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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3일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마태오 18,1-5.10.12-14
내가 죽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어린이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작은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욕심이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작은 생명도 죽이지 못하고 살리려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자기를 낮춘다는 말은 자기를 비운다는 말과 같고 자신을 죽인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삶입니다. 자신을 죽이려면 자신을 죽이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모든 선택의 기준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죽으면 정말 행복할까요? 하버드대 연구원으로 지내던 37세의 뇌 과학자였던
질 볼트 테일러는 샤워 도중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갑자기 어지러워 비틀거리다가 욕실 벽을 손으로 짚습니다.
그런데 어디부터가 자기 손이고 어디까지가 욕실 벽인지 구분이 안 되는 거였습니다.
그 이유는 언어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영역인 좌뇌 쪽에 출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까 이번엔 자기가 누군지 내 이름이 뭔지 어떤 사람인지조차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례로 시끄러웠던 그녀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고요하고 조용해집니다.
나와 세상을 구분하기 물리적 경계가 희미해지고 그냥 엄청난 우주의 에너지 자체만을 느낍니다.
모든 것과 하나가 된 거 같은 기분을 그녀는 이런 느낌을 마치 요술 램프에서 빠져나온 지니가
된 거 같았다고 표현합니다.
테일러는 이런 경험을 두고 “나의 정신적 에너지가 행복이 넘치는 침묵의 바다를 거대한 고래처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라고 표현합니다.
좌뇌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재잘거림을 통해서 우리를 삶에서 뒤처지지 않게 해줍니다.
좌뇌의 언어 중추가 나는 누구누구,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느끼게 합니다.
이때 우뇌는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모든 사람을 인류라는 가족의 평등한 존재로 여기고 국적 인종 종교 이런 인간들이 많은
경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린이들의 뇌를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어린이들은 좌뇌가 덜 활성화되어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온 우주와 하나가 되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출처: 하버드대 뇌과학자의 깨달음, 심리학 고양이, 유튜브]
그렇다면 자아, 곧 나가 죽으면 모두가 참 행복을 느낄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아가 강하면 어쨌거나 세상에서 자기만을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관계의 친밀함에서
오는 행복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관계가 힘들어 스스로 관계를 위해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자아를 죽이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세계적인 뇌 과학자 애덤 지먼은 자기가 죽었다고 말하는 48세 환자 그레이엄과 만납니다.
그레이엄은 이미 본인이 죽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먹지도 자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한 표정은 짓지 못합니다.
사실 이는 그가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렵기 때문에
스스로를 죽은 사람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무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고 합니다.
니콜라스의 부모님은 항상 마약에 절어 있었습니다.
열두 살 되던 해에 니콜라스 엄마와 양아버지는 자주 싸웠으며 어느 날 어머니가 부엌에서 피를 흘리며 경련을 일으키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니콜라스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서너 걸음 다가갔어요. 정상적으로 걷다가 갑자기 꿈속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졌다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어요.”
그 후로 니콜라스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몸까지도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상태로 살게 됩니다.
현실은 안개가 자욱하고 꿈 같거나 시각적으로 왜곡된 것처럼 보입니다.
분명히 내 생각인데 내 생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거나 내 감정이지만 마치 남의 감정처럼
멀게만 느껴집니다.
[출처: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가 된, 소위 '걷는 시체 증후군'으로 불리는 전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정신질환, 심리학 고양이, 유튜브]
이런 경우는 자아가 사라져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사실 자아가 사라진 게 아니라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를 감추어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으면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관계를 맺기 위해 현실에서 반응하고 느껴야 할 주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자아를 죽여나가는 방향은 세상을 끊는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포용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을 어린이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자아가 지나치게 강해지지 못하는 환경이 자기를 밀어 넣습니다.
바로 부모라는 존재의 품입니다.
그 품 안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기, 배고파요!”라고 말할 때 그 아기가 자기일 수 있습니다.
왜 제3자로 자기를 표현할까요? 부모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아이가 자기를 부모와 함께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스크루지 영감은 돈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색하고 이기적이며 탐욕스러운 노인이었지만,
자신이 죽었을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회개하여 모든 사람을 잘 받아들이는
존재가 됩니다.
그는 살았지만, 죽었다고 믿고 살게 되었기에 착해졌습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함이 아닌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되기 위해 자아를 잊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는 이 행복이 지속되는 나라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13일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 18,1-5.10.12-14
이 세상은 언제나 호기심 천국이요 즐길 거리로 충만한 멋진 무대입니다!
여름 신앙 학교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차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루 쉬는 날이라 만사 제쳐 놓고 ‘방콕’을 하며 밀린 잠을 실컷 잤습니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생겼습니다.
잠을 자는 동안 본인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고 아파라! 아이고 쑤셔라!”
잠을 자면서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이 정말 오랜 만이었습니다.
오래전 주택공사 현장에서 막노동을 세 달 정도 한적이 었었는데, 일 시작하고 일주일 내내 밤마다 그렇게 앓았습니다.
온 몸이 쑤시고 아프고, 그런데 딱 일주일 지나니 적응이 되더군요.
요즘 산업 현장에서 땀흘리며 일하시는 노동자들, 참으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힘든 때 인데, 두꺼운 작업복에 작업화, 작업모에 안그래도 더워죽을 지경인데, 철판 위는 복사열로 달구어져 계란 프라이를 해도 될 정도입니다.
다시 한번 현장 근로자들의 노고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깊이 감사드리는 요즘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찐하게 체험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덥다 덥다 하면 더 덥습니다.
왜 나만 이래야 해, 하고 불평불만 하며 더 힘듭니다.
이왕 일 하는 것, 짜증내지 않고 환하게 웃으면서, 여름에는 땀 흘리는 것이 정상이지, 건강에좋고 다이어트에도 좋다는 생각으로 기쁘게 일하면, 그것이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이요,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 복잡하게, 너무 인상 쓰면서 살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철부지처럼 희희낙락하면서 재미있게 살아가라고 당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 3-4)
인생의 고수는 사실 매사를 재미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만사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만사를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큰 고통이나 시련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며, 이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밋밋한 내 일상에 자극을 주시는구나, 나를 재미있게 해주시려나 보다 하고 생각해야겠습니다.
고수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은 언제나 호기심 천국이요 즐길 거리로 충만한 멋진 무대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강론>(2024. 8. 13. 화)
(마태 18,1-5.10.12-14)
<‘길 잃은 양’은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누구든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3-5).”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0.12-14).”
1) 여기서 ‘누구든지’ 라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가르침이고,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어린이처럼 되어라.”,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라.” 라는 말씀은 “겸손한 사람이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는, 뜻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회개’는, 여기서는 각자 자신의 교만을 버리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나는 교만했던 적이 없다.
나는 항상 겸손하게 행동했다.” 라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말은 그렇게 안 하더라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주장하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백 퍼센트 위선자이고,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위선과 교만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2) ‘되찾은 양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길 잃은 양’은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이 비유에서 ‘아흔아홉 마리’는 의인들의 실제 수가 아니라, 양을 잃었을 때의 목자의 슬픔과
되찾았을 때의 기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의인들과 죄인들의 실제 비율은 ‘99대1’이 아닙니다.
실제 상황을 반영한다면 ‘1대99’ 라고 말해야 할 텐데, 사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길 잃은 양’이고, 회개해야 할 죄인들이고, 예수님의 속죄와 구원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지옥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 가는 곳이고,
하늘나라는 ‘회개한 죄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또는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성모님 외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또 늘 하느님과 함께 계시기 위해서 ‘회개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3)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히브리서에 있는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1-2).”
이 말에서 ‘손님’은 ‘낯선 나그네, 뜨내기’를 뜻하기도 하고, ‘작은 이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뜻하기도 합니다.
‘천사들’을 접대했다는 말은, 하느님을 접대했다는 뜻입니다.
‘나보다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곧
주님께 사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작은 이들이 곧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오실 때 ‘나보다 작은 이’의 모습으로 오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천사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는 말씀은, 작은 이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수호천사들이 곧바로 하느님께 말씀드린다는 뜻이고, 다시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자기보다 작은 이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학대하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죄’이고, 그것은 심판 때에 엄한 처벌을 받게 되는 죄입니다.
4) 그러면 그 죄를 짓는 사람 쪽에는 수호천사가 없는가?
있다면 왜 그렇게 하는 것을 내버려 두는가?
위선자들, 교만한 자들, 작은 이들을 학대하는 자들 쪽에도 분명히 수호천사가 있고, 양심을 통해서,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통해서, 또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그러면 안 된다고 계속 타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위선자들과 교만한 자들 쪽에서 그 ‘사랑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수호천사의 반대쪽에는 마귀들이 있습니다.
마귀들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학대해도 된다.” 라고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너는 지금 충분히 겸손하다.”, “너는 죄가 없으니 특별히 회개할 것이 없다.” 라고 유혹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