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청빛 컴퓨터 책상을 날라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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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시인 고은씨의 책상을 본 적이 있다. 아니, 책상‘들’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해야 하겠구나. 책상이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드넓은 그의 서재에는 책상 네 개가 여기저기 흩어져 놓여 있었다. 책상이 여러 개 필요한 이유를 묻자, 시인은,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시켜야 할 경우가 많은데, 그 경우 각각의 일에 대하여 전담 책상을 지정해 놓으면 일하기 편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예컨대 어느 월간지에 연재하는 월평(月評)은 창문 옆의 책상에서 쓴다. 물론 이 책상에는 집필 중인 월평 원고가 펼쳐진 그대로 놓여 있고, 이 작업에 필요한 관련 자료들은 이 책상 위나 그 주변에 쌓여 있다. 그리하여 다른 책상에 앉아 다른 일을 하다가도 이 책상 앞에 와 앉기만 하면 거의 즉시로 월평과 관련된 생각에 빠져 들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용의주도하다고 말해야 할까, 기발하다고 말해야 할까?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 준 후, 나는 약간 자조적으로, 책상을 여러 개 들여 놓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므로 그 대신에 가방이나 한 개 더 장만해야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실지로 그렇게 하였다. 새로 산 가방은 ‘월요 세미나’ 전용이 되었다. 당시에 나는 월요일 저녁마다 서울대학교에 가서 <근사록>(近思錄)을 공부하는 모임에 참석하고 오곤 하였는데, 그 모임에 갈 때는 항상 그 가방을 들었다. 스케일이 너무 작은가?
나와는 정반대로 스케일이 너무 커서 고은시인을 머쓱하게 만드는 친구도 있다. 나는 지난 주에 천식이의 평택 연구소 개소식에 다녀왔다. 천식이 연구소가 아주 넓고 거기에 책상이 아주 많았냐고? 그 정도가 아니다. 나는 지금 ‘스케일’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천식이의 연구소 혹은 연구실이 그렇게까지 넓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천식이가 ‘동북아 통상 연구소’ 혹은 ‘동북아 통상 포럼 부속 자료실’이라고 이름 붙인 그곳은 천식이가 구상하고 있는 여러 연구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천식이는 고은시인처럼 하나의 서재에 여러 개의 책상을 들여 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서재를 여러 개 지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 중에는 (가칭) ‘가산서당’(佳山書堂)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도 있다. 전주 쪽에 세워질 이 곳에서는 한시(漢詩) 등 문학 작품을 주로 연구할 계획이라고 한다. 대한남아(大韓男兒)라면, 스케일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개소식 날 천식이는 스케일 크게 소주 두 빡스에 맥주 두 빡스를 쌓아 놓고 있었다. 천식이 키에 육박하더라. 나는 스케일 작게 마른 안주라도 좀 내오라고 말했다. 천식이는 그런 것은 없다면서 에이스 크랙카와 과일을 내놓아 우리는 그것을 안주 삼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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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오늘 나에게 새 책상이 한 개 생겼다. 컴퓨터 책상이다. 컴퓨터 책상치고는 큰 편이고, 색깔은 주황색인데,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면, 토속적 주황색이라고나 할까, 단청색이라고나 할까? 매끈하게 에나멜이 입혀져 있다. 아주 견고하게 생겼다. 유리도 얹어져 있다. 새로 산 것은 아니다. 원래는 애들 엄마가 화장대 겸해서 쓰던 것이다. 4, 5년 전에 15만원 주고 샀다고 한다. 그런 물건인데, 지난 주에 안양의 아이들 집에 올라 가 보았더니, 집이 너무 좁아서 버리지 않을 수 없다면서 복도에 아무렇게나 내다 놓은 것이 보였다. 너무 아까왔다. 게다가 큰 아이는 책상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래서 꼬박 한 주 동안 내 마음을 빼앗았던 대형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삼례 집에서 내가 써 온 (작은) 컴퓨터 책상을 가져가서 안양의 큰 아이 방에 놓아주고, 그 대신에 안양의 그 물건을 삼례로 가져와 내가 쓰는 것이다. 꿩 먹고 알 먹는 좋은 방안이 아닌가? 문제는 운반이다.
내가 쓰던 작은 컴퓨터 책상을 안양으로 옮기는 일은 내 차를 이용하여 하였다. 아버지까지 나와서 도와주셨으니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것이 승용차 뒷 좌석에 들어가더라. 이상한 일이지만, 꺼내는 것이 더 어렵더군. 안양에 도착해서는 큰 아이와 더불어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끄집어내었다. 20분도 더 걸렸던 것 같다.
더 큰 문제는 안양의 컴퓨터 책상을 삼례로 가지고 오는 것이다. 처음에는, 미련하게시리, 그것을 다시 뒷좌석에 싣거나 트렁크에 실어 나르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 무거운 것을 1층까지 혼자 들고 내려와 자동차에 대보기까지 하였다. 물론 어림도 없었다. 이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경비아저씨가 다가와, 택배로 부치면 되지 않겠느냐고 충고를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 때부터 며칠 간 100통 이상 전화를 걸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우체국 택배, 한진 택배 등 대부분의 택배 회사는 가구를 아예 취급하지 않으며, KGB 택배는 가구를 취급하되 작은 컴퓨터 책상까지만 취급한다. 한편, 양재동 화물차 터미널 등을 통해 화물로 부치는 것은, 물론, 가능한데, 비용이 많이 든다. 삼례까지 10만원이며, 하루 재워서 다른 화물과 같이 운반하는 것도 8만원이다. 운반 비용이 그렇게까지 든다면 전주에서 다른 물건을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나 이 물건이 나와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더라. 경동 택배라는 곳이 있다. KGB 택배의 친절한 직원이 소개해 주어서 알게 되었는데, 경동 택배는 가구를 포함한 비교적 큰 물건도 택배 개념으로 처리해 준다고 한다. 내 물건의 경우, 비용은 4만원이었다. 합리적인 가격이지? 그런 탓인지 경동 택배는 엄청나게 바빠 보였다. 게다가 요즘은 쌀과 밤, 과일 등속이 많이 들어와 유별나게 바쁘다고 한다. 일은 자꾸 지연되었다. 얼마나 조바심이 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솟아오르는 짜증을 꾹꾹 누르면서 경동 택배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러더니 결국 물건을 수거해 가주었는데, 수거해 간 바로 그 다음 날, 그것도 아침 9시에 배달을 해 주었다. 그것이 바로 오늘(11/1, 목요일) 아침이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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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의 협소한 스케일만 다시 한번 노출시킨 셈인가? 상관없다. 꿩 먹고 알 먹고 한 것 아닌가? 안양의 큰 아이 방 침대 옆에 끼어들어간 작은 컴퓨터 책상을 보고도 나는 아주 기뻤다. 예로부터, 자기 아이 글 읽는 소리보다 듣기 좋은 소리는 없다고 하지 않는가? 당초에는 그 쪽이, 즉 아이에게 책상을 마련해 주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털어놓건대, 어쩌다 보니 이 쪽이, 즉 내가 쓰기 위해 좋은 책상을 운반해 오는 것이 주목적처럼 되어 버렸다.
책상 욕심을 내는 것, 그리하여 꼬박 일 주일 동안이나 책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 ㅡ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보아야 하겠지? <근사록>에는, 정이천(程伊川)이라는 학자가 널빤지 하나에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다고 고백하면서 반성하는 일화가 실려 있다. 그러나 나는 나를 한번 봐주기로 했다. 게다가 내 경우에는 그 물건이 바로 책상 아닌가?
이제 이 컴퓨터 책상은 삼례의 내 방에 들어 와 기존의 일반 책상 옆 자리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기존의 책상이 텃세를 부리지 않으려나? 텃세를 부릴 만도 하다. 그 책상은 동서가구에서 산 것으로, 내가 결혼하여 분가하면서 들여놓은 것이니 나와의 인연이 26년도 더된다. 결혼 전에는 그 시절 학생들이 흔히 쓰던 철재 책상을 사용하였다. 이 철재 책상은 중고등학교 때 들여 온 것이다. 그러니 이것도 10년 넘게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목재 앉은뱅이 책상을 썼다. 그 책상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비록 앉은뱅이 책상이었지만, 초등학생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아주 큰 것이었다. 좌, 우 양 쪽으로 서랍 ㅡ 그 때 우리는 ‘빼닫이’라고 불렀지만 ㅡ 이 달려있었으니까. 아버지가 목공소에 가셔서 특별한 목재를 선택해 특별히 짜게 하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나에게 온 단청빛 컴퓨터 책상은 이러한 책상들의 계보를 잇는 것이구나.
이 쪽에서 보아도 마음에 들고, 저 쪽에서 보아도 마음에 든다. 서서 보아도 마음에 들고, 앉아서 보아도 마음에 들고, 그리고 누워서 보아도 마음에 든다. 책상이 날더러, 빨리 일어나 자기 앞에 와 앉아서 좋은 글 좀 써보라고 재촉을 한다. 내가 빙그레 웃으며 그대로 드러누워있자, 조바심이 나는지, 좋은 글이 아니래도 괜찮으니 뭐든 빨리 좀 써 보라고 통 사정을 한다.
첫댓글 으아 소주 두 빡스에 맥주 두 빡스라..원천식이 스케일이 크긴 크네...근데 우리 영태 교수님은 그 작은 콤퓨터 책상을 이리저리 여러 체위에서 처다보아도 그렇게 좋으실까??....... ㅋㅋ 내 아무리 생각해도 조영태는 교수다~~
멋진 책상을 얻었으니 앞으론 영태교수님의 멋진글 더 많이 볼 수 있겠는걸? ^^*
영태 교수의 글을 읽으니, 학준 거사의 표현대로 "교수는 교수"임을 느끼게 된다. 근데~ 아주 근데~ 천식이와 더불어 영태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 훌륭한 학문적 추구와 노력에 따른 업적도 건강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목사라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술은 될 수 있는대로 절제하시라. 앞으로 할 일이 많을텐데, 건강해야 할 것이다.
이크 목사님한테 딱 걸렸네. 학준, 창연, 말 좀 해줘, 나 그렇게 술 많이 못 먹는다고. 천식이도 별 것 없어. 일부 몰지각한 선수들은 포장마차에 가서 더 마셨지만, 나는 얌전하게 자고 다음 날 제 시간에 일어나 운전하고 안양으로 올라왔네. 뒷 좌석에 바로 그 컴퓨터 책상 싣고 말이야. 조수석에는 광식군을 모시고. 광식이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들었어, 신앙 이야기도 듣고.
오해하지 마시게나.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나보다 젊은 사람인데 암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다네, 이제 우리 모두 건강에 좀 더 신경써야 할 때라 싶은 생각이 "소주 두 박스.,, 운운"하는 문장을 읽을 때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라네. 내가 영태 교수는 절제있게 마신다는 것은 알지. 천식이에 대해서는 아직 보질 못해서 모르겠고... 훌륭한 동창 학자들의 연구와 학문발전에 큰 기대를 하고 싶기 때문이라네. 건승을 비네.
Computer desk + 단청빛 이라는 어울릴질 것 같은 두단어가 믹스되니 더욱 그 모습이 궁금하다. 그런데 무식이 통통 튀긴다고 또 학준이가 구박할 지 모르지만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지... 단청빛이라면 어떤 빛.. 어떤 색깔인지 언뜻 떠오르지 않네... 단청에 칠해진 붉은 빛인가..?...
'붉을 단에, 푸를 청'이라는 것은 알았으면서도, 나는 단청이라고 하면 그냥 붉은 색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기모 덕분에 찾아 보았더니, 단청은 붉고, 푸르고, 녹색에, 검은 색까지 다 포함하는 구나. 내 컴퓨터는 그냥 붉은 색이기만 하네. 기모야, 단청은 절이나 고궁 건물에 칠해진 무늬를 말하는 거야.
사실, 나도 술을 절제하지 못해. 주량은 얼마 되지 않아도. 그래서 분위기에 취해 오바하곤 하고, 또 후회하곤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