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 입학하기도 전이니까 거의 2년 쯤 전에 보려고 다운받아놨던 영화를 이제서야 봤다. 누군가 이 영화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을 보고 와, 이건 꼭 봐야겠다 싶어서 바로 구해놓고서도 2년이나 흘려보낸 셈이다. 게으르기 짝이 없다. 암튼간에 영화의 제목은 "The Lady". 나도 그랬지만, 제목만 보고서는 이게 뭐지, 할텐데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버마(현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아웅 산 수 치(Aung San Suu Kyi 1945~)이다. 버마 군부의 억압적인 통치 하에서 그녀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부를 수 없었던 버마 사람들은 그녀를 "The Lady"라고 불렀다고 한다. 2011년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2010년 11월 약 15 년 간의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그녀에게 바치는 영화이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부끄럽지만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나는 아웅 산 수 치에 대해서 별로 아는게 없다. 그녀의 아버지가 버마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영웅이었으며 그녀 역시 아버지를 따라 버마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는 것, 그리고 군부의 탄압으로 굉장히 긴 세월을 가택연금 생활을 했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현재 버마의 상황에 대해서도 역시 잘 모른다. 그러던 최근 우연히 아웅 산 수 치에 대한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그 뉴스의 내용은 여전히 버마에서는 군부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들에 의해 2008년에 만들어진 헌법 조항으로 인해 내년에 있을 대선에 아웅 산 수 치의 출마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어젯밤 뒤늦게 이 영화를 보게 된 것도 이 뉴스를 통해 내 컴퓨터 어딘가에 이 사람에 대한 영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웅 산 수 치의 대선 출마를 막고 있는 헌법 조항의 내용은 간단하다. "외국 국적의 배우자나 자녀를 둔 사람은 대선에 나설 수 없다"는 것. 아웅 산 수 치는 영국 국적의 남자와 결혼했으며 영국 국적의 두 아들이 있다. 이것이 헌법이 규정한 그녀가 대선에 나갈 수 없는 이유이다. 어떤가, 그럴듯한가? 재밌는건, 어젯밤에 내가 봤던 이 영화가 바로 아웅 산 수 치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그 아들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물론 아웅 산 수 치가 버마에서 민주화투쟁에 나서는 계기, 과정들을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이 영화에서 더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 특히 그녀의 남편인 마이클 에어리스 교수와의 관계이다. 심지어 어느 순간에는 영화의 주인공이 아웅 산 수 치가 아니라 그녀의 남편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1988년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버마에 입국하기 이전까지 아웅 산 수 치는 평범한 존재였다. 그녀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고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책을 쓰고 있었으며 영국인 학자 마이클 에어리스 교수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둔 평범한 아내이자 어머니였다. 버마에서 멀리 떨어진 영국에 살고 있었던 그녀는 어머니의 병 간호를 위해 입국한 1988년, 당시 버마에서 전국적으로 펼쳐진 민주화운동에 대한 군부의 폭력적인 진압을 목격하고 민주화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녀가 나서게 된 것은 그녀의 의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녀의 아버지의 존재가 그녀를 부른 것이기도 했다. 버마 독립 영웅의 딸로서 조국 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란 자리를 그녀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는 그녀가 이전에 누렸던 생활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때 그녀의 가족, 특히 그녀의 남편 마이클은 그녀의 투쟁을 응원하고 함께했다. 그녀가 버마를 위해 짊어진 짐은 그녀의 가족에게 있어 이전의 평온한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마이클은 그가 정말 사랑했던 아내, 수가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서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더 지나서는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그녀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사실상 그들의 어머니를 잃어야했다. 이는 그녀, 아웅 산 수 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아웅 산 수 치의 비하인드 스토리, 그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구보다 앞선에서 민주화투쟁을 이끌었으며 군부에 끝끝내 굴하지 않았던 그녀 역시 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한 여자였으며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눈물 흘리는 어머니였다는 것 말이다. "철의 난초(Iron Orchid)"라고 불렸던 누구보다 '강인한' 그녀 역시 우리와 같은 한 명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130분의 플레잉타임 동안 영화 속에서는 다양한 장면들이 등장한다. 그녀가 집회를 막기 위해 출동한 군대가 들이댄 총구 앞에서도 의연하게 홀로 그 사이를 돌파하는 모습. 그녀가 버마 민주화운동을 위해 버마 전국을 누비며 했던 연설들. 아웅 산 수치가 가택연금이 된 상태에서 치러졌던 1990년 총선에서 그녀가 이끄는 민주민족동맹의 대승. 그 이후 군부의 총선 불복과 더 강력해진 그녀와 그녀의 지지자들에 대한 대한 억압. 그녀를 돕기 위해 마이클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모습. 아웅 산 수 치가 가택연금이 된 상태에서도 그녀의 집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보이는 경이로운 태도. 아웅 산 수 치가 가택연금이 된 동안 노벨상 수상을 대신 수상한 그녀의 남편과 그녀의 아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갑작스런 정전 속에서도 끝내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캐논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장면까지.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장면은 누구보다 그녀를 응원했고 그녀가 의지했던 그녀의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 교수의 죽음일 것이다.
1998년 영국에 있던 마이클은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이미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은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이클은 그가 정말 사랑하는 그녀 아웅 산 수치에게 갈 수 없었다. 버마 군부는 마이클에게 끝끝내 비자를 내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웅 산 수치 역시 영국에 있는 그에게 갈 수 없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그를 보기 위해 영국으로 출국한다면 그녀는 다신 버마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와 그녀는 영국 대사관에서 그것마저 온전히 용인되지 않는 전화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서로를 간절히 원하지만 그도 그녀도 서로에게 갈 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약해지지 말 것을,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가 갖는 의미를 이해하며 그녀를 응원한다. 용기를 갖고 힘을 내라고. 그녀가 그래야할 이유는 충분하다면서. every reason. 1999년 3월 마이클은 세상을 뜬다. 끝끝내 그들은 만나지 못했다. 라디오를 통해 그 소식을 들고 쓰러져 통곡하는 수의 모습.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짐을 온전히 품으면서 그리고 온몸으로 절면서 나아가고 나아왔다.
영화를 보면서 많이도 울었다. 아마도 새벽에 맥주를 마시면서 봐서 그런지 영화에 이입이 완전히 되었었던 것 같다. 그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그녀를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실 나로서는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나는 신념을 위해 그녀처럼 무엇을 그렇게 온전히 포기해본 적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역시 그녀는 나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다는 이야기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 역시 맞는 말이다. 그녀는 나와 다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처럼, 이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것처럼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우리와 같은 한 명의 인간이란 점은 분명하다. 그녀가 온몸으로 절면서 내려놓은 것들, 사랑하는 남자와 두 아들 자신의 삶을 내려놓는 것은 그녀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 그녀를 계속 나아가게 만든 것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내려놓아야 할 바로 그 삶이었다. 그 삶은 그녀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응원하고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당신의 그 선택이 결코 우리를 내려놓는 것이 아님을 오히려 그것이 우리를 묶어놓는 것이라고.
얼마 전 아웅 산 수 치는 민주민족동맹이 올해 11월 총선에 참가할 것임을 밝혔다. 1990년 총선에서의 대승 이후 무려 25년 만에 총선에 참가하는 것이다. 수는 이 총선에서 승리한 후 헌법을 개정하고 내년에 있을 대선에 출마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얼마나 가능한 것인지 버마의 상황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역시 그녀답다고 해야할까.(영화를 통한 매우 소박한 이해지만-_-) 그녀가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이후부터 군부가 그녀에게 항상 강요했던 것은 항상 "가족과 조국 중에 선택하라."라는 것이었다. 가족을 선택하면 당신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나 그 힘든 시절에 그녀를 지탱해온 것은 그녀의 남편과 두 아들이 그녀에게 보내준 끝없는 사랑과 이해였다. 2008년의 헌법 개정 조항도 그간 군부가 그녀를 다뤄온 방식의 연장이라 봐도 무방하다. 가족과 조국 둘 중의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녀가 나아갈 수 있도록 그녀를 언제나 응원했던 이와 여전히 그녀를 응원하고 있는 두 아들이 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이것이 갖는 의미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녀는 누구보다 군부에 맞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먼 곳에서나마 그녀와 버마 민주화운동의 건투를 빈다. 그녀와 민주화운동 세력이 여전히 정권에 남아있는 군부 세력에게서 버마를 자유롭게 해방시킬 수 있기를 승리하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리고 내 생애 가능하다면 그녀를 꼭 한 번은 만나고 싶다. "The Lady"라는 말이 누구보다 어울리는 그녀에게 꼭 한 번 진심을 담아 감사합니다, (당신의 삶을) 언제나 응원하고 있습니다, 란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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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 수 치는 ‘미얀마’란 국가명을 거부하고 기존의 ‘버마’를 고수한다. 군부 정권이 국민과 상의도 없이 국가 이름을 바꿨기 때문이다. 미얀마와 버마라는 이름의 차이는 영어에서 나타나는 것일 뿐 현지어에서는 차이가 없다. 현재 미국과 영국, 캐나다, 프랑스 등은 여전히 버마란 이름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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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 하나 보고 주저리 쓴 것치곤 지나치게 길어 조금 부끄러운데 도서관에 검색해보니 아웅 산 수 치 평전 번역된 것이 있으니 조만간 도서관 연체(....)가 풀리면 꼭 한 번 빌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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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에서 그녀의 가족이 보여준 사랑과 이해, 응원을 일방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실은 그들 역시 그만큼의 희생을 감내했다는 것은 잊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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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경의 아웅 산 수치 연기는 정말 진심 최고다. 역시 대단한 배우.
첫댓글 이런분을 박근혜와 비교를.....아 부끄럽다...
아 그 2012년에 한국 방문했을때 나왔던 기사였죠. 비스게에서도 봤던 기억이 납니다. 진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어떻게 보면 이게 성차별이라고도 볼수 있습니다. 수치 여사와 박 대통령은 비슷하기는 커녕 정반대의 위치에 놓인 인물들이죠. 수치 여사는 대를 이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면서 탄압당했고, 박 대통령은 대를 이어 막대한 권력을 휘두른 인물이니까요. 이들의 공통점은 여성이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성이라는 공통점 하나와 수많은 차이점이 있는 두 인물을 동일선상에 묶는다는 것은 "이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여자라는 것"이라고 하는 거나 다를바 없죠. 박 대통령은 어찌됐거나 거물 정치인이고, 수치 여사는 민주화 영웅인데 "그냥 여자"라고 하는 거니까요.
여담이지만 박근혜의 당선이 민주주의 후퇴인 수많은 이유 중에 하나가
@maverick45 그겁니다. 보통 여자 대통령의 당선은 그 나라 여성인권, 즉 소수자의 인권이 강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 대통령이 나온다는 건 그만큼 그 나라의 민주주의가 건강하다는 증거죠. 근데 박근혜의 경우 정 반대입니다. 그를 뽑은건 노년 남성들이 절대적이었고, 오히려 여성들과 청년층은 압도적으로 문재인을 지지했습니다. 박근혜를 갖고 "여자 대통령" 마케팅하는게 웃기지도 않은게 그 이유죠. 그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앞세워 대통령이 된게 아니라 독재자의 딸이라는 걸로 대통령이 된 거니까요. 그나마 여성 정책이 진일보했다면 모를까, 그런것도 없죠. 박근혜는 여자대통령이 아닙니다. 여자인 대통령일 뿐이죠
@maverick45 22
@maverick45 여성은 박근혜지지가 많았을 겁니다. 가정주부와 무직층에서 박근혜가 압도했거든요. 출구조사결과도 남성이 문재인 여성이 박근혜 지지가 많았구요.
@calltax 아, 2,30대 여성이 문재인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던 건데, 제가 착각했네요 ^^;;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mbsIdx=1916713 2,30대 여성은 압도적으로 문제인, 40대 여성은 근소하게 문재인, 그리고 5,60대 이상 여성은 압도적으로 박근혜입니다. 아마 종합적으로는 성별 지지도는 비슷할 겁니다.
어찌됐건 여성 권리에 민감한 2~40대 여성층이 여성 후보가 아니라 남성후보를 더 많이 지지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점이죠.
절반쯤 읽다가 나머진 영화를 보고 나서 읽어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일단 접어둡니다.
좋은 소개글 감사합니다.
나중에 한 번 꼭 보셔요ㅎㅎ
저도 꼭 보고싶은 영화였는데 계속 미뤄두고 있었네요.수치 여사를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로 꼽아왔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 좋은 추천글 감사합니다
저도 정말 영화를 보고 나서 아웅산수치라는 사람에 대한 더욱 존경심이 생기더라구요. ^^
KBS1에서 해줘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더빙이었지만 괜찮았습니다
ㅎㅎ잘만든 영화같아요
뤽 베송 감독이 이런 영화도 만들었군요. 한번 찾아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