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
사랑하는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시며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고색창연한 아름다운 도시 예루살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랑 예루살렘, 온갖 지혜와 은총의 보고인 예루살렘, 그 사랑스런 도시를 바라보며 감탄하고 환호성을 터트려야 마땅할 텐데, 예수님께서는 왜 우셨을까요?
원인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겉은 호화찬란하고 그럴 듯 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부패와 타락으로 곪아 터져가는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돌아서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끝끝내 우상숭배와 배신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자식들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세상 모든 부모들의 한결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많이 빗나간 자녀, 맛이 간 자녀, 생명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접어드는 자녀가 있다면 부모 입장에서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정말 그 길이 아닌데,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인데도 불구하고 계속 가고 있다면 부모 입장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처음에는 불러 앉혀놓고 차근차근 설득도 시도해 볼 것입니다. 그게 안 먹혀들면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언성도 높일 것입니다. 완력도 사용할 것입니다. 갖은 수단을 총동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수단들이 전혀 먹혀들지 않을 때, 어떤 부모는 그 자녀 앞에 눈물로 호소할 것입니다. 제발 돌아오라고, 제발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부모의 마음으로 당신의 아리따운 딸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 흘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과 온 세상이 지금 자신들의 목전에 들이닥친 이 시간의 중차대한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가슴 아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육화강생하시고 그들 사이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지금 바로 이 시간이 구원의 때이며 은총의 시기라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함을 슬퍼하십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메시아께서 카이사르처럼 자신들에게 세속적인 힘과 권세를 부여해줄 것을 바랐었지 실제적인 메시아 본질적인 메시아의 도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세상의 왕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인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정작 참 메시아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고 가난한 얼굴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돌아서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 아무리 눈물로 호소해도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 사람들, 머지않아 영원할 것 같던 성채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며 더 이상 도성 안에서는 찬미가가 울려 퍼지지 않을 것이며, 그 대신 비탄과 통곡소리, 칼부림이 난무할 것임을 예견하신 예수님이셨기에 그리도 슬피 우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울고 계십니다. 우리의 배신과 타락으로 인해, 우리의 절벽같이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 슬피 우십니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끝까지 애타는 하느님의 마음을 저버리는 예루살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하기는커녕 언제나 반대하고 거부하는 예루살렘의 최후를 내다보시던 예수님이셨기에 그리도 슬피 우셨던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012.11.22 목요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260) 기념일
요한 묵5,1-10 루카19,41-44
울음과 웃음
-슬픔과 기쁨-
오늘은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아침 성무일도 즈카르야 후렴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태양이 솟아오를 무렵 성녀 체칠리아는
‘그리스도의 전사들아, 어두움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
하고 부르짖었도다.”
매일 미사은총으로 어두움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은 후
삶의 영적 전쟁터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성녀 체칠리아는 물론 모든 성인들이 빛의 갑옷을 입고 싸워
영적전쟁에 승리했습니다.
성인들의 승리는 바로 하느님의 승리를 뜻합니다.
오늘은 ‘울음과 웃음-슬픔과 기쁨-’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나는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근심에 찼던 마음을 위로해 즐겁게 하리라.”
예레미야 찬가 중 한 구절입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슬픔과 기쁨이, 울음과 웃음이 하느님 한 뿌리에 닿아있습니다.
이 둘은 분리된 게 아니라 한 실재의 양면으로
이런 리듬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마음에 닿을 때 순수요 여기서 나오는 슬픔 또는 기쁨입니다.
진정한 슬픔이나 기쁨은 바로 마음의 순수를 반영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입니다.”
순수한 영혼에서 샘솟는 슬픔이요 기쁨입니다.
사람만이 슬픔이 기쁨이, 울음과 웃음이 있습니다.
바로 이게 인간의 위대함이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임을 반증합니다.
성체성사나 고백성사 때 자주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눈물 그렁그렁한 얼굴로 성체를 모시는 얼굴에 이어
기쁨으로 꽃처럼 환히 피어난 얼굴에서 주님과의 만남을 직감합니다.
또 고백성사 처방전의 말씀을 읽으며 눈물짓는 얼굴들에 이어
고백소를 나설 때의 환한 미소 역시 주님과의 만남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예수님과 사도 요한의 울음입니다.
이 또한 순수한 마음의 반영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가려져 있다.’
예수님의 울음을 그대로 하느님의 울음입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울어난 울음입니다.
예루살렘이 상징하는바 회개의 대상인 우리들입니다.
회개의 자리는 바로 오늘 지금입니다.
오늘, 지금 미사 중 회개를 통해 눈이 열려
주님께서 가져다주는 평화를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래야 예수님의 울음은 웃음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요한 역시 참 순수한 영혼의 사도입니다.
‘그러나 하늘에도 땅위에도 땅 아래에도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보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마음에 닿아 나온 순수한 영혼의 울음임을 깨닫습니다.
원로 중 하나의 위로와 더불어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는
어린양이신 주님을 뵙는 요한입니다.
울음이 웃음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이어 네 생물과 스물 네 원로들이 부르는 기쁨의 새 노래를 듣는 요한은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묵시록의 새 노래는
우리 수도자들이 화요일 저녁 성무일도 때 마다 부르는 찬가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로 깨끗해진 우리를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시고
빛의 갑옷을 입혀 주시어 세상 영적 전쟁터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
제1독서 묵시 5,1-10
복음 루카 19,41-44
언젠가 맛 집이라고 이름을 날리고 있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이곳은 특히 짬뽕에 있어서는 그 어떤 집보다도 독특한 맛을 낸다고 하더군요. 가보니 그 중화요리 집에는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로 ‘맛 집은 맛 집인가 보다’ 싶었지요. 한참을 기다려서 겨우 짬뽕 한 그릇을 받았습니다. 군침을 흘리며 가장 먼저 국물을 숟가락을 퍼먹는 순간, 동시에 큰 실망감만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짬뽕 국물이 너무 매운 것입니다. 겉으로는 매우 먹음직스러운 음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매운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저에게는 좋아할 음식이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니 맛 집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맛있다고 하는 집이 과연 맛 집일까요? 사람마다 다 입맛이 다른데 어떻게 이곳은 맛 집이고 저 집은 맛 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가 요즘 즐겨가는 곳이 있습니다. 너무나 친절하고 밑반찬도 잘 나와서 특별히 갈 곳이 없으면 이 집을 갑니다. 그래서 지난번에는 신부님들께 인천 맛 집으로 선정된 곳이 있다면서 모시고 갔었지요. 그런데 신부님들께서는 조미료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면서 별로라고 말씀하네요. 저한테는 너무나 맛있는 집인데 말이지요.
우리 주변을 보면 이렇게 획일화 시키는 것들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싶습니다. 자신의 입맛이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의 만남 안에서도 이러한 획일화로 아픔과 상처를 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 기준에 의해 저 사람은 옳은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된다는 것 자체가 큰 잘못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획일화를 시키는 가운데에서 하느님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획일화는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이 더 윗자리에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면서 우십니다. 평화의 도시, 평화의 근원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도성이지만, 이 안에 참된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하며 또한 그 뜻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큰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지요. 자신의 생각만 옳다는 획일화가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러한 획일화가 큰 죄를 만들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도 바로 자신들의 이권만을 생각하는 획일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고통과 아픔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일까요? 이러한 획일화가 만들어내고 있는 지금의 현 상황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어떠하실까요? 어쩌면 단순히 우시는 정도가 아니라, 통곡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나의 뜻을 더 윗자리에 올려놓는 획일화를 버려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얼굴에 슬픔이 아니라 웃음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
<연중 제33주간 목요일>(2012. 11. 22. 목)(루카 19,41-44)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멸망>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1-44)."
이 말씀에서 '오늘'은 '오늘이라도' 라는 뜻이고,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오늘'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오늘'입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1요한 2,18)."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옛날의 사건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예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는 하느님이고,
하느님의(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멸망 예고 말씀'은
지금의 세상 사람들에게 하시는 경고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이라는 말씀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이라는 뜻이고,
다시 이 말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회개를 한다면'이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알았더라면'은 '알려고 노력했더라면'입니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닌데, 알려고 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라는 말씀은
'보여주어도 보려고 하지 않고, 들려주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감추어져 있다.' 라는 말은 '못 보고 있다.' 라는 뜻이 아니라,
'보려고 하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보아야 할 것은 보지 않고,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면서 자기가 보고 있는 것만을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아예 진리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오늘의 쾌락만 추구하기도 합니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멸망의 때가 닥쳐올 것이다.' 라는 뜻인데,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때'가 '멸망의 때'가 될 것이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때'가 될 것입니다.
구원이든 멸망이든 간에 누구에게나 '그때'가 닥칠 것입니다.
'그때'가 구원의 때가 될 것인지, 멸망의 때가 될 것인지는
지금 자기의 삶이 결정할 것입니다.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영속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인류의 문명과 업적들은 어쩌면 신기루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세계 문화 유산이니, 세계 7대 도시니,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하느님께서 그것들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새 예루살렘에는 인간의 건축물이 없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 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
정녕 저희는 당신의 진노로 스러져 가고 당신의 분노로 소스라칩니다(시편 90,5-7)."
이런 말을 하면 '허무주의' 라고 얼굴을 찡그릴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하고 있는 말은 허무주의나 염세주의가 아니라
더 늦기 전에 함께 회개하자는 권고입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는 이유를 말한 것인데,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신 때', 즉 '믿고 회개할 수 있있던 때'입니다.
'알지 못하였다.'는 '알기를 거부했다.'이고,
이 말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했다는 뜻입니다.
날마다 보도되는 각종 범죄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지금 이 땅이 소돔과 고모라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열 명의 의인이 없어서 멸망했습니다(창세 18,32).
지금 이 땅에는 멸망을 연기시킬 수 있는 의인이 몇 명이나 있을까?
'그래도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보다는 낫다.' 라고 큰소리칠 수 있을까?
송영진 모세 신부
-------------------------------------------------------
< 신앙의 고수되는 법 >
상대를 이겨야하는 모든 게임이나 스포츠에서는 ‘타이밍’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축구를 할 때에도 순간적으로 패스해야 할 타이밍, 혹은 슛을 때려야 할 타이밍을 놓치면 1초도 안 되어서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게 됩니다. 1초만 늦게 패스를 하고 슛을 날려도 볼을 빼앗겨 버리거나 막히고 맙니다. 왜냐하면 상대에게 방어할 시간을 주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테니스를 칠 때에도 혹은 더 정밀한 골프를 칠 때에도 0.1초 차이로 공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방향이나 거리로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강호동이 진행했던 무릎팍 도사에서 그가 씨름할 때에 경기가 시작하기 이전에 미리 다섯 개에서 일곱 개의 기술을 생각해 놓는다고 하였습니다. 한 기술이 먹히지 않았을 때, 다음 기술을 생각한다면 그 사이에 역습을 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바로바로 이미 계획해 놓은 다른 기술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 상대에게 역습을 당하지 않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운동을 잘하기 위해서는 머리 회전도 빨라야합니다. 모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몸의 반응속도가 가장 중요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축구가 대세입니다. 너도나도 그들의 패싱 게임을 찬양하고 지향합니다. 어떻게 하면 패스를 잘할 수 있을까요? 패스할 곳을 못 찾았는데 상대방이 달려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패스 하다 빼앗길 경우엔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 게 좋을까요? 세계 축구의 ‘보물’ 안드레스 이니에스타(29, 바르셀로나)는 키도 작고 몸무게도 63킬로밖에 되지 않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패스의 달인이 되었는지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볼을 받기도 전에 나는 패스를 연결할 동료부터 찾는다. 항상 내 주위에 누가 있는지 인지하고 있다. 킬러 패스를 내주는 타이밍을 간파해야 한다. 바르셀로나는 오랫동안 정해진 전술로 호흡을 맞춰왔기 때문에 모든 선수가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를 잘 알고 있다. 볼이 어디로 움직일지를 상대보다 먼저 안다면 그만큼 유리해진다. 볼을 잡은 상태에서 어떻게 할지 생각하면 바로 빼앗기고 만다. 최고의 선수들은 생각의 속도가 무척 빠르다. 동료가 어디로 달려가는지, 오프사이드에 걸리진 않을지, 누가 충분한 공간을 갖고 있는지, 누가 볼을 받고 싶어 하는지, 발 앞으로 받고 싶어 하는지 또는 앞 공간으로 받고 싶어 하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항상 주위에 누가 있는지를 인지해야 한다.”
바둑이나 장기를 두어도 얼마나 먼 앞 수를 미리 보느냐가 고수에 속하느냐, 이제 갓 입문한 사람이냐가 판결이 납니다. 당구를 칠 때도 눈에 보이는 공을 치는 것은 하수이고, 고수는 치고 난 다음에 공들이 흘러서 어떻게 모이게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관광버스를 타고 가다가 누가 멀미를 하면, 그 멀미하는 사람을 버스 맨 앞자리에 앉힙니다. 그 이유는 앞 유리창으로 버스가 달리는 길이 미리 보이기 때문입니다. 미리 보이면 좌회전을 할 것인지 우회전을 할 것인지 미리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몸이 놀라지 않아 멀미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전하는 사람은 절대 멀미를 하지 않습니다.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리 예상하고 있지 못하다면 닥치는 모든 상황을 헤쳐 나갈 때마다 멀미가 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미리 예상하고 있다면 대처하는 것이 매우 간단해집니다. 모든 것의 하수와 고수를 판단하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준비가 되어 있느냐,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 살아가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십니다. 미래에 로마인들에게 완전히 파괴될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그렇게 멸망하게 될 처지가 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그 때를 위해 가장 잘 준비가 되어있었던 삶의 고수가 계셨는데 바로 성모님입니다. 성모님은 즈카리야처럼 자신에게 닥쳐 온 운명에 대해 주저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이 바로 받아들이십니다.
혹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보십시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를 바꿀 때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성모님은 바로 그 때가 예수님이 기적을 하셔야 할 때임을 알아차리십니다. 그래서 첫 번째 기적을 얻어내신 것입니다.
때를 아는 것, 이것이 고수의 특징입니다.
만약 사제나 수녀님이 되려고 할 때 이미 결혼해 버린 상태라면 어떻게 할까요? 이미 때가 늦어버린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하느님이 성소의 길로 불러주실 때를 미리 알고 있었어야 합니다. 일단 기차가 떠나면 그만입니다.
그렇다면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내가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준비한다는 의미는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차를 타고가다가도 그 꽃이 보이지만, 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걸어가면서도 그 꽃을 보지 못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자신이 관심 있는 것만 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각자 성경을 다르게 해석해서 수많은 종파로 나눠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가톨릭교회는 개인의 해석을 규제하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르침 안에서 성경을 보려 합니다. 개인의 관심사가 어떻게 그동안 성인들을 포함한 교회의 관심사를 넘어설 수 있겠습니까?
어쨌건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에 관심이 없다면 나에게 주어질 소명이나 구원의 시기를 놓쳐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의 관심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나 세상에 두게 만드는 방법을 쓰는 것입니다. 나의 관심이란 하루 중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매 순간이 하느님의 뜻만을 생각할 때, 신앙에 있어서는 가장 완전한 고수가 되는 것입니다.
----
눈물을 닦아드리자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비시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청한다고 하지만 그분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고 계시며 그 범주에서 벗어날 것을 염려해 우리를 위해 빌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시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지 않고 있으니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십니다.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아프셨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길을 걸어야 할 사람들, 평화를 갈망해야 할 사람들이 그 본연의 것에는 관심이 없고,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평화의 길을 걸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의 완고한 마음은 자신의 삶을 돌이킬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의 길을 자초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우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소리에 우십니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자니 눈물이 납니다.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주님을 생각할 틈이 없으니 참된 평화는 영영 멀기만 합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먼저 마음의 무질서를 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마음의 고요를 누립니다.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구애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주님의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 평화를 일찍 알았더라면 그렇게 사사건건 마음의 혼돈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텐데 …. 주님께 대한 믿음은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하고 또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 구원을 갈망하며 구원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눈물을 씻게 됩니다. 참으로 올바르게 주님을 믿는 이에게는 참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서 평화를 갈망합니다. 재물이나 명예, 건강, 외모, 자식 등이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전력투구하며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그건 것들은 영원하지 않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합니다. 결국 그것이 참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그것을 믿는 이는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주님의 눈물을 씻겨드리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주님의 눈에서 눈물을 그치게 해드리고 웃음꽃이 피게 할 수 있는 새 삶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기를 희망합니다. 세실리아 축일을 맞이하여 축하와 사랑을 드립니다. 행복하십시오. 사랑합니다.
---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 또는 ‘평화의 근원지’라는 뜻을 지닌 도성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예루살렘을 통일 왕국의 수도로 삼아 계약의 궤를 그곳에 옮겨 왔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은 뒤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때를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때가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시고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때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고 안타까운 나머지 눈물을 흘리십니다. 실제로 기원후 70년,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은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성벽 일부만 남기고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자식이 파멸의 길로 접어드는 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픕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심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멸망의 길에서 벗어나는 길은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의 눈물을 닦아 드리는 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