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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게네프 - 전날 밤 (On the Eve) 1~5
전날 밤 on the Eve (Накану́не, Nakanune 1860)
이반 투르게네프 (Ivan Sergeevich Turgenev, 1818-1883)
1.
1853년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쿤초보(Kuntsovo)에서 멀지 않은 모스크바 강의 커다란 보리수 그늘 아래의 풀밭에 두 젊은이가 누워 있었다. 한 사람은 스물 세 살쯤 되어 보이며, 키가 크고 얼굴이 가무잡잡했다. 약간 구부러진 뾰족한 코에 잘생긴 이마, 그리고 두툼한 입술 언저리에 신중한 미소가 감돌고 있는 그는, 드러누워 깊은 생각에 잠겨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지 않은 잿빛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다른 한 사람은 두 손으로 금발 고수머리를 괸 채 엎드려 있었는데, 그 역시 어딘가 먼 곳으로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 친구보다 나이가 세 살이나 더 많았지만 훨씬 어려 보였다. 콧수염은 겨우 돋기 시작했고, 턱에는 솜털이 보송보송 나 있었다. 둥근 얼굴에 생기 있는 표정, 부드러운 갈색 눈, 아름답고 선명한 입술과 흰 손에서는 어린애 같은 귀여움이,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끄는 우아함이 엿보였다. 그의 몸 전체가 건강이 가져다주는 행복과 쾌활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젊음이 갖는 무사태평함과, 자신만만하여 버릇없는, 그리고 매력적인 기운이 넘쳐 있었다. 그는 두 눈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미소를 띠기도 하며, 또 팔로 머리를 괴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기를 기꺼워한다는 것을 아는 소년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블라우스 같은 헐렁한 흰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그의 가느다란 목에는 하늘색 스카프가 감겨 있었고, 그의 곁 풀밭에는 찌그러진 밀짚모자가 뒹굴고 있었다.
그에 비해 그의 친구는 나이가 훨씬 들어 보였다. 그의 울퉁불퉁한 얼굴을 보면서, 그가 지금 즐기고 있고 그의 마음이 편안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불편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위로는 넓고 아래로는 좁은 커다란 머리통이 기다란 목에 거북살스럽게 붙어 있었다. 바로 그의 팔의 자세에서, 짤막한 검정 플록 코트가 꼭 끼는 그의 몸통에서, 그리고 잠자리 뒷다리처럼 무릎을 세운 긴 다리의 자세에서도 그런 거북함은 드러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직’하다는 인상이 그의 둔한 몸집 전체에서 풍겨 나왔다. 그리고 잘생기지 않은, 조금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그의 얼굴은 사색하는 습관을, 또 선량함을 나타냈다. 그의 이름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베르셰네프(Andrei Petrovitch Bersenyev)였고, 그의 친구인 금발 청년은 파벨 야코블레비치 슈빈(Pavel Yakovlitch Shubin)였다.
“왜 자넨 나처럼 엎드리지 않나?”
슈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러는 게 훨씬 좋아. 특히 다리를 들어 발뒤꿈치를 서로 부딪치면, 이렇게 말이야, 바로 코 밑이 풀밭이니까, 경치를 바라보는 데 싫증이나면 풀잎 위를 기어다니는 올챙이 배를 한 장수풍뎅이를 보거나, 아니면 분주한 개미를 봐. 정말 그게 나아. 그렇게 되면, 자넨 고전적인 느낌이 드는 포즈를 취하게 되는 걸세. 발레리나가 마분지로 만든 바위에 팔꿈치를 기대는 포즈 그대로지. 자네는 지금 휴식할 충분한 권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농담이 아닐세. 쉬십시오, 나리. 긴장을 푸시고, 팔다리를 쭉 뻗고 말입니다!”
슈빈은 이 말들을 반쯤은 권태롭고 반쯤은 농담조의 코맹맹이 소리로 했다(장난꾸러기들이 과자를 가져온 친구들한테 그렇게 얘기하듯). 그리고는 대답을 기다릴 사이도 없이 말을 계속했다.
“개미니, 딱정벌레니, 다른 여러 곤충들에게서 내가 특히 감동한 것은 그들의 놀랄 만한 성실성이야. 그들은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뛰고 있지. 마치 그들의 생명도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듯이! 창조주이자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그들을 쳐다보는데, 그들은 인간을 쳐다볼 시간조차 없다는 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더욱 심한 것은 아마 어떤 파리가 창조주의 콧잔등에 앉아 그걸 먹이로 삼는다는 것일 걸. 이건 모욕이지.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보다 못한 게 뭐가 있겠나? 만일 우리가 우쭐해도 좋다면, 그들은 어째서 잘난 체하면 안 되는가? 자, 철학가 선생, 내게 이 문제 좀 풀어 주겠나! 왜 가만 있나, 응?”
“뭐라고 했지?” 베르셰네프가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듯 말했다.
“뭐라고 했느냐고!” 하고 슈빈이 되받았다. “자네 친구가 자네 앞에서 심오한 사상을 피력하는데 듣지도 않고 있었단 말이지.”
“난 경치에 넋을 잃고 있었네. 저 들판들이 햇볕에 뜨겁게 타오르는 걸 좀 보게나!” 베르셰네프는 약간 혀 짧은 소리를 냈다. “굉장한 색채가 일렁거리고 있군.”
슈빈이 말했다.
“자네를 위한 자연이지!”
베르셰네프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것들엔 나보다 자네가 더 감동을 받아야지. 이건 자네 분야이니까. 자넨 예술가잖아.”
“아닐세. 이건 내 분야가 아니야.” 슈빈은 이의를 말하면서 모자를 뒤통수에 얹었다. “난 백정이야.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살, 살을 찧어 어깨며 다리며 팔이며를 만드는 거지. 여기엔 형체도 없고 완성도 없어. 사방으로 흩어져‥‥가서 붙잡으라구!”
“하지만 거기에도 앎다움은 있잖아.” 베르셰네프가 말했다. “그런데 자네, 그 양각은 끝냈나?”
“무슨?”
“어린애와 산양 말이야.”
“제기랄! 빌어먹을! 말도 말아!” 슈빈이 노래라도 부르듯 소리쳤다. “실물도 보았고, 노대가들의 작품이나 고대 미술품도 보았어. 그래서 내 졸작은 때려부숴 버렸지. 자넨 내게 자연을 가리키면서 ‘저기에도 아름다움이 있어.’라고 말했지. 물론, 어느 것에나 아름다움은 있어. 자네 코에조차 아름다움은 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모든 아름다움을 다 쫓을 수는 없어. 노대가들, 그들은 아름다움의 뒤를 쫓지 않아. 아름다움이 스스로 그들 창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어디서 왔는지는 신만이 알지. 하늘에서 내려왔는지도 몰라. 온 세상이 그들의 것이었으니까, 너무나 넓어 우린 펼칠 수가 없어. 팔이 짧거든. 우리는 한 지점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가만히 기다리는 거지. 걸리면 좋은 거구! 하지만 걸리지 않으면‥‥”
슈빈이 혀를 쑥 내밀었다.
베르셰네프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건 역설이야. 만일 자네가 아름다움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만나든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아름다움은 자네에게도 또 자네 예술에도 아무것도 주지 못해. 만일 아름다운 경치가, 감미로운 음악이 자네 가슴에 아무런 이야기도 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만일 자네가 그것들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말이야‥‥”
“오, 공감자 선생!” 슈빈이 새로 지어 낸 말로 빈정거리고 웃기 시작했지만 베르셰네프는 생각에 잠겼다.
“아니네, 여보게.” 하며 슈빈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넨 수재야. 철학가고, 모스크바 대학을 삼등으로 졸업한 학사지. 자네와 논쟁을 한다는 건 두려운 일이야. 특히 대학을 중퇴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러나 나는 자네에게 이런 말은 할 수가 있어. 내 예술 외에도 나는 여인의 아름다움만은 사랑한다고.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 말이야. 하긴 이런 일도 불과 얼마 전부터의 일이지만‥‥”
그는 몸을 뒤집어 두 손으로 뒤통수에 깍지를 끼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몹시도 뜨거운 정오의 정적이 졸린 듯한 빛나는 대지 위에 깔리고 있었다.
“여자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나 말이지만.” 다시금 슈빈이 말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아무도 그 스타호프 영감을 손아귀에 넣지 못하는 거지? 자네, 그 영감을 모스크바에서 만나본 적이 있나?”
“아니.”
“그 영감쟁이 아주 정신이 나갔나 봐. 온종일 아브구스치나 흐리스치아노브나(Augustina Christianovna) 곁에 앉아 있어. 지독히 사모하나 보지. 그냥 앉아 있기만 할뿐이야. 서로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니까, 바보같이‥‥쳐다보기도 싫어. 한 번 생각해 보게나!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게 얼마나 훌륭한 가정을 내려 주셨나. 아니야, 아브구스치나 흐리스치아노브나가 있어야 돼. 그 여자의 오리처럼 생긴 낯짝보다 더 꼴보기 싫은 건 없다니깐! 얼마 전엔 그녀의 웃는 얼굴을 조각했었지. 단탄(Dantan)식으로. 그리 나쁘진 않더군. 내 보여 줄게.”
“그런데 옐레나 니콜라예브나(Elena Nikolaevna)의 반신상은 잘 되어 가고 있나?” 베르셰네프가 물었다.
“아니, 여보게, 잘 되고 있지 않아. 그 얼굴을 보면 실망하게 될 걸세. 언뜻 보면 깨끗하고 엄격한 직선이라 유사점을 포착하기가 어렵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게 영 쉽지가 않아서‥‥손 안에 든 보물처럼 빠져나간단 말이야. 자네 그 여자가 귀기울여 듣는 걸 본 적이 있나? 얼굴에는 전혀 변화가 없고 눈의 표정만이 끊임없이 변하는데, 이 때문에 얼굴 표정 전체가 변하지. 이런 경우 자넨 조각가에게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겠나? 그것도 훌륭하지 못한 조각가에게 말이야. 놀라운 사람‥‥무서운 사람이야.” 하고 그는 잠시 쉬었다가 덧붙였다.
“그래. 그녀는 놀라운 처녀지.” 베르셰네프가 그의 말을 받아 되뇌었다.
“그런데 그녀가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스타호프(Nikolai Artemyevitch Stahov)의 딸이라니! 이런 판에 혈통이니 가계니 따지겠나. 우스운 것은 그녀가 바로 그의 딸이며 그를 닮았는데다, 어머니 안나 바실리예브나(Anna Vassilyevna)도 닮았다는 거야. 난 안나 바실리예브나를 진심으로 존경하지. 그녀는 나의 은인이니까. 하지만 그 여잔 암탉에 불과해. 옐레나의 그런 영혼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누가 그 불꽃에 불을 붙였을까? 자, 여기에 또 자네 숙제가 있군, 철학가!”
그러나 철학가는 조금 전처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베르셰네프는 전혀 수다스러운 편이 못되었다. 그리고 그가 말이라도 할라치면, 쓸데없는 손짓까지 해 가며 어색하게 더듬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특별한 적막감이 그의 마음에 찾아든 것이었다. 피로감 같기도 하고 우울 같기도 한 적막감이. 그는 하루에 몇 시간씩이나 빼앗긴 장기간의 어려운 연구를 끝내고 시외로 옮겨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무위의 생활, 부드럽고 깨끗한 공기, 목적을 달성했다는 의식, 친구와의 두서없는 이런저런 이야기들, 갑자기 떠오르는 정다운 사람의 모습, 이 각각 다르고 동시에 왠지 유사한 인상들이 그의 마음 속에서 한 가지 공통된 감정으로 용해되어 그를 안심시켜 주기도 하고, 흥분시키기도 하며, 또 힘이 빠지게도 했다‥‥ 그는 신경이 몹시 예민한 청년이었다.
보리수 밑은 시원하고 조용했다. 그 그늘 주위로 날아든 파리와 벌들도 좀 덜 시끄럽게 윙윙거리는 듯했다. 금빛 광택을 발하지 않는 에메랄드 빛의 깨끗하고 가려진 풀잎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길다란 줄기들이 마술에라도 걸린 듯, 서 있는 것이었다. 보리수의 낮은 가지에는 작고 노란 꽃송이가 역시 마술에라도 걸린 듯 가만히 매달려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달콤한 향기가 가슴 저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으며, 또 가슴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강 건너 멀리 지평선에는 모든 것이 빤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간혹 가다 미풍이 불면 그 반짝임은 부스러졌다가는 다시 더 심해지는 것이었다. 땅 위에선 눈부신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아른거리고 있었다. 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새들도 한낮의 폭염 속에선 노래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메뚜기들이 사방에서 울어대고 있었는데, 시원한 곳에 편안하게 앉아서 그처럼 열렬한 생명의 소리를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고 있노라면, 졸음이 찾아들고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어떤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에 주의해본 적이 있나?” 손짓으로 자신의 말을 보충해 가며 베르셰네프가 불쑥 말을 꺼냈다. “자연 속에서는 모든 게 너무나 완전하고 분명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너무 자기 만족에 취해 있단 말이지. 우리는 그걸 알고 있고 또 그걸 즐기기도 하지. 동시에 자연은, 적어도 내게는 늘 어떤 불안감을, 공포를, 그리고 슬픔까지도 불러일으켜. 이건 무슨 의미지? 우리가 자연 앞에 섰을 때, 자연과 직면했을 때 우리의 불안전함을, 우리의 불분명함을 더욱 강하게 의식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자연을 만족시키는 그 만족감만으론 우리에게 불충분하고, 다른 것, 즉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 우리가 자연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원하기 때문인가?”
“흠, 내가 말해 주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이야.” 하고 슈빈이 말했다. “자네가 말한 것은, 살아 있지는 않으나 바라보기만 하면서 망연자실해지는 외로운 인간의 느낌일세. 바라만 보았자 무얼 하나? 사나이다운 생활을 해야지. 자네가 아무리 여러 번 자연의 문을 두드려도 자연은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네. 자연은 벙어리거든. 현처럼 소리를 내며 울기는 하겠지만, 노래는 기대하지 말게나, 살아 있는 영혼, 그것이 응답을 하지, 주로 여자의 영혼이. 나의 고결한 친구여, 내가 자네에게 진정한 여자 친구를 구하라고 충고하는 건 이 때문일세. 그러면 자네의 우울한 감정들은 죄다 사라질 거야. 자네가 말한 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걸세. 그 불안감이니 슬픔이니 하는 건 일종의 굶주림일 뿐이지. 위에 진짜 음식물을 주어 보게. 그럼 금방 만사가 형통하리니. 여보게나, 자네의 자리를 공간에다 마련하게. 육체로 말일세. 대체 자연이 무엇이며,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자네, 들어보게. 사랑‥‥이 얼마나 강렬하고 뜨거운 말인가! 자연‥‥이 얼마나 차갑고 교과서적인 표현인가! 그러니까(슈빈은 노래라도 부르는 듯했다) ‘마리야 페트로브나((Marya Petrovna) 만세!’ 아니지.” 하고 그가 덧붙였다. “마리야 페트로브나가 아니지, 아무렴 어떨까! 내 말을 알아듣겠지?”
베르셰네프는 몸을 반쯤 일으키고 두 손을 포개어 턱을 받쳤다.
“왜 비웃는 건가?” 그는 자기 친구 쪽을 보지 않으면서 말했다. “어째서 조롱하는 거야? 그래 자네가 옳아. 사랑은 위대한 언어이고 위대한 감정이지. 하지만 자네가 이야기하는 것은 대체 어떤 종류의 사랑인가?”
슈빈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냐고? 어떤 것이든 상관없네. 단지 사랑이기만하면 돼. 자네에게 고백하겠는데, 내 생각으로는 말이야, 사랑의 종류는 결코 다양하지 않아. 만일 자네가 사랑을 한다면‥‥”
“진심으로 말이지.” 베르셰네프가 말을 받았다.
“그럼 물론이지. 마음은 사과가 아니니까 그걸 쪼갤 순 없어. 만일 자네가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잘못될 리가 없지. 난 비웃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네. 지금 내 마음은 부드럽기 그지없어. 너무 평온해. 단지 내가 설명하고 싶은 건 어째서 자네가 자연이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해서일 뿐이야. 그건 자연은 우리에게 사랑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면서도 그런 걸 만족시킬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지. 자연은 우리를 다른 활기 있는 품 안으로 가만히 몰아내 주지만, 우리는 그걸 알지 못한 채 자연 자체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거지. 아, 안드레이, 안드레이, 이 태양, 이 하늘,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 주위의 것 모두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데도 자넨 비관만 하고 있다니. 하지만 만일 이 순간 자네가 사랑하는 여인의 손을 잡고 있다면, 만일 그 손과 그 여자가 온통 자네 것이라면, 또 만일 그녀의 눈길과 마주친다면, 안드레이, 자연은 자네에게 슬픔도 걱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걸세. 자넨 자연의 아름다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자연은 기뻐하며 노래를 부를 테고, 자네의 찬가를 따라 부를 거란 말이야. 왜냐 하면 자네가 자연에게, 말 못하는 자연에게 혀를 넣어 주었으니까!”
슈빈은 벌떡 일어나더니 왔다갔다 했다. 베르셰네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난 자네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하지 않네.” 하고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항상 자연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건 아니거든, 사랑을(그는 이 단어를 금방 내뱉지 않았다). 자연은 또한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 자연은 무시무시한, 그래, 불가사의한 신비를 기억하게 해. 자연은 우리를 지어 삼키지 않으면 안 되기라도 하듯 끊임없이 우릴 집어삼키고 있지 않은가 말일세. 자연 속에는 생명도 있고 죽음도 있지. 죽음도 자연 속에서는 생명만큼이나 그렇게 우렁차게 말하고 있는 거야.”
“사람에게도 생명과 죽음이 있지.” 하고 슈빈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니까요.” 베르셰네프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예를 들자면, 내가 봄날 숲 속에, 푸르름이 무르익은 곳에 서 있을 때, 내게 오벨론(Oberon)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요정
의 로맨틱한 뿔피리 소리가 들려온다면(베르셰네프는 이 말을 할 때 약간 수줍은 듯했다) 정말 그것은‥‥”
“사랑에 대한 갈증, 행복에 대한 갈망,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슈빈이 말을 가로챘다. “나는 그런 소리를 알아. 깊은 숲 속의 그늘 밑이나, 저녁 무렵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수풀 너머 강 위로 안개가 서려올 때, 황량한 들판에서 마음에 찾아드는 감동과 기대감을 나도 안다구. 하지만 숲에서도, 강에서도, 대지에서도, 하늘에서도, 한 점의 구름에서도, 풀 한 포기에서도 난 행복을 기대해. 행복을 원해. 난 모든 것에서 행복이 다가옴을 느끼고, 그것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네! ‘나의 신은 광명과 환희의 신.’ 난 이렇게 시 한 수를 읊은 적도 있지. 고백하겠는데, 첫 구절은 훌륭했지만, 둘째 번 구절을 이을 수가 없었어. 행복! 목숨이 이어지는 한, 팔다리를 움직일 힘이 있는 한, 우리가 산을 오를 수 있는 한은 행복이지! 제기랄!”
슈빈은 갑작스레 발작하듯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젊어. 불구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야. 우린 행복을 손아귀에 쥐어야 한다구!”
그는 고수머리를 흔들면서 자신만만하게, 거의 도전이라도 하듯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베르셰네프는 그를 향해 눈을 들었다.
“행복보다 나은 건 없는 것일까?” 그가 가만히 말했다.
“예를 든다면?”
슈빈은 물으면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래. 자, 예를 들어 나와 자네는, 자네가 얘기한 대로, 젊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가정해 보세. 우리는 둘 다 자신의 행복을 원하지. 그런데 ‘행복’이라는 이 말은 우리들을 함께 묶고 고무시켜 서로 손을 맞잡게 하는 것일까? 이기적인 말은 아닐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것이 이간시키는 말은 아닐까 하는 거야.”
“그러면 자넨 결합시키는 그런 말들을 알고 있나?”
“그럼, 그런 말들도 적지 않지.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
“그래? 어떤 말들인데?”
“예술이라는 말이 있지, 자넨 예술가니까. 조국, 과학, 자유, 정의.”
“사랑은?” 슈빈이 물었다.
“사랑도 결합시키는 말이지. 하지만 지금 자네가 갈망하는 그런 사랑은 아니야. 쾌락적인 사랑이 아니라, 희생적인 사랑을 말하는 거네.”
슈빈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건 독일 사람들에게나 가당한 일이지. 난 나 자신을 위해 사랑하고 싶어. 첫째가 되고 싶은 거야.”
“첫째로.” 하고 베르셰네프가 되뇌었다. “하지만 자신을 둘째에 놓는 게 우리 인생의 직분이지.”
“만일 모두 자네의 충고대로 행동하게 된다면.” 슈빈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땅 위의 그 누구도 파인애플을 먹지 않을 걸. 모두들 다른 사람더러 먹으라고 남겨 둘 테니까.”
“글쎄, 파인애플은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게 아니니까. 어쨌든 걱정할건 없네. 남의 입에 든 빵도 빼앗아 먹는 자는 항상 있는 법이니까.”
두 친구는 입을 다물었다.
“며칠 전 인사로프(Insarov)를 다시 만났어.” 베르셰네프가 말했다. “우리 집에 초대를 했지. 난 꼭 그와 자네가 만나 봤으면 싶어‥‥그리고 스타호프(Stahov) 일가와도.”
“인사로프가 누군데? 아, 그래, 자네가 내게 얘기했던 세르비아 사람인지 불가리아 사람인지 하는 친구 말이군? 그 애국자? 이 모든 철학적인 생각을 자네한테 넣어 준 사람이 그 사람 아닌가?”
“아마도.”
“그 사람 범상하지 않은 인물이겠군, 그렇지?”
“그래.”
“현명한가? 재주가 비상한가?”
“현명하냐구?‥‥그럼. 재주가 비상하냐구? 모르겠어, 아닐 거야.”
“아니라구? 그럼. 뭐가 대단하지?”
“그건 자네가 만나 보면 알 테지. 자, 이젠 우리가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됐다고 생각하는데.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차를 준비하고 있을 걸세. 몇 시나 됐나?”
“두 시. 가세. 너무 후텁지근하군! 이런 대화는 내 피를 끓어오르게 해. 자네도 이런 때가 있었지. 난 전혀 쓸모없는 예술가는 아니야. 다 눈치챘다구. 고백하게나, 마음에 둔 여자가 있지?”
슈빈이 베르셰네프의 얼굴을 쳐다보려고 했으나 그는 얼굴을 돌리고 보리수 그늘 밑을 나섰다. 슈빈은 조그만 두 발을 우아하게 떼어 놓으면서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베르셰네프는 발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어깨를 추어 올리고 목을 쑥 뽑고서 느릿느릿 걸어갔다. 그러나 그것이 슈빈보다 그가 더 지체 높은 가문 출신임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만일 이 말이 우리에게 제대로의 의미를 가진다면, 그가 더욱 신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투르게네프의 ' 전날 밤 on the Eve (Накану́не, Nakanune 1860)
2
두 젊은이는 모스크바 강가로 내려가, 그 기슭을 따라 걸었다. 강 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찰랑거리는 잔물결 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목욕이라도 했으면.” 슈빈이 말했다. “그렇지만 늦을까 봐 걱정이 되는걸. 저 강 좀 보게. 우릴 손짓하는 것만 같지. 고대 그리스 인들은 저기서 요정을 보았을 거야.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 인이 아니야. 오! 요정이여! 우린 감각이 둔한 스키타이인이라구.”
“우리에겐 루살카
가 있지 않나?” 베르셰네프가 지적했다.
“자네나 루살카한테 가게! 그러나 나 같은 조각가에게 칠흑 같은 겨울밤, 숨이 턱턱 막히는 오두막에서 생겨난, 겁에 질리고 싸늘하기 짝이없는 환상의 산물인 루살카 같은 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내게 필요한건 광선, 공간, 이런 거라네. 하느님, 전 언제 이탈리아로 가게 되는 겁니까? 언제나‥‥”
“언제 우크라이나로 가게 되느냐는 말이렷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자네는 나의 경솔한 어리석음을 책망하려 드는데, 그건 자네 수치일 뿐이야. 그렇잖아도 내가 이처럼 뼈아프게 뉘우치고 있는데 말이야. 하긴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지. 너무도 착한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이탈리아 여행을 할 돈을 주었는데도, 난 우크라이나 사람들한테로 가 경단이나 얻어 먹고 있었으니, 그리고‥‥”
“제발, 그만 하게나.” 베르셰네프가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네, 다 말해 버리겠네. 그 돈을 쓸데없이 허비해 버린 건 아니니까. 거기서 훌륭한 유형들을 보았거든, 특히 여자들을‥‥ 물론, 나도 알고 있어. 이탈리아 이외에는 구제란 있을 수 없다는 걸!”
“자네가 이탈리아로 간다고 한들 별 수가 있겠나?” 베르셰네프는 그를 돌아다보지도 않으면서 말했다. “자네가 아무리 활개짓을 해도 날지는 못해. 우리가 자네를 모르겠나!”
“스타바세르(Stavasse)는 날았지 않은가. 그리고 날은 사람은 스타바세르뿐만이 아니지. 하지만 난 날지 않을 거야. 날개 없는 펭귄새니까. 나는 이 고장에서 숨이 막힐 지경이야. 이탈리아로 가고 싶어. 거기엔 태양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하고 슈빈은 말을 이었다.
그 때,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장미빛 파라솔을 어깨에 받친 한 처녀가, 이들 두 친구가 내려가고 있는 오솔길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어, 저게 누구야? 여기서도 저런 미인이 우릴 맞으러 오다니! 매력적인 조야(Zoya) 아가씨에게 비천한 예술가가 삼가 인사를 드리나이다!” 슈빈이 모자를 연극조로 흔들어대면서 느닷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 외침 소리에 처녀는 걸음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위협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녀는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자 은방울이 구르는 듯한 약간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두 분께서는 점심 식사를 하러 오시지 않는 거죠? 식사 준비가 다 되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슈빈이 짐짓 깜짝 놀란 척 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매혹적인 조야 아가씨께서 이 뙤약볕에 우리를 찾아 나설 결심을 했다? 이 의미심장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아니, 잠자코 계시는 편이 더 좋겠지요. 순식간에 후회가 날 죽여 버릴 테니까.”
“아휴, 그만두세요, 파벨 야코블레비치.” 하고 처녀가 반박했는데, 별로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어째 당신은 나한테 한 번도 진지한 얘기를 하지 않는 거죠? 약이 올라 죽겠어요.”
그녀는 애교 있게 살짝 찡그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나의 이상이신 조야 니키치시나(Zoya Nikitishna)께서 나한테 화를 내다니요. 날 암울한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싶은 건 아니시겠죠. 난 진지한 이야기를 할 줄 모른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진지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처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베르셰네프 쪽으로 돌아섰다.
“이 분은 항상 이런다니까. 날 어린애 취급을 한단 말이야. 벌써 열여덟 살이란 말이에요. 이젠 어른이 다 되었다구요.”
“오, 맙소사!” 슈빈은 신음하듯 눈동자를 아래위로 굴리며 말했다.
베르셰네프는 잠자코 웃기만 했다.
처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파벨 야코블레비치! 나 그럼 화낼 거예요! 옐레나도 나와 같이 오다가 정원에 남았어요.” 하고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뙤약볕이 무섭대요. 그렇지만 난 뙤약볕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아요. 자, 가요.”
그녀가 오솔길을 앞장서 내려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호리호리한 몸집을 약간씩 흔들며, 검은 장갑을 낀 매끈한 손으로 부드러운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곤 하면서.
두 친구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슈빈은 두 손으로 조용히 가슴을 누르기도 하고 머리를 위로 쳐들기도 하였다). 이윽고 그들은 쿤초보 부근에 있는 수많은 별장 가운데 한 집에 다다랐다. 장미빛 페인트칠을 한 조그마한 2층 목조집이 한 채,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푸르른 나무들속에서 빠끔히 내다보이는 이 집은 어딘가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앞장을 서 가던 조야가 사립문을 열고 정원으로 뛰어들며,
“방랑자들을 데려왔어요!” 하고 소리질렀다.
창백하나 표정이 풍부한 얼굴을 가진 젊은 처녀가 길가에 있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 문지방에 연보랏빛 명주옷을 입은 부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햇볕을 가리기 위해 수가 놓인 삼베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서, 우울하고 맥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각주]
스키타이인
기원전 6∼3세기에 흑해 북안 초원 지대에 강대한 유목 국가를 건설한 민족
루살카
인어와 비슷한 모습을 한, 고대 슬라브 전선에 나오는 숲과 물의 요정
스타바세르(Stavasse)
19세기 러시아의 조각가
전날 밤 on the Eve (Накану́не, Nakanune 1860)
투르게네프의 ' on the Eve'(전날 밤`1860)
3
결혼 전의 성이 슈비나(Shubin)였던 안나 바살리예브나 스타호프(Anna Vassilyevna Stahov)는 일곱 살 때 고아가 됨과 동시에 막대한 재산 상속인이 되었다. 그녀에게는 아주 부유한 친척도 있었으나 아주 가난한 친척도 있었다. 아버지 쪽의 친척들은 가난했지만, 어머니 쪽의 친척들은 부자였던 것이다. 볼긴(Volgin) 원로원 의원, 치쿠라소프(Tchikurasov.) 공작 등. 그녀의 후견인이 된 아르달리온 치쿠라소프(Ardalion Tchikurasov) 공작은 그녀를 모스크바에서 제일 좋은 기숙 학교에 보냈으며, 학교를 마치자 곧 자기 집에 데려다 함께 살았다. 그는 자주 손님들을 초대했고 겨울철에는 종종 무도회를 열곤 했다. 후에 안나 바실리예브나의 남편이 된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스타호프(Nikolai Artemyevitch Stahov)는 이 무도회에서 그녀를 손아귀에 넣었던 것이다. 그 때 그녀는 ‘멋진 야회복을 입고 작은 장미 꽃송이로 만든 머리 장식’을 달고 있었다. 그녀는 이 장식을 오래도록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 때 부상을 입고 바로 제대해서 페테르부르그에 좋은 직장을 얻은 퇴역 대위의 아들인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스타호프는 열여섯 살에 사관 학교에 들어가 근위대에 배속되었다. 그는 용모가 뛰어나고 체격이 당당한 데다 사교 댄스의 명수여서, 그가 주로 드나들던 중류층 야회에서 인기가 대단하였다. 그는 상류층의 사교계에는 출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젊었을 적부터 두 가지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 하나는 시종 무관이 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략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첫째 번 야망은 이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때문에 그는 둘째 번 야망이라도 꼭 관철하려고 더욱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가 겨울이면 모스크바로 나간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 스타호프는 프랑스 말을 유창하게 구사했고, 방탕하지 않아 철학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는 소위에 임관된 후부터 논쟁을 하게 되면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예컨대, 사람이 일생 동안 세계를 한 바퀴 돌 수 있는가, 혹은 바다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토론하기를 즐겼던 것인데, 언제나 불가능하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었다.
니콜라이 스타호프 가(家) 안나 바실리예브나를 ‘얻은’ 것은 스물 다섯 살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는 퇴역하여 영지를 관리하기 위해 시골로 떠났다. 그러나 시골 생활에는 이내 싫증이 났고, 영지도 소작을 주었기 때문에 따로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처가에 정주하게 되었다. 젊었을 때에는 전혀 노름을 하지 않았으나 요즘에 와서는 로토(loto) 게임에 열중했다. 그러나 로토 게임이 금지되자 이번에는 에라라시[whist] 게임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는 집에서는 시간을 보내기가 무척 지루했는데, 근래에는 독일계 미망인과 가까워져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의 집에서 보내는 것이었다.
1853년 여름에는 쿤초보에 가지 않았다. 온천 요법을 한다는 핑계로 모스크바에 남아 있었는데, 실은 미망인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그는 미망인과 만나도 별로 이야기를 건네지는 않았다. 대개는 사람이 일기를 예보할 수 있겠느냐 하는 따위의 논쟁으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보통 트집쟁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그 별명을 대단히 마음에 들어 했다.
“암, 난 쉽사리 만족하지 않지. 아무도 날 속이지는 못해.”라고 흐뭇한 마음으로 입언저리를 씰룩거리고, 몸을 흔들흔들하면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의 회의적인 태도는, ‘신경’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도대체 신경이란 무엇인가?”라든가, 누가 천문학의 발들을 깨우쳐 주기라도 하면 “당신은 천문학을 믿고 있소?” 하고 대들 정도였다. 그는 논쟁에서 상대방을 결정적으로 누르고 싶어할 때엔 “그것 말장난에 불과해.” 하고 무찔러 버리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대답이 논박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지금까지도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애인 아구스치나 흐리스치아노브(Augustina Christianovna)나가 그녀의 종자매 페오도린다 페체르질리우스(Theodolina Peterzelius)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를 ‘마인 핀젤헨(Mein Pinselchen 우리의 멍청이)’라고 쓰고 있는 줄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의 아내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근심과 슬픔이 감도는, 작고 섬세한 얼굴을 가진 가냘픈 여자였다. 기숙 학교에서는 음악을 전공하고 소설을 탐독하였으나, 후에 다 집어치우고 말았다. 고운 옷으로 몸치장을 하다가 그것도 그만두어 버렸다. 그녀는 딸의 교육도 맡았었으나 힘에 벅차 여자 가정 교사에게 넘겼다. 무얼 시작하자마자 곧 슬픔에 젖어 신경질을 부리는 걸로 끝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옐레나 니콜라예브나를 낳은 후로 건강이 좋지 않아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하였다. 니콜라이 아르쵸미예비치는 아브구스치나 흐리스치아노브나와의 교제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런 사정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었다. 남편의 배신은 안나 바실리예브나를 무척이나 괴롭혔다. 특히, 그가 독일 여자에게, 안나 바실리예브나의 소유인 목장에 있던 잿빛 털을 가진 말 두 필을 주었을 때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안나는 남편을 맞대어 놓고 비난한 적은 없지만, 집 안의 아무나 붙들고는 슬며시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심지어 딸한테까지도.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외출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손님이 찾아와서 말상대가 되어 주면 여간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혼자 남게 되면 이내 맥이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매우 깊은 애정과 부드러운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금방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파벨 야코블레비치 슈빈은 그녀의 재종질뻘이 되었다. 슈빈의 아버지는 모스크바에서 관리직을 지냈다. 그의 형들은 모두 육군 유년 학교에 들어갔으나, 막내로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해 온 유약한 체질의 그는 그냥 집에 남게 되었다.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어렵사리 고등 학교에 다니던 그는 일찍부터 조각에 소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 번은 뚱뚱한 원로원 의원 볼긴(Volgin)이 슈빈이 만든(그 때 그는 열여섯 살이었다) 조그만 동상을 안나의 집에서 보고, 어린 천재를 위해 후견인이 되겠노라고 나섰다. 슈빈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은 청년의 장래ㅡ 백 팔십 도로 바꾸어 놓았다. 천재의 후견인인 원로원 의원이 슈빈에게 제공해 준 것은 호머(Homer)의 석고상뿐이었다. 그러나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경제적으로 많이 도와주어서 열 아홉 살 때 겨우 대학 의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파벨은 의학에 전혀 취미가 없었다. 의과를 택하게 된 것은, 그 당시 실시되던 학생 정원제에 따라, 다른 과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밖에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해부학에 대하여 상당한 흥미를 가지고 있어서였다. 그러나 그는 해부학 공부를 하지 않았다. 2학년 때 시험을 포기하고 대학을 그만두어 버렸다. 오로지 자신의 천직에만 전념하기 위해서.
그는 열심히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그것을 꾸준히 계속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내키면 미친 듯이 매달리는 발작적인 것이었다. 그는 모스크바 변두리를 돌아다니면서 농사꾼 소녀들의 초상을 빚기도 하고 그리기도 했다. 또 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고 여러 사람을 사귀기도 하였다. 그 중에는 이탈리아의 조각가도, 러시아의 화가들도 끼어 있었다. 그는 미술 대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어떤 교수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재능은 의심할 바가 없어, 모스크바에서 금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는 선량하고 현명한 여자로, 파리의 명문 출신이었다. 그녀는 아들에게 프랑스 어를 직접 가르쳤고, 밤낮으로 아들 걱정을 했다. 또 그를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는데, 폐병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면서 안나 바실리예브나에게 아들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 때 파벨은 벌써 스물 한 살이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슈빈은 별장의 조그마한 방 하나를 얻어 들게 된 것이다.
[각주]
로토(loto)
도박의 일종. 자루 속에서 번호가 붙은 공을 꺼내어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카드와 일치하는 번호의 말을 얹어 먼저 일렬로 나란히 한 자가 이기게 된다
4
“자, 어서들 식사하러 갑시다. 가요.” 하고 안나 부인이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식당으로 갔다.
“조야, 내 곁에 앉으렴. 그리고 옐레나, 넌 손님들 시중을 들어라. 파벨은 조야를 그만 좀 못 살게 굴고‥‥오늘 난 머리가 아파.”
슈빈이 두 눈을 치켜 떠 보였다. 조야가 웃을 듯 말 듯한 얼굴로 그에게 응답해 주었다. 조야는,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서 조야 니키치시나 뮐러(Zoya Nikitishna Mueller)는 귀엽게 생긴 러시아계 독일 소녀로, 약간 사팔뜨기에 금발머리이며 통통한 편이었다. 그녀는 끝이 좀 갈라진 코와 아주 작은 붉은 입술을 가졌다. 그녀는 러시아 로망스를 곧잘 불렀고, 때로는 경쾌하고 때로는 감상적인, 여러 가지 곡들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옷차림은 그녀의 고상한 취미를 말해 주고 있는데, 어딘가 앳되고 너무나 청초해 보였다.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조야를 딸의 친구로 데려왔으나, 거의 언제나 자기 곁에 붙어 있게 하였다. 옐레나도 이 점에 대하여 별로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옐레나가 조야와 단둘이 남아 있을 때 도무지 말머리를 쉽게 찾아 내지 못하기도 한 때문이었다.
식사는 꽤나 오래 계속 되었다. 베르셰네프는 옐레나와 대학 생활과 장래의 포부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슈빈은 말없이 듣기만 하면서 짐짓 허기가 진 듯이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이따금 조야에게 침울한 눈초리를 보내는 것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옐레나와 베르셰네프, 그리고 슈빈은 정원으로 나갔다. 조야는 한동안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곧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피아노 앞에 가 앉았다.
“왜 너도 산책 나가지 않고서?” 안나 바실리예브나가 말했다.
그리고는 상대방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덧붙여 말했다.
“내게 아주 슬픈 곡조를 좀 쳐 주렴‥‥”
“베버의 <최초의 상념>을 들려 드릴까요?” 조야가 물었다.
“아, 그러렴, 베버를.”
안나 바실리예브나는 안락의자에 푹 파묻히면서 대답하였는데, 그녀의 속눈썹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괴어 있었다.
이러는 동안 옐레나는 두 친구를 아카시아 향기가 나는 정원으로 데려갔다. 한복판에는 탁자가, 그 주위에는 벤치가 둘러 놓여 있었다. 슈빈이 뒤를 돌아보면서 몇 번 팔짝팔짝 뛰더니, “잠깐만 기다려!” 하고 속삭이듯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달음질쳐 갔다. 이윽고 그는 진흙덩이를 가지고 와 조야의 형상을 빚기 시작했다. 사뭇 머리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뭐라 지껄이기도 하고 또 낄낄거리기도 하면서.
“또, 그 장난이군요.” 옐레나가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베르셰네프를 향해, 아까 식사할 때 주고받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장난이라.” 슈빈이 그 말을 되씹었다. “이런 일은 쉽사리 끝나는 것이 아니죠. 그녀가 오늘은 특히 날 참지 못하게 하는데요.”
“그건 왜죠?” 옐레나가 물었다. “마치 심술궂은 불쾌한 노파 이야기라도 하는 것 같군요. 예쁘고 젊은 아가씨를‥‥
“그야 물론이지요.” 슈빈이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예쁘죠. 예쁘고 말구요. 지나가던 사람은 누구나 그녀를 보면서 반드시 이런 생각을 하리라는 걸 난 확신해요. ‘폴카 한 번 같이 춰 봤으면’ 하고. 그리고 그녀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걸 즐기고 있다는 것도요. 그러면서도 그 부끄러운 듯한 찌푸림은, 그 겸손은 무엇 때문이죠?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슈빈은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경멸에 찬 어조로 덧붙였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지금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잖아요?”
그리고서 슈빈은 조야의 형상을 부숴 버리고는 성급하게, 그리고 마치 화라도 난 듯이 다시 진흙을 주물러 무엇인가 빚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학 교수가 되고 싶으신 거예요?” 옐레나가 베르셰네프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베르셰네프는 불그레한 손을 무릎 사이에 끼면서 대답했다. “그것이 제가 가장 즐겨 하는 공상이죠. 전 물론 그런 훌륭한 인물이 되기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하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지만, 외국 유학을 떠날 수 있는 허가를 얻어 두고 싶다는 겁니다. 필요하다면 삼사 년쯤 그 곳에 눌러 있을까 해요. 그런 다음에‥‥”
그는 말을 멈추고 눈을 내리깔더니 금방 눈을 치켜 떴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베르셰네프는 여자와 이야기할 때면, 말은 더욱 느려지고 발음이 분명치 않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시다면 역사 교수가 되려고 하시나요?” 옐레나가 물었다.
“그래요. 그렇지 않으면 철학 교수.” 하고 그는 목소리를 한결 낮추어 대답했다.
“이 친구는 철학에 대해선 지금도 환하지요.” 하고 슈빈이 진흙에 손톱으로 깊은 흠을 파면서 말했다. “그런데 구태여 외국 유학을 갈 필요가 뭐 있겠소?”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당신의 직업에 충분히 만족하게 될까요?” 옐레나가 팔꿈치로 턱을 괴고서 베르셰네프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 보고 물었다.
“충분히,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충분히 만족할 겁니다. 그보다 더 좋은 천직이 어디 있을까요? 당치도 않죠. 치모페이 니콜라예비치(Timofay Nikolaevitch)교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그런 걸 생각만 해도 전 기쁨과 당혹감으로 가득 차죠. 그래요‥‥당혹감이에요, 제 자신의 무능을 인식하는 데서 일어나는. 고인이 되신 아버지께서는 저의 이런 목표를 한껏 성원해 주셨답니다. 전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아버님께선 이번 겨울에 돌아가셨지요?”
“그렇습니다, 2월이었지요.”
“아버님께서는 훌륭한 저서의 원고를 남기셨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옐레나가 말을 이었다. “그래요, 남기셨죠. 그 어른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지요. 만나 보셨더라면 좋아하게 되셨을 겁니다,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그랬을 테지요. 그 저서의 내용은 무엇이죠?”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저서의 내용을 당신께 한 마디로 잘라서 말씀드리기는 좀 어렵습니다. 아버진 셸링(Schelling)파 학자여서 가끔 모호한 표현을 하셨으니까요.”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옐레나가 그의 말을 막았다. “저의 무지를 용서하세요. 셸링파라는 게 무슨 뜻이죠?”
베르셰네프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셸링파란, 독일 철학자 셸링의 추종자라는 뜻이지요. 셸링의 학설이 무엇이냐 하면‥‥”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갑자기 슈빈이 소리질렀다. “제발 그만두게나! 자네, 옐레나 니콜라예브나에게까지 셸링을 강의할 생각은 설마 아니겠지? 좀 봐 주게.”
“강의가 아니야.” 베르셰네프가 더듬거리더니 얼굴을 붉혔다. “내 말은, 저‥‥”
“강의해서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어요?” 옐레나가 말을 받았다. “나나 당신은 강의를 좀 들을 필요가 있어요, 파벨 야코블레비치.”
슈빈이 한동안 옐레나를 응시하더니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죠?” 그녀가 싸늘하고 날카로울 정도의 목소리로 물었다.
슈빈은 잠자코 있었다.
“자, 됐어요. 화낼 건 없어요.” 하고 그가 조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했소. 하지만 사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이런 나무 그늘에 앉아서 철학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아요? 차라리 꾀꼬리나 장미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편이 낫죠. 아니면, 젊은 눈망울과 미소를 화제로 삼아도 좋구요.”
“그럼요. 프랑스 소설과 여자들 유행에 관한 것도 좋겠지요.” 옐레나가 비아냥거리듯이 말을 받았다.
“왜 여자들의 유행은 화제가 될 수 없나요?” 슈빈이 반박했다. “아름답기만 하다면야‥‥”
“이야깃거리가 안 된다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가 유행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싫어한다면요? 당신은 자신을 자유 분방한 예술가라 내세우면서, 어째 남의 자유는 침해하겠다는 거죠? 한 가지 묻겠는데요, 만일 당신 생각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조야를 비난하는 거예요? 그 애야말로 유행과 장미를 놓고 토론을 즐길 만한 상대로 가장 안성맞춤일 텐데요.”
슈빈이 얼굴을 붉히면서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그런가요?” 그가 불확실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무슨 암시를 하고 있는지 알겠소. 옐레나 니콜라예브나, 당신은 나를 그 아가씨한테로 쫓아 보내고 싶은 거죠. 다시 말해서, 난 자리에 필요 없는 존재라는 거지요?”
“가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당신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죠.” 슈빈은 화가 치밀어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 아가씨하고나 어울리는 게 알맞다구요? 그 밖의 어떤 사람과도 사귈 수 없다는 거 아니오? 난 그 달콤한 독일 아가씨처럼 머리가 텅 비어 있고, 어리석고 천박하다는 거 아닙니까?”
옐레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조야에 대하여 늘 그렇게 말하지는 않잖아요, 파벨 야코블레비치.”
“아하, 날 비난하고 계시군! 지금 날 비난하고 계셔!” 하고 슈빈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자, 그럼 나도 솔직히 말하지. 사람이란 살다 보면 이런 때도 있지. 그 싱싱하고 평범한 뺨에‥‥하지만 만일 내가 당신에게 복수하듯 그 비난을 되갚아 상기시키자면‥‥그럼 미안.” 하더니 불쑥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나한테서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가 튀어나올지도 몰라.”
그러더니 사람의 모양으로 빚은 진흙을 손으로 내리쳐 부수어 버리고는 정원을 빠져나가 자기 방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꼭 어린애 같아.” 하고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옐레나가 한 마디 했다.
“예술가죠.” 하고 베르셰네프가 말했다. “예술가는 다 저래요. 그들의 변덕은 용서해 줘야 해요. 그건 그들의 특권이니까요.”
“그런가 봐요. 하지만.” 옐레나가 이의를 말하였다. “파벨은 지금까지 그와 같은 권리를 내세우지 않았어요. 그가 지금껏 한 일이 무엇이에요? 제 팔을 잡으세요. 가로수 길을 따라 산책이나 하게요. 그가 우리를 괜히 방해했지 뭐예요. 당신 아버님의 저서에 대해 이야기했었죠.”
베르셰네프는 옐레나의 팔을 잡고 함께 거닐었다. 그러나 아까 끊겼던 화제는 다시 시작되지 않았다. 베르셰네프는 대학 교수라는 직책과, 자기 자신의 장래 계획에 대하여 몇 마디 했을 뿐이다. 그는 그녀의 곁에 바짝 붙어 서서 조용히 발걸음을 떼어 놓고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자연스럽지 못하였다. 그는 옐레나의 팔을 어색하게 잡고 있었고, 이따금씩 그의 어깨가 그녀의 어깨와 맞부딪치곤 하였다. 그리고 한 번도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말소리만은 결코 유창하지는 못했으나 낭랑하였다. 그는 간단 명료한 표현을 했다. 나무 줄기와 모래밭과 풀들을 천천히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눈망울 속에는 조용한 감동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대변하고 있었다. 옐레나는 그의 이야기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몸을 절반쯤이나 상대방에게 돌리고, 약간 창백한 듯한 얼굴과 친절하고 온순한 그 두 눈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옐레나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녀의 영혼은 활짝 열려, 무엇인가 부드럽고 진실하며 좋은 것이 그녀의 마음 속에 스며들어 차츰 자라나는 것만 같았다.
[각주]
치모페이 니콜라예비치(Timofay Nikolaevitch)
모스크바 대학의 역사학 교수
셸링(Schelling)
독일의 철학자. 객관과 주관과의 무차별이 철학의 원리가 되는 동일 철학을 확립
5
슈빈은 밤이 되도록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밖은 이미 어두워서 초승달이 하늘 높이 솟아 있고, 은하수가 부옇게 반짝였다. 별들도 아른아른 반짝였다. 안나와 옐레나, 그리고 조야와 헤어진 베르셰네프는 친구의 방문 쪽으로 다가갔다. 방문이 잠겨 있는 걸 알자 그는 문을 두드렸다.
“누구야?” 슈빈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날세.” 베르셰네프가 대답했다.
“무슨 일인가?”
“들어가게 해 주게나, 파벨. 이제 그만 심술부리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심술부리는 게 아니야. 잠을 자고 있는 거지. 조야의 꿈을 꾸면서 말이네.”
“그만 좀 해 둬. 자넨 어린애가 아니지 않나. 들어가게 해 줘. 꼭 할 말이 있으니까.”
“옐레나와 할 말은 다 했을 터인데?”
“그만, 됐다니까. 그만, 됐어. 날 좀 들여보내 줘!”
슈빈은 거짓으로 코를 고는 소리를 냈다. 베르셰네프는 어깨를 한 번 으쓱 추어올리고 나서 발길을 돌렸다.
밤 공기는 훈훈했고,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주위의 모든 것이 귀기울여 그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어둠에 포위당한 베르셰네프는 부지중에 멈춰 서서 자기도 귀를 기울이며 주위를 살폈다. 여인의 옷자락이 스치는 듯한 사락사락하는 가벼운 소리가 가까이 있는 나무 꼭대기에서 일어, 베르셰네프에게 감미로운 동시에 스산한 느낌을, 그리고 반쯤 공포에 가까운 느낌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뺨에 소름이 돋고, 눈에는 별안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어디라 할 것 없이 조용히 발길을 옮겨 자기 자신을 감추어 버리고 싶었다. 싸늘한 바람이 옆에서 불어닥쳤다. 그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이 우두커니 멈춰 섰다. 잠자던 딱정벌레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길바닥에 부딪치는 소릴 내었다. 그는 “아!” 하고 나지막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다가 옐레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런 순간적인 느낌들이 일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밤의 신선함과 밤 산책의 생생한 인상만이 남았다. 젊은 처녀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온통 차지해 버렸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걸으면서 조금 전에 옐레나가 한 말과 질문들을 떠올렸다. 그 때 뒤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귀를 곧추 세웠다. 누가 뛰어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를 쫓아오고 있는 것이다. 숨을 헐떡이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키가 큰 나무가 던지는 시커먼 그림자 속에서 모자도 쓰지 않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드러낸 채, 달빛을 받아 온통 파리한 슈빈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가 이 길로 가고 있어서 다행이군.” 하고 그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자넬 붙잡지 못했더라면 나는 밤새 한잠도 이루질 못했을 걸세, 팔을 잡으세. 자넨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지?”
“그래.”
“내, 함께 가겠네.”
“괜찮아. 난 넥타이도 풀어 버린 걸. 이젠 상당히 푸근하군.”
두 친구는 몇 발자국 걸음을 떼어 놓았다.
“오늘 내가 너무 어리석었지, 그렇지?” 슈빈이 불쑥 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래. 난 자넬 이해할 수가 없어. 자네가 그러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야.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를 냈나? 그런 하찮은 일을 가지고.”
“흠.” 하고 슈빈이 소 울음 소리 같은 걸 냈다.
“자넨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한텐 하찮은 일이 아니야. 자네도 알다시피.” 하고 그가 말을 이었다. “자네에겐 이야기해야겠는데, 난, 나는 말이야‥‥자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난‥‥그래! 난 옐레나를 사랑하고 있다네!”
“자네가 옐레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하고 베르셰네프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더니 우뚝 멈춰 섰다.
“그래!” 슈빈이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양 이야기를 계속했다. “왜, 내 말에 놀랐나? 말할 게 더 있어. 오늘 밤까지만 해도 난 시간이 흐르면 그녀 역시 날 사랑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네. 그러나 난 오늘 비로소 절망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다른 사람이라니? 누굴 말인가?”
“누구냐구? 자넬세!” 하고 슈빈이 소리를 치며 베르셰네프의 어깨를 두드렸다.
“날?”
“자넬.” 하고 슈빈은 같은 대답을 되풀이하였다.
베르셰네프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더니, 화석처럼 우뚝 멈춰 섰다. 슈빈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왜, 또 한 번 놀랐나? 자넨 온순한 청년이야. 그녀는 자네를 사랑하고 있어. 그 점에 대해서는 마음을 놓아도 좋을 걸세.”
“쓸데없는 소리 말아!” 이윽고 베르셰네프가 고통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야. 그런데 우린 왜 이렇게 서 있지? 앞으로 가세. 걷는 편이 더 나아. 난 그녀를 전부터 알고 있네. 그녀를 잘 알고 있다구. 내 눈은 틀림없어. 자네가 그녀 마음에 들었단 말일세. 그녀가 날 좋아하던 시절도 있긴 했지. 하지만, 첫째로 난 그녀에게 너무 경솔한 청년으로 비쳤어. 거기에 비하면 자넨 진지한 인물이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 아닌가. 자넨‥‥가만, 내말 아직 끝나지 않았네. 자네는 아주 성실한 감격파인데다가, 러시아의 중류 계급이 그렇게도 과시하고 있는 전형적인 과학의 신봉자란 말일세. 둘째로, 전에 언젠가 내가 조야의 손에 키스를 하는 장면을 옐레나가 목격했거든!”
“조야에게?”
“그래. 조야의 손에 말이야. 자네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나? 조야의 어깨는 정말 멋지거든‥‥”
“어깨라구?”
“그래, 어깨고 팔이고 결국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식사를 마치고 나서 마음놓고 수작하는 꼴을 옐레나가 목격했던 걸세. 그런데 나는 식사하기 전에 그녀 앞에서 조야의 험담을 마구 해 댔었거든. 유감스럽게도 옐레나는 그런 모순이 매우 자연스런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그때 바로 자네가 나타난 걸세. 자넨 이상주의자이고, 믿는 사람이 아닌가?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지만 말이야. 신앙이라도 좋아. 자네는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는가 하면, 실러(Schiller)니, 셸링이니 하며 열을 내지. 옐레나는 자네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런 위대한 사람을 찾고 있는 걸세. 자네가 사랑에 승리하게 된 건 그 때문이라구. 자네와는 달리, 나처럼 불행한 친구는 농담이나 하려 들고‥‥그런데 저‥‥”
슈빈은 별안간 울음을 터뜨리더니 옆으로 비켜 서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었다.
베르셰네프가 그에게 다가갔다.
“파벨.” 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이 무슨 어린애 같은 짓인가? 진정하게나? 자네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자네가 어떤 헛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신은 알고 있다네. 그런데 자네 울고 있구만. 사실 내겐 자네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슈빈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달빛을 받아 그 두 뺨에서 반짝이고 있긴 했으나, 그의 얼굴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하고 그가 말했다. “나에 대해서 자네 마음대로 생각할 수는 있어. 내가 지금 신경질적이라는 것도 인정해. 그러나 분명한 건 난 옐레나를 사랑하고, 옐레나는 자넬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하지만 내가 자넬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약속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겠네.”
그가 일어섰다.
“얼마나 멋진 밤인가! 은빛과 같은 검은빛이 뒤섞인 젊은이의 밤! 이런 때 누굴 사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 사람은 얼마나 기쁠까? 자넨 잠을 잘 건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베르셰네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빨리 했다.
“자넨 어딜 그렇게 급히 가려고 하나?” 하며 슈빈이 얘기를 계속했다. “내 말을 믿어, 자네 일생에 이런 밤은 두 번 다시 없을 테니. 하지만 셸링이 집에서 자넬 기다리고 있을 테지. 오늘 그가 자네에게 큰일을 해준 것도 사실이지. 그렇다고 서두를 필요는 없잖아. 할 줄 안다면 노래를 부르게나. 우렁차게 불러. 부를 줄 모르면 모자를 벗고 머리를 뒤로 젖혀 별들에게 미소를 보내게. 별은 모두 자네를 내려다보고 있어. 자네만을 보고 있단 말이야. 별들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만 내려다보고 있다구. 그래서 별들은 저렇게 아름다운 거지. 자넨 사랑에 빠져 있지 않나,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대답하지 않는군‥‥무엇 때문에 대답하지 않나?”
슈빈은 또다시 말했다.
“오, 만일 자네가 자신을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침묵을 지키게! 침묵을 지켜! 난 불운의 사나이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요술쟁이에 예술가에 어릿광대이기 때문에 수다를 떨고 있는 거야. 그러나 누가 날 사랑하는 걸 알았다면, 난 이런 밤의 흐름에, 이런 별들 아래서, 이런 다이아몬드들 아래에서 얼마나 말없이 환희에 차 있을까! 베르셰네프, 자네는 행복하지?”
베르셰네프는 아까처럼 아무 말 없이 조용한 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양쪽의 나뭇가지 사이로, 그가 살고 있는 마음의 불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마을에는 크지 않은 별장이 열 채쯤 모여 있을 뿐이었다. 마을 어귀의 한길 오른쪽에 서 있는 우거진 두 그루의 자작나무 아래 조그만 가게가 자리잡고 있었다. 가게 창문은 이미 모두 닫혀 있었으나, 열린 문을 통해 굵은 빛줄기가 짓밟힌 잔디 위에 부채 모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희끄무레한 무성한 잎사귀 속과 나무 꼭대기를 강렬히 비추었다. 하녀 같은 차림새를 한 처녀가 가게 안에서 문을 등지고 주인과 물건을 흥정하고 있었다. 머리에 둘러쓴 수건 밑으로 그녀의 토실토실한 뺨과 가느다란 목이 보일락말락 했다. 그녀는 맨손을 턱에 갖다 대곤 했다. 두 젊은이가 빛줄기 아래로 들어섰다. 슈빈이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더니 멈춰 서서 “안뉴시카(Annushka)!” 하고 소리를 질렀다. 처녀가 몸을 홱 돌렸다. 즐거운 듯한 갈색 눈과 검은 눈썹을 가진, 약간 납작하나 귀엽고 생기에 찬 얼굴이었다.
“안뉴시카!” 하고 슈빈이 다시 한 번 불렀다. 처녀는 그를 보자 놀라 당황해하였다. 그녀는 물건 사는 걸 끝내지도 않은 채 층계를 뛰어내리더니, 쏜살같이 두 사람 곁을 스쳐 길 왼쪽으로 뛰어갔다. 간간이 뒤를 돌아보면서. 시골 소상인들이 다 그러하듯이, 뚱뚱하고 세상 만사에 무관심한 가게 주인은 그녀 뒤에다 대고 소리치다가 하품을 했다. 슈빈은 베르셰네프 쪽으로 몸을 돌려 이렇게 말했다.
“이건‥‥보다시피 이건‥‥내가 잘 아는 가족이 여기 와 있다는 걸 말해 주는 거야. 저 앤 그들의, 자네 다른 생각은 말게‥‥”
그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가 버린 처녀의 뒤를 쫓았다.
“눈물이나 닦고 가게.”
베르셰네프가 그의 등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왔을 때는 그의 얼굴에 즐거운 표정이 사리지고 더 이상 웃지도 않았다. 그는 한동안 슈빈이 한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은 여간 큰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파벨이 날 놀린 거야.’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여자도 언젠가는 사랑을 하게 될 테지‥‥그게 누굴까?’
베르셰네프의 방에는, 아주 깨끗한 건 아니지만, 부드럽고 경쾌한 음색을 가진 조그마한 낡은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었다. 베르셰네프는 피아노 앞에 앉아 협화음을 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귀족들이 거의 다 그렇듯이 그도 어려서 음악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으레 그러하듯, 그의 연주는 매우 서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에 대한 그의 열의는 대단했다. 좀더 옳게 말한다면, 그가 좋아하는 건 음악의 표현 기술이나 형식이 아니라(그는 심포니라든가 소나타 또는 오페라 같은 것에 흥미가 없었다.), 음악의 자연스런 힘이었다. 음의 결합과 교류에 의해 마음 속에 불러일으켜지는 막연하고도 감미로운, 추상적이면서도 전체를 감싸는 듯한 느낌을 좋아했다. 그는 같은 협화음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치기도 하고, 함부로 새로운 협화음을 찾기도 하면서, 또 단조 칠음에서 멈추기도 하면서, 한 시간 이상을 피아노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가슴이 아리고 두 눈에 눈물이 그득 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부끄럽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렸으니까. ‘파벨이 옳아!’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예감이 들어. 오늘과 같은 밤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마침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을 켜고, 실내복으로 갈아입고는 서가에서 라우머(Raumer)의 <호헨시타우펜(Hohenstaufen)사(史)> 제2권을 꺼냈다. 그리고는 두어 번 한숨을 쉬고 나서 부지런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각주]
실러(Schiller)
영국의 철학자로 프래그머티즘의 주창자
라우머(Raumer)
독일의 고전 학자로 역사, 문학사, 법률, 경제 분야의 명저가 많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