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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3년 만에 귀향한 혜초의 대여행기 ‘왕오천축국전’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은 신라 승려 혜초(704∼780)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원본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고 하네요.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지라 사진으로밖에 만나지 못했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1283년 만에 귀향한 혜초의 대여행기 왕오천축국전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볼까요?
세계 여행 문화원형의 효시, 혜초의 대여행기 왕오천축국전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신라 승려 혜초(704∼780)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원본이 지난 12월 14일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떠나, ‘대여’ 형식으로 15일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와 12월 18일부터 2011년 4월 3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실크로드와 둔황: 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展을 통해 세계 최초로 일반인들에게 현재 공개 중에 있다. 이는 지난 100년동안 왕오천축국전을 보관해왔던 프랑스 사람들이나, 왕오천축국전의 최초 발견지가 중국이었다는 점을 착안할 때 중국 사람들도 아닌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전시되고 있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시대에 국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역사적인 순간에 살고 있다. 1908년 중국 둔황(敦煌) 막고굴(莫高窟) 장경동(藏經洞)에서 발견돼 프랑스로 넘어간 이래 지금까지 한 차례도 공개 전시한 적이 없었다. <실크로드와 둔황: 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 전을 통해 세계에서 처음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는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723∼727년 다섯 천축국(인도의 옛 이름)과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등 서역지방을 기행하고 작성한 여행기다. 혜초는 신라의 수도 경주를 출발해 뱃길로 중국 광저우(廣州)를 거쳐 인도에 도착한 뒤 육로로 페르시아 중앙아시아를 지나 당의 수도 장안(지금의 시안)까지 2만 km를 여행한 기록을 이 책에 담았다. 한국인이 쓴 최초의 해외 여행기로,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 풍습 등을 생생히 담고 있다. 7세기 현장 법사의 ‘대당서역기’,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14세기 이븐바투타의 ‘여행기’와 함께 세계 4대 여행기로 꼽힌다.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 폴 펠리오가 둔황 막고굴 장경동에서 발견해 세상에 알려졌다. 펠리오는 이를 관리인으로부터 싼값에 구입해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보냈다. 지난 30년 동안 왕오천축국전을 연구해온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은 “왕오천축국전이 프랑스국립도서관을 나와 1283년 만에 저자의 조국 땅을 밟는다는 것은 매우 감격적인 일”이라며 “한국 최초의 세계인 혜초의 선구자적 삶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최초의 한국인으로서 혜초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이번 전시를 통해 당대 동남아시아, 인도, 이슬람, 중앙아시아, 중국의 문화 및 풍물사를 조망할 수 있었으며, 당대 신라세계와 타(他) 세계를 비교문명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한 전시다. 또 우리 시대에 마지막으로 왕오천축국전을 만나볼 수 있는 전시다.
그림3. 2007년 혜초 문화원형 결과물의 하나인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불 디지털 복원” 영상콘텐츠. 국립중앙박물관 ‘실크로드와 둔황-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에서 원본 왕오천축국전과 나란히 전시중에 있다.
그런데 이 혜초가 지난 2007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문화원형 사업으로 선정되어 사업을 마친 적이 있는데, 이번 <실크로드와 둔황: 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展에 디지털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번 혜초 전시를 통해 혜초에 대한 국민적 이해와 관심 그리고 왕오천축국전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었던 소중한 전시기회인 동시에 혜초 문화원형 디지털 자료가 역사적인 전시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2007 문화원형의 결과물 “혜초의 대여행기 왕오천축국전” 출간
<실크로드와 둔황: 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展에 활용되고 있을 뿐만아니라 이 전시회에 발맞추어 최근 출간된 “혜초의 대여행기 왕오천축국전(두레출판사 간)” 책에 2007년 혜초 문화원형 결과물이 대거 반영되었다.
이 책에는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사료가 될 만한 것들이 많은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대식’이라는 용어이다. 대식은 중세 아랍을 이르는 말인데, 대식이라는 말이 쓰인 것은 <왕오천축국전>이 처음이다. 또한 그 지역의 이름을 중국식 명칭과 현지 발음 그대로 함께 기록한 것도 <왕오천축국전>이 처음인데, 이는 마르코 폴로나 몽골 시대의 중국 측 기록보다 5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여기에 8세기 무렵의 인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와 아랍에 관한 생생하고도 정확한 기록은 중세 세계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 원천이 되고 있다. 그래서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8세기 당시 인도와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에 관한 역사와 문화를 알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찾는 책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원전 중의 원전으로서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인 셈이다.
그림5. 「혜초의 대여행기 왕오천축국전」에 혜초 문화원형 결과물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탈레반 정권에 의해 2003년 파괴된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불의 3차원 디지털 복원된 모습이 수록되었고(왼쪽), 혜초가 지나갔던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벽화 역시 디지털 복원(오른쪽) 되었다.
「혜초의 대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은 2007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수행한 혜초 문화원형 디지털 자료(TEXT, 지도, 2D, 3D)들을 최대한 실어 고전이지만 독자들이 현장성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각화(視覺化)에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책의 실린 혜초 문화원형 이미지 자료들만으로도 마치 혜초가 여행한 당시를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아날로그 번역(혜초의 한자원문 한글화)과 디지털 이미지(혜초 문화원형 결과물)의 만남을 통해 이 책은 내용과 형식은 물론 책을 보는 재미까지 두루 갖출 수 있었다. 이는 또 문화원형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 여실히 증명해준 사례다. 이렇듯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디지털 전시로도 활용되고 책으로도 출간된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07년 혜초 문화원형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한국의 첫 세계인이었던 혜초
길 위에 이루어진 여행 콘텐츠를 모색하던 중 여행 문화원형과 외국과 접목될 수 있는 소재를 연구했다. 그런데 8세기 초 신라의 한 승려가 16살에 경주를 출발하여, 중국, 인도를 거쳐 이슬람 지역에 이르는 일찍이 전무후무한 대장정을 이뤄냄에 착안했다. 1300년 전 한국인의 눈으로 들여다본 세계상(世界像)이며 한민족이 주인공이 된 국제적인 문화원형 콘텐츠이다. 또한 구한말 유길준의 ‘서유견문’ 이전 세계를 체험한 유일한 한국인의 기록인 왕오천축국전을 통해 한민족에 의해 남겨진 국제 문화원형 콘텐츠의 효시가 되는 셈이다.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인도의 이름인 ‘천축’을 다녀온 기록이란 뜻이다. 혜초는 어린 나이인 16살에 당나라 밀교승 금강지의 문하에 들어갔다가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는데, 당시 이 여행에서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한 두루마리가 ‘왕오천축국전’이다. 이렇게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이름의 기행문으로 기록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혜초 문화원형을 시작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다.
사실 혜초는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반드시 등장하는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 누구도 혜초의 행적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그동안 혜초에 관해 소개한 변변한 책이 한권 없었고, 혜초에 관한 문화콘텐츠(소설, 만화, 영화 등)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가장 한국적이자 가장 세계적인 콘텐츠
그림7. 혜초 여행의 그 끝은 어디인가?KAIST 문화기술대학원팀은 혜초의 최종 답사지인 이란(Iran)까지 쫓아갔다. 이란 남부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유적에서 촬영중인 모습.
“통일신라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디지털 콘텐츠 개발”이란 타이틀로 KAIST 문화기술대학원과 동명대학교 산학협력단이 혜초 문화원형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723∼727년 통일신라인 혜초의 왕오천축국 순례는 8세기 한국과 인도 및 중앙아시아의 문화가 만나는 하나의 사건으로, 왕오천축국전에는 불교의 승려가 본 인도의 불적 및 명승지뿐만 아니라 신라인이 바라본 인도 및 중앙아시아사의 생활상이 녹아져 있다.
이를 디지털 콘텐츠화 함으로써 천축국 및 서역의 문화사를 이해하고 통일신라시대 문화의 형성배경을 찾고자 하였고, 왕오천축국전 기록을 중심으로 8세기 당시 신라와 천축국을 포함한 서역(西域) 콘텐츠를 구축하여 문화콘텐츠 산업의 기반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2007년 8월 18일부터 29일까지 1300년전 혜초의 루트를 따라 인도의 ‘오천축(五天竺)’에 대한 답사를 마쳤으며 이후 이슬람 지역인 타쉬켄트, 사마르칸트등지를 돌고 혜초의 귀로인 쿠차, 돈황, 서안에 대한 방문을 마쳤다.
혜초의 최종 종착지는 오늘날의 이란(Iran). 혜초 당시에는 사산조 페르시아라고 불리우는 나라였다. 그래서 일찍이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만큼 외국 관습과 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인 나라는 없다”고 말했다. 페르시아가 정복지의 다른 문화에 대한 관용과 융합을 통해 세계적 감각의 독창적 문화를 창조하며 세계적인 글로벌 제국이 되었다. 이것은 후일 페르시아 예술과 문화가 인도 유럽뿐 아니라 동아시아까지 세계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원동력이 됐다. 따라서 오늘날 이란으로 알려진 페르시아는 최초의 문명국가로써 서양 문화의 원류인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명 성립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림8. 혜초가 신라 경주 출생임을 착안하여 신라 경주의 랜드마크(Landmark) 였던 황룡사9층목탑도 디지털 콘텐츠로 제작되었다.
또한 신라 경주(慶州)를 출발한 혜초스님이 가장 멀리 다다른 지역이 오늘날 이란, 즉 옛날 페르시아 지역이었다. 우리가 혜초의 마지막 종착지 이란에 갔을 때, 이란에서는 드라마 “양금” 열풍이 한창이었다. 양금은 드라마 <대장금>의 주인공 장금의 이란식 이름이다. <대장금>이 이란에 방영되었을 때 90퍼센트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하여 9천만 이란 국민들에게 대장금을 각인시켰다.
그 동안 페르시아는 우리에게 ‘아라비안나이트’의 나라로만 잘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 드라마 ‘대장금’이 이란 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이란에 한류(韓流) 열풍이 불어 닥치면서 한국과 이란 간 문화 교류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오늘날 양국의 활발한 문화교류의 이면에 또 하나의 선례가 있었으니 1300년전 이란을 찾아온 우리의 혜초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제공/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칼럼
글/박진호(KAIST 문화기술대학원 선임연구원)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