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끝나고 최초로 쓴 단편 소설입니다. 아직 많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읽어주시면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1950년 9월. 한반도의 강원도(江原道)라는 지방의 산골짜기일 것이다. 시간은 대략 2시 경일까. 햇볕은 아직 따갑기만 하다.
남한군 정영훈(鄭永熏, Yeong-Hun Jeong) 중위는 자기 소대원들의 대부분을 죽이고 자신도 부상을 입는 아주 뼈아픈 경험을 했다. 그의 목표는 적의 조그마한 기관총 참호. 그것을 공격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소대원을 이끌고 포복 자세로 천천히 접근했다. 그 때 적의 수류탄 몇 발이 굴러 내리더니 그대로 터져서 소대원이 말려들었다. 다행히도 그는 수류탄이 굴러간 지점보다 훨씬 앞을 기어가고 있었으므로 별로 다치진 않았다. 그러나 뒤이어 내리꽂힌 기관총 세례로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그는 응급조치로 다리에 붕대를 동여맸다. 피가 배어나와 빨갛게 물든다. 이제 그가 병원에 가면 당장 절제수술을 받을 것이다.
그가 야전 병원으로 가기 위해 구급차에 들어갈 때 중대장 김우건(金友建, U-Geon Kim) 대위가 말을 꺼낸다.
"적은 대강 어땠나?"
중위는 대답한다.
"저항이 완강합니다. 저 참호를 점령하려면 엄청난 희생이 필요할 것입니다."
구급차는 무심히 떠나고 김우건 대위는 고뇌에 빠져들었다. 이제까지 작은 기관총 참호를 제압하는 데는 소대 규모의 병력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상황이 달랐다. 지형 조건상 그들이 언덕 위를 잡고 있었고, 우회 루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것을 점령하려면 상당한 희생이 불가피했다. 김우건 대위는 담배를 빼들고 피웠다. 그의 입에선 한숨만이 나올 뿐이었다.
참호의 상황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참호에 남아있는 북한군 병사는 4명. 이들은 모두 서울에서 차출된 북한군 병사들이었다. 북한군은 이북으로 철수하면서 이들에게 '현 위치 사수' 명령을 내리고 약간의 식량과 물, 총탄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들은 북한군이 다시 이 위치로 돌아올 때까지 기약 없는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다.
김영방(金英房, Yeong-Bang Kim)은 담배 하나를 빼들었다. 그리고 성냥을 꺼내려고 했다. 그런데 주머니에 남은 게 없었다. 다 써버린 것이다. 영방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그들은 철수하면서 담배 하나 피울 권리도 앗아가 버린 것이다.
"썩을."
영방의 입으로 내뱉는 소리다. 옆에 있던 강현명(姜玄明, Hyeon-Myeong Kang)이 그를 본다. 찌푸린 인상. 또 다시 자신에게 잔소리가 날아들 것이다.
"이봐. 성냥 있어?"
"저한테 그런 게 있겠습니까?"
현명은 싸늘하게 대답한다.
"이 자식. 그딴 물건도 안 가지고 다니냐? 너 담배 안 피워?"
"벌써 당신이 다 쓰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또 쓰고 싶은 것입니까? 저도 피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남은 게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짜증나는 녀석 같으니라구."
영방은 다시 그의 따발총을 붙잡는다. 소련제 PPsh-41 기관단총은 묵직한 물건이다. 처음에 그런 물건을 붙잡고 전선으로 가라고 했을 땐 난감했었다(무거우니까). 그런데 한 몇 달 뛰다보니까 이젠 적응이 다 되어버렸다. 지금은 묵직한 느낌도 별로 받지 못한다.
"그 쪽! 시끄러우니까 입 좀 닥쳐!"
기관총 사수인 황동주(黃東周, Dong-Ju Hwang)가 짜증난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인다.
"뭐? 야! 너 뭐라고 했어!"
성질이 더러운 영방이 이에 응수를 한다.
"닥치라고 했다!"
"뭐야! 이 개자식이!"
서로가 싸울 듯이 으르렁거린다. 일촉즉발의 상황.
"아! 가만히 있으라구요! 누군 안 짜증나는 줄 알아! 누군 여기서 죽고싶어 환장한 줄 알아!"
가만히 있던 기관총 탄약수 윤대광(尹大光, Dae-Gwang Yun)이 소리를 지른다.
"넌 뭐야!"
동주가 주먹을 쥐고 대광의 얼굴을 날리려고 했다. 그러나 대광은 동주의 주먹을 간단히 잡았다.
"누군 안 무섭습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소리 높여 떠든다고 해결이 됩니까? 그리고 이렇게 주먹 내미는 거 신상에 안 좋습니다. 이젠 인민재판도 없으니 나이 많다고 까불다가 줘 터지면 누구에게 하소연하려고 그러우?"
대광은 싯누런 이를 드러내 보였다. 동주는 이 기세에 움찔하여 주먹을 내린다.
사실 그랬다. 이렇게 상부의 통제를 받지 않은 부대에서 같은 계급의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마찰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상부가 와해된 상황이라면 싸움 잘 하는 놈이 대장이었다. 영방이나 동주 같으면 공부를 하는 대학생이었다. 반면 대광이 같으면 못 배운 농사꾼 집안이라 싸움은 못 할지라도 힘은 제법 있었다. 행군할 때에도 영방과 동주는 헥헥거린 반면 대광은 하나도 흐트러짐 없이 유유히 걸었다. 이렇게 둘의 힘 차이가 보이는 데 싸우면 누가 이길지는 자명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들은 싸울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어떠한 것 때문에' 싸우지 못하는 것이다.
"예? 이 병력으로 점령하라구요? 적어도 이 참호를 점령하려면 대대급의 병력이 필요합니다."
우건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수화기에서 나오는 목소리도 크다. 그러나 잘 들리지는 않는다.
"항공지원도 불가능합니다. 저 참호는 나무 사이에 가려져 있어 하늘에서 공격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
"예? 지원군이 오려면 적어도 하루 이상 걸린다구요? 에잇! 차라리 그냥 하겠습니다!"
우건은 전화를 격하게 끊어버린다. 한시라도 급히 점령해야 하는데 하루가 걸려야 지원병을 파견한단다. 차라리 여기 있는 병력으로 참호를 점령하는 게 낫다. 어떻게든 지원을 기대했는데 이젠 어쩔 수 없었다. 그냥 그대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우건은 1개 중대 병력을 일시에 동원해서라도 저 참호를 점령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성은(趙成恩, Seong-Eun Jo) 소위가 이끄는 분대가 돌아왔다. 우건의 지시로 주변 정찰을 한 것이다. 처음 정찰은 너무 대강 했기 때문에 이번엔 주변 지형을 꼼꼼히 살펴보라고 했다. 한참만에 돌아온 성은의 보고는 이러했다.
"우회 통로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방법은 오로지 정면 돌파밖에는 없습니다."
이 말에 우건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우회 통로가 있으면 쉽게 점령할 수 있겠지만 적은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아마도 우회 통로는 모조리 없애버렸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지뢰를 매설했을 가능성이 크다. 저들만 남겨두고 본대는 사라진 뒤였으므로 저들이 죽으나 사나 신경을 쓰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놈들은 밀려오는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이 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전쟁 초기에 독립기갑사단 3연대 도보대대는 드럼통을 굴려가며 적의 총탄을 막아내며 김포공항을 탈환했다. 드럼통이야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 그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총알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으므로 조금 더 유리하게 싸울 수 있을 것이다.
"드럼통 있나?"
"아니, 갑자기 드럼통은 뭐에 쓰시려고……."
성은은 의아해했다. 그러나 잠시 뒤에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떡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성은은 드럼통 3개를 가져왔다. 밭에는 미군의 장갑차들이 버린 드럼통들이 널려있었다. 이것을 이용하여 적 참호를 치는 것이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그 안에다 모래를 채워라. 그리고 그것을 비탈면에 가지고 가라."
성은은 그 말대로 했다. 잠시 후 드럼통에는 모래가 가득 차고 많이 묵직해졌다.
비탈면 아래를 감시하고 있던 현명이 아래쪽에서 무언가 수상한 일이 행해지고 있음을 목격했다. 탱크 옆에 달고 다니는 괴상한 물건이 굴러오고 있던 것이다. 점점 굴러 다가오는 저 물건은 어쩐지 무식해 보였다.
"어이. 저기 뭐가 오고 있는데요."
그 말에 모두들 아래를 응시했다. 과연 괴상한 물건 3개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필시 적들의 수작일 테지. 어서 공격을 해야겠군."
동주는 자신의 MG-42기관총의 손잡이를 잡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대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소련에게 노획된 독일군의 MG-42기관총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신뢰성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튼튼한 물건이었던 MG-42기관총은 그리 호락호락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분당 1200발이라는 엄청난 속도로 총알이 쏟아져 나온다. 그 옛날 '히틀러의 전기톱'이라는 별명이 전혀 무색하지가 않게 말이다.
드럼통에 구멍이 뚫리고 총알이 박힌다. 총알이 쏟아지는 땅에는 흙먼지가 일어난다. 아직은 9월이라 풀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총알의 힘은 풀뿌리가 흙들을 얽어놓는 힘 따윈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아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린다. 총알에 맞아서 생기는 비명이 아니다. 흙먼지에 겁을 먹는 것이다. 아무리 간이 큰 사람이라도 옆에서 총알이 내리꽂히고 있는데 겁을 먹지 않을 수 없다. 병사들은 드럼통 뒤에서 총알 피하기에 급급했다. 총알 세례 때문에 전진도, 후퇴도 못 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동주가 계속 총알을 낭비하자 초조해지는 것은 나머지 사람들이다. 특히 대광은 탄약수이기 때문에 남은 총알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총알을 이렇게 계획 없이 써대는 동주의 태도는 언짢을 수밖에 없다.
"총알 그만 쓰도록 합시다! 너무 낭비가 심해요!"
그러나 동주는 계속 쏴댔다. 총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특히 안으로 움푹 파고든 참호 안에서는 소리가 증폭이 되어 더욱 심해졌다.
대광은 탄약 보급을 끊었다. MG-42는 총알이 다 떨어지자 침묵한다.
"어! 뭐야! 총알 더 넣어!"
동주가 말한다.
"여분 총알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나서 그런 말을 하슈."
대광은 이렇게 대답하고는 주머니에 있던 수류탄을 들었다. 그리고 안전핀을 뽑고 던졌다.
MG-42가 멈췄다. 이 때다 싶어 우건이 소리친다.
"적의 총격이 멈췄다. 가자!"
하지만 방금 전까지 받았던 기관총 세례의 충격으로 중대원들 대부분이 정신을 못 차리고 쪼그려 앉아있었다. 이대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우건이 앞을 바라봤다. 참호는 아직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무언가 날아오는 것이 있었다. 크기는 벽돌을 3등분 한 것이랑 비슷했다. 순간적으로 봐도 위험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건은 소리쳤다.
"썩을! 고개 숙여!"
"펑!"
다시 수류탄 세례를 받았다. 수류탄은 드럼통 뒤편으로 떨어져 중대원들을 많이 다치게 만들었다.
"아아악!"
"내 팔!"
"살려줘!"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다치지 않은 중대원들은 다시 날아들 수류탄에 겁을 먹고 일어나서 무작정 도망갔다. 그리고 이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참호로부터 따발총알이 날아든다. 따발총은 위력이 그다지 세지 않아서 3명 정도가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그러나 빗맞았는지 즉사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쓰러진 중대원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기어서 그 사지를 탈출하려고 했다.
"젠장! 후퇴다!"
우건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전부터 물러나고 있던 상태. 병사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방금 전 공격에서 죽은 중대원은 없었다. 그러나 7명이 크게 다쳤고 나머지 대원들도 대부분 찰과상을 입었다. 피해가 막심하다. 원활한 임무를 위해선 꼭 차지해야 하는 참호를 공략하는 데 벌써부터 이렇게 피해가 크다. 앞으로 펼쳐질 전투는 이것보다 더 심각하게 펼쳐질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우건은 다시 담배를 물었다.
"야! 너 미쳤냐!"
동주가 대광에게 소리친다.
"갑자기 총알 끊으면 어쩌자는 거야!"
"총알 낭비가 그렇게 좋으우?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계획적으로 써야 할 거 아니우?"
PPsh-41을 든 대광이 동주에게 말한다. 수류탄 하나와 PPsh-41로 밀려드는 적군을 격퇴시킨 대광이었다. 동주는 뭐가 잘났는지 계속 지껄인다.
"그깟 놈들이야 내 기관총으로 모두 쓸어버릴 수 있단 말이다! 그걸 네 놈이 방해해!"
"넌 한 일도 없잖아!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
영방이 말한다.
"넌 뭔데 지랄이야! 왜 다들 내 일을 방해하는 거야!"
역시나 성질이 더러운 동주도 응수한다.
"니가 그렇게 잘났냐? 니 혼자서 싸우면 다 되는 줄 아냐구!"
서로가 서로의 목소리를 높여나간다. 이젠 내분이 위험수위에 도달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오합지졸은 이런 것 때문에 더 무서운 것이다. 조금만 의견이 달라도 이렇게 스스로 자멸의 길로 빠져드니까.
"타타타타타!"
그 때 다시 PPsh-41의 발사음이 들렸다. 이번엔 현명이 쏜 것이었다. 이제까지 제일 많이 참아온 현명이 드디어 폭발한 것이다. 총은 하늘을 향해 쐈기 때문에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 특유의 요란한 소음은 순간적으로 싸움을 멈추게 하기엔 충분했다.
"조용히 해! 지금 우리끼리 분열되면 어쩌자는 거야!"
"……."
모두들 침묵했다. 현명은 이제까지 잘 참아온 것을 한꺼번에 분출시킨 듯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모두들 잘 들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뒈진다. 살고 싶으면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죽을 각오로 싸우라구. 그리고 동주! 총알 아껴서 써! 니가 총알 낭비할수록 목숨이 짧아진다."
"……알았다."
동주가 마지못해 말한다.
해가 저물고 하늘이 서서히 검게 물들어간다.
우건은 이 때를 노리고 재차 공격을 하려고 했다. 어둠은 이 쪽에 있어서는 일종의 엄폐물이 될 수 있다. 밤엔 시야가 제한되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기어가는 우리들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옛날의 경험을 떠올려 본다.
충승(沖繩, Okinawa)에서의 지상 전투에 일본군으로 참여했던 경험이다.
그 곳에선 김전우건(金田友建, Yuuken Kaneda)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당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상태였으니까. 당시 제국주의 국가가 그렇듯 우건도 징병되어 아무 의미 없는 전쟁에 내몰렸다. 충승의 무수히 많은 산의 한 가운데 틀어박혀 굴을 파고 지냈다.
그 중 하나의 굴에 우건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 대략 20여 명 정도. 그 중 일본군은 6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충승 원주민이었다.
그 곳에 틀어박힌 지 한 10일 정도 되었을 때 전투가 벌어졌다. 미국 해병대원들이 몰려온 것이다. 자기네 편의 기관총이 불을 뿜고 1개 분대의 미국 해병대가 전멸했다. 이 상태로는 적 1개 중대가 몰려와도 점령이 불가능하긴 마찬가지였다. 대낮에는 그들의 활동이 뻔히 보이므로 이 쪽에서 먼저 사격을 하게 된다. 때문에 적은 공격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밤이 되니 상황이 달라졌다. 어둠을 틈타 적이 포복자세로 기어서 올라온 것이다. 극도로 긴장된 일본군은 어둠 상태에서도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들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화염방사기와 수류탄으로 겨우 20m 거리에서 공격해오는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굴은 점령되었고 그를 뺀 나머지 일본군 5명과 충승 원주민 7명이 죽어버리고 그는 화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긴 충승 혈전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지금은 그가 공격군의 입장이고 북한군이 방어군의 입장이다. 숫자는 이 쪽이 유리하다. 그는 충분히 자신감을 얻었다.
다시 중대원들을 집합시켰다. 낮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녀석들은 물론 뺀다. 쉬고 있던 병사들은 다시 모여 열을 맞춰 선다. 그들의 앞에는 우건이 있다. 그는 자신의 중대원에게 말을 한다.
"자! 이제 우리들의 때가 왔다! 모두들 포복 자세로 적 참호까지 기어간다! 그리고 육탄 돌격을 벌인다! 내 말대로 하면 승리할 것이다!"
"네!"
중대원은 주먹을 하늘에 쳐들고 외친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참호가 있는 능선으로 가서 엎드리고 수풀을 헤치고 기어가기 시작한다. 이제 다시 공격이 시작된다.
"아. 내가 왜 여기까지 끌려왔을까."
대광이 탄식을 한다.
"또 뭔 개소리야."
옆에 있던 동주가 대꾸한다.
"씨발. 내가 왜 빨갱이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하고 싶어서 싸우는 줄 알아?"
"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우리들은 자랑스런 사회주의 전사다. 자본가들의 착취로부터 노동자들을 지킬 의무가 있는 것이다."
동주는 자신이 무슨 적군(赤軍, Red Army)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영방은 그의 말에 쓴웃음을 짓는다.
개전 초기 서울이 단 3일만에 점령되자 큰일난 것은 정작 동주 자신이었다. 그의 집안은 예로부터 재산을 많이 축적한 유산가 집안. 당연히 인민 재판에 의해 처형될 몸이었다. 그러나 그의 웅변술은 타고났는지 그 말발 센 북한군 정치장교를 상대로 콧대를 완강히 꺾어놓은 것이다. 그 때 그가 한 말은 이러했다.
"저야말로 진정한 희생양이오. 꼴에 돈 있는 집안이랍시고 태어나 그들의 꼭두각시로서 조종당하고 살아온 몸이란 말이오. 사실 마음으로는 진정 사회주의자이지만 이 썩어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제대로 목소리를 키울 수가 없었소이다. 이제 당신들이 와서 서울을 해방시켜주었으니 우리들 사회주의자들도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겠지."
이 말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실제로는 이것보다 더 긴 장황한 연설로서 정치장교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만들어서 집안 배경에도 불구하고 '희생양'으로 인정받아 살아남은 것이다.
영방의 눈에는 그 어린 시절에 '천황폐하 만세'를 무작정 외치던 녀석이 저렇게 쉽게 변질해버리는 것이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영방은 당연히 살아남는 것이지만 부잣집 아들도 저렇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현명은 그들의 대화 따윈 아예 신경도 안 쓰고 오로지 앞만 쳐다보았다. 그는 남들과 어울려 지내는 데는 서툴렀다. 흔히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야기하는 출신 성분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농사꾼 집안. 별로 많이 배우지도 못했지만 그가 딱 하나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들은 총알받이로서 끌려왔다는 것이다. 영방이나 동주처럼 많이 배운 것도 아니고 대광처럼 무식하게 힘만 내세우는 것도 아닌 그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 북한은 그들을 버렸고 이제 총알받이로서 무참히 죽어나간다는 것이다.
능선을 조용히 감시한다. 바람은 아직 불어오지 않았다. 가끔씩 풀이 흔들리는 정도로 약하게 부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웃긴 게 있었다. 어느 부근에선가 풀이 바람에 의해 흔들리는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인위적인 면이 없는 자연현상으로 보기엔 정말 어이없는 사태. 참호 안의 넷 중 누구보다도 '감(感)'이 좋은 그로서는 저것은 분명 어떤 생물체가 만들어놓은 현상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소련제 모신-나강 소총을 붙잡았다.
아직 장전은 되어있지 않은 상태. 장전손잡이를 당겨 한 발을 약실에 넣는다. 그리고 그 풀을 향해 총을 쏜다. 이것은 매우 빨리 이루어져 미처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탕!"
"악!"
역시 무언가가 있었다. 총소리가 나자마자 들리는 비명소리. 참호 안의 나머지 셋은 그 총소리와 비명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또 다시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야! 빨리 총알 넣어!"
"지금 빨리 넣고 있습니다!"
"수류탄 까!"
완전히 난장판이다. PPsh-41을 든 영방은 무작정 응사하고 동주와 대광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침착한 녀석은 현명 하나밖에 없었다.
북한군이 먼저 사격하자 공격하는 쪽도 난리가 났다. 설마 이렇게 빨리 들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중대원들과 참호까지의 거리는 20m, 충승에서라면 충분히 공격을 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이 곳에서는 상당히 애매한 거리다. 재빨리 뛰어서 적을 제압해버릴 수도 있는 위치였지만 잘못하면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우건은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중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에잇! 할 수 없다! 돌격! 일어서서 뛰어! 무조건 전진하라!"
이제 뛰기 시작한다. 대략 20여 명 정도 되는 중대원들이 모조리 뛰기 시작한다. 손에는 모두 M1 소총을 잡고 앞에는 대검을 꽂았다. 육탄전을 벌이려는 것이다.
"와아아!"
함성을 지르면서 뛰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기관총의 사격이 시작된다. 선두에 있던 3명이 쓰러진다. 나머지 대원들은 모두 엎드린다.
"또 기관총 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우건의 옆에 엎드린 박철수(朴哲秀, Cheol-Su Pak) 병장이 물었다. 그 둘은 아까 전에 쓰러진 3명을 제외하고 제일 선두에 있던 자들이었다.
"대략 저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되겠는가?"
"한 열 걸음 정도입니다."
"정말 애매하기 짝이 없군. 그냥 돌격하면 기관총에 맞아 전멸 당하고 말 텐데."
그 때 우건은 박 병장의 허리주머니에 있는 수류탄을 볼 수 있었다.
"아. 수류탄이 있다. 엎드린 상태에서 날리면 저기 참호 안까지 넣을 수 있나?"
"글쎄요. 조금 힘들겠지만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래. 어서 던져라."
박 병장은 허리춤에 있던 수류탄을 꺼냈다. 그리고 안전핀을 뽑았다. 손에 쥐고 있는 상태. 이제 던지면 5초 후에 터질 것이다.
"펑!"
그 때 뒤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필시 적의 수류탄이겠지. 그런데 비명 소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엉뚱한 데 던진 것 같았다.
"적의 수류탄 공격이다! 피해라!"
낮의 수류탄 공격의 악몽이 다시 떠오르는 것인가. 이미 뒤쪽은 무너지고 있었다. 자신이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나 둘 슬금슬금 기어서 도망가기 시작한 것이다.
"도망가지 마라! 이놈들!"
우건이 권총을 뽑아들고 소리친다. 그러나 이미 무너지는 대열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옆을 봤다. 박 병장은 수류탄을 꾹 움켜쥔 채 엎드려 있었다. 그도 공포감에 젖어든 것인가? 이제 싸울 사람은 우건 혼자밖에 없었다.
우건은 박 병장의 손에서 수류탄을 뺏는다. 그리고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정확히 둘 센다. 그리고 던졌다. 그가 던질 당시에 기관총탄이 날아와 어깨를 관통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던진 후였다. 우건은 어깨를 움켜쥐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굴러 떨어졌다.
"펑!"
둔탁한 폭발음. 그와 동시에 참호의 기관총이 침묵했다. 절호의 기회. 우건은 굴러 내려가는 와중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빨리 돌격해! 이 바보들아!"
방금 전 적의 수류탄 공격은 의외였다. 참호 바로 앞에서 터진 수류탄에 모두들 놀라서 쓰러졌다. 흙먼지가 참호를 덮쳤다. 한동안은 이 먼지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다.
"욱!"
가장 먼저 일어나는 녀석은 현명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사는 것에 대해 상당히 집착을 하는 모양이었다. 방금 전의 수류탄 공격으로 무언가가 얼굴을 덮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파편이 얼굴을 스쳤을 것이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파편이 머리에 박힌 것 같지는 않았다.
"야! 정신차려!"
엎드려 있는 녀석들을 향해 말을 한다. 그러나 아직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잘 일어나지 못한다.
"일어나란 말야! 이 자식들아!"
그는 영방이 쏘던 PPsh-41을 들고 아래를 향해 쏘기 시작했다. 요란한 PPsh-41의 소리에 다른 녀석들도 겨우 정신을 차린다.
"……으으으."
동주는 일어나자마자 반사적으로 기관총을 잡고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나 총이 작동되지가 않았다.
"고장! 고장! 큰일났다!"
동주는 머리를 감싸쥐며 절규한다. 기관총이 고장났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장나면 어때! 어서 수류탄을 까!"
현명이 외친다. 그리고 이번에는 더 절망적인 소식이 그의 귀를 때릴 것이다.
"……수류탄이…… 없어!"
대광의 외침. 이제 그들은 끝이었다. 더 이상 도망도 가지 못하는 신세. 현명도 이젠 제 정신이 아닌지 무작정 응사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녀석들은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어느 새 적들은 참호까지 기어올랐다. 기관총이 침묵하자 적들이 이렇게 빨리 몰려드는 것이다. 현명은 이제 끝났다는 생각을 했다. 때마침, PPsh-41의 드럼 탄창도 텅텅 비어버렸다.
중대원들이 적 참호 안으로 뛰어들었다. 들어간 인원은 한 3명 정도. 그리고 그 안에서 총알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로 봐서는 분명히 M1의 소리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상황 종료!"
우건은 다친 왼쪽 어깨에 삼각건을 동여매는 응급처치를 했다. 다행히도 관통상을 입었고 뼈를 다치지도 않았다. 그 정도의 상처라면 병원에서 조금 쉬면서 치료받으면 될 것이다.
이 전투에서 자기네 중대원들의 피해는 전사 7명. 부상 10명. 나머지 대원들도 군복이 다 헤지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그러나 적은 단지 4명만을 사살했을 뿐이다. 이건 엄청난 피해였다. 만약 앞으로도 이런 식의 전투가 계속 펼쳐진다면 불리한 싸움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는 아까 전 적의 시체가 그대로 남아있는 참호를 구경하는 과정에서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바로 그들의 발에 족쇄가 채워진 것. 그것도 아주 튼튼한 쇠로 만든 족쇄여서 여간해서는 풀기 힘들어 보였다.
"이런. 이랬으니 저들이 죽기살기로 싸울 수밖에."
분명히 이들은 서울에서 징집된 청년들일 것이다.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녀석들을 잡아다가(우건은 북한군 중에서 동주 같은 녀석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렇게 전장으로 몰아놓고서는 낡은 기관총 하나와 같이 발을 참호에 묶어둔 것이다. 꼭 이런 식으로 죽여야 했을까?
우건은 다시 담배를 피운다. 그런데 주머니 안을 뒤져보니 성냥이 없었다. 어쩔 수 없다. 부하들 성냥에 빌붙어서 피울 수밖에.
1950년이란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끔찍한 해였다. 지금이야 옛날 전쟁이기에 기억하는 이는 얼마 없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전쟁기념관이란 것을 만들어 다시는 한반도에 이런 재앙이 일어나지 않도록 강구하고 있다. - 한 가지 아이러니는 그 전쟁기념관을 만든 세력이 한반도 불바다론을 내걸고 있는 수구 세력이라는 것이다. - 그 전쟁기념관에 가보면 모형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전쟁 상황을 재연한 것이라는데 그 중에 흥미로운 게 하나 있다.
1950년 후반에 남한군이 북한군의 참호를 공략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자세히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북한군의 기관총 참호에는 '족쇄'가 있었다. 기관총 사수가 절대로 도망가지 못하게 바닥에 묶어놓음으로서 그 옛날 히틀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내렸던 '현 위치 사수' 명령을 그대로 재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족쇄'가 있는 참호를 공략할 때 특히 남한군의 희생이 컸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족쇄'의 효과는 가히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가 족쇄에 발이 묶인 상태로 국가에 의해 강제로 싸울 것을 강요받았을 때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이런 것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