자들보다 훨씬 더 진지하다. 내 경험으로 다시 말해도 된다면, 이따금 나를 찾아온 출판사의 기획편집자들 중에서 끝끝내 자기의 고집을 완강하게 밀고 나간 쪽이 있고 정말 착하고 다정한 얘기만 하다가 공손히 물러간 쪽도 있는데, 대체로 자기 고집 강하게 부린 쪽의 출판사 책이 우람하고 아름다웠다. 그들을 지금 당장 6자 회담 실무자로 파견해도 괜찮을 것이다.
필자들이 원고를 쓰고 나면, 본인은 다 썼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사디스트들에게는 이제부터 황홀경의 밤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들은 각 장의 골격을 우선 살피고 덜 여문 곳을 조근조근 씹어대며 군살이 엉킨 곳은 날카롭게 도려낸다. 필자가 저도 모르게 자신만이 알고 있는 어법에 따라 함부로 써버린 굳은살도 여지없이 도려낸다. 초고는 어느덧 빨간 펜의 피가 흥건해진 사체가 된다.
이 수정본이 필자에게 돌아가면 대개의 필자들은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된다. 그것은 크게 두 단계로 진행된다. 첫 번째는 왜 내 소중한 원고에 붉은 칠을 했느냐고 화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한밤중에 남 몰래 수정된 부분을 찬찬히 보고 나서는, 아 내가 과연 이 책의 저자로 합당한 것인가 하고 회한과 자책에 사로잡히게 된다.
전용 휠체어로 활동하는 스티븐 호킹 이 정도로 편집자의 역할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필자와 원고를 '만들어 가는' 동시에 시장의 상황을 판단하고 표지 디자인의 컨셉을 확정하고 복수의 가제목을 정하여 수십 차례 회의를 한다. 모든 책이 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처럼 교정교열을 전문 외주업체에 맡기고 편집자가 '기획'에 비중을 두고 책을 만들어가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그것이 숙성될수록 그 원고는, 군살이나 굳은살 없이 매끄럽게 읽히는 책으로 탄생한다.
영국 밴탐북스의 편집자 피터 구자디가 아니었다면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는 지금 출간되어 있는 모습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공식들이 거듭 출몰하는 학술 전문서가 되었을지 모른다. 스티븐 호킹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1962년에 근위축성 측색경화증이라는 전신마비증, 일명 루게릭 병에 걸려 정상적인 신체 활동이 불가능한 학자다.
그는 1973년에 ‘블랙홀은 완전히 검은 것이 아니라 빛보다 빠른 속도의 입자를 방출하며 뜨거운 물체처럼 빛을 발할 수 있다’는 학설을 발표하여 강한 중력을 가진 블랙홀이 주위의 모든 물체를 빨아들인다는 기존 학설을 뒤집은 것으로 유명하다. ‘특이점 정리’, ‘블랙홀 증발’, ‘양자우주론’ 등의 혁신적인 이론을 제시한 그는 미시 세계를 지배하는 양자역학과 거시 세계의 상대성이론을 높은 차원에서 통일하는 ‘양자중력론’ 연구에 몰두하였다. 진실을 고백하자면, 바로 위의 문단에서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그는 연구에 몰두하였다'는 두 어휘들 뿐이다. 그 사이의 말들은 무슨 뜻인지 모른다.
아무튼 밴탐북스의 편집자 피터 구자디는 나처럼 이 세계(우주)의 본질적인 생동 원리에 대해 일자무식인 사람들을 위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인 스티븐 호킹이 매우 '대중적인' 책을 집필하기를 원하였고, 스티븐 호킹이 열심히 원고를 쓰고 나면 빨간 펜으로 수정 사항을 적은 후 몇 번이고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특히 물리학자들의 난해한 공식만큼은 줄이고 또 줄여야만 했다. 그 과정에 너무도 지난하고 또한 고통스러웠지만, 결국 아인쉬타인의 유명한 공식 'E=mc²' 만이 <시간의 역사>에 남게 되었다.
미국 민간우주여행사 제로그라비티 초청으로 휠체어를 벗어나 무중력 체험에 참여한 스티븐 호킹 이 책의 서문에서 스티븐 호킹은 “나는 개정을 요청한 방대한 표를 받았을 때 좀 짜증을 냈던 것을 실토해야겠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옳았다. 그가 내 코를 꿰고 다닌 덕택으로 이 책이 더욱 좋아질 수 있었음을 나는 확신한다.”고 썼다. <시간의 역사>는 당연히 스티븐 호킹의 저서이고, 그 학문적 성취와 업적은 물론 일반적인 집필 환경이 아닌 조건에서 빚어진 아름다운 결실임에 틀림없지만 그 책의 숨은 주인공으로 편집자 피터 구자디 또한 기억할 만한 이름이 되는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회고록 역시 1인칭의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음에는 3인칭으로 썼으나 유능한 편집자가 집요하게 설득하여 한결 독자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1인칭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런 유능한 편집자들을, 축구나 야구에서 차지하는 감독과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뛰어난 눈매를 지닌 타격 코치나 주루 코치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우리가 읽고 있는 수많은 책들은 대부분 이 뛰어난 투수 코치들의 자세 교정에 의해 빚어진 결실들이다.
무중력 체험 때 박수를 받고 있는 스티븐 호킹 오늘, 1월 8일은, 바로 그 스티븐 호킹이 지난 1942년에 영국 옥스퍼드에서 태어난 날이다. 사실 스티븐 호킹에 대하여 내가 달리 전문적인 의견을 쓸 만한 재주는 전혀 없다. 그래서 슬쩍 다른 얘기를 했는지도 모른다.
내친 김에 한가지 더 기억나는 일이 있다. 스티븐 호킹은 지난 2000년에 방한한 적 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특강을 가지기도 했다. 1992년의 대선에서 패한 김대중 후보가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1년 정도 머물 때의 인연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청와대 특강에서 스티븐 호킹은 '우주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13차원 정도로 되어 있을 것'이라는 요지의 강의를 했다. 그런 내용이야 알 길이 없지만, 단 한마디는 여전히 생생하다. 그 말은 그가 강의를 할 때 첫마디로 한 것이다. 그는 그 때 말했다.
"내가 이제까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시한부를 시한부로 만든 일생
스티븐 호킹 과학의 일생 | 존 그리빈 지음 | 김승욱 옮김 | 해냄출판사 스티븐 호킹은 세인트 알반즈 학교와 옥스퍼드 대학을 다녔으며 이 시절에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의 저작에 심취하고 클래식 음악에 깊이 빠져들었다. 조정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게 되었는데 이 무렵에 몸 속의 운동신경이 차례로 파괴되어 온몸이 마비되는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 일명 루게릭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2년의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았으나 초인적인 의지와 희망으로 지금까지 아름다운 한 생애를 살아내고 있다.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그의 이름은 당대를 뛰어 넘어 갈릴레이, 뉴턴, 아인슈타인의 뒤를 잇는 거인의 반열에 올라 있다. 1974년에 왕립학회 최연소 회원이 되었고, 1979년 아이작 뉴턴이 재임했던 케임브리지 대학 루카스 석좌교수가 되었으며 1982년에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그 아름다운 생애와 학문의 풍경이 담겨 있는 책이다. ☞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 /
끝까지 읽었으나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책
시간의 역사 | 스티븐 호킹 지음 | 현정준 옮김 | 삼성출판사|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는 그의 또다른 저서인 <호두껍질 속의 우주>와 함께 '누구나 읽고 싶어하지만 사실은 책장에 꽂아두는 책'으로 유명한 20세기의 최고 명저이다. '명저'가 대개 그렇듯이 어떤 갈증에 의하여 일단 그것을 구입하였으되 서문을 거쳐 1장 정도 읽다가 책장에 꽂아두는 수가 많다.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도 그런 셈인데, 그래서 따로 나온 본인 저작의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나 다른 과학책 전문 필자들이 쓴 '알기 쉬운 시간의 역사' 같은 책들도 연이어 출간되었으나 이 책들 역시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명저란 그런 것이기도 하다. 수없이 책장에서 꺼내 다시 펼쳐보고, 그러다가 포기하고, 다시 꺼내보고, 그런 ‘시간의 역사’가 축적되는 것이 명저다. ☞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 /
어느 책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
편집자 분투기 | 정은숙 지음 | 바다출판사 출판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의 저자 이름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정은숙. 도서출판 마음산책의 대표다. 단행본 편집자 생활 20년의 베테랑이다. 1천여 권 정도를 어루만진 사람이다. 1985년에 종교와 인문을 전문으로 낸 홍성출판사에서 처음 일을 시작하였고 세계사, 열림원 등을 거쳐 마음산책을 차려 독립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을까. 아쉽게도 이 책을 그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는다. 장안의 지가를 주무르는 당대의 필자들과 맺은 다채로운 인연(혹은 악연)에 대해서 언젠가 깊이 술회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편집자와 저자의 팽팽한 지적 긴장, 그것은 한편으로 '뒷담화'이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지식 생산의 한 풍경이다. 어쨌거나 이 책은 출판 편집이라는 전근대적인 산업에 매혹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매뉴얼이 된다. 그가 자신이 대표로 있는 출판사가 아닌 곳에서 책을 낸 것도, 아름답다. ☞ 상세정보 및 구매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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