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의 오아시스에 대한 글에서 장애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만든 영화라는 평이 있었는데요,저도 물론 오아시스를 보고 그들의 사랑이 완전한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그들이 온전한 인간이었다고해도 그들의 사랑은 그리 탐탁치 못한 형태였을 거예요. 요즘 인간들을 보면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던가요..? 오염된 세상에서 이만큼의 사랑을 일구었다는 것은 그들이 장애인이었다는 면에서 좀 더 시니컬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거겠지요..감독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려했다기보다 실테를 고발했다고 봐야 더 옳을 것 같아요..그래서 공주를 성폭행하는 종두의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거겠죠..공주가 바보처럼 아무말 도 할 수 없는 것은 그녀가 장애인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의사 소통의 장애인이기 때문이에요..그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녀에게 대변하게금 묘사한 것이지요..
저도 오아시스를 보고 뭔지 허전한 마음을 받았어요..오아시스를 보고 감명받았다는 사람도 웬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깐요...암튼 퍼온 글을 보고 조금 이해할 수 있었어요...
밑에 글 쓰신 장애인은 바보가 아니라고 하신 분도 아마 이 글을 읽으시면 오아시스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실 수 있으실 거예요..
그리고 이렇한 현실을 상기시켜준 영화는 상받아야 하겠지만 , 이렇게까지 놀라워해야 하는 현실이 많이 씁쓸해지는 거겠지요...아마 그런 이유에서 밑의 글이 올라왔는지도 모르겠어요...
문화] [속보이는 문화]삶의 오아시스는 혼자 파야 한다
김성일
오아시스에 관한 이미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가령, 오아시스는 오랜 갈증을 해결해주고 더위에 지친 심신을 쉬게 하는 산소의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다. 또한 사막이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생명의 끈을 끈질기게 이어가는 모진 인생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오아시스>에서는 사막 속에 고립되어 살고 있는 은둔자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여기서 사막이란 스스로 밥벌이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적 규범과 가치체계를 받아들인 철들은 사람들과 장애인과 같은 공간에서 살 수 없는 정상인들만의 영토를 의미한다.
영화 <오아시스>는 중증 뇌성마비에 걸린 여주인공 공주(문소리)와 방금 교도소를 나와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종두(설경구)의 사랑 이야기를 주요 테마로 하고 있다. 이들의 사랑은 정상인과 장애인과의 격이 없는 소통을 주장하는 휴머니즘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가식적인 휴머니즘의 가면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사막 속에서 거주하는 주변 사람들은 종두의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았으며, 오아시스 안에 고립된 공주는 원천적으로 발화행위를 거부당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이런저런 이유로 사회적 타자가 된 주체들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정상인들의 사회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정치영화'라 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 <오아시스>에 '정치'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종두와 공주의 마지막 만남이 끝내 성사되지 못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즉 종두와 공주의 마지막 교감에 사용되는 소통장치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회 부적응자이면서 철저하게 유아적인 자기 중심주의에 빠져있는 종두는 마지막으로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행위, 즉 정상적인 사회인에게 요구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러한 타인에의 배려는 어쩌면 사회적 그물망에 종두가 어쩔 수 없이 포섭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공주를 무섭게 하던 가로수를 자른다는 것은 공중도덕을 해치는 일이다. 따라서 그는 공주라는 타인을 배려하면서도 여전히 사회적 규율체계에서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공주가 자신의 의사표현을 대신해 라디오를 크게 켜는 장면은 관객을 더욱 안타깝게 만든다. 라디오와 거울에 반사된 햇빛이 유일한 친구였던 공주에게 있어, 밤이라고 하는 시간적 제약은 라디오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하지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전혀 공주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한다. 그것은 곧 아무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소음'이 되어 버린다.
이 장면은 보나빠르뜨를 분석한 맑스를 생각하게 만든다. 맑스는「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멍청이 보나빠르뜨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을 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농민층의 지지를 언급하고 있다. 보나빠르뜨의 집권 후 반혁명의 물결이 몰아치는 상황 속에서, 맑스는 보나빠르뜨의 성공적인 집권에 결정적 요소였던 농민을 철저하게 소외시키는 상황을 보게 된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이해를 표현할 만한 언어나 정치집단을 스스로 가지지 못했을 경우에 나타나는 비극적 상황을 어둡게 묘사했다.
영화 <오아시스>에 나오는 공주에게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부재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해와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대리자로 라디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라디오를 켜 놓고 살던 공주에게 이 라디오 결정적인 순간에 공주의 자기표현을 '소음'으로 그치고 만든다. 새벽의 고요함을 찢는 라디오 소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소음이 되어 종두의 무죄를 증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대중이 자신을 스스로 대변할 수 있는 언어가 부재한다면, 어떠한 변화도 이룰 수 없음을 은유적으로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항상 표준화되고 공식화된 언어만을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아 왔다. 가령, 학교교육은 '교과서'라는 표준담론을 통해, 사회생활은 '상식'이라는 공식담론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도록 교육했던 것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기묘한 분업의 발생을 보게 된다. 그것은 교과서와 상식을 구성하고 생산하는 두뇌의 역할을 권력주체가 담당하게 하고, 대중은 두뇌의 활동을 보조하는 손과 발이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구상과 실행의 분리가 시작되면서 대중은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대의제' 속에서만 표현하게 되는 보이지 않는 철창에 갇히게 되었다. 그 결과 대중이 모이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그들의 사소한 목소리조차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로 규제 당하고 억압되었다. 대리자인 정치권이 권리 위임자인 국민을 적절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상황이 한국정치의 현실이 아닌가?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스스로 표현하고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언어를 빨리 되찾아야 한다. 다행히 길거리 응원전에 보였던 대중의 자발적인 대규모 응원, 8%가 넘는 지지율로 민주노동당의 약진에 기여한 젊은 유권자들 행보, 오노 사건의 부당성에 분노하면서 미국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였던 네티즌들의 사이버 시위는 잃어버린 자신만의 언어를 찾기 위한 청신호로 볼 수 있다. 목마른 자가 샘을 파듯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대중 스스로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