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천 자유시장
부천 자유시장은 복사골로 유명한 부천에 개설되어 있는 전통시장이다. 부천 자유시장은 주변에 위치한 부천청과물시장과 함께 1970년대까지 부천의 유일한 시장이었다. 청과물과 수산물, 잡화, 생활필수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소재지 : 경기 부천시 소사구 자유로 33
시장 유형 : 상설시장
형성 시기 : 1947년(개설)
시장 현황 : 점포 수 257곳, 면적 24,647m2
같은 지역 다른 시장 : 소사종합시장, 청과물시장, 역곡북부시장
주변 볼거리 : 도당산 벚꽃, 백만송이 장미공원, 부천활박물관
전화번호 : 부천 자유시장 상인회 032-656-1892
목차
1. 부천자유시장 개요
2. 부천자유시장의 어원
3. 부천의 지리적 특색과 시장 형성 과정
4. 시장의 발달 및 변천 과정
1) 부천자유시장과 부천청과물시장
2) 소사종합시장
3) 그 밖의 시장
5. 시장의 위치와 거래 품목
6. 시장의 지리적 배경과 인근 볼거리
7. 먹을거리
1. 부천자유시장 개요
부천 지역은 오랫동안 인접한 부평에 속해 있었다. 북쪽으로 흘러가 한강과 만나는 하천들이 일구어 놓은 평야와 산지를 중심으로 농산물과 과일, 채소 등을 생산하던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복숭아 과수원이 많이 생겨나 복숭아가 지역의 특산물이 되었고, 복사골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부천 지역이 성장하게 된 계기는 경인선이 지나면서 소사역(현 부천역)이 세워진 것이었다. 소사역 주변에 점포와 노점들이 들어서고, 소사시장이 형성되었다. 그 이후 부천과 시흥의 길목에 뱀내시장, 부천과 김포 사이에 황어시장이 개설되어 소사시장을 중심으로 상권을 형성했다. 또한 서천리와 장기리에 우시장이 개설되어 인근 지역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부천 지역은 한국전쟁 이후 서울과 인접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급속도로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이와 더불어 인구 또한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1970년대까지 자유시장 외에 다른 시장이 없었던 부천이지만 1980년대부터 시장들이 지역 곳곳에 개설되었다. 2016년 현재 부천 지역에는 19개의 전통시장이 개설되어 있고 대부분 활성화되어 있다.
2. 부천자유시장의 어원
부천 지역은 삼국시대에 주부토라고 불렸다. 그것이 고려시대에 들어서 수주로 바뀌었고, 조선시대에는 부평에 속해 있었다. 부천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시행된 행정구역 개편 때였다. 부천은 부평과 인천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천자유시장은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3. 부천의 지리적 특색과 시장 형성 과정
부천 지역은 오랫동안 부평에 속해 있던 곳으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만 복숭아밭이 많아서 복사골이라고 불린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부평과 서울 사이에 위치해 농업을 주로 하는 논과 밭으로 형성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부평에 속해 있던 부천 지역의 특산물은 소금과 조기, 소라, 새우, 조개 등의 수산물과 소, 돼지, 복숭아, 대리석, 구리 등이었다.
조선시대에 오늘날의 부천 지역이 주목받은 것은 세곡의 운반과 관련된 육로의 개설이었다. 조선시대에 삼남 지방에서 세곡을 싣고 올라오는 배들이 인천과 부평을 지나 강화도 수로를 거쳐 한강의 마포나루로 들어갔다.
그런데 강화도의 수로인 손돌목은 물살이 거세어 배들이 자주 가라앉았다. 그래서 2가지 방안이 마련되었다. 하나는 인천 연안에서 직접 한강으로 들어갈 수 있는 수로를 만드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부평 지역에 항구를 건설하고 조창을 설치해 그곳에 세곡을 집산해 우마차를 이용해 한양으로 운반하는 방법이었다.
육로를 이용한 방법은 부평 지역에 전초장을 설치해 세곡 운반을 위해 새로 만든 새고개를 넘어서 계산과 서운동, 부천 오정동을 거쳐 양화나루를 지나 서울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오래 활용되지 못했고, 1899년 경인선 철도의 개설과 도로의 신설로 인해 폐기되었다. 지금은 그 도로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한편 새롭게 수로를 내는 것은 중종 연간에 추진되었다. 하지만 이내 중단이 되었고, 오랜 세월이 지나 2011년에 굴포천을 따라 경인아라뱃길이 되었다.
부천 지역이 제 이름을 갖고 군이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의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은 인천항의 개항과 깊은 연관이 있다. 역시 작은 어촌이던 인천이 개항한 뒤에 인천항을 통해서 외국의 교역품과 사람들이 유입되었다. 그리고 인천과 서울이 연결되면서 그 중간 지점에 있던 부천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상징이 경인선이었다. 1899년에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의 노선 안에 오늘날의 부천역인 소사역과, 오늘날에는 서울에 포함되어 있는 오류역이 생기면서 부천은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경인선에 소사역이 설치된 것은 넓은 김포평야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집산해 인천항으로 보내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경인선은 인천항의 개항과 더불어 일본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침투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경인철도의 경우 아직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철도 체계였던 협궤식이 아닌 미국과 영국식으로 부설되었다. 그러나 곧 철도의 부설권이 일본으로 넘어갔고, 철도를 개통한 것은 일본이었다.
경인선에 소사역이 생기면서 주변에 큰 변화가 생겼다. 자연스럽게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생겨났고, 음식점 등의 점포들이 생겨나면서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소사역을 중심으로 개설된 시장은 2, 7일이 장날이었던 소사장이었다. 소사장은 소사삼거리 초입에 위치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부천 지역에 2개의 시장이 더 생겨났다. 하나는 경기도 시흥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뱀내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기도 김포로 가는 길목에 개설된 황어장이었다. 황어장은 지금의 소사 2동에 위치했던 시장이었다.
뱀내장은 한자로 표기하면 사천장(蛇川場)이 되는데, 장날은 매월 끝자리가 1, 6일이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주변에 금광이 있어서 일본인들이 금을 캤다. 한편 황어장의 장날은 3, 8일이었다.
당시 부천 지역에는 2개의 우시장이 있었다. 하나는 황어장이 개설되어 있던 장기리의 우시장이었고, 뱀내장과 가까운 곳에 있던 서천리 우시장이었다. 장기리 우시장은 부평역에서 북서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개설되었는데, 장날은 5일이었다. 7~11월 사이에 매달 평균 500~600두의 소가 거래되었다. 장기리 우시장은 김포와 강화, 시흥 등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서천리 우시장은 성주산 남쪽에 있었는데, 당시의 지명은 부천군 소래면 사천리였다. 규모는 장기리 우시장과 비슷했고, 우시장을 찾는 상인은 평균 100명, 고객은 250명 정도였다. 서천리 우시장은 1973년 부천이 시로 승격될 때 시흥군 소래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한편 시흥의 주민들이 부천에 개설되어 있는 뱀내장이나 황어장을 보러 가기 위해서는 성주산의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여우고개와 하우고개, 마니고개가 있었다. 이곳에 도둑들이 들끓어서 장꾼들이 고개를 급하게 넘어야 했기 때문에 숨이 헉헉거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하우고개이며, 마니고개는 산에만 가면 시신은 없이 머리만 발견되는 일이 많아 머리의 옛 말인 마니가 붙은 이름이었다. 여우고개는 이 고개에 여우가 많이 나타났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대 후반에 부천 지역에는 세 곳에서 장이 서고 있었다. 소사장과 뱀내장(사천장), 황어장이 그것이었다.
4. 시장의 발달 및 변천 과정
부천 지역은 1975년까지만 해도 인구가 10만 정도였다. 그것이 1980년에 20만 명을 넘었고, 1990년에는 60만 명이 넘었다. 2005년에는 80만 명을 넘을 정도로 그 증가세가 폭발적이었다. 2016년 현재 부천의 인구는 84만 8,190명을 기록하고 있다. 인구의 이러한 급격한 증가와 더불어 교통이 편리해지고, 시장 또한 크게 증가했다. 시장의 증가는 인구의 증가와 비례했다.
부천 지역의 시장은 1970년대까지 단 1곳이 개설되어 있었을 정도로 열악했다. 당시 부천의 주민들은 생선과 같은 수산물은 인천에서, 혼수품은 서울 광장시장에서 구입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다.
부천 지역의 시장은 1970년대 말까지 오늘날의 부천역인 소사역 주변에 위치한 자유시장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78년에 부천종합상가와 부천지하상가가 개설되면서 시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시장이 크게 늘어난 때는 1980년대였다. 1981년에 백화점을 포함해 23곳으로 증가했고, 1983년에는 26곳에 이르렀다.
부천 지역의 시장들은 서울처럼 사설시장, 상설시장이 중심이었다. 1980년대에 부천의 중심 시장은 자유시장과 대보시장이었다. 자유시장과 대보시장을 중심으로 규모가 작은 역곡북부시장과 동부시장, 원미시장 등이 상권을 떠받치는 형태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에 대형마트가 등장하면서 전통시장이 약화되고 현대식 대형매장의 신설이 늘어났다. 당시 대형백화점은 자유시장의 일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서 1984년 4월에 개장한 장안쇼핑이었다. 장안쇼핑은 이후 이름을 그레이스쇼핑으로 변경했다.
또한 시장의 발달과 관련이 깊은 또 하나의 요소가 교통이다. 부천 지역은 기존의 경인선에 더해서 1960년대 후반에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경인고속도로는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로, 부천은 그 중간에 위치해 있다.
경인고속도로가 지나는 오정구 내동과 삼정동, 약대동을 중심으로 공업 지대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서울과 인접하다는 지리적 이점과 농촌 지역이던 부천의 많은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했다.
또 1930년대 초반에 합자회사로 설립된 소사여객이 한국전쟁 이후 소사와 신천리를 왕래하면서 운행했고, 1950년대에 김포국제공항까지 운행하면서 인천항과 공항, 부천을 연결했다. 1965년부터 소신여객이 부천 전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형성해서 상업 활동의 활성화에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1) 부천자유시장과 부천청과물시장
부천자유시장은 경인선 부천역 주변에 형성되던 소사시장이 개설되었던 곳에 건립된 전통시장이다. 자유시장은 해방 이후 1947년에 심곡동에서 문을 열면서 부천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시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1970년대 후반까지 부천 지역의 유일한 시장이기도 했다.
부천 지역에서 가장 먼저 수도가 개설된 곳도 자유시장이었다. 인천에서 부천 삼정동을 거쳐 들어온 수도를 자유시장에 공급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공사를 했을 정도로 깊은 관심을 모았던 작업이었다. 이 무렵 부천 지역에서 수도가 나오는 곳은 자유시장뿐이었다.
자유시장은 1980년대까지 큰 호황을 누렸다. 오후 4시가 되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밀려들어 몸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자유시장에는 부천의 주민들 외에 인접한 도시인 김포와 광명, 시흥에서도 고객들이 찾아왔다. 자유시장은 경기도 내에서도 손꼽히는 시장의 하나였다.
자유시장의 장세가 약화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 대형마트와 백화점들이 등장하면서 생긴 상권의 변화 때문이었다. 또 부천역 외에도 주변에 소사역과 중동역 등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분산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과거에는 부천역이 교통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부천역에 있는 자유시장이 사람들로 붐빌 수밖에 없었지만 교통의 분산이 일어나면서 자유시장을 이용하는 고객의 숫자가 줄어들었던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 눈에 띄게 약화된 장세를 회복하기 위해 자유시장은 두 차례에 걸쳐 시장 현대화 작업을 추진했다. 2009년부터 2012년, 2014년부터 2015년까지 2단계 사업을 통해 아케이드 시설과 간판 정비 등 쾌적한 쇼핑 환경을 조성했다.
한편, 해방 이후에 자유시장과 함께 개설된 것이 깡시장이었다. 깡시장은 과일과 채소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도매시장이었다. 깡이라는 말은 일본어에서 할인을 의미하는 ‘와리깡’에서 유래한 말이었다.
깡시장에 과일과 채소를 제공한 곳 중 하나가 까치울이라고 불리는 작동(鵲洞)이었다. 작동은 부천과 서울 경계에 위치한 곳으로 주변에 산지가 많은 지역이었다. 그래서 예부터 작동은 산의 비탈길을 일구어 과일 농사를 많이 지었다. 과일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부천의 특산물이었던 복숭아와 수박이었다.
작동의 복숭아와 수박은 워낙 맛이 뛰어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갔고,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 난 것을 작동에서 난 것으로 속이고 팔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다만 복숭아를 수확하는 계절이 한여름인 6~8월이었고, 수확 시기도 짧고 보관이 힘들었다. 그래서 작동 사람들은 수확한 복숭아를 등짐이나 광주리에 담아 땡볕에 먼 길을 걸어서 깡시장으로 운반했다. 오늘날 자동차를 이용하면 가까운 거리지만 1960년대까지는 길이 제대로 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산을 넘어서 가야 하는 힘든 길이었다. 깡시장에서 팔지 못한 것은 집들을 돌아다니며 행상으로 팔았다고 한다.
작동 외에 깡시장에 과일과 채소를 제공한 곳은 깊은구지라고 불린 심곡동과 소사구의 솔안말이었다. 깊은구지는 깊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심곡(深谷)이 된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산지를 개간해서 복숭아밭을 만들기도 했다. 깊은구지는 부천역 인근의 깡시장과 가까워서 이곳에서 생산한 복숭아를 비롯한 채소들을 깡시장에 내다팔았다.
깡시장에서 청과물 경매가 이루어질 때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시장을 꽉 메웠다. 특히 복숭아가 출하되는 여름이면 이 지역은 복숭아 향기로 가득 찰 정도였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에 부천역에서 자유시장 쪽으로 나오면 복숭아를 파는 노점들이 즐비했다.
깡시장은 차츰 규모를 키워서 2006년에는 시장 인정을 받았고, 이때 부천청과물시장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부천청과물시장은 바깥에서 보면 시장처럼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시장의 모습이 드러난다. 인접한 자유시장보다 규모는 작지만 거래 규모는 자유시장보다 크다.
2) 소사종합시장
소사종합시장은 1980년에 소사동 일대에서 개설된 전통시장이다. 1978년 무렵부터 장터에 쌀집과 이발소 등이 들어서고 곳곳에 노점들이 형성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었다.
처음 시장이 개설되었을 때에는 골목에 있다고 골목시장, 도깨비시장으로 불렸다. 시장의 위치가 대로변에 있었기 때문에 소사 지역의 사람들이 부천역으로 가거나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시장을 지나야 했고, 그만큼 유동 인구가 많아 비교적 큰 상권을 이루었다.
소사종합시장은 달리 대보시장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현재의 시장 입구 쪽에 14층짜리 세영주상복합타워가 들어서 있는데, 이 복합타워가 들어서기 전에 사람들이 그곳에 장터를 만들고 대보시장이라고 허가를 내서 장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사종합시장이 개설할 무렵 시장 이름을 사람들에게 친숙한 대보시장으로 할 것을 고민하다가 소사종합시장으로 정했다.
3) 그 밖의 시장
부천시는 소사구와 오정구, 원미구로 구성된 도시이다. 자유시장과 소사종합시장이 부천 소사구를 대표하는 전통시장이라면 오정구를 대표하는 시장은 원종제일시장이다. 또한 원미구를 대표하는 시장은 원미부흥시장이다.
원종제일시장은 1983년에 개설되었으며 고강동과 원종동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고강동 쪽에서는 고강원종제일시장이라고 부르고, 원종동에서는 원종고강제일시장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50여 개의 노점들이 모여 있다가 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노점과 점포도 늘어났고, 자연스럽게 시장으로 성장했다. 원종제일시장은 매우 활성화되어 있는 시장이다. 이 지역이 김포공항과 가깝고 서울과 인접해 도시화 과정에서 인구가 크게 늘어난 덕분이다. 시장의 길이는 약 700m 정도인데, 평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원종제일시장 주변에는 원종중앙시장, 원종종합시장, 베르네풍물시장이 위치해 있다. 원종중앙시장은 1991년에 개설되었고, 원종종합시장은 1985년에 개설되었다. 원종중앙시장과 원종종합시장 모두 주민들이 많이 찾고 있어 장세가 유지되고 있다. 베르네풍물시장은 베르네천을 복개한 곳에 세워진 시장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부천 시내의 노점상들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새로 장터를 조성해 개설되었다.
원미구의 부흥시장은 1981년 원미동에 개설된 전통시장이다. 이곳은 1987년에 발표된 양귀자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주요 무대가 된 동네로 유명하다. 처음에는 노점들이 모여들어 장사하다가 시장으로 발전했다. 1985년에 개설된 원미종합시장이 인접해 있어 두 시장을 한꺼번에 원미시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도시화의 과정에서 중동과 상동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이곳에 중동시장과 상동시장이 개설되었다. 이들 시장은 거대한 아파트 단지의 주민들을 상대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판매하며 활성화되어 있다.
5. 시장의 위치와 거래 품목
부천 자유시장은 전철 1호선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부천역에서 남쪽 방향으로 나와 오른쪽으로 조금 향하면 곧바로 자유시장이 나타난다. 시장 입구에는 만화 캐릭터인 왈순아지매의 조각이 세워져 있다. 부천 자유시장은 동서로 길게 점포들이 이어져 있으며 과일, 채소, 생선, 식료품, 의류, 잡화 등을 판매하고 있다.
자유시장 앞에서 도로를 건너 남쪽으로 길을 따라 가면 심곡본동 주민센터 주변에 부천청과물시장이 위치해 있다. 부천청과물시장은 과일과 채소를 전문적으로 도매하는 시장이다.
소사종합시장은 부천역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소사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소사역을 나와 남쪽으로 큰 길을 따라 가다가 소사사거리에서 부천역 방향으로 조금 가면 나오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향하면 곧 시장과 만날 수 있다. 소사종합시장에서는 과일과 채소, 수산물, 식료품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6. 시장의 지리적 배경과 인근 볼거리
부천 지역은 경기도의 중서부에 위치해 있다. 동쪽으로는 서울과 광명, 서쪽은 인천, 남쪽은 시흥, 북쪽은 서울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부천 지역은 남동부 쪽에 산지가 있고, 북서부는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다. 서쪽과 북쪽에서 여러 하천들이 북쪽으로 흘러 한강과 만나는데, 하천 유역에 평야가 발달해 있다. 특히 북서부 쪽에 발달한 평야가 비옥해 농산물의 생산이 많았다.
과거에는 농업이 성행해서 쌀 외에도 감자와 고추, 배추 등이 생산되었다. 복숭아와 포도, 수박도 많이 생산되었지만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농업이 크게 약화되고 그 대신 공업이 크게 발달했다.
이들 가운데 부천의 특산물이던 것이 복숭아였다. 1908년 일본 사람들이 부천으로 이주하면서 복숭아 과수원이 많이 생겨났고, 복숭아 산지로 유명세를 떨쳤다. 4월이 되면 복숭아꽃이 만발해 수도권에서 즐겨 찾는 관광명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3년 부천시로 승격된 이후 복숭아 과수원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이다.
오늘날에는 복숭아꽃 대신에 벚꽃과 장미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원미구에 위치한 도당산은 수도권에서 10대 벚꽃 경관으로 꼽힐 정도로 오래된 벚나무들이 터널을 이루며 꽃을 피워낸다. 또한 도당산 초입에는 백만 송이 장미공원이 있어 벚꽃이 지고 난 뒤 화려한 장미꽃들이 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이 외에 부천둘레길이 조성되어 야트막한 산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부천의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다. 부천둘레길에는 활박물관을 비롯해서 옹기박물관, 유럽도자기박물관 등이 있어서 독특한 문화체험도 가능하다.
또한 부천 지역은 문화의 도시로 불리기도 하는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천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부천국제만화축제와 같은 굵직한 축제들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젊은 세대에서 관심이 높은 영화와 만화를 중심으로 한 문화 도시로서의 위상을 보여주는 축제들이다.
7. 먹을거리
부천 자유시장 주변은 부천의 번화가이고 젊은 사람들을 비롯해 유동 인구가 많기 때문에 먹을거리를 파는 음식점도 많다.
또한 과거 깡시장에 과일과 채소의 공급처였던 까치울에는 먹을거리촌이 형성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이 지역에 특히 많은 음식점은 오리고기이다. 오리고기를 파는 오리전문점이 10곳이 넘으며 닭백숙, 보리밥, 스파게티, 한정식, 커피 등 다양한 먹을거리들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반긴다. 또한 서울과 인접해 있고, 지하철 7호선이 개통되어 접근성도 뛰어나다.
부천 자유시장 1구간 점포 위치도
부천 자유시장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