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자작나무
법정스님
자다가 저절로 눈이 떠진다. 어김없이 새벽 한 시에서 한 시 반 사이.
이때 내 정신은 하루 중에서도 가장 맑고 투명하다.
자연은 사람의 나이를 묻지 않는다는데, 나이 들어가는 탓인지
남들이 곤히 잠든 이런 시각에 나는 곧잘 깨어있다.
둘레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개울은 두껍게 얼어붙어 흐름의 소리도 멈추었다.
자다가 뒤척이는지 이따금 뜰에 가랑잎 구르는 소리만 바스락거릴 뿐,
이것은 적적 요요한 자연의 본래 모습이다.
창문을 열면 섬뜩한 한기와 함께 새벽하늘에 별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다.
밤을 지키는 이런 별들이 없다면 이 우주는 너무 삭막하고 적적할 것이다.
요즘 오후로는 대지팡이를 끌고 마른 숲길을 어슬렁거린다.
묵묵히 서 있는 겨울 나무들을 바라보고 더러는 거칠거칠한 줄기들을 쓰다듬으며
내 속에 고인 말들을 전한다.
겨울 나무들에게 두런두런 말을 걸고 있으면 내 가슴이 따뜻하게 차오른다.
우리 산천의 수목 중에는 단연 소나무가 으뜸이다.
노송의 훤칠한 품격과 청청한 그 기상은 그 어떤 나무들하고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산중에 있는 겨울 나무 중에서 정답기로는 자작나무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알몸으로 자신을 죄다 드러내고 있는 그 모습이
믿음직한 친구를 대하는 것 같다.
내가 이 산중에 들어온 이듬해 봄. 손수 심은 1백여 그루의 자작나무들은
이제 정정한 수목의 반열에 들어서 있다.
자작나무를 가까이서 대하고 있으면 내 귀에는 문득 바로크 음악이 은은히
울려 오는 것 같다. 그래서 자작나무 곁을 떠나기가 아쉽다.
한 친구의 글에서 자극을 받아, 지난가을부터 그동안 잊고 지내던 엣 가락들에
다시 귀를 기울인다. 파비오 비온디의 연주로 비발디의 협주곡들에 기대고 있노라면
내 감성에 녹이 벗겨져 나가고 속뜰이 한결 투명해 진다.
전에는 바흐의 "평균율 크라비아"를 즐겨 들었는데
요즘에는 "골트 베르크 변주곡"을 자주 듣는다.
잠들기 전 등잔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듣고 있으면 그 가락이 지닌 뒤뜰까지도 울린다.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안드라스 쉬프의 연주로 들으면
감흥이 더욱 새롭다.
그리고 최근에 알게 된 젊은 피에르 앙타이의 하프시코드로 연주한 같은 곡에
귀를 모으고 있으면 3백년 전 예스런 분위기에 젖을 수 있다.
이래서 산중의 겨울밤은 적막하지 않고 넉넉하고 그윽하다.
겨울 자작나무는 이렇듯 우리 가슴에 물기를 돌게 하고 추위를 밀어낸다.
자작나무는 시베리아의 나무로 상징되기도 한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끝없는 설원에 펼쳐진 자작나무 숲을 우리는 기억한다.
몇 해 전 소로우의 '월든'에 들렀다가 그 다음 날 북쪽으로 차를 달려
뉴헴프셔주의 '화이트 마운틴'에 이르렀다.
거기 온 산에 빽빽이 자란 아름드리 자작나무 숲을 보고 나그네는 크게 놀라고 설렜다.
'화이트 마운틴'이란 하얀 산이란 뜻인데 산 정상에 사철 눈이 쌓여 있어 그런 이름이
생겼겠지만 온 산이 허연 자작나무 숲으로 덮여 있어 원주민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앞에 마주 서면 사람이 순수해지는,
겨울 자작나무 이야기로 새해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