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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을 굳게 잡으라
히 10:19-25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19-25 / [믿음을 굳세게]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흘려 주신 그 피의 덕분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 신선하고 새로운 이 생명의 길을 그리스도께서는 그 휘장, 곧 당신의 몸을 찢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21) 이 위대한 대제사장께서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니 22)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뿌린 피로 정결함을 얻었고 우리의 몸은 정결한 물로 씻겨졌으니 확신과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함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23)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구원의 희망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우리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구원이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실행하시리라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2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일에 응답하여 우리도 서로 돕고 친절히 대하며 선할 일을 힘써 행합시다. 25) 어떤 사람들처럼 교회에 모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 옵니다. 더욱 서로 격려하고 충고합시다.
예수의 대제사장 사역은 우리에게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길(19-20)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통해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예수는 단순히 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길 자체이십니다(요 14:6). 아무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도록 성전 휘장이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육체를 찢으심으로써 그 휘장이 찢어져 누구든지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마 27:51).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몸으로 열어놓으신 이 놀랍고도 새로운 생명 길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날마다 그 길로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와 친밀한 사귐을 누리는 기쁨을 만끽하십시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21-23) 기자는 신자들이 하나님께 가는 당당함을 얻었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이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권면합니다(22). 율법 아래에서 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뿌리고 손을 맑은 물에 씻음으로 죄 없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실체로 오신 예수는 ‘큰 제사장’으로 자신의 피를 우리의 마음에 뿌려 악한 앙심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의 몸을 맑은 물로 씻겨 주셨습니다. 이렇게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참 마음과 온전(확실)한 믿음’은 하나님께 당당히 다가갈 수 있는 담대함의 근거가 됩니다. 이제 저자는 신자들에게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으라고 말합니다. 믿는 도리의 소망은 속죄에 근거한 하나님께 나아감, 영원한 구원, 하늘 백성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24-25) 기자의 권고는 개인적 신앙생활의 차원에서 이제 공동체를 향한 차원으로 확대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24)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에서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은 사랑과 선행의 격려를 위해 서로 돌아보아야 하며 함께 모여야 합니다. 우리는 같은 믿음, 같은 소망을 가지고 같은 예수를 따라 하늘의 성소에 계신 같은 하나님께 함께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의 누구라도 고난이나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 믿음에서 떠내려가지 않도록 힘써 살펴보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운 때이지만 더욱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를 힘쓰십시오. 묵상 나눔이나 기도 모임 등 다시 시작해야 할 모임은 무엇입니까?
적용: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힘써 모이고, 힘써 사랑하며, 힘써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가십시오.
진정한 사랑은 생명을 구합니다. 부모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 두려움보다도 크기 때문에 불타는 건물로 뛰어들 수 있습니다. 만일 주위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를 두려워하여 다가가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그들에 대한 사랑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 설 교 >
히브리서 10:19-25
작성 : 백정수 / 찬송가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성소에 들어가다(19-25절)
오늘 본문을 요약하자면,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큰 대제사장이 되셔서 그 피로 말미암아 휘장을 넘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셨음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본문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구약의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휘장으로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에, 지성소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했고,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 짓는 휘장은 하늘하늘한 천이 아니라, 매우 크고 두꺼운 천이었습니다. 오래 전, 성막을 재현한 곳을 가봤는데, 휘장의 크기에도 놀랐지만, 무엇보다, 그 두께를 만져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너무도 단단했고, 두꺼웠습니다.
휘장의 정확한 크기와 두께에 대해서는, 성경과 고대 문헌과 역사적 자료들을 토대로 보면, 길이는 약 22미터, 넓이는 약 11미터, 두께가 약 8-10cm라고 합니다. 휘장을 처음에 만들어서 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결하게 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깨끗한 물에 한 번 넣었다가, 꺼내서 성소로 옮겨야 하는데, 이는 제사장 300명이 힘을 모아서 옮겨야 할 만큼 엄청나게 크고 무거웠다고 합니다.
이런 두꺼운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자연적으로 찢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리 힘이 센 어른들이 달려 붙어도 이것을 찢기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너무 놀랍고 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9절에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구약에서는 아무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고,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그의 몸인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진 것처럼, 십자가의 못 박히신 주님의 몸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려 할 때, 이를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찢어버리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린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지성소와 같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 길은 무엇입니까? 20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리게 하신 <새로운 살 길>입니다. 이는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첫째로 예수님의 피로 구원의 생명을 얻는 <새로운 살 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피가 우리 삶의 문제를 찢으시고, 닫힌 문을 열게 만드시는 <새로운 살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때도, 지금 이 순간도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재의 문제와 고난으로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19절에 우리가 담력을 얻었다고 합니다. 담력의 원어적 의미는 <담대함>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겠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에게 윤리적인 죄가 있다면, 경찰서에 들어가는 것이 두렵고 떨립니다. 물론 죄가 아예 없으면 당연히 두렵고 떨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있는 상태라면, 혼자가 아닌 유명한 변호사를 대동하고 간다면, 아마 그 마음은 덜 떨리고, 덜 두려울 것입니다.
담력이라는 것은 내가 스스로 용기를 만들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담대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는 세상의 문제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살 길> 열어주시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며, 담대하게 오늘 하루를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1절에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다고 합니다. 여기서 큰 제사장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하늘의 대제사장이심을 재확인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의 일차적인 역할이 무엇입니까? 바로 희생 제사를 통해, 백성들을 죄로부터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구약에서 제사장직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제사장 스스로도 거룩함과 정결함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정결의식을 행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정결함과 거룩함을 갖추어 하나님의 집(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갔으니,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구나가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인 것입니다. 마트에 들어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트에서 들어가면 상품을 잘 구입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정결케 하시고, 예수님처럼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선택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내가 거하는 곳이 죄가 아닌, 정결하게 만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22절을 보니, 우선적으로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악한 양심>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분리되려는 마음(생각과 행동)’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유혹과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분리되려는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벗어나는 방법은 “마음에 뿌림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보혈을 우리 마음에 뿌린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마치 구약의 제물이 피 뿌림을 얻어 정결함을 얻은 것처럼(히9:21-22), 제사장이 몸을 씻어 깨끗함을 얻은 것처럼(민19:7),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은 자는,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씻음을 얻은 자며, 깨끗함과 정결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사모하고 마음에 뿌리면,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뜻>을 품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죄와 멀어지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정결케 만들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게 만듭니다. 그럴 때 우리는 22절 후반 절에 기록된 대로 두 가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입니다. <참 마음>이란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된 마음입니다. 죄악의 마음과 세상의 마음이 아닌, 어떤 상황에서든 예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 다음 <온전한 믿음>은 말로 믿는 상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에 대한 확신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기도는 하지만, 문제 앞에서는 무기력한 신앙이 아니라, 문제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이 나를 붙드신다는 영적 기력이 충만한 상태를 말입니다.
(23-25)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상이란 바다에서 신앙의 등대를 바라보며 목적지로 나아가야 하는데, 세상의 풍랑과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방향을 잃거나, 다른 유혹 등으로 다른 곳으로 항해를 하는 이들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이 오직 소망의 하나님을 의지하며 바른 인생의 항해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습니다.
요즘 <최애>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최고로 애정한다>의 줄임말입니다. ‘최애가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말’을 있는데, <최애>로 인해 삶이 기쁘고 즐거워진다는 것입니다. <최애>는 소유욕을 동반합니다.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물건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 만의 <최애>로 기쁨과 만족감을 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로 새로운 마음을 얻게 된 우리는, 세상의 것들로 기쁨과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통해 얻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친밀한 관계,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소망의 말씀이 <최애>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우리에게 새 마음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과 선행을 이웃들에게 추구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하게 하시는 분이,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우리 안에 두어 그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오직 예수의 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새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도, 분명 넘어지고, 상처받고, 실수하고, 유혹 당하고, 죄를 범하고, 실망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주신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나의 연약함을 능가합니다. 이를 힘입어 날마다 하나님께 담대히 나가십시오. 그럴 때 현재 우리의 작은 새 마음은 날로 커지게 되어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돌아보고 격려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있는 자리에 모이기를 싫어하거나, 중단하지 말고, 구역모임과 예배의 자리에 모이기를 언제나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혼자말고, 내 주변 이들이 말씀의 자리로 오도록 권면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기 원하시는 주님께만 집중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과 일터, 교회에서 서로 말씀으로 격려하고,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최선을 다해 행하는 진정한 제자의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기 도
하나님, 십자가의 은혜로 인하여 저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또한 저희 안에 새로운 살 길을 열어주셔서, 담대하게 저희가 주님을 힘입고 인생을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어떤 고난과 문제가 있더라도, 가로막힌 것을 둘로 쪼개시고 찢으셔서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저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보혈을 사모하며, 그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가 날마다 새롭게 되고, 새 마음으로 변화되어 사랑과 선행을 행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휘장과 같은 것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인생의 문제들 가운데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새로운 살 길은 무엇이었나요?
3. 악한 양심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분리되려는 마음(생각과 행동)입니다. 삶에 그런 경우가 있다면 나눠봅시다.
4.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한 신앙적 노력이 무엇인지 고민해봅시다.
주 안에서 참된 복을 누리는 방법
히 10:19~25 / 조정의
만일 하나님께서 오늘밤 여러분에게 나타나 “내가 너에게 어떤 복을 줄까? 내게 구하라”라고 한다면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어떤 대답을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울까요? 무엇이 모든 복을 초월하는 최상의 복, 모든 복을 포함하는 최대의 복, 즉 “참된 복”일까요?
동화같이 들리지만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잠을 자는데 꿈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 너는 내게 구하라”(왕상 3:5)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대답을 마음에 들어 하셨고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화를 함께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받은 축복을 풍성히 누리면서 이런 저런 일을 겪고 나서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돈, 명예, 쾌락, 영화, 지식, 인기, 권력 다 헛되더라…진짜 사람에게 있어 참된 복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다”(전 12:13)
한 마디로 참된 복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가 가진 지혜는 진실을 볼 줄 아는 참 지혜였습니다. 부귀영화, 호흡, 그가 가진 지혜까지도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참된 복, 모든 것을 초월하고 포함하는 복은 그 하나님에서 내려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모든 복의 근원인 하나님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솔로몬이 마지막으로 남긴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자기가 행한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가지고, 거룩하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그분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 화목한 관계를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분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진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입니다. 어쩌면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비를 얻고 건강을 누리고 재물을 받고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땅에서도 그리고 영원한 삶에서도 하나님께 도저히 나아갈 수 없는 존재로 영원히 분리되어 살아가게 될 운명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노래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다윗은 참된 복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무슨 수로 허물과 죄를 보지도 못하시고 마음에 간사함이 있다면 반드시 공의로 그것을 정죄하시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참된 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아침 우리가 살펴볼 본문에서 우리는 그 참된 복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다는 기쁜 소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복을 풍성히 누리는 세 가지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 새해를 시작하면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 안에서 풍성한 복을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본문은 히브리서 10장 19-25절입니다.
본문은 두 가지로 크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참된 복의 근거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19-21절에 설명하고, 둘째, 그 복을 누리는 세 가지 방법에 관해 나머지 구절에서 설명합니다.
1. 참된 복의 근거이신 예수님(19-21절)
참된 복의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9절에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이 편지의 수신자, 주로 유대인으로 이루어진 아마도 로마지역에 세워진 초대교회 형제자매에게 그들에게 익숙한 유대성전을 비유로 제시하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19절)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신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20절에 언급된 “휘장”을 볼 때 여기서 “성소”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던 “지성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대제사장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아주 엄숙한 장소였습니다. 대제사장조차 자기가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제한된 시간, 제한된 조건에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조금도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셨고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그 앞에 합당하지 못한 마음을 갖거나, 그 뜻에 합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들어가게 되면 단번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옷 가장자리에 돌아가며 방울을 달게 했습니다. 성소에 들어가고 나올 때 소리가 들리도록 말입니다. 그 소리가 들려야 죽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출 28:35).
그만큼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것이 무섭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담대함을 얻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담력을 얻었을까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로 무엇을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까요? 20절에 계속된 설명을 살펴봅시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산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20절)
지성소는 휘장으로 막혀있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휘장 가운데로 예수께서 새로운 산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돌아가셨을 때 성전의 휘장, 죄인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던 지성소 안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마 27:51). 20절에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고 말하는데 이는, 예수의 육체가 십자가 위에서 휘장처럼 찢어져 피를 쏟았을 때 죄인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던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이렇게 제시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음으로 새롭게 내신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떠올려야 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는 그를 힘입어 담대하게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된 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내가 만든 노력과 헌신의 길이 아니라, 오직 예수께서 죽음으로 내신 길을 통과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떳떳하고 내세울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고귀하고 그리스도의 삶이 정결하기 때문에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두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이런 자녀를 아버지가 좋아하실까요? 사랑하실까요? 나에게 정말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요? MRI처럼 내 속에 모든 은밀한 것을 훤히 들여다보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지 두렵습니다. 아무리 자녀라도 은혜와 사랑을 구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걱정 말아라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되신다”(21절 참고)
“하나님의 집”은 종종 물리적인 장소 “성전”이나 “성소”를 가리키지만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합니다(히 3:2, 5, 6). 특별히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 그 안에 소망과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그의 집”이라고 표현합니다(히 3: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 된 형제자매들이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 그분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냥 나가지 않습니다. 큰 제사장 예수님을 중보자로 믿고 나아갑니다.
우리의 중보자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체험적으로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중보하실 때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며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중보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와 같이 연약한 자로 하나님 앞에서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죄 없는 의로운 분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담대하게 구하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5-16)
정리하면,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분의 보혈이 우리와 아버지 사이에 생명의 길을 내셨습니다. 또한 부족한 행위와 연약한 마음을 가지고도 아버지께 용서와 은혜와 사랑을 기대하며 때마다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중보자, 대제사장 되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가 누리는 참된 복의 근거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영원히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귀하고 초월적이며 모든 복을 포함하는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복을 얻었고 지금부터 영원히 이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것, 그분의 것이 내 것!
여러분은 이 복을 누리고 계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복, 영원한 복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고 계십니까? 왜 그렇지 못할까요? 왜 최고의 복이 주는 기쁨에서 멀어져 솔로몬이 헛되다고 결론지은 상대적으로 저급한 복을 갈구하는 것일까요?
D.A.카슨은 현대 기독교인들은 마치 원하지 않은 결혼을 한 사람이 결혼생활의 의무는 다하지만 기쁨은 없는 삶을 사는 것처럼 산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참된 복을 가진 자의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살만큼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진 복을 온전히 충만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갖고 있던 다음 관심사였고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입니다.
2. 참된 복을 누리는 세 가지 방법(22-25절)
참된 복을 누리는 방법은 흥미롭게도 믿음(22), 소망(23), 사랑(24)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방법의 원동력이 되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A.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22)
첫째로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를 풍성히 누리기 위해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의 삶에서 멀어져 자포자기한 상태로 의무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한동안 기쁨을 누렸는데 자기 삶에서 오는 실망, 다른 사람이나 자기의 죄로 넘어지면서 겪는 죄책감과 좌절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저앉아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아버지와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누리다가 계속된 잘못으로 아버지를 실망시키고는 더 이상 자기에게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친밀한 관계를 갖기를 포기한 자녀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관계만 유지하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얻는 참된 복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라!” 계속해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넘어지고 삶에 온통 진흙이 묻어있고 엉망진창일지라도 계속해서 믿음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양심도 없습니까? 더러운 몸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성경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22절)
마치 구약의 제물이 피 뿌림을 얻어 정결함을 얻은 것처럼(히 9:21-22), 제사장이 몸을 씻어 깨끗함을 얻은 것처럼(민 19:7),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자, 그가 피로 맺은 새언약으로 씻음을 얻은 자, 그는 깨끗함과 정결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이런 놀라운 예언의 약속을 전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에스겔의 예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거룩함이 우리 안에서 실질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새 마음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추구하려는 욕구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빌 2:13). 성령을 우리 안에 두어 그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오직 예수의 피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단호하게 묻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3-14)
한 마디 더 붙이자면 “믿음이 없는 자들아!”일 것 같습니다. 예수의 보혈의 능력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신 하나님,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넘어지고, 상처받고, 실수하고, 유혹당하고, 죄를 범하고, 실망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당신의 연약함을 능가합니다. 이를 힘입어 날마다 하나님께 담대히 나가십시오.
B. 소망을 굳게 잡으라(23절)
두 번째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누리는 참된 복을 풍성히 얻기 위해 우리는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참된 소망, 참된 복을 다른 곳에서 찾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된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에서 찾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며 우리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찾은 “보화”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는 우리의 “보화”를 다른 것에서 찾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경제적인 압박 속에서 재물을 보화로 찾고, 관계의 심각한 갈등이 생길 때는 사람들의 인정, 격려, 위로를 찾습니다. 명예가 실추되었을 때는 그것을 회복하는 것을 가장 귀한 것처럼 여기고, 건강을 잃으면 그것만 찾으면 모든 것이 완벽한 것처럼 착각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우리 소망이 다른 것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약속하신 이가 미쁘시기 때문입니다. 약속하신 그분이 신실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삶이 고달프고,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소망을 잃지 마십시오. 배고프고, 굶주리고, 심지어 육체적 고난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께 둔 소망을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분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하신 것을 이루지 않으신 것이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파도가 거셀수록 더 단단하게 하나님께 소망의 닻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그 분명한 보증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아담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씨, 다윗에게 약속한 영원한 왕,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해온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로 확증되지 않았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여 우리의 살아있는 소망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보다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명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가 가진 참된 복의 소망을 앗아가지 않도록 굳게 잡으십시오.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해도 솔로몬이 헛되다고 말하는 것들을 소망으로 삼지 마시고 최고의 복을 붙잡으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커다란 소망으로 여기는 로또는 푼돈으로 살 수 있지만 벼락을 두 번 연속으로 맞는 확률만큼 당첨되기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예수의 보혈로만 살 수 있는 고귀한 가치를 갖고 있지만 100% 당첨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누리는 영원한 사랑의 관계, 그것을 당신의 소망으로 굳게 붙드십시오.
C. 사랑과 선행으로 돌아보라(24-25절)
마지막으로 우리가 가진 참된 복,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풍성히 누리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사랑과 선행으로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각 사람을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부르셨지만, 자녀가 된 이상 개별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한 믿음과 한 소망을 가진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함께 모여 교제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기쁨을 더 풍성히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일반 사회조직, 동아리, 모임에서 나누는 교제와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슈를 이야기하고, 서로의 근황을 나누고 경조사를 챙기는 것도 교제의 필요한 부분이지만 우리의 교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산악회 사람들이 산에 대해 이야기하고, 연예인 팬클럽 회원들이 자기들이 사랑하는 스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위대하고 영광스런 아버지에 대해 나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종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우리를 강력하게 하나로 묶는 단 하나의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일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격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켜(서로 사랑하라)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 우리가 서로 사랑할수록 우리는 더 큰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리스도가 주신 기쁨을 충만하게 누립니다. 그래서 사랑을 더욱 격려해야 합니다.
손과 발로 봉사하는 것만 사랑이 아닙니다.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만 사랑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서로 섬기든지 오래참고 온유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일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 사랑입니다(고전 13). 우리가 서로 그렇게 사랑하자고 만날 때마다 돌아보며 격려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고 너희는 내 가지라고 하시면서 나에게 붙어있으면(내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 열매를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열매를 많이 맺는 것, 그것이 또한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 돕는 것, 억울한 사람을 돕는 것만 선한 일이 아닙니다. 열심히 종교생활 하는 것만 선한 일이 아닙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명한 목적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딛 2:14).
우리의 교제의 목적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 해줄 말이 그것입니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매를 많이 맺는 사람이 되도록 힘을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서로 만나지 않고서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25절에 경고하고 있는 대로 어떤 이들은 습관적으로 모이는 것을 멀리합니다. 개인주의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성도들과 접촉점을 최소한으로 합니다. 교회를 학원처럼 여러 종교서비스를 받는 곳처럼 여기고 매달 회비를 내며 나와 가족만 덩그러니 왔다 갔다 반복합니다. 돌봄을 받고 싶어하지도 않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런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할수록 습관적으로 잘 모이지 않으려는 태도도 두드러집니다. 가족여행, 자격증, 시험 준비, 휴식 등 여러 가지 특별한 이유를 만들어 모이는 일을 건너뜁니다. ‘나 하나 가서 다른 성도를 격려할 수 있다면…’이 아니라 ‘나 하나 빠진다고 해서 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태도를 가진 자들은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망각한 자들입니다.
바로 그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 오심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달력을 한 장 넘길 때마다 달력은 우리에게 “주오심이 이만큼 더 가까이 왔다”고 말해줍니다. 주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셨을 때 우리 각자는 아버지의 그 풍성한 사랑을 자녀들과 어떻게 서로 나누었는지 보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맺은 열매를 가지고 결산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내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는 일을 제쳐놓고 선택한 여러 가지 핑계들을 낱낱이 보고할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하나님과 영원히 누리는 풍성한 사랑의 관계를 풍성히 누리기 원한다면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모여서 서로 돌아봐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자고, 서로 열매를 많이 맺자고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과 기쁨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새해에 어떤 계획들을 세우셨습니까? 바이블 타임으로 오늘까지 14일째 성경읽기를 차근차근 해가고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성경 공부에 열심히 참여하기로 마음먹으신 분도 계실 것이고, 신앙서적을 열심히 읽거나 교회 여러 봉사의 자리에서 성도를 섬기는 것으로 사랑을 베푸는 것을 결심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스포츠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열매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새해에는 유평 성도 중 소외되는 청년, 학생, 가정을 돌아보려고 마음먹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되었든 좋습니다. 모든 활동이 이 세 가지 분명한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도구가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하든지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을 힘 있게 붙드는 도구가 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하든지 소망을 하늘에 굳게 붙들어 둘 수 있는 도구가 되게 하십시오. 각종 모임, 읽기, 공부, 묵상, 교제 그 모든 것의 목적이 여러분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맛보게 하는 도구가 되게 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무엇을 하든지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 돌보게 하는 도구가 되게 하십시오. 혼자 좋아서 하는 일, 혼자 즐기는 일, 혼자 유익을 얻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무엇으로 섬기든지 그 일을 통해 성도에게 사랑을 격려하고, 선행을 격려하며, 서로 돌아볼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이를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모이기를 힘쓰십시오.
새해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은혜와 평강이 예수 안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둔 우리 모두에게 가득 부어 넘치고 우리 모두가 그것을 풍성히 누릴 수 있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히브리서 10:19-25
최병남 목사(송탄중앙교회)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역자들은 목회사역과 섬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며 굳게 붙잡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법을 지키고 질서를 바로잡고 굉장한 사업을 구상하고 예산을 확장하는 일 등이 다 중요하겠지만 우리가 간과하거나 상실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요?
본문 말씀에 보니 십자가의 복음과 믿음의 회개와 사랑과 선행 등 3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우리를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그 결과로 모든 죄에서 용서받게 하시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으며 죄악을 이길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복음을 사랑하며 널리 전파하고 가르치며 사수해야 합니다.
a. 『새롭고 산 길이 우리에게 열려져 있으니』(19-20)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몸 버려 피흘려 죽으심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의 길을 열어 놓으셨으며 이 길은 새롭고 산 길이라는 말입니다. 이 속죄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천국의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열려진 새로운 길이요 생명의 길인데 짐승의 피 없이도 속죄가 발효되는 유효한 길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과 제물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고 그것도 일반 제사장은 성소에만 들어갈 수 있도록 제한되었기 때문에 지성소엔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1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으며 제물의 피를 가지고 라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번 그 일을 반복하여 다시 해야만 했었습니다. 이일과 비교한다면 전혀 새롭고 산길이 바로 십자가 복음이니 이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사이비 종교나 이단 종교가 극성을 부리는 이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일들 가운데 전도나 교육이나 봉사나 모든 사업계획이 바로 이 복음을 전파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b. 이 길이 있으므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의심없이 이길을 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룩해 놓으신 십자가의 복음은 생명의 길이며 완전한 길로서 조금도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기치 못했던 바다 밑의 길을 건너서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군대는 같은 길을 가다가 그곳에서 모두 빠져 멸망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의 길을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 간 홍해 길을 뒤따라 갔는데 그 길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이 약속한 믿음의 길을 말합니다.
c. 이 복음은 굳게 잡아야 할 소망이라고 하였습니다.(23절)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소망』-미래에 대한 약속을 믿고 바라며 행동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과 언약하신 바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이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이 믿음의 소망이 세상의 온갖 환난과 시험과 풍파가 있어도 요동치 않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위한 영원불변의 구원의 길이며 종말론적으로 이루실 약속을 믿고 변치 말라는 뜻이며 환난과 핍박도 이 큰 소망을 바라고 변치 않는 신앙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2. 믿음의 회개를 중요시해야 합니다.(21-22절)
이 말씀은 주님의 피로 깨끗이 씻음 받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여지며 새로운 마음, 즉 믿는 자 다운 양심으로 회복되는 것을 강조한 말씀인데 이는 참된 회개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택함 받은 성도는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그의 온전한 믿음을 통하여 양심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a. 예수께서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신 까닭은 이 길로 걸어가게 하시려는데 있습니다. 길을 닦는 이유는 물론 그 길을 통하여 목적지에 가게 하기 위해서이듯, 하나님께서는 이 길을 통하여 직접 자기에게 오도록 이 생명의 길을 닦아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전진해 가야 합니다.
b.그런데 이 길을 가는 방법은 곧 믿음의 회개를 통하여 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사실 믿음의 회개 없이는 그가 온전한 믿음도 아니며 더구나 주님의 일꾼이 되어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섬기는 자들이 거듭나지 아니한 양심을 가지고 일을 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까?
교회에서 일꾼을 세울 때 이점을 잘 관찰하고 확신이 설 때 시험을 실시하고 세워야 일꾼을 세워 놓고 진통을 겪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3.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24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은 사랑의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사랑과 선행을 주저하지 않으며 이를 또한 가르치고 격려합니다. 사랑은 내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그의 도움과 필요에 응하는 것이며 선행은 이렇게 상대방의 필요와 형편에서 구체적으로 도움을 베풀어 시련과 좌절을 겪을 때 실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사랑과 선행은 복음을 전하여 그 생명을 구원 얻게 하는 것입니다.
a. 믿음의 선배들이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면서 온갖 핍박과 환난을 당하면서도 굽히지 않고 복음사역을 계속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1)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비방」은 거짓으로 고소하여 비난하는 것을 말합니다. 「환난」은 폭력을 동원하여 박해하는 행위를 의미했습니다. 「구경거리」는 공개된 자리에서 박해를 받을 때 구경거리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이렇게 주의 일을 하다가 고난을 당해도 개의치 않고 감당한 것입니다.
2)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했다는 말은 그보다 더 큰 상급을 바라보고 소망의 인내로서 견딘 것을 말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하신 말씀을 믿고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3)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고난 당하는 형제들을 위하여 후환과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선 것입니다.
b.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36절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이는 인내가 반드시 요청된다는 뜻입니다. 없어서는 안될 그리스도인의 표시와도 같은 것으로서 신앙 때문에 고난과 시험이 와도 잘 참고 견디며 여전히 선행일치의 삶을 지속해야 약속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환난과 위험의 기간은 짧은 것이며 반드시 지나갑니다.
마치 소나기처럼 때로는 태풍처럼 그것을 당할 때는 두렵고 맹렬하며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은 위기감이 절망을 재촉하는 듯하지만 때가 되면 일순간에 지나가는 비처럼 지나간 추억이 되고 말 것인데 이때에 소망이 있는 자라야 참고 견딘다는 말입니다.
『뒤로 물러가지 않는다』고 한 말씀대로 고난과 박해가 올 때에 담대히 맞서서 싸울지라도 주님을 배반하거나 변절하지 않는 성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복음입니다. 믿음의 회개를 중요시해야 합니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이를 열심히 실행해야 합니다.
길
히브리서 10:19-25
사람에게는 습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행동을 하며 살아가고 매번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많은 인간이다 보니 행동이 반복됨으로써 그것이 습관화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고 해서 습관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습관적 행동이란 같은 행동이 반복되면서 나중에는 자동화되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왜 이같은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이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습관적 행동’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이러한 습관적 행동이 신자의 신앙생활에도 무수히 많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교회에서 정해 놓은 날과 시간을 따라 신자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많습니다. 예배, 기도, 묵상 등등 많은 부분들이 교회가 정한 시간과 날에 의해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정해진 날과 시간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반복되면서 자신이 이것을 왜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채 단지 날이 되었고 시간이 되었기에 정해진 행동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까?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지옥 가는 것입니까? 나 혼자, 아니면 그냥 가족끼리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안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배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까? 사실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예배당이 아닌 집에서 홀로 또는 가족끼리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예배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먼 길을 차를 운전해서 와서 모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물음을 하는 것은 정해진 날과 시간에 모이는 것이 반복되면서 어쩌면 성도가 모이는 모임의 의미와 목적 등이 상실된 채 무작정 모이는 습관적 행동에 머물러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5절을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아마 여러분은 주일 예배에 잘 빠지는 사람들처럼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25절의 내용은 주일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종말이 가까울수록 예배에 빠지면 안된다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생각할 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에 해당된다고 여기십니까? 주일에 잘 빠지는 분이 아니라면 그렇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주일에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하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25절의 내용은 예배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주일에 전혀 빠지지 않는 신자라 할지라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에 해당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25절의 내용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신자가 모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신자가 왜 모이는 것입니까? 사람이 모이는 것은 세상에도 많습니다. 동창회, 계모임, 직원들끼리의 단합 등등 수많은 모임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모임이든 관심은 사람이고 세상입니다. 즉 하늘에 관심을 두고 하나님께 관심을 둔 모임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신자의 모임은 분명한 구별점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관심을 둔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신자 자체가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까? 따라서 하나님께 관심을 두는 마음들이 서로 모이는 것이 신자의 모임인 것입니다. 이 모임에는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은 올 수가 없습니다. 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이 모임을 회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유익도 즐거움도 없는 모임으로 치부해 버릴 뿐입니다.
그래서 19절부터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여기 보면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라고 말합니다.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휘장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하여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언약궤를 가려 놓거나 지성소를 구별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가 있는 곳으로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음을 상징하는 휘장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단절을 뜻하는 것입니다. 단절이란 곧 사망을 뜻합니다. 이것이 인간이었으나 당시 하나님은 일 년 한번 대제사장이 자신의 몸에 피를 바르고 나아오게 함으로써 생명의 길을 열어 놓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길이 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생명의 길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의 뜻입니다.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몸으로 말미암아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길이란 어느 한 곳과 다른 곳을 연결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길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하고 교통할 수 있게 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에 관심을 둘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는 하나님과 끊어진 인간의 상태를 아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생명에서 단절되고 사망에 처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께는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임을 아는 사람만이 길 되신 예수님께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른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의 죄에 대해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나갈 자격을 얻은 것처럼 여겨버리기에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보기보다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 더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즉 육신의 배부름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예수님이 흘리신 피에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물론 자기 배부름에 관심을 둔 사람들도 입으로는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안다고 할 것이고 감사함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피의 은혜가 그 마음을 채우고 있다면 육신의 배부름에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배부름을 얻은 자로 살기에 그 무엇에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생명에서 멀어진 존재가 예수님이 길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에 거하게 되었음을 아는 신자라면 분명 예수님의 은혜에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함이 없을 수가 없으며, 예수님에 대한 그 마음은 내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동일한 마음이기에 신자의 모임은 예수님을 향한 같은 마음이 만나는 것이고 이것을 신자의 교통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예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중요성은 의식에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에 예수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높이며 믿음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마음이 서로 만나서 동일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것이야 말로 참된 예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육신의 만남이 아니라 마음의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로 만날 때 서로 무시하거나 비교하고 시기하는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모이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나의 전부로 여기는 그 마음으로 모이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은 이미 뒤로 밀려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가장 최우선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위한 세상일을 최우선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한 날과 시간이 되었기에 예배당을 찾는 것이라면, 이것이야 말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에 해당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의 모임은 예수님만이 나의 길임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세상을 길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을 내가 행복해지고 살 수 있는 길로 여기면서 예배당을 찾는 것이라면 그는 이미 모이기를 폐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습관처럼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24-25절을 다시 보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말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곧 예수님을 길로 믿고 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종말이 가까움을 볼수록 보이는 것은 길 되시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의지가 되고 믿어지는 것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모이면 세상에서 배부름을 얻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의 배부름은 헛된 것이고 종말 앞에서는 모두 배설물에 불과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망이 되신 예수님을 얘기하고 그 마음을 나누며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한다는 것도, 서로가 믿음으로 산 삶을 나누며 힘이 되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의 모임입니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신자에게는 예수님만 보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보면서,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고자 하면서 아무리 모인들 그것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일 뿐입니다.
믿음을 굳세게 하자
히브리서 10:19-25 / 출처/생명수교회 설교 중에서
믿음을 올바로 가지려고 한다면, 이에 반하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려고 하며는 그 반대로 교회의 부흥을 가로 막는 일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전도하려면, 오히려 이를 막는 자도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시험에 처하게 되고 신앙 생활에 어려움도 격게 됩니다. 그러나 어떠한 시험과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성도의 가정은 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셔서 동행하심을 체험하고 기쁨으로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또한 생명수 교회도 성도들의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과 성도의 열심을 합하여 반드시 부흥 성장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되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의 말씀이 이를 답변하여 줍니다. '믿음을 굳세게 하자'고 말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분들은 믿음을 갖기 위하여 먼저 끊임없이 자기의 허물과 죄를 회개하고, 말씀을 읽고, 마음 밭에 새기며,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여 기도하며,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또한 믿음이 있는 분들도 더욱더 믿음을 굳세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말씀을 의지하고, 기도의 박차를 가하며, 전도와 봉사하는 일에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을 굳세게 할 수 있습니다.
1.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어야 한다.
1) 예수의 피에 의미는 무엇인가?
(1) 화목제물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 언약의 피=하나님과의 성약
히 13: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 예수의 피에 목적은 무엇인가?
(1) 죄사함을 위한 것
마 26:28;막14:24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2) 생명을 얻는 것
요 6:53-5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3) 구원을 이루는 것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3) 예수의 피의 역할은 무엇인가?
(1) 화평을 이루심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 깨끗케 하심
요일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3) 씻어 희게 하심
계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4) 거룩케 하심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4) 예수의 피의 요구는 무엇인가?
(1) 예수와 가까워 지는 것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2) 죽은 행실에서 거듭나는 것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3)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4) 교회를 바로 세우는 것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접근조차 하기 힘들었던 거룩한 곳인 성소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속죄를 받은 후에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담력은 어떻게 얻는가?
딤전 3: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이와같이 할 때에 예수의 피를 힘입어 천국에 들어가되 자기의 직분을 잘 감당하여야 하는 것이다.
2.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1)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만 방패자가 되신다.
잠 2: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온전한 곳으로 인도하신다.
삼하 22:33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온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우리는 어떻해야 되는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1) 참 마음으로 온전하게 섬겨야 한다.
대상 28: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2) 행위가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
계 3: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잠 11:20 마음이 패려한 자는 여호와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3)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온전한 자로서 장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4) 온전한 것을 바쳐야 한다.
레 22:21 무릇 서원한 것을 갚으려든지 자의로 예물을 드리려든지 하여 소나 양으로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리는 자는 열납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
삼상 7: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특히 십일조를 속이지 말고 바쳐야 한다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것이 바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3.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한다.
1) 믿지 않는 자로서 악한 자의 소망은 어떠한가?
(1)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한다.
잠 11:23 의인의 소원은 오직 선하나 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루느니라
(2) 소망이 없어지거나 끊어진다
욥 8: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사곡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
잠 10:28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
(3) 언제 소망이 끊어지는가?
잠 11:7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
욥 27:8 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하실 때에는 무슨 소망이 있으랴
2) 소망은 자연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욥 14:7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3) 진정한 소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주 하나님
시 39: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 71:5 주 하나님이시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시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4) 어디에 소망을 두어야 하는가?
1) 하나님
시 78:7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
딤전 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2) 그리스도
골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딤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5) 성도는 소망을 이룰 때까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1) 소망으로 즐거워 하며 참을 줄 알아야 한다.
롬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2) 소망을 갖고 찬송하여야 한다.
시 71:1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6) 소망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
(1)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가득차게 하신다.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2) 성령의 능력으로 기쁨과 평강이 충만케 하신다.
롬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3) 보이지 않는 소망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7) 우리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가?
(1) 미래가 보장된다.
잠 23:18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렘 29:11 나 주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2) 복이 있다.
시 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자녀들이 잘된다
렘 31: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
그러므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고 나아가야 한다.
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여야 한다
1) 다른 사람을 돌아보아야 한다.
빌 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2)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1)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사랑을 보여주셨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사랑을 해야 함은 주님의 명령이다
고후 2: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벧후 1: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3)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
(1) 허물을 덮어 주여야 한다.
잠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2) 사랑으로 행하여야 한다
고전 16: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그러므로 이에 대한 사랑의 실행으로
골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4) 선행을 보여 주어야 한다
약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 이것은 성도의 마땅한 행위이다
딤전 2: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2) 주님의 명령이다.
사 1: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3) 선행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벧전 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4) 선행을 하는 자에 대한 보답
잠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는 것이 바로 4번째의 믿음을 굳세게 하는 방법이다.
5.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의 습관을 따르지 말고 오직 권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1) 초대 교회에 모습을 살펴보자.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13: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2) 모여 무엇을 하는가?
(1) 회개하여야 한다
삼상 7: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2) 기도하여야 한다
행 12:12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3) 간구하여야 한다
대하 20:4 유다 사람이 주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주께 간구하더라
(4)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막 2: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5) 찬양하여야 한다
대하 20:26 제 사 일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6) 섬겨야 한다
시 102:22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3)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에 모이면 어떠한 것이 나타나는가?
(1) 나음을 얻는다
행 5:16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2)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된다
롬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3)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는다
고전 5:4-5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육신은 멸하나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결론으로 끝을 맺겠다.
우리는 이 거친 세상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믿음을 굳세게 하지 않고서는 방법이 있다. 그러므로 생명수 교회의 성도들은 믿음을 굳세게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1.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어야 한다.
2.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3. 믿는 도리의 소망을 갖고 말씀을 굳게 잡고 나아가야 한다
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여야 한다
5.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의 습관을 따르지 말고 오직 권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점점 더 그 날이 가까워 오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끝으로 그 날이 다가올수록 말세가 다가올 수록 더욱 믿음을 굳세게 하자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성도들의 가정이 더욱 축복이 넘치기 위해서, 교회가 조만간 부흥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명심하여, 성도 모두가 믿음을 굳세게 하여야 되겠다.
온전한 믿음의 생활
히브리서 10:19-25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공부했습니다. 저자는 이제부터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덧입은 신자들의 실제적인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제 1부는 1장에서 10장 18절까지로 교리편입니다. 제2부는 10장 19절부터 33장까지로 실천편입니다. 제1부의 주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우리의 참된 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시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는가 하는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증거했습니다. 제2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1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우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2부는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월성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오늘 읽은 본문은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성도들의 근본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 세 가지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온전한 믿음으로 나가자(I9-22)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애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늘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 갈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담력' 을 얻었다는 말은 본래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 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구약시대에는 아무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잘못 들어갔다가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제사장들도 지성소에 들어가려면 극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까?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는 참 성소에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들어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 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휘장은 무엇을 말합니까? 지성소와 성소를 갈라놓는 휘장입니다. 이 휘장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 나님과 추하고 더러운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장막이었습니다. 이 휘장이 없으면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인간을 보호하는 뜻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있는 건널 수 없는 강과 같은 장애물이었습니다. 이 휘장을 열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나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휘장을 찢으시고,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길은 새로운 살 길입니다.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성전에 어떤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두 동강이 났습니다. 이 휘장은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찢을 수 없을 만큼 두껍고 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부터 아래까치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벽이 없어졌습니다. 유대 전설에 의하면 찢어진 휘장을 기워서 다시 걸어놓았는데 다시 찢어졌다고 합니다. 아무튼 성소 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사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멱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죄인들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 길이 새롭고 산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을 예수님의 육체가 찢어진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죄인들이 하늘 성소에 들어가는 새로운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집에 큰 제사장으로 살아 계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큰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제사장의 직분은 어떤 직분입니까? 제사장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라고 했지요? '다리를 놓는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직분을 지금도 감당 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뿐 만 아니라 구원 받은 후에도 늘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시는 대제사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약하여 넘어지고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파괴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타락한 본성과 연약함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 님의 집에서 큰 제사장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로서 그 사역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롬 8:34).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우리는 마음에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았습니다.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양심이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양심이라고 다 선한 것이 아닙니다. 악한 양심도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악한 양심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양심은 상대적입니다. 공자님 양심이 다르고 부처님 양심이 다릅니다. 소크라데스의 양심이 다릅니다. 한국 사람의 양심이 다르고, 일본 사람의 양심이 다릅니다. 문화인의 양심이 다르고 식인종의 양심이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기 이전의 양심은 다 악한 양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마음에 피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이 깨끗함을 받았습니다(18; 9:13,14) . 또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습니다. 이는 중생의 씻음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세례라는 말은 씻는다는 개념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죄로 더러워진 우리의 몸, 우리 자신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까? 우리는 언제든지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참 마음은 '간사함이나 거짓이 없는 마음' 입니다. '온전한 믿음' 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의지하는 충만한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내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요, 나의 대제사장이시다 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참 마음과 전한 믿음' 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복음 진리를 확신하고, 하나님의 자녀요, 언론의 자유를 가진 자와 같이 담대한 믿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빠지게 되면 거짓된 마음이 일어납니다. 끊임없이 자기 죄를 변명하고 은폐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또 사단이 끊임없이 참소하기 때문에 절망하고, 믿음이 흔들립니다. 복음의 능력을 의심케 하고 자의식에 사로잡힙니다. 담대함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 문제를 온전히 다 해결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항상 구속의 사랑을 새롭게 덧입은 은혜 가운데 살게 됩니다.
II. 소망을 굳게 잡으라(23)
23절을 보십시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으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기 때문입니다. 미쁘다는 말은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신실하심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다는 말은 어떤 성품을 할까요? 아브라함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수없이 넘어지고 불신에 빠지기도 하고 범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신실하십니다. 변함없이 아브라함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약속하신 말씀을 신실하게 다 이루셨습니다. 오래 참으시며 기다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이 신실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할 때는 항상 그 속에 충성스러우신 분,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성품을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실 때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고난을 무릅쓰고 출애굽의 대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 정탐꾼들이 두 파로 나누어졌습니다. 12두령 중에 열 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정탐하면서 도리어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대장부와 같았고, 자기들은 메뚜기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정복은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장군은 아니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고 하면서 올라가서 취하자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더욱 더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올라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열 두령은 소망이 흔들렸습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새도록 울며 하나님 원망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광야훈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믿는 도리라는 말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만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가는 새롭게 산 길이 되심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깨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6:4) 그리고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습니다. 승천하시고,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장차 심판장으로 오실 것을 믿습니다. 그날에 예수 믿는 자들-불러 모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날에 우리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주와 함께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 모든 소망이 믿는 도리의 소망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소망을 살아있는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흘대로 애수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색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벧전 1:3,4)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소망을 굳게 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이 소망을 흔들어놓습니다. 과연 천국이 있을까? 천국을 부정합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천국은 없다,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말들을 통해서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 마음속에 불신을 심고, 소망을 흔들어놓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도 과연 부활이 있겠느냐? 합리적인 생각으로 부활은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정하면서도 믿는 자의 부활은 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모든 진리는 거짓이요, 자기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며 믿는 도리의 소망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을 부활장이라고 합니다. 그는 믿는 자의 부활에 대하여 여러 면에서 증거한 후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얘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 15:58)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요한 웨슬리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오늘 저녁에 죽는다 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웨즐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하다니요? 예정대로 아침에는 설교하고 약속대로 사람들을 만나고 저녁이 되면 집에 가서 저녁 먹고 가족과 함께 기도하고 침상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천국에서 눈을 뜰 것입니다.“ 소망이 흔들리면 우리의 신앙은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특히 천국에 대한 소망은 우리가 함께 고백하는 신앙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에 흔들리지 않고 굳게 잡고 이 땅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I. 사랑으로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24)
24절을 보십시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여" 서로 돌아본다는 말은 consider one another로서 서로 깊이 이해하고, 깊은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이웃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이웃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 격려해 야 합니다. 성도들은 서로 격려하는 사람들입니다. 불신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자체가 큰 고통입니다. 많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불신 세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롯과 같이 의로운 심정이 상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어떤 때는 노골적으로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부당하게 선을 강요당하기도 합니다.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환난과 핍박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는 더 많은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격려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견딜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서로 격려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우리 옅 사람과 한번 말해 봅시다."나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격려 좀 해주세요."
저도 격려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마귀는 항상 지도자를 공격합니다. 모든 공격의 최종목표는 목사입니다. 목사를 시험에 들게 하고 넘어뜨리면 가장 큰 이득을 로는 것이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많은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으니까 잘 하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 년이 지나가도 격려의 말 한 마디도 안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제가 힘들었을 때 '목사님, 힘내세요.' 라는 문자를 받았을 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분들을 통해서 끌을 얻고, 어려움을 참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그러니 성도들이 얼마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서로 격려하라고 했습니까?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라 고 했습니다. 사랑으로 격려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로 사랑은 선한 행실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성령의 첫 번째 열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야만 하는 행동 표현인 것입니다. 또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이것은 돌보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사랑과 선행은 서로 뗄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2대 덕목입니다. 우리는 말로만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해야 합니다. 물론 한 마디 격려의 말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착한 행실로 하는 격려가 가장 큰 격려가 됩니다. 특히 인생에 시련을 만나 분들이나, 환난을 당한 자들에게는 격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말로만 하는 격려가 아니라 실제적 도움을 주는 격려가 되어 야 합니다.
성경에 사용된 격려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분발하다, 자극하다는 의미로 일정한 방향으로 사람을 충동한다는 것입니다. 여행 중에 피곤한 사람에 계속 여행을 하도록 격려한다는 것입니다. 또 호흡을 불어 넣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마치 달리기 경주에서 골인 지점을 향하여 숨을 몰아쉬면서 기진맥진해 들어오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달려가서 같이 뛰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스울라는 "한 번 비난 받으면 아홉 번 칭찬을 받아야 겨우 평상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고 하였습니다. 연약한 자만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에게도 격려가 필요합니다. 이래서 유명한 F. B. 마이어 성경학자는 "내가 다시 살 수 있는 생명이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데 바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남들이 행하는 것들을 격려하기 보다는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말합니다. 격려를 받고 힘을 얻고 싶은데 찬물을 끼얹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 소망을 붙잡는 성도의 할 일이 아닙니다. 잘하면 마음껏 격려의 박수를 쳐주어야 합니다. 잘 못해도 더욱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더욱 힘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신앙생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격려하는 사람입니까? 낙심케 하는 사람입니까? 소망을 가진 자라면 격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성도들도 모두 하나가되어 서로 사랑하고 돌보고 격려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상을 볼 때 우리 신자들의 기본 생활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세 가지로 요약됨을 알 수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 믿는 도리의 소망, 서로 돌아보는 사랑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기본 생활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모이기 힘써야 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말씀을 보면 모이는 것은 습관이 되어야 함을 말해 줍니다. 습관이 되면 부담이 되지 않고 즐거움이 됩니다. 한 행동이 습관이 되려면 21번 이상 반복해야 한다고 합니다. 요즘은 40일은 반복해야 한다고 합니다. 같은 행동을 자꾸만 반복하면 습관이 됩니다. 모이기를 습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 습관화 된다는 것은 몸에 배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하게 되면 습관이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깨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눅 22:39) 매주 정기적으로 모이는 목장 모임도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의 습관을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모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사탄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사랑과 선행을 격려 받고 서로 돌아보기 위해서는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더욱 모이기를 힘써 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의 날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시대를 말세지말 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그 날이 가깝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더욱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모임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자들의 모임을 유대교의 회당 모임보다 소홀히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사회적인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환난과 핍박 받는 것이 두려워서 의식적으로 모임을 기피하는 현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서로 권면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날이 가까웠으므로 더욱 힘써 모여 야 합니다.
요즘은 모이기를 싫어하는 분들이 더욱 많습니다. 우리가 모이기를 힘쓸 때 시간과 물질이 아까운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또 함께 모이게 되면 서로의 허물 과 약점이 드러나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또 원치 않는 인간문제가 발생하여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통해서 우리는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굳게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깊이 영접하고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우리의 내면성이 깊어지고 사람들에 대한 이해심이 생기고,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소망이 더 견고해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점점 거룩하게 성별되어 갑니다. 예수 그리 도의 재림이 가까우므로 더욱 힘써 모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 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기적인 마음으로 모임을 폐하게 되면 본인의 신앙도 식어지고 공 체 전체가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우리가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성도와의 사귐 소홀히 여기게 되면 자연히 그리스도와의 사귐도 멀어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극적으로 모이기를 힘쓰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우리들의 신앙이 성장해 합니다.
D. L. 무디에게 한 청년이 찾아와 "주일을 지킴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아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무디는 "맞습니다. 그런데 질문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주일성수를 잘 안 해도 신앙생활 잘하고 열심히 믿으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디는 난로에서 잘 타고 있던 조개탄 하나를 불집게로 집어꺼내 들고는 한 동안 다른 이야길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들고 있던 조개탄은 곧 시커멓게 꺼지고 말았습니다. 조개탄을 젊은이에게 로여 주며 "보이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그것을 보고 왜 모여야 하는가를 깨닫고 돌아가서 좋은 성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 교회에 함께 모여 뜨겁게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지 않고 떨어져 나가면 신앙생활이 뜨거울 수 없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흩어지는 교회' 를 말합니다. 하지만 모이지 않고 흩어질 수 있습니까? 모이는 교회 없이 흩어지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과 선을 격려하기 위해서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서로 돌아보기 위해서 더욱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도가 은혜를 받았을 때는 교회 모임에 잘 참석합니다. 그러나 모임에 나가기 싫어진다면 그 성도는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교회 모임보다는 기도원이나 다른 집회에 열정적으로 참석하는 것을 봅니다. 사람이 때로는 밖에 나가서 외식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몸에 꼭 이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자기 집에서 먹는 음식이 가장 안전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집 음식에는 관심이 없고 식만 즐기면 되겠습니까? 모이기를 힘쓰는 것은 자기 신앙을 유지하는 중요한 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이기를 힘지 않으면 결국 그 신앙은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여야 합니다. 모이되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열심히 모 믿음을 굳게 하지 않으면 점점 더 타락해 가는 세속을 이길 수 없고, 썩어질 세속에 물들면 도둑같이 갑자기 재림하실 주님의 날에 부끄러움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이기를 힘쓰되 습관화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모이는 습관은 하나님께서 권하신 습관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고백하는 신 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 격려하며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 할 때 우리는 불신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승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