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이야 제철이 없지만, 그래도 떡과 제일 어울리는 계절을 꼽으라면 역시 겨울이겠죠. 추운 겨울, 갓 빚은 뜨끈뜨끈한 떡을 꿀떡꿀떡 삼키는 맛은 한국사람이 아니면 알기 어려운, 그리고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그리워하는 맛이죠. 여기다가 쨍하니 시원한 동치미 국물로 목까지 축인다면…. 그야말로 부러울 게 없지요. 떡으로 우뚝 일어선 전국 최고의 떡마을, 강원도 양양 '송천떡마을'에 다녀왔습니다. D1면에서 소개합니다. 송천떡마을과 다른 전국의 유명 떡마을·떡집은 D2면에서 알려드립니다.
▲ 강원도 양양 송천떡마을 아낙들이 떡메를 친다. 이 마을에선 가능한 한 옛날 하던 대로 떡을 만들려고 애쓴다. 그래야‘그 맛’이 나니까.
찜통 뚜껑을 열자 하얀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더니 누룽지 비슷한 향기가 부엌에 꽉 찼다. 찹쌀이 잘 쪄졌나 살펴보던 손원옥(65)씨가 말했다. "구수한 냄새가 나지? '향미찹쌀'이라서 그래. 이건 (다른 찹쌀보다) 더 비싸. 그래도 우린 좋은 (찹)쌀만 써. 옛날부터 이걸 썼으니까."
강원도 양양군 '송천떡마을'은 새벽마다 떡메 치는 소리로 유명한 떡 마을 중의 하나다.
이 마을에서 떡을 만들기 시작한 건 40여년 전. 마을에서 처음 떡을 만들어 팔았다는 김연화(62)씨는 "가난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그때를 회상했다. "새벽부터 떡을 만들어서 오색약수터로 팔러 나갔어. 마을 꼭대기 언덕에 오색약수터 가는 버스가 있었어요. 새벽 5시 반까지 가서 서 있지 않으면 버스를 못 타. 그러면 오색약수터까지 네 시간 반을 걸어야 했어요."
당시 오색약수터에는 위장병 환자들이 많았다. 환자들에게 김씨가 만든 떡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약수 마시고 인절미 먹으면 위장병 잘 낫는다고 무지 사먹었어요. 찹쌀이 속을 보(補)해준다고 하잖아. 제일 처음 석 되를 해 가지고 갔네. 주먹만한 떡 두 개에 100원밖에 안 받았어요. 그래도 떡 석 되 파니까 쌀 여섯 되는 사겠더라."
떡 장사가 짭짤하단 걸 본 마을 아낙들이 하나 둘 떡 장사에 나섰다. 동트기 전부터 떡메 치는 소리가 마을에 진동했다. 오색약수터로, 설악산으로 가서 떡을 팔았다. 서러움도 많이 당했다. 식당 주인들은 "밥 안 팔린다"며 싫어했고, 국립공원에서는 '잡상인'이라고 단속했다.
송천마을은 '떡마을'로 차츰 소문났다. 1987년쯤 '떡을 집집마다 따로 하지 말고 마을 단위로 공동으로 만들어 팔자'고 의견이 모였다. 2003년에는 마을 떡집을 지었고, 지난 4월에는 18가구가 '송천떡마을영농조합'을 만들었다. 마을이 하나의 회사가 된 것이다. 떡을 팔러 나갈 필요가 없어졌다. 요즘은 떡을 팔라고 밀려오는 주문을 소화하기도 벅차다.
▲ (좌)찌기 전 찰뭉생이. (우)미지떡에 바르는 미지.
송천마을에서 만드는 떡은 인절미에서부터 팥소를 넣은 찹쌀떡(모찌), 밤·대추·콩·늙은호박 따위를 푸짐히 넣은 찰뭉생이(영양떡) 등 다양하다. 처음 만들어 팔았던 '미지떡'도 여전히 인기라고 한다.
미지떡? 그저 손바닥만하게 큼직하게 썬, 평범해 보이는 직사각형 찰떡이다. 특별한 고물을 묻히거나 소를 넣지도 않았다. 그런데 겉에서 들기름 냄새와 함께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냄새가 난다.
김연화씨가 색깔은 석청(꿀)처럼 누르스름한데 밀도는 버터 비슷해 보이는, 액체도 고체도 아닌 묘한 물건이 가득 담긴 사발을 보여주며 "이게 미지"라고 했다. "미지는 여기 사투리로 밀랍이에요. 꿀을 채취하고 남은 벌집을 끓여서 체에 밭친 다음 들기름과 섞어요. 이 미지를 떡에 발라요. 떡이 오래 둬도 굳지 않고 서로 들러붙지도 않아요. 천연 방부제지요."
예전에는 미지떡이 쉬 쉬지 않아 사랑받았지만, 요즘은 '냉동해도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랑받는다. "떡을 아무리 냉동실에 넣어둬도 오래되면 이상한 냄새가 나고 하잖아요. 미지떡은 그런 게 덜해요."
어엿한 영농조합이 됐지만 떡 만드는 방식이나 재료는 40년 전과 똑같다고 주민들은 자부한다. 특별히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래야 옛날 떡 맛 그대로 난다는 것이다.
▲ 송천떡마을 아낙들의 인절미 써는 솜씨가 한석봉 어머니 뺨친다.
가능한 한 기계를 쓰지 않고 떡메로 쳐서 만든다. 찹쌀이 완전히 뭉개지지 않고 남아 있어서 자연스럽게 씹힌다. 질 좋은 찹쌀을 써서 그런지 구수한 향기가 유난히 짙고, 기분 나쁘게 이에 들러붙지 않으면서 적당히 차지다. 명절이나 휴가철 등 주문이 몰릴 때는 부득이하게 기계로 떡을 치기도 하나, '반드시 떡메로 쳐서 만들어달라'고 꼭 집어 주문하는 이들도 많다. 송천마을에서는 5되(8㎏·인절미 기준 4만원) 이상 주문하면 1만원을 추가로 받고 떡메로 쳐준다.
영농조합 대표를 맡고있는 송천마을 이장 탁상기(54)씨는 "결국 옛날 하던 그대로 하는 게 가장 좋더라"고 말했다. "떡 유통기한이 여름에는 대여섯 시간밖에 안 돼요. 그래서 11월부터 3월까지만 택배를 하고, 나머지 계절에는 고속버스로 부쳐 드려요. 버스터미널에 와서 찾아가야 하니까 불편하지요. 냉동해서 보내달란 분도 있어요. 하지만 그러면 우리 떡 원래 맛이 나지 않아요. 손님들이 우리 떡을 찾는 게 옛날 맛 그대로이기 때문이잖아요. 요즘은 유통기한이 짧은 걸 오히려 '천연 재료만 쓴다'며 손님들이 좋아해요. 단점이 장점이 된 것 같아요. 그래서 늘 하던 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옛날과 똑같은 재료를 써서 똑같은 방법으로 만들어 똑같은 맛이 나는 떡을 맛보는 행복을 두고두고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