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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환의 택리지 복거총론 중 인심(人心)편
사민총론(四民總論),
팔도총론(八道總論),
복거총론(卜居總論 : 地理·生利·人心·山水),
총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219페이지 중 20페이지 분량 (129~149페이지)
인심(人心)
인심을 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자는 말하기를 “마을 인심이 착한 곳이 좋다. 가려서 착한 곳에 살지 않으면 어찌 지혜롭다고 하랴”고 했다. 또 옛날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이나 집을 옮긴 것도 아들의 교육 때문이었다. 좋은 풍속을 가려 택하지 않는다면 자기에게만 해로운 것이 아니라 자손에게도 나쁜 물이 들어 행실을 그르칠 우려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집터를 잡을 때는 그 고장의 풍속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8도 중에 평안도는 인심이 가장 순후(醇厚)하고, 그 다음은 경상도 풍속이 소박하고 진실하다. 함경도는 오랑캐 땅과 접해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거칠고 사나우며, 황해도는 산수가 험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사납고 모질다. 강원도는 산골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많고, 전라도는 간사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쁜 일에 마음이 움직이기 쉽다. 경기도는 도성 밖 백성들의 생활이 가난하고, 충청도는 세력과 재리(財利)만을 쫓는다. 이것이 8도 인심의 대략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민의 경우이고 사대부의 풍속은 그렇지 않다. 대개 우리나라 관제(官制)는 고대와는 달라서, 삼공(三公)1과 육경(六卿)2이 모든 관청을 감독하고 통솔하게 되어 있으나 그중에 중점은 대각(臺閣)3에 두었다. 떠돌아다니는 소문을 들어 관리들을 처리하고 오로지 남들의 의논만을 가지고 정사를 하기 때문에, 모든 안팎의 벼슬을 임명하는 일은 삼공이 맡지 않고 오로지 이조(吏曹)에 일임했다. 그러나 또 이조의 권한이 너무 클 것을 우려하여, 삼사(三司)4의 관원을 추천할 때에는 판서(判書)에게 맡기지 않고 전적으로 낭관(郎官)5에게 맡겼다.
1 삼공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말한다.
2 육경 : 육조의 판서. 육조는 즉 이조(吏曹 인사 담당), 호조(戸曹 조세), 예조(禮曹 행사와 교육), 병조 (兵曹 군사와 우편), 형조(刑曹 법률과 형벌), 공조(工曹 건설과 제작)를 일컫는다.
3 대각 : 대간(臺諫)과 같은 말. 대(臺)는 사헌부(司憲府)를, 간(諫)은 사간원(司諫院)을 가리킨다.
4 삼사 : 사헌부·사간원·홍문관(弘文館).
5 낭관 : 각 조의 정5품 벼슬인 정랑(正郎)과 정6품 벼슬인 좌랑(佐郎).
그런 까닭에 이조(吏曹)의 정랑(正郎)과 좌랑(佐郎)이 대각(臺閣)의 임명권을 장악하게 되니, 삼공과 육경이 벼슬은 비록 높지만 전랑(銓郎)6이 생각하기에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삼사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논하게 한다. 조정 풍속이 염치를 숭상하고 명예와 절의(節義)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탄핵(彈劾)7을 당하면 그 자리를 물러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전랑의 권리는 바로 삼공과 비슷하다. 이것은 크고 작은 벼슬이 서로 얽히고 위와 아래가 서로 견제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렇게 삼백 년을 내려오는 동안 큰 권세로 농간을 부린 자도 없었고, 꼬리가 커서 흔들기 어려웠던 근심도 없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조종(祖宗)께서 왕권이 약하고 신하의 세력이 강했던 고려조의 폐단을 막기 위해 마련한 제도다. 그런 까닭에 삼사(三司) 중에 반드시 명망과 덕행이 있는 자를 엄밀히 가려 전랑을 삼고, 또 전랑에게 자기 후임자를 추천하게 했다. 추천할 권리를 관장(官長)에게 맡기지 않은 것은 인사권을 소중히 여겨 모두 공정한 의논에 붙이게 한 것이다. 대체로 관직의 품계(品階)8를 승진시킬 때에는 반드시 먼저 전랑을 올려서 쓴 뒤에 다른 관청의 인사를 처리하게 했다. 또, 한번 전랑을 지낸 사람으로서 별 문제만 없으면 어려움 없이 공경(公卿)의 자리에 오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 벼슬에는 명예와 이익이 모두 따라다녀, 젊은 신진으로서는 이 자리를 희망하고 부러워하지 않는 자가 없다. 그러나 이 제도를 시행한지 이미 오래되고 보니, 차례와 추천 문제에서 논쟁 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조 때에 김효원(金孝元)9이 명망이 있어서 전랑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왕실의 외척이었던 이조참의(吏曹參議) 심의겸(沈義謙)10은 김효원이 전랑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6 전랑 : 이조를 전조(銓曹)라 하는데, 전랑은 전조의 낭관을 가리킨다. 즉 이조의 정랑과 좌랑이다.
7 탄핵 : 관리의 죄과를 조사하여 임금에게 아뢰는 것.
8 품계 : 직품(職品)과 관계(官階).
9 김효원(1532~1590) : 문신.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庵). 본관은 선산(善山). 알성문과에 장원급 제하여 벼슬이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심의겸과의 분규로 동서붕당이 시작됐다.
10 심의겸(1535~1587) : 문신.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 본관은 청송(靑松).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김효원과의 분규로 당쟁의 실마리를 만 들었다.
김효원은 명망 있는 집 자제로서 학행과 문장이 뛰어나고 또 어진 사람을 추대하고 유능한 사람에게 양보하기를 좋아하여 젊은 선비들로부터 크게 환심을 사고 있었다.
이에 선비들이 심의겸을 가리켜 어진 사람을 배척하고 권세를 희롱한다고 공격했다. 그러나 심의겸이 비록 왕실의 외척이기는 하지만, 그 전에 권력 있는 자를 물리치고 선비들을 등용한 공이 있어서 벼슬 높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를 옹호했다. 이리하여 선배와 후배 사이에 의견이 둘로 갈리었는데, 처음에는 사소한 일이었으나 일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계미(癸未)년과 갑신(甲申)년 사이에 동(東)·서(西)라는 이름으로 처음 갈라졌다.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일파를 동인(東人)이라 했고,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일파를 서인(西人)이라 했다. 동인은 김효원·유성룡(柳成龍)·김우옹(金宇顒)·이산해(李山海)11·정지연(鄭芝衍)12·정유길(鄭惟吉)13·허봉(許篈)·이발(李潑)14 등을 추대하고, 서인은 심의겸·박순(朴淳)15·정 철(鄭澈)·윤두수(尹斗壽)16·윤근수(尹根壽)17·구사맹(具思孟)18 등을 추대했는데, 이렇게 해서 붕당(朋黨)이 생기게 된 것이다.
11 이산해(1539~1609) : 문신.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 본관은 한산(韓山). 식년문과에 급제하 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충(文忠).
12 정지연(1527~1583) : 문신. 자는 연지(衍之), 호는 남봉(南峰). 본관은 동래(東萊). 별시문과에 급제하 여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13 정유길(1515~1588) : 문신. 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 본관은 동래.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 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14 이발(1544~1589) : 문신.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庵). 본관은 광주(光州).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15 박순(1523~1589) : 문인.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蓭). 본관은 충주(忠州). 친시문과에 장원으 로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충(文忠).
16 윤두수(1533~1601) : 문신.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 본관은 해평(海平).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靖).
17 윤근수(1537~1616) : 문신.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본관은 해평. 윤두수의 아우. 별시문과 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
18 구사맹(1531~1604) : 문신. 자는 경시(景時), 호는 팔곡(八谷). 본관은 능성(綾城).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의(文懿).
이보다 앞서, 정승 이준경(李浚慶)19이 임종할 때 말하기를 “조정 신하들 중에 장차 붕당의 조짐이 있습니다” 했는데, 옥당(玉堂) 이이(李珥)가 배척하는 소(疏)를 올려, “이것은 임금과 신하 사이를 이간하는 말입니다”라고 했다. 심지어 “죽으면서 한 말이 악하다”고까지 했다. 이때에 와서는 이이는 자기 말이 틀렸다는 것을 걱정하여, 동·서의 중간에 들어서 조정하고 화해시키기에 힘썼다.
그러나 나라에서 여러 번 사화20를 겪은 것이 모두 왕실의 외척에서 연유된 것이었기 때문에 선비들은 왕실의 외척을 몹시 미워했다. 그런데 심의겸이 마침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되자 그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때 인순왕대비(仁順王大妃)21는 세상을 떠났고 선조는 지파(支派)로서 대통을 이었기 때문에 심의겸은 궁중과의 인연이 끊어진 상태였다. 한데도 그가 외척이라는 허울뿐인 이름만 가지고 지나치게 설치니, 동인은 심의겸을 두둔하는 자를 모두 미워하게 되었다. 명망을 흠모하는 신진 선비들은 동인이 매우 많았다.
이이가 비록 중간에서 조정했지만, 이때에 와서 선비들의 논조가 너무 격렬해진 것을 보고, 대사헌(大司憲)이 된 후에는 심의겸을 탄핵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이는 서인은 아니었다.
그가 병조판서로 있던 어느 날, 옥당(玉堂)22 홍적(洪迪)23의 집에 가서, 적(迪)의 “지는 꽃은 높게도 날고 낮게도 날아 가지런하지 않다〔落花高下不齊飛〕”는 시를 읊으며 이 시는 당시(唐詩)의 격조라고 칭찬했다. 이때 그 자리에는 명사들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홍적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여기 모인 것은 공을 탄핵하기 위해서 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이이는 “공적인 의논이 있다면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겠소” 하고 일어났다.
19 이준경(1499~1572) : 문신.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 본관은 광주(廣州).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정(忠正).
20 사화 : 사림(士林)의 참화(慘禍). 조선시대에 조신(朝臣)과 선비들이 정적들을 몰아 화를 입힌 일을 말한다. 무오사화(戊午士禍)(1498, 연산군 4년), 갑자사화(甲子士禍)(1504, 연산군 10년), 기묘사화(己卯士禍)(1519, 중종 14년), 을사사화(乙已士禍)(1545, 명종 1년)가 있었다.
21 인순왕대비(1532~1575) : 조선 제13대 명종(明宗)의 정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를 말한다.
22 옥당 : 홍문관의 관원. 원래는 홍문관을 일컫는 별칭이었다.
23 홍적(1549~1591) : 문신. 자는 태고(太古), 호는 양재(養齋). 본관은 남양(南陽).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인(舍人)에 이르렀다.
허봉(許篈)이 이이를 탄핵하는 소를 올리자, 임금은 노하여 도리어 허봉을 귀양 보냈다. 대사간 송응개(宋應槪)24가 또 이이를 탄핵하자, 임금은 또 송응개를 귀양 보 냈고, 도승지 박근원(朴謹元)25이 동료들을 데리고 이 일을 거듭 아뢰자, 임금은 또 박근원을 귀양 보냈다. 이것이 세 차례의 귀양이다. 하지만 허봉이 한 말에는 억지가 많고 실상은 적었다. 이렇게 되자 이이를 두둔하는 자가 심의겸을 두둔하는 자 보다 많아지고 서인의 수도 많아졌다.
이름난 유학자였던 이이는 서인으로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세 차례나 귀양 보내는 일에 경솔히 관여해서 정국이 온통 뒤바뀌어 수습할 수 없게 되었으니, 세 차례 귀양 보내게 한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얼마 후에 이이가 죽고, 기축년에 정여립(鄭汝立)26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때 임금이 정철로 위관(委官)27을 삼아서 옥사를 다스리게 했다. 정철이 옥사를 다스리자 평소에 과격했던 동인은 죽이지 않으면 귀양 보내니, 조정이 거의 비다시피 했다. 기축년에서 신묘년에 이르기까지 옥사는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져 범위가 넓어져만 갔다. 이때 이산해는 영상(領相)이고 정철은 좌상(左相)이었는데, 이산해는 정 철이 옥사를 핑계로 자기를 해치지나 않을까 의심이 나서 뜬소문을 퍼뜨렸다. 정철이 바야흐로 금부(禁府)에서 옥사를 다스리고 있는데, 왕이 비망기(備忘記)28 를 내려 정철을 쫓아냈다. 이에 양사(兩司)의 대간(臺諫)이 정철을 논박하는 계사 (啓辭)29를 올려 강계(江界)로 귀양 보냈다. 양사에서는 벌을 추가하고자 했으나, 이산해가 옳지 못하다고 하여 중지시켰다.
24 송응개(?~1588) :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25 박근원(1525~?) : 문신. 자는 일초(一初), 호는 망일재(望曰齋). 본관은 밀양(密陽).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26 정여립(1546~1589) : 모반자. 자는 인백(仁伯), 호는 죽도(竹島). 본관은 동래(東萊).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수찬(修撰)에 이르렀으나, 임금의 미움을 받고 진안 죽도에서 대동계(大同契)를 모아 모반하다가 자살했다.
27 위관 : 옥사(獄事)를 다스릴 때 대신 가운데 임명하던 임시 벼슬.
28 비망기 : 임금이 명령을 적어서 승지(承旨)에게 내리던 문서.
29 계사 : 죄상을 적어 임금에게 올리는 글.
정철이 귀양 간 후 이산해는 정철에게 쫓겨났던 동인들을 모두 불러들여 조정 관직에 임명하고 또 정철에게 붙었던 서인을 몰아냈으니, 이것이 신묘년에 있었던 일진일퇴의 정국이었다. 이때부터 동인이 정국을 장악했다.
임진년에 선조가 파천(播遷)30하여 잠시 개성부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종실 한 사람이 소(疏)를 올려, 김공량(金公諒)31이 대궐과 통하여 정사를 어지럽혔다고 고하고 또 이산해가 정사를 그르쳤다고 고하여 귀양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은 이산해만 귀양 보내도록 명했다. 이에 이산해는 영상의 지위에서 파면되고 평해(平海)로 귀양 갔다.
임금이 남문루(南門樓)에 거둥했는데, 정철을 소환하도록 청하는 글을 올리는 자가 있었다. 이에 임금은 정철을 용서하고 행재소(行在所)32로 오게 했다.
임금이 의주(義州)에 이르러 시 한 수를 정원(政院)33에 내렸다.
관산(關山)34 달을 보고 통곡하고 압록강 바람에 마음 상한다 조정 신하들은 오늘 이후에도 다시 또 서인·동인 할 것인가
임금이 서울에 돌아온 후에도 왜적들은 남쪽 바닷가에 머문 채 돌아가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밖으로는 왜적을 막고 안으로는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느라 여러모로 바빴다. 그리하여 동인과 서인이 조정에서 함께 벼슬해도 서로 공격할 겨를이 없었다. 무술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그제야 왜적이 돌아갔다.
30 파천 : 임금이 난을 피해 서울을 떠나는 일.
31 김공량 : 인빈(仁嬪) 김씨의 오빠. 누이가 임금의 총애를 받자 권세를 부려 정치에 관여했으며, 뒤에 처형하라는 명이 내리자 강원도로 도망갔다.
32 행재소 : 임금의 임시 거처.
33 정원 : 승정원(承政院)의 준말. 조선시대에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
34 관산 : 국경 지대에 있는 산.
이때 이산해는 사면되어 돌아와 원임대신(原任大臣)이 되었고, 이산해의 아들 경전(慶全)35은 이미 과거에 올라 있었다. 옥당을 뽑게 되었는데, 이 경전은 글 잘한 다는 명성이 있었고 또 대신의 자제이기 때문에 전조(銓曹)에서 추천할 수가 있었 다.
대개 조종의 관례로서 이조의 낭관(郎官)이 옥당을 뽑을 때에는 추천받을 사람 중 에서 가장 유망한 사람을 골라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하는데, 이것을 이조 홍문록 (吏曹弘文錄)이라고 한다. 그때 영남 사람 정경세(鄭經世)가 전랑(銓郞)으로 있었 는데, 이경전이 추천되는 것을 막으려고, “경전은 유생으로 있을 때부터 남들의 비방을 많이 받았으니, 전조(銓曹)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을 퍼뜨렸다. 그러 자 이산해와 이산해를 따르던 자들이 크게 노했다.
그때 이덕형(李德馨)36이 정승으로 있었는데, 사람을 시켜 이준(李埈)을 불러다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경임(景任)37에게 말하게. 만일 이 경전이 전조에 추천되는 것을 막으면 반드시 큰 풍파가 일어날 것인즉, 이것은 조정을 평온하게 하는 일이 아닐세. 내가 사사로운 감정에서 하는 말이 아닐세.”
이준은 정경세와 같은 고을 사람이고, 이경전은 이덕형의 처남이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그러나 정경세는 말을 듣지 않았다.
얼마 후 남이공(南以恭)38이 대간이 되자 수상 유성룡을 호되게 탄핵했다. 정경세가 유성룡의 제자였으므로, 이산해는 정경세가 유성룡의 지시를 받은 것으로 의심해서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남이공을 시켜 말한 것이었으나, 실은 유성룡의 잘못은 아니었다.
35 이경전(1567~1644) : 문신. 자는 중집(仲集), 호는 석루(石樓). 본관은 한산(韓山).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36 이덕형(1561~1613) : 문신.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본관은 광주(廣州).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38세에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했다. 시호는 문익(文翼).
37 경임 : 정경세(鄭經世)의 자.
38 남이공(1565~1640) : 문신. 자는 자안(子安), 호는 설사(雪蓑). 본관은 의령(宜寧).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유성룡의 편을 드는 이원익(李元翼)39·이덕형·이수광(李晬光)40·윤승훈(尹承勳)41·한준겸(韓浚謙)42을 모두 남인(南人)이라 했는데, 이것은 유성룡이 영남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산해의 편을 드는 유영경(柳永慶)43·기자헌(奇自獻)44·박 승종(朴承宗)45·유몽인(柳夢寅)46·박홍구(朴弘耈)47·홍여순(洪汝淳)48·임국로(任國老)49·이이첨(李爾瞻)50을 모두 북인(北人)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이산해의 집이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으나 남인은 아주 적었다.
선조 말년부터 북인이 국정을 장악한지 십 년이나 되었고, 광해(光海)가 즉위하자 서인과 남인은 모두 세력을 잃었다. 그 후 또 북인은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졌다.
39 이원익(1547~1634) : 문신.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본관은 전주(全州).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충(文忠).
40 이수광(1563~1628) : 문신·실학자.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 본관은 전주(全州).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
41 윤승훈(1549~1611) : 문신. 자는 자술(子述), 호는 청봉(晴峰). 본관은 해평(海平).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文肅).
42 한준겸(1557~1627) : 문신.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千). 본관은 청주(淸州).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5도도원수 등을 역임했고, 인조(仁祖)의 장인이 되어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익(文翼).
43 유영경(1550~1608) : 문신. 자는 선여(善餘), 호는 춘호(春湖). 본관은 전주(全州).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44 기자헌(1562~1624) : 문신. 자는 사정(士靖), 호는 만전(晚全). 본관은 행주(幸州).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가, 이괄의 난 때 사사(賜死)되었다.
45 박승종(1562~1623) : 문신. 자는 효백(孝佰), 호는 퇴우당(退憂堂). 본관은 밀양.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인조반정 때 자결했다. 시호는 숙민(肅愍).
46 유몽인(1559~1623) : 문신.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 본관은 흥양(興陽).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시호는 의정(義貞).
47 박홍구(1552~1624) : 문신. 자는 응소(應邵), 본관은 죽산(竹山).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48 홍여순(1547~1609) : 문신. 자는 사신(士信), 본관은 남양(南陽).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나, 당쟁으로 진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49 임국로(1537~1604) : 자는 태수(鮐叟), 호는 죽오(竹塢). 본관은 풍천(豊川).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50 이이첨(1560~1623) : 권신.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 본관은 광주(廣州).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판서·대제학에 이르렀으나, 인조반정 때 참형됐다.
폐모론(廢母論)51을 주장한 자는 대북이 되고, 이를 반대한 자는 소북이 되었다.
대북은 이이첨을 중심으로 허균(許筠)52·한찬남(韓纘男)53·이성(李偗)·백대형 (白大珩)54 등이 따랐고, 소북은 남이공을 중심으로 기자헌·박승종·유희분(柳希奮)55·김신국(金藎國) 등이 따랐다. 이들은 남이공보다 벼슬은 높았으나, 폐모론을 공박하면서 소북이 되어 따르게 된 것이다.
이경전은 처음에는 이이첨과 사이가 좋았으나, 뒤에 이이첨이 여러 사람에게 미움받는 것을 보고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계축년에 그의 아들 진사 부(阜) 를 시켜 이이첨을 참하라는 소를 올렸다. 이때 이이첨은 이경전과 바둑을 두다가 소보(小報)56를 받았는데, 그 소보에는 진사 이부가 이이첨을 참하도록 청하는 소가 실려 있었다. 이이첨이 놀라 “그대의 자제가 나를 죽이라고 했소” 하자, 경전은 “어찌 그럴 리가 있겠소. 이는 반드시 동명이인일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이이첨은 이 말을 믿고 두던 바둑을 마치고 일어났으나, 그 후 속은 것을 알고 절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경전은 소북이 되었다.
51 폐모론 :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자는 주장.
52 허균(1569~1618) : 문신.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본관은 양천(陽川).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좌참찬에 올랐으나, 반란을 음모한 죄로 능지처참됐다. 《홍길동전》의 저자.
53 한찬남(1560~1623) : 문신. 자는 경서(景緖), 본관은 청주.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판서에 올랐으나, 인조반정 때 주살됐다.
54 백대형(1575~1623) : 문신. 자는 이헌(而獻), 본관은 수원(水原).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서궁에 침입하여 인목대비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고, 인조반정 때 사형당했다.
55 유희분(1564~1623) : 문신. 자는 형백(亨佰), 호는 화남(華南). 본관은 문화(文化). 별시문과에 급제하 여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데 주동이 되었으며, 인조반정 때 참형당했다.
56 소보 : 승정원에서 그날 처리된 일을 간추려 여러 관원들에게 알리는 글.
계해년에 인조가 서인 김류(金瑬)·이귀(李貴)57·홍서봉(洪瑞鳳)58·장유(張維)59·
최명길(崔鳴吉)·이서(李曙)60·구인후(具仁垕)61 등을 거느리고 반정(反正)한 다음, 대북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리고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인과 소북을 함께 등용했으나, 소북은 온전히 파를 유지하지 못하고 남인이 되거나 서인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소북으로 행세하는 자는 아주 적어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그 후 반정에 참여했던 공신들이 교만하고 방자한 자가 많아지자, 인조는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고자 했다. 대간(臺諫)에 있는 남인이 서인을 공박하면, 반드시 남인을 옹호했다. 김류는 임금의 뜻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기 세력을 잃을까 두려워 은밀히 자기편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이조참판 이하의 벼슬은 모두 남인에게 주더라도, 이조판서 이상과 의정부 자리는 남인에게 주어서 는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당하관(堂下官)62 중에서도, 청환(淸宦)63인 한림(翰林)과 이조의 낭관(郎官) 이상으로 이조참의(吏曹參議)·이조참판까지는 남인이 서인과 함께 벼슬을 하지만 아경(亞卿) 이상은 승진시키지 않았고, 혹 승진을 시킨다 해도 이조판서는 허락지 않았다. 그런데 오직 이성구(李聖求)64만은 병자년 난리의 틈을 타서 영의정이 될 수 있었다.
효종 초년에 김자점(金自點)65을 제거하려고 특별히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66을 올려 썼고, 김자점을 죽인 후에는 두 송씨를 대관(大官)으로 발탁했다.
57 이귀(1557~1633) : 문신.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 본관은 연안(延安).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이조판서, 좌·우참찬,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시호는 충정(忠定).
58 홍서봉(1572~1645) : 문신. 자는 휘세(輝世), 호는 학곡(鶴谷). 본관은 남양(南陽). 문과중시에 급제하 고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靖).
59 장유(1587~1638) : 문신.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 본관은 덕수(德水).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문장이 뛰어났다. 시호는 문충(文忠).
60 이서(1580~1637) : 무신. 자는 인숙(寅叔), 호는 월봉(月峰). 본관은 전주. 무과에 급제하여 장단부사 겸 경기방어사로 있다가 김유·이귀 등과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정(忠正).
61 구인후(1578~1658) : 무신. 자는 중재(仲載), 호는 유포(柳浦). 본관은 능성(綾城).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무(忠武).
62 당하관 : 당(堂)은 대청이라는 뜻인데, 당하관은 조정에서 조의(朝儀)를 행할 때 대청의 의자에 앉을 수 없는 관원을 말한다. 당상관(當上官)은 그 의자에 앉을 수 있는 관원이다. 당상관은 정책결정에 직 접 참여할 수 있으며, 승진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다. 문관은 통훈대부(通訓大夫), 무관 은 어모장군(禦侮將軍) 이하의 관원들이 당하관에 해당된다.
63 청환 : 규장각·홍문관·선전관청 등의 벼슬.
64 이성구(1584~1644) : 문신.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汾沙). 본관은 전주(全州). 별시문과에 급제 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숙(貞肅).
65 김자점(1588~1651) : 문신.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본관은 안동. 음보(蔭補)로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인조반정 때 정사(靖社) 1등공신으로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으나 반역죄로 사형 당했다.
66 송준길(1606~1672) : 문신.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 학행으로 천거되어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正).
현종 말년에 남인 허목(許穆)과 윤휴(尹鑴)67·윤선도 등이 기해년에 국가의 예식 을 그르쳤다는 이유를 들어 두 송씨를 공격하자 현종은 그 말을 받아들여 바로 잡았다. 이때 남인 허적(許積)68이 수상으로 있었으며, 이어 고명(願命)69도 받았다. 숙종 초년에는 허적이 국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보다 먼저 대비의 친정아버지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70이 그 아버지를 장사 지낼 때 수도(隧道)71 의 제도를 썼는데, 송시열이 이를 크게 공박했다.
그러자 김우명은 민신(閔愼)72이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거상(居喪)한 일을 가지고 두 송씨를 배척하니, 크게 틈이 벌어졌다. 이때 김우명의 조카 김석주(金錫冑)73는 허적과 합세해 남인들을 끌어들여, 국가의 예식을 그르쳤다는 이유로 송시열을 공격하여 귀양 보내게 했다. 이 일 때문에 서인과 남인 사이에 논쟁이 시작되었다. 김석주는 옥당으로 있다가 1년 만에 벼슬에 올라 병조판서가 되었다.
허적의 서자 견(堅)74은 본래 교만하고 방자한 사람이었다. 과거에 급제는 했으나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한 것을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고,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는 종실(宗室)의 정(楨)과 남(楠)형제와 사귀면서 김석주와 점점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김석주는 이를 의심하여 몰래 자기사람 정원로(鄭元老)를 시켜 허견의 행동을 감시하게 했다. 드디어 허견이 정·남과 내왕하면서 요망된 말이 오가는 것을 알고, 이들을 공박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67 윤휴(1617~1680) : 문신.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 본관은 남원(南原). 재행으로 천거되어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숙종 즉위 때부터 많은 개혁안을 제기하고 실행하려 했으나, 허견(許堅)의 옥사에 관련된 혐의로 사사(賜死) 됐다.
68 허적(1610~1680) : 문신. 자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默齋). 본관은 양천(陽川).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자인 견(堅)의 역모에 연좌되어 사사(賜死)됐다.
69 고명 : 임금이 죽을 때 세자나 종친에게 나라의 뒷일을 부탁하는 것.
70 김우명(1619~1675) : 문신. 자는 이정(以定), 본관은 청풍(淸風). 현종(顯宗)의 장인이다. 청풍부원군 (淸風府院君)에 봉하고,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
71 수도 : 무덤에 문을 만들어 계절마다 옷과 음식을 관 앞에 갖다 놓을 수 있게 한 제도.
72 민신 : 숙종 때 사람. 조부인 업(嶪)이 죽었는데 아비 세익(世益)이 정신병 환자라 복을 입을 수 없었다. 이에 민신은 이 문제를 송시열과 의논했고, 송시열은 아들에게 폐질이 있으면 손자가 대신해 복을 입는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민신이 상주(喪主)가 됐으나, 허적·김우명 등은 이를 패륜(悖倫)이라 주장하며 공격했다. 결국 형조의 건의로 민신을 삼강오륜을 범했다는 죄목으로 장형(杖刑)에 처하고 유배하는 것으로 논란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 논란은 이후 남인이 송시열을 공격할 때 자주 이용됐다.
73 김석주(1634~1684) : 문신.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 본관은 청풍(淸風).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충(文忠).
74 허견(?~1680) : 허적(許積)의 서자로서 삼복(三福) 사건의 음모자.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과 역모를 꾀한다 하여 주살됐다.
이때, 임금이 허적에게 궤장(几杖)75을 하사하고 잔치를 내렸다. 어주(御酒)와 어악 (御樂)을 내리고, 백관들에게 이 잔치에 참여하도록 명하여 그를 총애했다. 김석주 는 이 날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바로 대궐로 가서, 정원로가 전한 말을 그대로 임금께 아뢰었다. 그러자 임금은 즉시 국청(鞫廳)76을 설치하라 명하고, 허견을 잡아다가 정원로와 대질시켰다. 허견이 드디어 자복하자, 곧 환렬(轘裂)77에 처했다. 이렇게 옥사가 크게 일어나 정·남과 허적·윤휴·오정창(吳挺昌)78이 죽고 유혁 연(柳赫然)79·이원정(李元禎)80·조성(趙惺)·이덕주(李德冑)에게도 화가 미쳤는데, 이들은 모두 재상이었다. 이렇게 해서 남인이 물러가고 서인이 다시 나오게 되었다. 임술년에 또 허새(許璽)81의 옥사가 일어나 사람들의 말이 많았는데,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또 나뉘게 되었다.
75 궤장 : 임금이 나이많은 중신에게 특별히 내리는 안석(案席)과 지팡이.
76 국청 : 중죄인을 다스릴 때 임시로 설치하는 관청.
77 환렬 : 팔 다리에 끈을 매어 말이 끌어당기게 해서 찢어 죽이는 형벌.
78 오정창(1634~1680) : 문신. 자는 계문(季文), 본관은 동복(同福).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판서에 이르렀으나, 1680년에 허견의 삼복(三福) 사건을 정점으로 남인들이 대거 정치적으로 쫓겨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주살되었다.
79 유혁연(1616~1680) : 무신. 자는 회이(晦爾), 호는 야당(野堂). 본관은 진주(晉州).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훈련대장·공조판서·총융사(德戎使) 등을 지냈으나, 경신대출척 때 유배·치사됐다. 시호는 무민(武愍).
80 이원정(1622~1680) : 문신. 자는 사징(士徵), 호는 귀암(歸巖). 본관은 광주(廣州).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경신대출척 때 장살(杖殺)됐다.
81 허새(?~1682) : 유생. 병마정도사 김환(金煥)의 고변으로 체포되어 주살되었으나, 뒤에 남인 숙청을 위한 조작극이었음이 밝혀졌다.
노론은 김석주·김만기(金萬基)82를 중심으로 송시열·김수항(金壽恒)83·김수흥 (金壽興)84·민유중(閔維重)85·민정중(閔鼎重)86이 따랐고, 소론은 조지겸(趙持謙)87 을 중심으로 한태동(韓泰東)88·오도일(吳道一)89·남구만(南九萬)90·윤지완(尹趾完)91·박태보(朴泰輔)92·최석정(崔錫鼎)93이 합세했다. 이것은 노론이 남인을 모두 죽이려 하자 소론이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에 갈라지게 된 것이다.
82 김만기(1633~1687) : 문신. 숙종의 장인. 자는 영숙(永淑), 호는 서석(瑞石). 본관은 광산(光山). 별시 문과에 급제했고,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충(文忠).
83 김수항(1629~1689) : 문신.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본관은 안동.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기사환국(己已換局)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진도(珍島)로 유배돼 사사됐다. 시호는 문충(文忠).
84 김수흥(1626~1690) : 문신.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 본관은 안동. 김수항(金壽恒)의 형.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기사환국으로 장기(長鬐)에 유배 됐고 이듬해 그곳에서 죽었다. 시호는 문익(文翼).
85 민유중(1630~1687) : 문신. 숙종의 장인.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 본관은 여흥(驪興).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친정아버지.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판서에 이르고,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정(文貞).
86 민정중(1628~1692) : 문신.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峰). 본관은 여흥. 민유중(閔維重)의 형.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기사환국에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죽었다. 시호는 문충(文忠).
87 조지겸(1639~1685) : 문신. 자는 광보(光甫), 호는 오재(迀齋). 본관은 풍양(豊壤).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경상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88 한태동(1646~1687) : 문신. 자는 노첨(魯瞻), 호는 시와(是窝). 본관은 청주.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89 오도일(1645~1703) : 문신. 자는 관지(貫之), 호는 서파(西坡). 본관은 해주.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90 남구만(1629~1711) : 문신.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본관은 의령. 널리 알려져 있는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지은이.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충(文忠).
91 윤지완(1635~1718) : 문신. 자는 숙린(叔麟), 호는 동산(東山). 본관은 파평(坡平).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정(忠正).
92 박태보(1654~1689) : 문신.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본관은 반남(潘南).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조 좌랑·암행어사에 이르렀으나,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진도로 유배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 시호는 문열(文烈).
93 최석정(1646~1715) : 문신. 자는 여화(汝和), 호는 명곡(明谷). 본관은 전주(全州).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
경신년94 이후 십 년만에 남인 민암(閔黯)95·민종도(閔宗道)96 등이 세력을 잡자 경신년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원한을 풀어 주었는데, 오직 정(楨)·남(柟)만은 용서받지 못했다. 이들은 또 송시열·김수항·이사명(李師命)97·김익훈(金益勳)98을 죽였다. 또 6년 뒤에 서인이 다시 세력을 잡자 민암과 이의징(李義徵)99을 죽였다. 이로부터 노론과 소론이 함께 정국을 맡았으나, 조정에서 서로 다툰 것이 수십 년이나 되었다.
숙종 말년에는 노론만을 등용하고 소론은 배제했으며, 경종 신축년에는 조태구(趙泰耈)100와 최석항(崔錫恒)101이 정권을 잡아 노론을 쫓아냈다. 임인년에 또 옥사를 일으켜 노론의 정승 이이명(李頤命)102·김창집(金昌集)103·이건명(李健命)104·조태채(趙泰采)105를 죽였다.
94 경신년 : 1680년(숙종 6년)에 남인 세력이 정치적으로 대거 축출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말한다.
95 민암(1636~1694) : 문신. 자는 장유(長孺), 호는 차호(叉湖). 본관은 여흥.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경신대출척 때 파직됐으나 기사환국 때 재기용됐다. 이어 숙종이 서인을 등용하면서 영의정 남구만의 탄핵으로 이의징과 함께 사사(賜死)됐다.
96 민종도(1633~?) : 문신. 자는 여회(汝會), 본관은 여흥.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 다.
97 이사명(1647~1689) : 문신. 자는 백길(伯吉), 호는 포암(浦菴). 본관은 전주(全州). 춘당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98 김익훈(1619~1689) : 문신. 자는 무숙(懋叔), 호는 광남(光南). 본관은 광산(光山). 음보(蔭補)로 의금 부도사가 되어 벼슬이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경신대출척을 일으키는 데 적극 참여했다. 시호는 충헌 (忠獻).
99 이의징(?~1695) : 무신. 본관은 전주. 진안현감(鎭安縣監)이 되고 벼슬이 훈련대장이 되었으나, 1694 년(숙종 20년) 숙종의 폐비(廢妃) 민씨 복위운동을 둘러싸고 남인이 몰락한 갑술옥사(甲戍獄事)로 사사(賜死)됐다.
100 조태구(1660~1723) : 문신. 자는 덕수(徳叟), 호는 소헌(素軒). 본관은 양주(楊州).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101 최석항(1654~1724) : 자는 여구(汝久), 호는 손와(損窝). 본관은 전주(全州).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신임사화(信任士禍) 때 관직이 추탈됐다.
102 이이명(1658~1722) : 문신. 자는 양숙(養叔), 호는 소재(疏齋). 본관은 전주(全州). 이사명의 아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문(忠文).
103 김창집(1648~1722) : 문신.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본관은 안동. 김수항의 아들.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헌(忠獻).
104 이건명(1663~1722) : 문신.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포齋). 본관은 전주. 춘당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민(忠愍).
지금 임금 초년에는 노론을 등용하고 소론을 배척했다가, 정미년에는 소론이 다시 등장했다. 무신년에는 역변(逆變)이 일어나서 김일경(金一鏡)106과 박필몽(朴弼夢)107이 역적으로 몰려 죽었고, 이사상(李師尙)108·이진유(李眞儒)109·윤성시(尹聖時)110·서종하(余宗厦)111·이명의(李明誼)112도 같은 당이라 하여 죽였다. 이에 소론 정승이었던 조문명(趙文命)113과 노론 정승이었던 홍치중(洪致中)114이 주동이 되어 탕평론(蕩平論)115을 주장했다. 이리하여 노·소·남·북의 사색을 함께 등용하게 되었다.
지금 임금 경신년에 경연(經筵)116에 참석했던 신하가, 붕당이 갈라진 것은 전랑(銓郎)에서 시작되었으니 한 쪽 편을 드는 일이 없도록 전랑의 권한을 없애기를 청했다.
105 조태채(1660~1722) : 문신.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 본관은 양주(楊州).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익(忠翼).
106 김일경(1662~1724) : 문신. 자는 인감(人鑑), 호는 아계(丫溪). 본관은 광산.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참찬에 이르렀다.
107 박필몽(1668~1728) : 문신. 자는 양경(良卿), 본관은 반남(潘南).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찬에 이르렀다.
108 이사상(1656~1725) : 자는 성망(聖望), 본관은 전주.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 다.
109 이진유(1669~1730) : 문신. 자는 사진(士珍), 호는 북곡(北谷). 본관은 전주.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10 윤성시(1672~1730) : 자는 계성(季成), 본관은 해평(海平).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111 서종하(1670~1730) : 자는 비세(庇世), 본관은 대구(大邱).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112 이명의(1670~1728) : 자는 의백(宜伯), 본관은 한산(韓山).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113 조문명(1680~1732) : 문신. 자는 숙장(救章), 호는 학암(鶴巖). 본관은 풍양(豊壤).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충(文忠).
114 홍치중(1667~1732) : 문신. 자는 사능(士能), 호는 북곡(北谷). 본관은 남양.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1712년에 북평사(北評事)로서 청나라 사신 목극등(穆克登)과 함께 백두산에 올라 경계를 정했다. 시호는 충간(忠簡).
115 탕평론 : 영조(英祖) 때에 주장된 정치 이론으로, 4색 당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당쟁을 없애자는 취지 를 띠고 있었다.
116 경연 : 조선시대에 임금이 학문을 닦기 위해 학식과 덕망이 높은 신하를 불러 경서(經書)와 왕도(王道) 에 대해 강론하던 자리. 강론을 마친 다음에는 일반 국정도 논의했다.
임금이 그 말을 받아들여 허락했다. 전랑이 자기 후임을 추천하던 일과 삼사 (三司)의 관원을 추천하는 데에 주장하던 법을 없애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랑의 권한이 낮아져 다른 관청의 낭관(郎官)과 같아지니, 삼백 년 동안 내려온 법이 폐지되었다.
옛날 선조 때는 바로 국조(國朝)의 중엽이었는데 인재들이 많았다. 신진이라면 누구나 명망을 쌓아 전조(銓曹)에 추천되기를 희망 했었다. 어떤 명관(名官)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사동(使童)을 불러 말에게 콩을 더 주라고 했고, 또 어떤 명관은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마당에 널어놓은 벼에 앉은 새를 손으로 쫓았다. 그러나 여러 명사들은 모두 이 두 사람의 행동을 천하다고 보았고 그래서 전조에 추천 되지 못했다. 이 두 가지 일은 천진하고 솔직한 자로서는 혹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 사람의 인품과 관계되는 일이 아닌데도 동료들에게 배척을 당했으니, 참으로 웃을 일이다.
그러나 한때 인선 문제가 엄격했다는 것과 선비들이 언행을 닦는 데 힘썼던 풍습은 상상할 수 있다. 이는 즉 건국 초기에는 깨끗한 명망과 좋은 벼슬로써 온 세상 선비의 기풍을 고무시키는 기틀로 삼았던 것이다. 인조 때에도 전조(銓曹)의 권한을 없애자고 청한 자가 있었다. 그래서 임금이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대신 들은 건국 초기부터 내려오는 제도를 함부로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당시의 대신들은 본조(本朝)에서 큰 권한을 전조에게 준 것은 대신들의 잘못을 방지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자기에게 혐의가 돌아오지 않도록 전조의 권한을 없애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 러던 것을 이 때에 와서 없애니, 추천권으로 통솔하던 전조의 힘이 없어졌기 때문에 신진 선비들은 각자 제 맘대로 하고 제한이 없어서, 모두 승진의 차례를 뛰어넘으려고 생각했다. 또 명예를 숭상하는 기풍이 없어지고 오로지 사리사욕에만 뜻을 두어, 외직(外職)을 소중히 여기고 내직(內職)117은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다. 모두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이 되려고 하고 염치 같은 것은 돌보지 않았다.
117 외직·내직 : 외직은 지방의 관직을, 내직은 조정 안의 관직을 말한다.
또 조정에서 탕평책을 시행한 지 오래되어 사색이 함께 벼슬하게 되었다. 그러니 벼슬자리는 적고 벼슬하려는 사람은 많았다.
경쟁이 심한데다가 전조의 권한마저 없어졌으니, 높은 벼슬을 조급하게 탐내게 되어 진신(縉紳)118들의 기풍이 회복할 수 없이 일시에 무너졌다. 그리고 조정의 대권 (大權)은 또 다시 정승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서울은 사색이 모여 살기 때문에 풍속이 고르지 못하나, 지방으로 말하면 서·북 삼도를 제외한 동·남 5도에는 사색이 나뉘어 살고 있다.
경상도는 모두 예안(禮安) 이황(李滉)의 학문을 따르는데, 유성룡은 이황의 문인이다. 남인이라는 명칭이 유성룡으로 해서 생겼기 때문에 도내의 사대부는 모두 남인이 되어 의논이 통일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도에는 사색이 섞여서 살고 있다. 이보다 먼저 이이의 문인 김장생(金長生)119이 벼슬에서 물러나 연산(連山)에 살면 서 후진들을 가르쳤는데, 회덕(懷德)의 송시열·송준길과 이산(尼山)의 윤선거(尹宣擧)120 형제가 가서 배웠다. 윤선거의 아들 증(拯)121도 송시열에게 배웠으나, 얼마 안 가 사이가 벌어졌다.
경신년 후에 송시열은 노론이 되고 윤증은 소론이 되어, 회덕과 이산의 문인은 서로들 맹렬히 공격했다. 이때문에 연산과 회덕 근처는 모두 김(金)·송(宋) 두 집 문인의 자손들이지만, 세 윤씨 때문에 이산 고을만은 모두 소론이다.
강원도와 경기도에도 강가에 있는 정자는 남인들의 옛집이 많다. 전라도에는 국조 (國朝) 중엽 이후로 큰 벼슬을 한 사람이 드물어서 인재를 키우지 못했기 때문에 인물이 적고, 사대부는 다만 서울에 있는 친지를 따라 색목(色目)이 구별되었다.
118 진신 : 조정의 신하.
119 김장생(1548~1631) : 문신이자 학자.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 학행으로 천거 되어 동지중추부사·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예학(禮學)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
120 윤선거(1610~1669) :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 본관은 파평(坡平).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함락되자 평민 복장으로 달아났기 때문에 이를 자책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시호는 문경(文敬).
121 윤증(1629~1714) : 학자.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본관은 파평. 학행으로 천거되어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성(文成).
이런 이유로 예전에는 남인과 북인이 많았으나 지금은 노론과 소론이 많다. 도내에서 크다는 집안은 십여 집에 지나지 않는다. 부유한 집은 많으나 널리 알려진 사람은 드물다. 이것은 기대승(奇大升)·이항(李恒) 이외에는 선비들을 지도하고 훈계할만한 스승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심이 매우 박하고 지도계급의 도에 미치지 못한다.
대체로 사대부가 사는 곳은 인심이 나쁘지 않은 곳이 없다. 붕당을 만들어 할 일 없는 사람들을 모으고, 권세를 부려 가난한 백성들을 괴롭히기도 한다. 자기 행동을 단속하지 못하면서 남이 자기 말을 하면 미워하고, 한 지방의 패권을 독차지하기를 좋아한다. 같은 색목이 아니면 한 고장에서 함께 살지 못하고, 마을 안에서는 헐뜯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신축년과 임인년 이후로 조정에는 노론·소론·남인 세 색목끼리 원한이 날로 깊어져 서로 역적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우더니, 그 영향이 시골에까지 미쳐 싸움터가 되고 말았다. 이들은 서로 혼인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귀지도 않는다. 한 색목이 다른 색목과 친하면 절조를 잃었다느니 항복했다느니 하고 멀리한다. 심지어 일없이 노는 자나 종들까지도, 한번 아무개네 집 사람이라고 불리었으면 다른 집안을 바꾸어 섬기고자 해도 용납되지 않는다.
사대부의 자질이나 지위의 고하는 자기 편 색목한테만 통할 뿐, 다른 색목한테는 통하지 않는다. 이쪽 색목 사람이 저쪽 색목에게 배척당하면 이쪽 색목에서는 더욱 귀하게 대접하는데, 이것은 저쪽 색목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큰 죄를 범했 더라도 다른 색목에게 공격을 받으면 그 사람의 잘잘못이나 옳고 그름은 덮어둔 채 떼지어 역성을 들어 죄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무리 행실이 착하고 숨은 덕이 있더라도 같은 색목이 아니면 그 사람의 약점부터 들추어낸다.
당색(黨色)이란 것이 처음에는 하찮은 일에서 생겼으나, 그 자손들이 조상이 한 말을 지키다 보니 2백 년이 지나는 동안 드디어 깨뜨릴 수 없이 굳어 버렸다. 노론과 소론은 서인에서 갈라진 지 겨우 40여 년이다. 그래서 간혹 형제나 숙질 간에도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자도 있다. 색목이 한번 갈라지면 심장이 마치 초(楚)나라와 월(越)나라122 처럼 서로 멀어져, 같은 색목끼리는 서로 의논해도 지친(至親) 간 에는 서로 말도 하지 않는다. 일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윤리까지도 없어졌다.
122 초나라·월나라 : 고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있었던 나라들인데, 모두 중국 서울에서는 아주 거리가 먼 중국 남부 지방에 있었다.
근래에 와서는 사색이 조정에 함께 나가서 오직 벼슬만 할 뿐이고, 옛날부터 지켜오던 의리는 고깔을 씌우듯 모두 감추어 버렸다. 사문(斯文)의 옳고 그름과 충신과 역적에 대한 논란도 모두 과거지사로 돌려 버린다. 이리하여 피 터지게 싸우던 습관은 전에 비해 적어졌지만, 옛 풍속에다가 한 술 더 떠서 나약하고 게으른 새 병폐가 추가되었다.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입에 올릴 때에는 모두 한 색이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공적인 좌석에서 조정에 관한 말이 나오면 서로 모나지 않으려고 한다. 혹 대답하기가 어색하면 우스갯소리로 얼버무리고 만다. 그래서 의관을 정제한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에는 방안 가득히 웃음소리만 들릴 뿐이다. 공무를 처리할 때는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할 뿐 나라를 위해 몸 바치려는 자는 드물다. 관직을 가볍게 여기고 관청을 주막집처럼 여긴다. 재상은 중립을 지키는 것을 현명하다 하고, 삼사(三司) 는 말하지 않는 것을 고상하다 하며, 외관(外官)은 청렴하고 검소한 것을 어리석다 하니, 결국에는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천지지간 수많은 나라 중 인심이 일그러지고 무너져 본성을 잃은 나라가 있었다 한들, 오늘날 붕당으로 인한 환난보다 더한 적은 없었다. 만일 이대로 나간다면 장차 어떠한 세상이 될 것인가. 한 모퉁이에 있는 총알만한 나라가 아무리 작다고 하지만 그래도 백성이 백만인데, 이들이 장차 그 본성을 모두 잃어 구제할 수가 없을 터이니 이 또한 슬픈 일이다.
그래서 장차 시골에 가서 살려면, 인심이 좋고 나쁨을 따질 것 없이 비록 건조하고 습(濕)한 것이 마땅치 않다 하더라도 같은 색목이 많이 모여서 사는 곳을 찾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서로 찾아가고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이 있고, 또한 학문을 연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사대부가 살지 않는 곳을 선택해서 두문불출하며 홀로 착하게 산다면, 비록 농사짓고 물건 만들고 장사를 한다 해도 즐거움이 그 안에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한다면 인심이 좋으니 나쁘니 할 것도 없다.
첫댓글 글 감사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