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금주법"의 역사
한국의 “금주법”의 시행의 이유는, 대부분 부족한 식량에 대한 보존과 절약 등을 이유로 시행 하였다. 그랬기에 보통은 식량이 부족해지는 기근이나 가뭄에 금주령을 시행한다.
한국의 경우 전통주는, 포도주 같은 과실주가 별로없고, 거의 대부분이 쌀 같은 곡물을 원료로 하는 곡주이기 때문에, 술을 빚는 만큼 밥 지을 곡물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탁주가 아닌, 소주 같은 증류 과정이 들어간 고품질의 술(증류수)은 곡물이 훨씬 더 소모되기 마련이다. 당연히 이렇게 만들어진 술은 일반 백성들보다는 선비 같은 상류층들이 즐기는 식품이었기에, 유교 문화권에서의 “금주법 시행”은 상류층의 근검과 기강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1. 백제 다루왕때 처음 실시된 “한국의 금주법”
기록에 따르면 한국에서, 최초의 금주법이 실시된 것은, 백제의 다루왕이 “금주령”을 선포한 것이 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도 기근이 들었을 때, “식량 절약 차원”에서 금주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금주령에도 불구하고,양반가에서는 몰래 소주를 만들어먹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러다 포도청에 의하여 적발되었다는 기록이 종종 나온다. 문제는, 술이 “유교식 제사”에 있어서 필수적인 음식이라, 술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오랫동안 금주령을 실시할 수 만은 없었다.
2. 조선 영조때, 실시된 강력한 금주령(술을 빚으면 사형에 처하다)
영조 통치 시기, 영조는 즉위와 동시에 술(특히 소주와 같은 증류주)을 절대 금기하였다. 즉위 초부터, "아예 조선 팔도에서 술 자체를 영원히 없애버리겠다!"고 나오자 강력히 사대부들은 항의를 했다.
그럼에도 영조는 a)술을 먹다가, 적발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즉시 노비 신분으로 강등되며, b)술을 빚었다가 걸리면 닥치고 사형에 처한다.
나중에는 “관직 박탈”이나 “귀양”으로 처벌이 약화되었지만, 그것이 40년 뒤의 일이다
심지어는 영조시기에는, 조상에게 올리는 유교의식인 “제사”에조차 술을 올리지 못하게 했다. 영조는 금주령 초기, 신하들이 금주령을 강력히 거부하자, 본보기로 누구 한 명 걸리기만 기다리다가, “병마 절도사 윤구연”이 술을 빚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2주일 만에 남대문에서 참수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때 영조는 직접 숭례문까지 나아가 윤구언에 대한 사형을 참관했다고 한다.
그리고 증거가 부족하다며 (증거가 술 냄새가 나는 항아리 1개 뿐이었다.) 윤구연의 사형에 반대하는 재상급 대신들도 모두 파직해버렸다(영조 38년 9월 17일).
3. 영조가 강력한 금주령을 시행한 이유
평민인, “유세교” 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 술 같다고 하여, 영조에게 고발하였는데, 유세교는 그것을 식초라고 하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자 영조는 그가 빚었다는 것을 직접 궁으로 가져오게 했는데, 좌의정에게 한 잔 마시게 하고는 "어떠냐"라고 물으니 "술인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영조는 이번엔 우의정에게도 한 사발을 내밀고 다시 질문했다. 그러자 영조의 마음을 알아챈 우의정은 사발을 들이킨 후, 진짜 식초였다면 도저히 얌전히 있을 수가 없었을 텐데"틀림없는 식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영조는 “유세교”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며 그를 석방해주었다고 한다. 영조도 국법이 지엄하다 한들 가난한 백성들에게까지 죄를 물어 벌주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고위 관리들의 음주는 엄금하였으나 평민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는 점에서 음주를 명목으로 관리들의 나태한 생활을 통제하고 궁극적으로는 왕권 강화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4. 그러한 영조 역시 술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조는 널리 알려진대로, 조선에서 가장 오래 즉위(52년)한 왕이었다. 즉, 그렇게 오해 금주령을 시행했지만, 결국 “만들어 먹을 사람은 결국은 또 만들어 먹었고”, “능력 되는 사람은 사와서 먹었다”. 사실상 결국 영조 본인 빼고는 다들 불만이 가득했다.
결국 다음 국왕인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금주령을 바로 페기했는데, 정조는 술을 엄청나게 좋아했다. 그래서 정조 대에는 한양에 술집들이 많이 생겼고, 상당한 사회적 문젯거리로 떠오르다 보니까 사대부들이 상소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영조는 또한, 본인이 금주령을 내렸음에도 술을 마신다는 소문이 있었다. 신하들이 이에 대해, 영조에게 따지자, 영조는 '난 다만 오미자차를 마실 뿐인데 그게 소주로 의심받는다.'라고 답했다(영조 12년 4월 24일).
5. "사관원 관원"만은, 음주가 허용된다(농민들의 "농주"도 암묵적으로 허용하다)
참고로, 조선에서는 “사간원 소속 관리”는 업무 시간에도 음주가 허용 되었는데, 임금의 금주령 마저도 무시할 수 있었다. 이같은 상황이 일어난 것은, 상소 올리는 업무와 전제군주제인 사회상을 감안하면, 술기운이라도 돌지 않으면 감히 임금한테 간언 혹은 하극상을 부릴 엄두를 못 낼거라 생각한거 같다.
사간원 관리들 뿐 아니라, 농사꾼과 군인들이 흔히 마시는 농주는, 금주법에서 제외되었다. 즉, 쌀을 많이 소모하는 청주는 사치라 금지하지만, 서민들이 고된 심신을 달래려 먹는 술은 아량을 베풀어 금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6. 일제 강점기의 술 제조에 대한 “면허제” 실시
일본의 “메가타 다네타로”는 일본에서 주세법 제정을 주도했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시행중인 주세법을 따라, 조선에서 세수 확보를 위해, 술에 제조에 대한 “면허제”를 실시하고 신고하지 않은 술에 대해선 밀주로 단속하였다. 면허는 개인과 기업 모두 존재했지만 개인 면허 소지자는, 1920년대에 사실상 더 이상 발급되지도 발행하지도 않게 되어, 사실상 정식 양조장이 아닌, 일반 민가에서 술을 빚는 것은 불법적인 일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주세는 식민지 조선에서 두번째로 큰 세수가 된다.
7. 박정희 정권하의 “막걸리 금지법”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1961년 주세법을 개정하여서, “순수한 쌀”을 술의 원료로 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1965년부터 모든 알곡으로 술을 빚는 것이 금지되는 “막걸리 금지법”이 시행되었다. 당시는 a)개밥을 먹이는 것과 b) 술을 집에서 빚는 것을 사치로 여기는 장면이 있다.
물론 모든 술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는 와인이나 맥주 같은 숧을 즐기던 시대가 아니었으니, “막걸리 금지 조치”는 금주법 같은 효과를 낳았다. 또한 소주 역시, 증류식 소주 대신 희석식 소주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로인하여 한국의 전통술의 맥이 끊기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 후, 수확을 많이 할 수 있는, 통일벼가 보급되자 이러한 “금주 조치”는 풀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