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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4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마태오 18,15-20
면죄부와 대사는 어떻게 다른가?
오늘 복음은 교회의 권위에 대한 마태오 복음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하늘 나라는 죄와 벌이 모두 사해져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교회에서 파문당하면 하늘 나라에서도 파문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개신교는 그러나 교회의 이 죄사함과 벌까지 면해주는 권한을 교회에 주었음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며 가톨릭은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해 준다는 뜻의 ‘면죄부’를 팔아 바티칸 베드로 성당을 지었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교회에 죄와 벌의 모든 용서의 권한이 주어졌음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며
그 치유가 죄의 용서의 권한이 사람에게 주어졌음을 보여주는 표라고 하신 복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영화 ‘나라야마 무사시코’에서는 고려장과 같이 70세가 넘으면 먹을 것을 줄이기 위해 부모를 산에 버리는 옛 일본 풍습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는 어머니가 아들이 주저하는 것을 보고 일부러 몰래 튼튼한 앞니를 부러뜨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머니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둘째 아들이 첫 경험을 하는 날 큰아들의 지게에 실려서 산에
오릅니다.
새로 태어나면 누군가 죽어야 하는 상징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한 일본의 전설에서는 자기 아내를 살리기 위해 노모의 간을 빼서 달리는 아들에게 어머니의 혼령이 나타나 “천천히 가라. 넘어질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하느님도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나라야마 무사시코에서는 어머니를 버리고 왔더니 슬퍼하는 기색 전혀 없이 어머니의 옷을 이미 나누어 걸치고 있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영화가 마무리됩니다.
하느님께서 교회를 낳으셨고 교회를 통해 구원의 백성이 탄생하기를 원하셨다면 ‘다’ 주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면죄부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면죄부는 죄를 사해준다는 뜻인데, 죄사함을
돈으로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는데 그 은총을 죄인에게 돈을 받고 팔 수는 없는 일과 같습니다.
죄와 벌은 개인의 몫이기 때문에 돈을 받고 죄를 사해준다는 식의 ‘면죄부’라는 말은 가톨릭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고 개신교가 만들어낸 말입니다.
그들이 면죄부라고 말하는 단어는 라틴어 ‘은총의 문서’(Litterae indulgentiales)의 번역입니다.
이는 분명 ‘대사’(Indulgentia)와 차이가 있습니다.
대사는 본래 ‘은혜, 자비’의 뜻으로 로마 제국 시대 특별한 날에 이뤄지는 형벌의 사면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입니다.
대사는 죄의 용서와는 관계없고 일정한 전제조건(기도와 회개, 성지순례, 자선, 교회에 대한 기부 등)을 채울 때 죄에 대한 보속을 감면하거나 전부 없애주는 은총입니다.
대사는 교회가 죽은 이들의 잠벌을 없애주려는 목적도 있지만, 더 큰 목적은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의 신심의 발전에 있습니다.
16세기에는 대사 관행이 널리 퍼졌고 종종 남용되었습니다.
일부 성직자, 특히 독일의 요한 테첼(Johann Tetzel)과 같은 인물은 베드로 성전 재건을 명목으로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을 사거나 미래의 죄에 대한 용서를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면죄부를 판매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방침이 아닌 당시 돈으로 잘못을 되갚는 게르만족의 전통과 결합한 잘못된 관행이었습니다.
교회는 트렌트 공의회(1545~1563)에서 공식적으로 은총의 문서 판매를 금지하였고 1570년에는 대사를 거래하고자 하는 자들을 파문시킨다는 조항을 추가하였습니다.
정리하자면, 하느님께서는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벌을 없애주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죄와 벌을 함께 용서해 주지 않는 이유는 죄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느껴봐야 죄의 무거움을 느끼고 다시는 죄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다윗이 병적조사를 한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흑사병이 들게 하시는 벌은 주셨습니다. 교회가 벌을 사해주는 대사 제도를 시행하는데 은총은 돈을 주고 사고팔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제도는 결국 신자들의 신심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복음: 마태 18,15-20
저 사람 대신 제가 가겠습니다!
교도소나 구치소에 갈 때마다 느끼는 안타까운 일이 한가지 있는데, 재소자들의 가슴에는 하나같이 이름 대신 번호가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민영 소년 교도소 설립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만일 꿈이 이루어진다면, 아이들의 가슴에 번호 대신 이름을 달아주고 이름을 불러주자는 안을 내어놓기도 했습니다.
16670번,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의 번호였습니다.
수용소 안에서 콜베 신부님의 삶과 죽음은 한마디로 무죄한 어린양의 삶과 죽음, 속죄양으로서의 삶과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로 악명 높았던 나찌 수용소 안에서 콜베 신부님은 동료 수감자들에게 마지막 희망이자 위로였습니다.
한 포로가 죽음의 방으로 끌려가며 외쳤습니다.
“내 불쌍한 아내! 내 아이들!”
당시 연병장 내에는 수많은 운동장에 포로들이 서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 말라깽이가 걸어 나오며 외쳤습니다.
“저 사람 대신에 제가 가겠습니다!”
그 한 마디로 인해 콜베 신부는 깊은 지하 감방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열 명의 수감자가 함께 갇혀 있었는데, 물 한잔도 빵 한 조각도 없이 죽음의 순간만을 기다려야만 했던 그곳에서 콜베 신부님의 성덕은 더욱 발휘됩니다.
가장 허약했던 콜베 신부님은 의외로 가장 오래 견딥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였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인 동료 수감자들을 향한 극진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떨던 동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도 힘든 병약했던 콜베 신부님이었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기도와 위로 속에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나서 자신도 떠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기적과도 같은 일이 생깁니다.
평소에 배급이라고 받던 빵 조각들도 늘 남들에게 양보해서 가장 체력이 바닥나 있던 콜베 신부님이었지만, 15일간이나 굶주림을 견디면서 동료들의 눈을 모두 감겨줍니다.
끝까지 생존해있는 콜베 신부님을 확인한 나찌들은 신부님에게 탄산 주사를 맞힙니다.
콜베 신부님, 살아 생전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과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한 투철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신부님의 그러한 신심은 하루하루 피 말리는 수용소 생활 안에서 활짝 꽃피어났습니다.
그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수용소 생활 가운데서도 수감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콜베 신부님을 통해서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곤 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던 그들에게 끊임없이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었던 것입니다.
동료 수사들과 함께 나치에 체포된 후 수용소로 향하는 트럭 안에서의 일입니다.
숨 쉴 틈도 없이 끌려가는 사람들로 빽빽했던 트럭 안에서 동료 수사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기약도 없는 미래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때 콜베 신부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죽으러 가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차까지 타면서 가니 이 얼마나 커다란 행운입니까?
여러분, 이제 우리는 가능한 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더 많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성모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강론>(2024. 8. 14. 수)(마태 18,15-20)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공동체에서는 내 몸이든 형제의 몸이든 모두 내 몸입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5-20).”
1) 이 말씀은, ‘공동체의 형제애 실천’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을, 이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코린 12,14.18.26).”
몸의 일부가 병들었다면, 그것은 몸이 병든 것입니다.
손가락도 내 몸이고, 발가락도 내 몸입니다.
어느 지체가 무슨 병에 걸렸든지, 어떻게 얼마나
다쳤든지 간에 그것은 내 몸이 병들거나 다친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애를 실천해야 하는 것은, 공동체로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이든 형제의 몸이든, 공동체에서는 모두 내 몸이고,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 자신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내 몸에 병이 들었거나 어딘가를 다쳤다면, 가장 먼저 나 자신이 치료를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라는 계명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계명은 “네 이웃은 너 자신이니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입니다.>
2) 예수님 말씀에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네 형제가 죄를 지은 것을 네가 알았거든”입니다.
<죄는 하느님께 짓는 것입니다.
만일에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를 용서하거나 처벌하는 일은 나의 권한이 되어버리는데, 우리에게는 용서할 의무만 있을 뿐이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 권한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네 형제가 주님께 죄를 지은 것을 네가 알았거든”으로 읽는 것이 옳습니다.>
단둘이 만나든지,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만나든지 간에, 죄를 지은 형제를 타이르는 것은, “나는 의인이고, 그는 죄인이니까, 의인으로서 죄인을 타이른다.” 라는 생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같은 죄인’으로서 함께 회개하자고 권고하는 일입니다.
<“너, 회개하여라.”가 아니라, “우리 함께 회개하자.”입니다.>
3)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라는 말씀은, 개인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노력해도 성과가 없다면, 공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자기 혼자서 자기 몸을 치료하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어서 병원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순서의 문제가 아니라 일의 경중에 관한 문제입니다.
작은 상처라면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지만, 반드시 병원에 가야 하는 큰 부상이나 큰 병이 있습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파문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파문’은 ‘최종 선고’가 아닙니다.
파문은, 영구 추방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따라서 파문당한 죄인이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교회는 그를 다시 받아주게 됩니다.
4) ‘공동체’, 또는 ‘형제애’ 라는 말 때문에 무의식중에 ‘남의 일’로 여길 때가 많은데, 만일에 죄를 지은 그 사람이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나의 부모’ 라면?
또는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나의 자녀’ 라면?
그러면, 예수님 말씀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오게 됩니다.
사랑하는 나의 부모나 자녀나 연인이 죄를 지어서
주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는 것을 본다면?
그런 일을 보면서, 죄인의 심판이 이루어짐으로써
주님의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기뻐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을 크게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하늘나라는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나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늘나라 자체는 ‘지극히 행복한 나라’인데,
그 나라에 함께 들어오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슬퍼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극히 슬픈 나라’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지금의 나를 보면서, 또 우리를 보면서, 하늘나라의 성인 성녀들과 가족들이 몹시 슬퍼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