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에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달동네 집을 배경으로 멋진 대사 "여그는 세상 밑바닥인데 왜 이렇게 높은 데 있지"가 나오긴 하지만 박희수(정우)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파도 치는 바다를 배경으로 좌악 나오는데 그야말로 찰지다. 20초쯤 되는 것 같은데 '무슨 인생이 이렇게 쓸쓸하지' 이렇게 읊조린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뜨는데 '천명관 각본 감독'이란다. 무릎을 탁 치게 된다. 넷플릭스에 얼마 전에 올라온 영화 '뜨거운 피 구암의 사람들'이 시작할 때 고래 픽처스란 제작사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그 답이 맨 뒤에 나오는 셈이다. 소설가의 감독 데뷔작으로 2019년 부산과 경남의 여러 항구에서 촬영해 코로나 시국 등을 이유로 2022년 개봉, 40만 관중을 모았다. 평단이나 관객 평가 모두 미지근했다. 난삽하기 때문이다.
김언수 작가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옮겼는데 원작보다 형편 없이 못 만들었다는 리뷰를 봤다. 넷플릭스에 올라온 120분 분량의 작품보다 웨이브에 성인 인증을 하면 볼 수 있는 '뜨거운 피, 디 오리지널'을 보는 것이 좋겠다는 리뷰도 뒤늦게 봤다. 영화학도라면 두 편을 비교하며 상업 영화와 작가 영화의 차이점을 확인하며 공부하듯 보라는 권유도 있었다. 그냥 영화를 시간 때우는 개념으로 보는 이라면 '디 오리저널'을 보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겠다는 팁도 있었다.
전형적인 느와르 영화인데 대학 시절부터 하숙집과 자취집을 오가며 친하게 지내며 지금은 미국 뉴저지주에 살고 있는 절친이 부산고를 나온 양정동 출신이라 익숙한 부산 사투리를 무한정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전적으로 부산 영화다.
건질 만한 대사가 여럿이다. “내도 나이 마흔입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뭔가 해봐야지예”, “싸움은 망설이는 놈이 지는 기다”, "세상은 멋진 놈이 이기는 게 아니라 씨발 놈이 이기는 거다", “저 밑바닥 끝까지 떨어지거나 저 위로 올라가서 왕이 되거나! 니는 어디로 갈 거고?”에다 앞에 얘기한 희수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절정이다. 원작이 쪽수가 줄어드는 것을 안타까워할 정도로 재미있다는 리뷰가 적지 않아 구해 읽고 싶어졌다.
부산에 있는 가공의 포구 구암에서 '세금'을 걷을 정도로 절대적인 주인 행세를 하는 손 영감(김갑수) 아래 수족처럼 일해온 희수는 뭣 하나 이뤄낸 것 없이 싸구려 양아치 인생을 사는 것이 지겹기만 하다. 1993년 범죄와의 전쟁으로 거대 조직이 사라진 부산에서 북항 건설 계획을 미리 알아낸 영도파 건달들이 ‘구암’에 눈독을 들이는데 영도파 에이스이자 ‘희수’와 같은 모자원 출신인 철진(지승현)이 희수에게 은밀히 접근한다. 손 영감을 처리하고 영도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칼을 휘두르고 꽂고 그으며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밑바닥 건달들이 왜 건달이고, 양아치가 왜 양아치인지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신세계'가 약간 고급스럽다면 '뜨거운 피'는 지방 소멸의 대표 격이 된 부산의 날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는 처절하고 적나라한 양아치들의 세계관, 가치관에 천착한다. 그래서 그야말로 난삽하다. 이 얘기 저 얘기를 중구난방 식으로 펼쳐 보인다. 캐릭터도 일관되게 그려내지 못한다. 양동이(최무성)이 대표적이다. 영화 전반과 후반이 너무 다르게 그려진다. 그리고 뜬금없이 들이미는 문학적 내레이션이 뜨악하게 만든다. 감독이 작가연하는 것이라 짐작했다.
그런데 21분이 추가돼 141분이 된 '디 오리지널'을 보면 완전 다른 작품이란 인상을 받는 모양이다. 성인 인증을 하는 번거로움을 떨쳐내야 하는데 캐릭터들의 관계를 훨씬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음향이나 효과도 새롭게 해 훨씬 몰입도를 높인다고 한다.
난 이 작품을 보며 부모 없이 자라난 희수가 손 영감에게 아버지란 정 붙을 곳을 찾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한 이불 덮고 지내는' 인숙의 아들 아미(이홍내)에게 아버지인 것처럼 구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는 손 영감 얼굴을 베개로 눌러버리며 오열하는 장면이 앞에 얘기한 바다 내레이션 장면의 앞 장면이었다. '디 오리지널'은 물론 김언수의 원작 소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우와 김갑수, 최무성 등 '응답하라' 시리즈 등에서 익히 봐왔던 배우들의 연기가 빼어나다. 그리고 이홍내란 신인 배우의 펄떡이는 생명력이 압권이다.
'디 오리지널'을 보고 두 작품(!)을 비교하는 리뷰를 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