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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양(陰陽)이 나뉘어 귀천(貴賤)이 정해진다. 양(陽)은 귀하고 음(陰)은 천하며, 양은 1이고 음은 2이니, 2가 아니면 귀한 것을 섬길 수가 없다. 만물이 모두 귀하거나 모두 천하면, 천지는 위치를 잡을 수 없고, 모두 1이거나 모두 2이면 만물이 성립할 수 없다. 반드시 천한 것이 귀한 것을 받들고, 2가 1을 섬긴 뒤에야 사리(事理)가 정해지고 조화가 완성된다.
1은 하나로 정해진다는 것이고, 2는 만(萬.매우 많음)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1이고 땅과 사람은 2이며, 해는 1이고 달과 별은 2이다. 남편은 1이고 처첩(妻妾)은 2이며, 아비는 1이고 자녀(子女)는 2이다. 임금은 1이고 신민(臣民)은 2이며, 재상은 1이고 서관(庶官)은 2이다. 장수는 1이고 사졸(士卒)은 2이며, 주인은 1이고 노비(奴婢)는 2이다. 군자는 1이고 소인은 2이며, 선(善)은 1이고 불선(不善)은 2이다.
가까이에서 비유하자면, 가옥은 동량 하나와 주미(柱楣.기둥과 도리) 둘에서 완성되며, 수레는 축 하나와 윤폭(輪輻.차대) 둘에서 완성된다. 천지 사이에 있는 수많은 사물들이 모두 이런 이치이다. 간혹 이치가 상도(常道)에서 벗어나 2가 1에 맞서면, 사물이 망가지고 집안과 나라가 망한다. 이치에 통달하지 못한 자는 2가 많고 1이 적다는 것만 보고는 마침내 하늘을 의심하고 선한 일에 태만하여 불선(不善)을 경계하지 않는다. 아아, 하늘은 2를 기다려 완성되니, 어찌 그 2를 적다고 하겠는가.
● 1의 지위는 높고, 2의 자리는 낮다. 1의 일은 편안하고, 2의 사역은 수고롭다. 1의 길은 평평하고, 2의 길은 험난하다. 1의 지킴은 간략하고, 2의 작용은 번잡하다. 1의 마음은 바르고, 2의 정(情)은 사특하다. 군자는 1을 알아 공경하여 잃지 않으며, 소인은 2를 써서 방자하게 스스로를 속인다. 2는 방자하기 때문에 악(惡)을 따라 아래로 가고, 1은 공경스럽기 때문에 선(善)을 따라 올라간다. 그래서 군자는 늘 적고 소인은 늘 많으며, 다스려지는 날은 늘 적고 어지러운 날은 많다.
그러나 천지가 추락하지 않고, 해와 달이 어두워지지 않으며, 만물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모두 1의 공력이다. 사람이 만일 존귀함과 편안함, 평평함과 간략함, 바름 등을 버려두고 기꺼이 그 반대로 나아간다면, 아무리 성인이라도 어쩔 방도가 없다.
● 천지는 자(子)ㆍ축(丑)에서 시작하는데, 자(子)는 북방(北方)이다. 육갑(六甲)은 임자(壬子)와 계축(癸丑)에서 시작하는데, 자축(子丑)의 운회(運會)는 만물을 낳지 못하고 임계(壬癸)의 운회는 계절로 보아 겨울이다. 천지가 체(體)만 있고 용(用)이 없기 때문에 인(寅)으로 봄기운을 회복하며, 만물이 처음 생기는 운회가 더해진다. 자축을 육갑의 첫머리로 삼은 것도 사람들이 안배한 바가 아니다. 극도로 궁박한 상황에서 살길이 생기게 마련이니, 이치가 자연 이와 같다. 역사를 편찬하는 사람이 “천황(天皇)이 해〔歲〕를 섭제(攝提.寅)에서 시작했다.”라고 말했는데, 바로 이것이다.
● 자(子)ㆍ축(丑)에서 천지가 열렸지만 만물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봄의 첫머리가 될 수 없다. 무사(無事)를 주로 하며 겨울에 있지만, 겨울은 만물이 정(貞)으로 돌아가는 계절인데 건원(乾元)이 주관한다. 이는 정(貞)에서 원(元)으로 회복되는 이치이다.
● 하(夏)나라에서 시행한 책력은 인통(人統)인데, 이는 곧 천황의 세(歲)가 섭제(攝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만물의 생성을 정치의 시작으로 삼으니, 황왕(皇王)이 하늘을 체득하여 기준을 세우는 도리이다.
● 천지는 24방위가 있는데, 1년의 24기(氣)가 골고루 짝한다. 선천 팔괘(先天八卦)의 진(震)ㆍ손(巽)ㆍ간(艮)ㆍ태(兌)가 4립(立)이 되고, 건(乾)ㆍ곤(坤)ㆍ감(坎)ㆍ리(离)가 4중(仲)이 된다.
진(震)은 움직임이다. 만물이 생동하는 기운이 이르기 때문에 입춘(立春)이 된다. 봄은 준동(蠢動)이다. 손(巽)은 들어감이다. 만물이 수렴하는 기운이 이르기 때문에 입추(立秋)가 된다. 가을은 추렴(揫斂)이다. 태(兌)는 기쁨이다. 만물이 양육되면 기쁘기 때문에 입하(立夏)가 된다. 간(艮)은 그침이다. 만물을 거두어 저장하면 그치기 때문에 입동(立冬)이 된다. 여름은 크다는 뜻이니, 기쁘며 크다. 겨울은 끝난다는 뜻이니, 그치며 끝난다.
건(乾)은 순수한 양이지만 음(陰)이 생기기 때문에 하지(夏至)가 된다. 곤(坤)은 순수한 음이지만 양이 생기기 때문에 동지(冬至)가 된다. 리(离)는 해이다. 해가 동쪽에서 뜨고 온난(溫暖)을 주관하기 때문에 춘분(春分)이 된다. 감(坎)은 달이다. 달은 서쪽에서 뜨고 음량(陰凉)을 주관하기 때문에 추분(秋分)이 된다. 8절기(節氣)가 정해진 뒤에는 16절기도 이런 식으로 순서가 매겨진다. 후천팔괘(後天八卦)가 8절기에 배정되는 것은 모두 자연의 오묘함이다.
진(震)은 장남(長男)으로 춘분의 탄생을 주관한다. 태(兌)는 소녀(少女)로, 추분의 형성을 주관한다. 이(离)는 양 중의 음을 포함하고 있으니 하지(夏至)이다. 감(坎)은 음 중의 양을 포함하고 있으니 동지이다. 간(艮)은 소남(少男)으로, 발생의 기제(機制)를 시작하여 입춘(立春)이 된다. 곤(坤)은 노모(老母)로, 순종하여 거두는 임무를 검속하여 입추(立秋)가 된다. 건(乾)은 노부(老父)로, 보관하고 축적할 줄 알므로 입동(立冬)이 된다. 손(巽)은 장녀(長女)로, 음식 장만하고 기르는 일을 주관하여 입하(立夏)가 된다. 이러한 이치로 인간의 몸에 있는 장부(臟腑)와 혈맥(血脉)을 검증하면 병을 고칠 수 있고, 행동에 미루어 보면 덕(德)을 닦을 수 있다.
● 4립(立)의 이름을 춘립(春立)이나 추립(秋立)이라고 하지 않고 입춘과 입추라고 한 것은, 천운(天運)의 순환을 주로 하여 말한 것이다. 물의 왕성함이 물러가니 이날에 나무를 심고 봄이 된다. 우수(雨水)는 땅과 하늘이 사귀어 태평(泰平)이 되니 음과 양이 화합하여 비가 내리고 물에 이른다. 경칩(驚蟄)은 번개가 쳐서 칩거하는 곤충들을 놀라게 한다. 춘분(春分)은 모든 물건이 가지런해진 뒤에 나뉜다. 이날 이전은 여전히 춥고 이후는 조금 따뜻하지만, 이때만은 춥고 따뜻한 것이 같고, 백각(百刻.하루)을 가운데서 나누어 보면 밤낮의 길이가 같기 때문에 봄의 분기점이 된다. 청명(淸明)은 바람이 온화하고 날씨가 따뜻하며, 하늘과 사물의 자태가 맑고 밝다. 곡우(糓雨)는 파종을 위한 비가 내린다.
입하(立夏)는 불이 왕성하다. 소만(小滿)은 양(陽)이 여기에 이르러 육순(六純)이 된다. 모든 사물은 차면 반드시 변화한다. 군자는 양이 변화하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양이 극도로 차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 중기(中氣.24절기)에서 소만을 좋아하면서도 이어서 경계하는 뜻을 담았다. 15분(分)을 더하면 대만(大滿)이 되는데 하나의 음(陰)이 이미 생기게 되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망종(芒種)의 경우, 곡식 중에 까끄라기가 있는 품종은 벼와 보리인데, 보리가 이때 오면 익어서 종자가 될 수 있고, 벼는 이때 이르면 모종하여 심을 수 있다.
하지(夏至)는, 모든 사물이 극도로 번성하면 변하며 양(陽)이 극도에 이르러 변하기 때문에 지(至)라고 했다. 해가 북쪽 끝까지 갔기 때문에 역시 지(至)라고 한다. 소서(小暑)는 두 음(陰)이 양을 쫓아내지만 양이 아직 아래에 있으므로, 날씨는 5월에 비해서 뜨겁다. 무더위는 열에 찌는 느낌이 있는 것이다. 이 달에는 흙이 전적으로 일을 주관하는데, 태음(太陰)은 젖은 흙의 기운으로, 불과 서로 가까워지므로 찌면서 막혀 있기 때문에 무더위가 된다. 대서(大暑)는 양이 더욱 궁색해지고 습기가 더욱 찌는 까닭에 특히 ‘크다.〔大〕’고 했다.
입추(立秋)는 입춘과 같다. 처서(處暑)는 세 음(陰)이 내려와 땅 위가 모두 음이다. 무더위가 땅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늘 양을 보호하여 이름을 세우기 때문에 음을 가지고 무더위를 물리친다고 말하지 않고 양이 해(害)를 피한다는 뜻에서 처서(處暑)라고 말하는데, 처사(處士)라는 용법과 같고 양이 스스로 들어가 쉰다는 뜻이다. 백로(白露)는, 가을이 사물을 죽이는 계절인데 이슬은 오히려 양의 윤택이기 때문에 이슬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추분(秋分)은 따뜻하고 서늘하며, 밤과 낮이 같으면서 분기점이 된다. 한로(寒露)는 이슬이 내리더라도 기온은 점점 추워지는데, 추워지면 이슬이 서리가 된다. 상강(霜降)은 풀을 죽이지만 만물의 열매를 익게 한다. 비록 죽이면서도 생성의 길이 있기 때문에 곡우(糓雨)와 서로 짝한다.
입동(立冬)은 입하와 같다. 소설(小雪)은 순수한 음(陰)의 달이라 양이 없다는 혐의가 있지만, 양이 올라가 음과 화합한 뒤에 눈이 되기 때문에 굳이 눈이라는 절기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대설(大雪)은 하나의 양이 이미 땅속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눈의 징후가 더욱 크다는 뜻이다.
동지(冬至)는 이때에 음이 극에 이르러 양으로 변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지(至)라고 한다. 해가 남쪽 끝까지 갔기 때문에 또한 지(至)라고 한다. 소한(小寒)은 두 양(陽)이 음을 쫓아내지만 음이 아직 위에 있기 때문에 날씨가 11월에 비해서 춥다. 추우면 사물이 단단해진다. 사물이 단단해지면 삶의 의지가 충실해지기 때문에 군자가 귀하게 여긴다. 날이 무더우면 찌면서 생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기 때문에 만물이 비고 썩어서 쉽게 병에 걸린다. 추우면 견고하면서 오로지 진기(眞氣)만 안에 있게 되기 때문에 만물이 더욱 단단해지고 잘 다치지 않는다. 육기(六氣)의 태양(太陽)이 차가운 물과 짝하면 만물의 대양(大陽)이 안에 있기 때문에 추워도 삶의 의지가 충실해진다.
● 일출(日出) 때 보면 바다의 파도가 붉게 물들고 오색구름이 시퍼렇게 피어오르면서 선명한 붉은 바퀴가 파도 속에서 솟구쳐 나온다. 일몰을 보아도 이와 같다. 왜인(倭人)들이 자기들 동해에서 뜨는 것을 보고, 서양인들이 자기들 서해로 지는 것을 보면 비슷하다. 왜인들이 우리 동해로 지는 것을 보고, 중국이 우리 서해에서 뜨는 것을 보며, 서양이 중국의 서해에서 뜨는 것을 보고, 나는 중국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동해로 지는 것을 본다. 등주와 내주로부터 서양의 서해까지는 거의 만리이다. 우리나라 강릉(江陵)의 동해에서 뜨는 것을 보는데, 강릉에서 왜국(倭國)의 동해까지는 거의 만리이다.
그런데도 수레바퀴 같은 해가 분명히 그 바다로 출입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더구나 해가 집 뒷산에서 뜨면 온 세상이 아침이 되고, 집 앞산으로 지면 온 세상이 저녁이 된다. 세상 사람의 거주지가 모두 그렇다. 귀신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명료히 눈으로 보면서도 그 이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지극히 높고 큰 존재의 변화가 이와 같다. 성인이 하는 일을 보통 사람은 본디 모른다고 하니, 맹자(孟子)의 말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 만물의 대소(大小)를 막론하고, 사사로운 의도가 없으면 신령함을 헤아릴 수가 없다. 사사로움이 없으면 하늘이기 때문이다. 짐승과 벌레의 신령스러운 변화가 모두 인간보다 우월한 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짐승 중 큰 짐승은 신령함이 작은 짐승에 미치지 못하는데, 크면 사사로움도 커지고 작으면 사사로움도 작아지기 때문이다.
지금 두엄에 있는 구더기, 쌀에 있는 바구미, 벽에 붙은 노랭이, 옷에 붙어 있는 좀 등을 얼른 잡아서 뜰에 던져 땅에 떨어뜨리면 바로 안으로 들어온다. 백 번 해 보아도 백 번 다 그런 것은 지극히 신령스럽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지만 사사로운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령스러움이 구더기나 이에 미치지 못하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 1원(元) 12회(會)의 연수(年數)는 적당히 안배하고 억측해서 아는 것은 아니다. 다만 1년의 월, 일의 수(數)를 추론해서 필연적으로 그리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요순(堯舜)은 사회(巳會)와 오회(午會)의 만남에 해당하니, 세대(世代)로 헤아린 것이 아니다. 다만 하루 아침저녁의 운행으로 측정하여 필연적으로 그리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참위설(讖緯說)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각각 연대를 어지럽게 말하는데, 이치로 보아 모두 근거가 없으니 믿을 수가 없다.
● 어떤 사람은 “당우(唐虞.요순)가 오시(午時)의 가운데에 만나지 않았다. 왜 그런가?”라고 묻는다. 하루의 양(陽)은 사시(巳時)와 오시가 교차할 때 가장 왕성하다. 오시 반을 지나면 음(陰)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사시와 오시의 교차는 바로 소만(小滿)이 있는 4월 중이다. 양의 운(運)이 한창 장성하고 음이 아직 오기 전의 운이니,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당우가 되는 운이다.
● 지금은 오회(午會.中天)의 반으로 이미 음(陰)의 운(運)에 속한다. 그러므로 중국이 오랑캐에게 망했지만 해외 여러 나라와는 멀어도 통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 바로 하루 중 오시의 운이다. 이후 점차로 요순(堯舜) 이전의 시대를 거슬러 짝하여, 사람과 귀신이 섞여 짙은 안개 속 같은 세상이 되며, 소의 머리, 뱀의 몸을 해가지고 일정한 주거도 없이 짐승처럼 먹는 시대를 거쳐, 만물이 닫히고 하늘을 소멸시키기에 이르는 것은 필연의 이치이다.
● 천지 사이에 귀신(鬼神)이 없는 사물은 없다. 귀신이란 형색이나 영상(影像)이 있어서 저것이 귀신이라고 가리켜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천지 사이에 기(氣)가 없는 사물도 없다. 기가 바로 신(神)이다. 신이 되는 근거가 바로 이(理)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경우에는 구름ㆍ안개ㆍ번개ㆍ천둥ㆍ비ㆍ햇살ㆍ서리ㆍ눈 등에 모두 신이 있다. 땅의 경우에는 산림ㆍ연못ㆍ습지ㆍ구릉ㆍ구덩이ㆍ강ㆍ바다에 모두 신이 있다.
썩은 나무, 썩은 토양에까지도 신이 있다. 태허(太虛)의 공중에도 모두 쌓인 기가 있으니, 허공도 모두 떠도는 신이다. 천지가 사물을 낳을 때 모두 먹는 것을 도(道)로 삼았기 때문에 귀신도 음식을 대접받을 수 있다. 성인이 그 이치를 깊이 이해했기 때문에 귀신을 섬기는 제사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산에 제사를 지내면 따로 어떤 무엇이 있어 산신(山神)이 되어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다. 산에는 산의 기가 있으니 불러서 제사의 주인으로 삼고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면 바로 음식을 흠향하는 신이 있게 된다.
전(傳)에 ‘귀신이 굶는다.〔鬼餒〕’라는 말이 있고, 불교의 서적에도 ‘아귀(餓鬼)’라는 말이 있다. 허공을 가득 채우고 떠도는 귀신으로, 불러서 제사의 주인이 된 적이 없는 것이 모두 아귀이다. 불가에서는 이에 대해 본 것이 있었고, 허공에 가득 찬 것이 아귀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므로 재식(齋食 불가(佛家)의 식사)을 베풀고 아귀를 꾸짖어 막는 법이 가장 엄밀했다. 상도(常道)는 아닌 듯하지만 그 이치는 옳다.
음식에 대한 성인의 예(禮)에도 이런 의미가 있는데, 다만 바른 데 합치할 뿐 따로 명칭은 없이 백성들의 번독함을 막아 주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할 뿐이다. 세상 사람들이 “두진(痘疹.홍역 같은 병)이나 온역(瘟疫.급성 전염병)에도 모두 신(神)이 있다.”라고 하는데도, 융통성 없는 선비는 그것이 망녕되다고 꾸짖으며, 유행하는 기운이 바로 신이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 만일 상스럽고 속된 사람들이 푸닥거리를 받들면서 메아리처럼 곧장 감응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면 잘못이지만 거기에 신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실제 이치이다. 이미 실제 이치가 있으니, 또한 감응하는 오묘함이 없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이는 통달한 사람과 할 말이지 세속의 선비와 할 말은 아니다.
● 도가(道家)에서는 옥경(玉京)이나 월궁(月宮)을 말하고, 불교에서는 지부(地府.저승)나 용궁(龍宮)을 말한다. 당나라 이래로 그런 말이 점차 사실인 것처럼 되어 왔으나, 진실인지 허망한 말인지는 알 수 없다. 오직 정자와 주자의 말이 정론이겠지만, 역시 분명하게 말하지 않아서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설사 그들의 말이 정말 그런 일이 있어도, 세속 풍습이 괴이한 것을 좋아하고 또 게다가 장생(長生)과 화복(禍福)에 대한 욕구가 있어서 군자가 앞서 이끌면 온 세상 사람이 파도처럼 달려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성인(聖人)이 괴이한 일과 신령한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이유가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송(宋)나라 휘종(徽宗) 때 도사(道士)가 천제(天帝)를 섬기는 일에 대해 아뢸 적에 규성(奎星)을 보고 조회에서 아뢰었던 인물이 바로 소식(蘇軾)이었다. 소식은 이름 있는 학자였지만, 천도(天道)의 공정한 이치로 말하자면 당시 뛰어난 기운을 받았던 사람이 어찌 소식 한 사람뿐이었겠는가. 다른 사람은 보지 않고 유독 소식만 보았으니, 안기생(安期生)과 불도징(佛圖澄)을 만났다는 이야기와 가깝지 않겠는가. 아무리 신령과 통하는 도사라도 분명 사마공(司馬公.司馬光)이나 이정(二程.程顥와 程頤 형제)을 보지는 못했을 것이니, 어찌 사마광과 이정이 상제(上帝)를 섬기기에 부족하다는 말인가. 저 소식은 평소의 학술과 명망이 소인(小人)과 합치되는 점이 있었기 때문에 도사가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소공(蘇公)을 두고 생각하자면 애석하도다. 그런데도 소씨를 존숭하는 자들은 지금까지 이를 미담(美談)으로 생각하니, 그 역시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부(地府)를 보았다는 자가 무수하니 누가 반박할 수 있겠는가만, 그 이야기는 너무도 진지함에 문제가 있다. 특히 명호(名號)나 관직(官職)이 사람들의 생각에 납득되기 어렵다. ‘하 판관(河判官)’이나 ‘황보 판관(皇甫判官)’ 같은 자들이 지황(地皇.고대 전설상의 황제) 원년에 관직을 받았다고 하지만, 전한(前漢) 이전에는 ‘하(河)’나 ‘황보(皇甫)’ 같은 성이 아직 생기지도 않았다.안연(顔淵)과 복상(卜商.공자 제자인 子夏)의 ‘수문사인(修文舍人)’처럼 나중에 선발되어 들어간 사람으로 후한(後漢) 이후에 관직을 받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지부가 공정한 도리에 입각해서 사람을 써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을 수천 년 동안 오래 임용하고 직임을 교체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요즘 설재(設齋)하여 귀신을 부르는 자들이야말로 귀신에게 잘못 비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부나 용궁이 정말 있다고 해도 지부와 용궁은 지부와 용궁이고, 인간 세상은 인간 세상일 뿐이다. 왜 굳이 그런 논의를 빌려다가 우리 이야기를 신비화하는가. 그러므로 선비의 말은 지금 눈앞의 부자ㆍ군신ㆍ부부, 인의예악(仁義禮樂) 같은 당연한 일을 제외하고 반 푼 어치라도 현묘하거나 기이한 데로 옮아 가게 되면 모두 이단(異端)이 된다.
● 별의 정기(精氣)가 내려와 사람이 된다는 말은, 기미성(箕尾星)이 된 부열(傅說) 이후 분명히 증명해 주는 사례가 많다. 그렇지만 만일 성현(聖賢)이 모두 반드시 별에서 내려왔다면 공자도 반드시 명백히 별이 내려와 탄생했다는 자취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비둘기가 변하여 송골매가 되었다고 해도 천하의 송골매가 어찌 죄다 비둘기가 변한 것이겠는가. 분명 세상 사람들이 그 생사를 신비스럽게 보이게 하려고 황당한 이야기를 빌려 꾸몄으리라.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
● 불설(佛說)에서는 사람의 운명이 모두 북두(北斗)에 예속되어 있다고 말하고, 각기 별 모양을 그려 부적을 만들어 기도한다. 그 이치가 진실한지 허망한지는 모르지만 별 모양으로 만든 칠부(七符)는 극히 요사스럽고 터무니없는 말이다. 지리가(地理家)가 마침내 이를 통해 그 학설을 신비화하여 칠성(七星)의 형상을 기준으로 천하의 산(山)을 몰아다가 이름하기를, 이것은 ‘탐랑체(貪狼體)’, 저것은 ‘파군체(破軍體)’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신비하고 기이하게 생각하여 다투어 몰려든다.
하늘과 땅은 하나의 이치이니 어찌 유독 칠성의 형상을 산에 빗대겠는가. 수ㆍ화ㆍ금ㆍ목ㆍ토 같은 오위(五緯)도 의당 각각 형상이 있는데, 왜 ‘태백체(太白體)’, ‘형혹체(熒惑體)’라고는 부르지 않는가. 더구나 28수(宿)는 항상 그 자리에 있는 하늘의 별이므로 더욱 당연히 각성(角星)의 목교체(木蛟體), 항성(亢星)의 금룡체(金龍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오행은 하나인데, 목성(木星)의 만두(巒頭)에, 왜 유독 탐랑목(貪狼木)만 형상화하고, 세성목(歲星木)이나 각성목(角星木)은 형상화하지 않는가. 그 술수가 참으로 허술하다. 식자라면 현혹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천하의 산 중에 본래 숭산(嵩山)이나 화산(華山)보다 큰 데가 많다. 그런데도 오직 다섯 산만 악종(岳宗.산 중의 으뜸)으로 삼았으니, 그 산의 정신과 영기(靈氣)가 다른 산들보다 매우 다른 데가 있기 때문에 성인이 언급한 것이다. 그러니 그 나머지는 조교(曹交)가 말한 키만 10척(尺)인 산들이다.
● 중국은 동남쪽에 편향되어 있고 동해가 역내(域內)에 있으니, 오묘한 조화이다. 중국이 땅의 정 가운데 있고 사해(四海)가 모두 멀리 서북쪽에 있었다면, 어떻게 그 보장(寶藏.소중한 지하자원)을 활용하겠는가.
● 우씨(虞氏.舜)가 명산대천을 바라보며 차례를 정하여 제사한 예(禮)는, 멀어서 어디는 가고 어디는 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바라보며 제사를 지낸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며 제사를 드렸는데도 신이 모두 마치 옆에 있는 듯 흠향했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그렇게 한 것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제사를 지내지 않았을 것이니, 분명 거짓이거나 망녕스런 행동이 아니다. 성인은 위선이 없으니, 오직 이 성실함뿐이다. 이것이 의상을 드리우고 있자 천하가 다스려지는 이유이다. 바로 《논어》에 이른바 “교(郊) 제사와 체(禘) 제사에 대한 내용을 아는 사람은 천하 다스리는 일을 손바닥에서 움직이듯 할 것이다.”라고 했던 말이다. 한유(韓愈)는 학문이 끊어진 뒤에 태어났는데도 “교 제사를 지내니 하늘의 신령이 이르고, 종묘에 제사를 지내니 사람의 귀신이 흠향한다.”라고 했다. 호걸지사(豪傑之士)가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자후(子厚.柳宗元)나 자첨(子瞻.蘇軾) 같은 무리라면 일찍이 꿈에서라도 생각이나 했겠는가.
● 하늘과 사람 사이에 간격이 없다고 옛사람들은 말했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다. 그 실제는 하늘이 곧 사람이고 사람이 곧 하늘로, 원래부터 일체였으니 간격이 없다는 말조차도 오히려 실질과 거리가 멀다. 경전(經傳)에 “우리 백성들을 통해 보고, 우리 백성들을 통해 듣는다.〔自我民視 自我民聽〕”라고 했는데, 여기에서의 ‘자(自)’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自此至彼〕’라고 할 때의 ‘자’ 자가 아니라, ‘자가(自家)’라고 할 때의 ‘자’ 자이다.
하늘이 보는 것이 곧 백성이 보는 것이고, 하늘이 듣는 것이 곧 백성이 듣는 것이다. 그래서 군자는 홀로 있을 때도 삼가며 하늘에 죄를 얻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 중에는 은밀히 흉악한 짓을 하는 자가 많은데도 하늘이 꼭 벌을 내리지는 않았으니, 어찌 벌을 받아야만 죄를 얻었다고 하겠는가. 관청에서는 사적인 도살을 금지한다. 일반 백성들이 도살을 하는 행위는 죽어도 그 죄가 용납될 수 없다. 그렇지만 잘난 척하는 자들이 멋대로 도살하면서도 꼭 죄를 받지는 않았으니, 이 어찌 사적인 도살이 죄가 아니라는 말이겠는가. 군자는 함부로 소를 죽이지 않으니, 이 어찌 반드시 죽을 죄를 얻을 것이 두려워서 하지 않는 것이겠는가. 원래 법률상 삼금(三禁 소나무, 술, 소와 관련된 무단행위 금지법)에 속하는 대상물이므로, 요행히 죄를 면하더라도 스스로 자기 마음에 추하게 생각되면 이것이 죄를 얻는 것이다. 하필 형벌을 받고 목이 잘린 뒤에야 죄를 얻었다고 하겠는가. 요행히 법망을 벗어나는 것을 두고, 군자는 모면했다고 하지 않는다. 성인은 구만리 밖을 하늘로 여기지 않고 단지 내 마음에 하늘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늘에 앞서서 일을 행할 때에는 하늘이 이를 어기지 못하고, 하늘보다 뒤에 행할 때에는 하늘의 때를 받들었다.
삼대(三代.하은주) 이후로 선악의 응보가 어긋나는 경우가 수없이 많았다. 그래서 설명하는 사람들이 매번 하늘을 의심하고 나아가 하늘을 원망하기까지 했다. 하늘이 만약 그 말대로 상을 주고 벌을 준다면, 그 상은 정자산(鄭子產)이 자기 수레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건너게 해 준 경우와 가깝지 않겠으며, 그 벌은 조광한(趙廣漢)의 항통(缿筩)에 가깝지 않겠는가. 통치 대상이 구주(九州)의 백성에 지나지 않았고 재위 기간이 50년이었던 순 임금에 대해서도 고요(皐陶)는 오히려 군주의 좀스럽고 번잡한 방식을 경계했는데 하물며 육합(六合)의 다양한 대상을 통치하고 재위 기간이 12만 년인 하늘이 어찌 선(善) 하나를 살피고 악(惡) 하나를 징벌하겠는가. 제순(帝舜)의 좀스러움은 그 나라를 망칠 것이고, 하늘의 좀스러움은 천지를 망칠 것인데, 하늘이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그러나 유자후(柳子厚.柳宗元)는 감히 하늘을 원망하고 그에 대한 글을 써서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 유자후의 선이 당시 정권을 잡은 사람들보다 나은 점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유자후는 왕비(王伾)와 왕숙문(王叔文)의 압객(押客)이 되었던 죄가 감형되어 지방관으로 좌천된 것도 이미 다행이라고 할 것인데, 어찌 다시 그의 하잘것없는 선행을 기록했다가 서용(敍用)할 대상에 올릴 겨를이 있었겠는가. 또 유종원이 유주(柳州)에서 죽은 것에 대해 지금까지 사람들은 원통하다고 말하는데, 유주에서 죽은 것이 유종원의 행운이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말이다.
유종원은 미세한 한 마음이 이미 십육당(十六黨)에 빠졌으니, 만일 서용되어 문장(文章)을 믿고 조정에서 이름을 날렸다면 그 악이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렀을지 모르겠다. 재주를 믿고 다른 사람에게 오만했으며, 벼슬에 안달을 내고 권력을 탐했고, 사사로운 은혜는 잊지 않고 원수는 갚으려고 했던 것이 그의 본래 기량이다. 어찌 한 번의 귀양이라는 경고만으로 스스로 깨닫겠는가. 그나마 유주(柳州)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의 문장 표현에 스스로 원망하고 뉘우치면서 이치에 가까워진 데가 있었다. 그래서 옛 친구인 한자(韓子 한유(韓愈)) 같은 사람들도 슬퍼하고 동정했으며, 그의 잘못은 잊고 그의 좋은 점만 기록했다. 죽어서도 그 땅에서 제사를 받아먹으며 천 년 동안 제사가 폐지되지 않았으니, 이는 유종원의 큰 행운이었다. 유종원 같은 사람이 하늘을 원망한다면 너무도 스스로 헤아리지 못했다고 하겠으니, 거의 식부궁(息夫躬)과 다를 바가 없다.
당송(唐宋) 이래 시문(詩文)을 잘했던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뜻을 얻지 못했다고 자처하면서 모두 하늘을 원망하는 글을 남겼으니, 시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선(善)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만일 성인이 산정(刪定)했다면, 단지 문장이 되고 말이 통하는 것만 택하여 《시경》의 정풍(鄭風)이나 위풍(衛風)에 비견하여 후대 사람들이 뉘우치고 경계할 자료로 삼았을 것이다. 언제 한 편, 반 구절이나마 선한 마음을 감동시켜 인간의 성정을 착하게 만들 수 있었겠는가.
세상에 손회종(孫會宗)이 없으니 편지를 보내 깨우치지도 않고, 더구나 따라서 그 원망하는 글을 기리니 어찌 괴이하지 않은가. 하늘을 원망하는 사람은 반드시 공자와 맹자, 정자와 주자가 때를 만나지 못한 일을 글머리에 쓰되, 마지막 부분에 자신의 사정을 붙여 원통함을 풀어놓는다. 하늘의 뜻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만일 공자와 맹자가 일찍이 현명한 임금을 만나 총재(冢宰)가 되어 천하를 다스렸다면 당시의 행운은 정말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다면 《논어》와 《맹자》의 인의(仁義)와 성명(性命)에 대한 학설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요순(堯舜)과 문왕, 무왕의 도(道)가 이미 연기나 안개처럼 사라져 만고의 역사가 긴 밤이 되었을 것이다.
만일 정자와 주자가 일찍이 현명한 임금을 만나 지위를 얻어 도를 실천했다면 당시에는 정말 행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육경(六經)이 흙이나 마른 풀처럼 가치 없게 되었을 것이고, 공자와 맹자는 묵적(墨翟)이나 순황(荀況)이 되었을 것이며, 만고의 역사가 긴 밤이 되었을 것이다. 한당(漢唐) 시대에 왕도(王道)를 펼치지 못했지만, 완전히 오랑캐가 되지 않고 사람다움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은 공자와 맹자가 지위를 얻지 못한 공(功)에 힘입은 것이다. 원명(元明)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천하의 어지러움이 극에 달했지만 그래도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의 도리가 유지되는 것은 정자와 주자가 때를 만나지 못한 힘 덕분이다.
상제(上帝)가 언제 춘추 시대나 조송(趙宋)의 일시적인 다행을 위해 두 성인과 두 현인이 시대를 만나도록 하겠는가. 성인이 하는 일은 순우곤(淳于髡)의 변설로도 오히려 알 수 없고, 한신(韓信)이 사지(死地)에 놓일 줄은 또 장이(張耳)의 지혜로도 오히려 알 수 없었는데, 하물며 하늘이 하는 일을 소인(小人)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천지는 이치가 있지만 사념(思念)은 없다. 사람이 그 이치를 받아 마음으로 삼았으므로 천지의 보고 들음이 되고 천지의 사려(思慮)가 되며 천지의 재량이 되니, 우리 사람의 마음이 바로 천지의 마음이다.
성인은 이 마음을 가지고 정밀하게 생각하고 의롭게 재량하며, 천하에 그 중(中)의 도를 운용한다. 중(中)이란 바로 천지가 절로 가지고 있는 이치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 마음을 잃으면 사람이라도 사람이 될 수 없다. 사람으로 사람이 될 수 없으면 천지라도 천지가 될 수 없다. 선한 사람에게 복(福)을 주고 음란한 사람에게 화(禍)를 내리는 것이 천지의 이치이지만, 복을 주고 화를 주는 것은 사람이다.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고 불초한 사람을 물리치는 것은 천지의 이치이지만 등용하고 물리치는 것은 사람이다. 간혹 사람이 천지의 마음이 되지 못하여 화복이나 진퇴가 그 정당함을 잃게 되면, 모르는 사람은 바로 천지에 허물을 돌리며 천리(天理)는 믿을 게 못된다고 말한다. 아, 이 어찌 천지의 잘못이겠는가.
어떤 사람은 “황왕(皇王)이 그런 마음을 가진 뒤에야 지나친 것을 억제하고 모자란 것을 보충해서 천지(天地)를 제자리 잡게 하는 것이니, 아래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그런 마음을 얻었더라도 어찌 천하에 그 중(中)을 운용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황왕이 중을 운용한다면 참으로 그와 같다. 공자와 맹자, 정자와 주자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자기 몸의 천지를 자리 잡게 했고, 한 집안의 천지를 자리 잡게 했으며, 만세의 천지를 정했다. 나의 작은 마음을 천지의 마음으로 삼아 하늘로서 보고 듣고, 하늘로서 말하고 행동한다. 뱃속에서 만물을 낳고 기르며 거두고 저장하며, 가슴속에서 만사를 주고 빼앗으며 취하고 버린다. 7척의 피와 살로 된 몸이 상제(上帝)와 한몸이 되니, 그 마음이 유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은 흑백이 어우러지는 한 판을 두고도 의기양양하며 흡족해 하는데, 하물며 천지 만물을 감당하고 처리할 자는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마음이 온전한 자는 즐겁기 마련이다.
● 천지의 덕은 오직 살리기를 좋아할 뿐이다. 커서 낳지 않는 것이 없고 두터워서 기르지 않는 것이 없으며, 선악이나 미추(美醜)를 가리지 않는 것은 사념(思念)이 없기 때문이다. 무왕이나 주공은 그런 이치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작은 마음을 천지의 마음으로 삼아 한 사람의 필부에 지나지 않는 주(紂)를 주벌했고,비렴(飛廉)과 악래(惡來)를 죽였으며,50국(國)을 멸망시켰다. 친한 이를 가까이하고 현자를 존중하며, 오전(五典)을 펴고 오례(五禮)를 썼다. 뱀과 용을 몰아서 늪으로 내쳤고, 재목과 물고기, 자라를 길렀다. 괵씨(蟈氏.국씨)로 하여금 두꺼비를 죽이게 했고,정씨(庭氏)는 요망한 새의 둥지를 엎었다. 이것이 천지의 본심이다.
● 만물의 생성은 미세한 데서 시작해서 점차 커진다. 천지 이전에는 이기(理氣)가 있을 뿐이다. 이(理)와 기(氣), 두 존재는 원래 함께 있었으며, 선후(先後)나 분수(分數)가 없다. 그렇지만 이(理)는 소리나 냄새가 없고 기는 자취가 있으며, 이는 애당초 기가 있기를 기다리지 않고, 기는 이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극단적으로 미루어 말하면, 이는 비교적 앞서고, 기는 비교적 뒤에 있다. 또 앞서 이가 있고, 기가 뒤에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미 이기가 있은 뒤에 절로 음양(陰陽)이 있다. 천지의 기운이 뭉쳐 더워지고 적셔지면서 물이 생긴다. 물은 형태가 있는 존재의 시작이다. 물이 있은 뒤에야 거대한 허공을 가득 채운다. 물의 정기(精氣)가 위로 떠서 하늘이 되는데, 이는 무(無)에서 유(有)로 들어가는 운이다. 바람과 물이 서로 부딪혀서 흔들려 저절로 찌꺼기를 만드는데, 점차 응결하여 아래로 떨어져 땅이 된다. 두 기운이 따뜻하게 발양되어 물속의 곤충이 먼저 생기고, 땅 위의 풀이 다음에 생기며, 나무가 그다음에 생긴다.
미세한 곤충 - 쥐며느리, 벼룩 같은 아주 작고 이름 없는 곤충 - 이 먼저 생기고, 점차 큰 것이 생긴다. 소나 말, 호랑이나 코뿔소 같은 부류가 모두 생기고 난 뒤에야 비로소 사람이 생기는데, 사람 중에서도 어리석은 사람이 먼저 생긴다. 사람과 사물이 그 사이에 채워진 뒤에야 거룩하고 신령하여 군장(君長)이 될 수 있는 자가 최후에 생긴다. 사물의 이치에 우두머리는 졸개가 없어서는 스스로 봉양할 수 없기 때문에 졸개가 먼저 갖추어진 뒤에 우두머리가 비로소 이르러 졸개의 봉양을 받는다. 사람이란 만물의 우두머리인 까닭에 나중에 생기고, 거룩하고 신령한 자는 사람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최후에 생긴다. 지금 꿀벌이 새끼 벌들을 나누려고 하면 먼저 새끼들의 방을 집에 가득 채우고 난 뒤에야 왕대(王㙜)를 기르니, 그 이치가 참으로 이러하다.
● 만물에는 진짜도 있고 비슷한 것도 있다. 비슷한 것은 가짜이면서 진짜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어지럽힐 뿐만이 아니다. 진짜는 하나이지만 가짜는 백이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사람의 사이비는 오직 순(舜)이 알고, 곡식의 사이비는 기(棄.后稷)가 알며, 풀의 사이비는 신농(神農)이 안다. 그들이 알고서 버리고 취할 것을 판단해 주었기 때문에 망하지 않았고, 천하가 굶주리지 않았으며, 만민이 병들거나 요절하여 죽지 않았다. 그래서 거룩하며 신령스럽다고 말한다.
그러니 참된 사람이어야 참된 사물을 알아본다. 순이 아니면 어떻게 우(禹)를 알아보았겠으며, 후직(后稷)이 아니면 어떻게 벼나 기장을 알아보았겠으며, 염제(炎帝)가 아니면 어떻게 인삼과 백출(白朮)을 알아보았겠는가. 천지가 생긴 지 오래되었는데, 천지 사이에 있는 사물 중에 가짜가 점점 더 많아져서 거의 가짜가 조화를 바꿀 정도가 되었다. 그중 더러 왕왕 진짜도 있지만 진짜가 진짜인 것을 모른 채 진짜도 가짜에 섞여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진짜가 가짜에 섞여 있으면 도리어 가짜가 국면을 이루고 있는 것만 못하니, 이 역시 섞여 있는 상태를 달갑게 여길 뿐이다.
내가 소라를 먹는 기회에 소라와 비슷한 것이 수십 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소라 살이 톡 쏘아 삼킬 수 없는 게 십중팔구였다. 어린아이가 그 가짜를 먹으면 늘 식중독에 걸리는데도 여전히 그게 비슷하지만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세상에는 가짜 소라 같지 않은 자가 없으니, 원래 치세(治世)가 적고 난세(亂世)가 많은 것이 진실로 당연하다.
● 천도(天道)는 선을 좋아하고 참을 돕는데, 어찌 그리 사이비가 많이 나와서 진짜를 어지럽히는가. 선을 사랑하고 참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왜 그런가. 사물에는 귀천이 있는 것이 사물의 실정이다. 천한 사물이 없으면 귀한 사물을 기를 수 없고, 천한 사물이 아니면 귀한 사물을 드러나게 할 수 없다.
사이비는 천한 사물이다. 사이비 같은 사람이 천하에 가득한데 성현(聖賢)은 하나이기 때문에 천한 사람들에게 봉양을 받아 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이비 조수(鳥獸)가 산과 연못에 가득하기 때문에 복희씨(伏羲氏)의 그물을 쓸 데가 있고 기린과 봉황이 그 귀함을 과시하는 것이다. 사이비 곡식이 논밭에 가득하기 때문에 농부가 거름 주고 김을 매어 오곡이 귀하게 되는 것이다. 사이비 나무가 많은 까닭에 예장(豫章.좋은 나무)이나 편남(楩楠.교목)이 귀한 동량이 되는 것이다. 사이비 옥(玉)이 많기 때문에 곤륜산(崑崙山)과 남전(藍田)에서 나는 옥이 귀한 호련(瑚璉.제사 그릇)이 되는 것이다. 사이비의 천함이 아니면 귀한 것은 어디에서 귀할 것인가. 예를 들어 춘추 시대에 온 천하 사람이 모두 공자였다면, 노나라 성(城) 북쪽 무덤이 어찌 동쪽 옆집 노인을 묻은 것뿐이 아니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그림을 좋아하는데 실물과 매우 흡사한 그림을 좋아한다. 초목이나 동물, 곤충을 그렸는데, 실물과 닮았으면 모두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향(香)을 넣어 향기를 내고 상자에 담아 보배처럼 소중히 보관한다. 이는 더러워질까 걱정하고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것이다. 지금 성현을 본받아 매우 흡사하게 하는 데는 내 몸만한 것이 없다. 이목구비를 닮고, 팔다리와 장부(臟腑)를 닮고,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닮는 것이다. 어찌 분과 먹, 청색 물감이나 빨강색 물감으로 그 형태만 닮게 그릴 뿐이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할 줄을 몰라서 향도 쓰지 않아 냄새가 나고 상자에도 담지 않아 더러워졌다. 더러워져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잃어버려도 두려워할 줄 모르니, 어찌 미혹되지 않은가. 더욱이 나의 심성(心性)이 본래 성현과 같기에 나를 극복하고 성실함을 보존하여 그 처음으로 회복하면 내가 곧 성인이고 성인이 곧 나다. 선유(先儒)가 산 꽃과 그린 꽃의 비유를 들었던 적이 있는데 내가 바로 산 꽃이니, 어찌 또 그림이 무척 흡사하니 어쩌니 하겠는가. 그러므로 옛사람은 자신의 몸을 만금처럼 소중하게 여겼으니, 참으로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알았던 것이리라.
● 청풍명월(淸風明月)은 사람들이 입만 열면 좋다고 하는데, 과연 모두 풍월을 진실로 아는 것일까. 황 태사(黃太史.黃庭堅)는 주무숙(周茂叔.周敦頤)에 대해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고 표현했는데,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곧장 풍월(風月)이라고 말하지 않고 굳이 양류오동(楊柳梧桐.버드나무와 오동나무)이라 했으니, 분명 진실로 알고 마음에 터득한 것이 있었으리라. 버드나무와 오동나무는 나무 중에서 덕(德)의 모습이 있는 나무이다. 버드나무가 아니면 바람이 광풍(光風)이 될 수 없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달이 제월(霽月)이 될 수 없다.
광풍제월이 아니면 도(道)가 있는 사람의 가슴속 기상을 표현할 수 없다. 노직(魯直.황정견) 같은 사람이 아니면 광풍제월이라는 말을 통해서 무숙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고, 노직 같은 사람이 아니면 양류오동이라는 말을 통해서 광풍제월이라는 말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황노직은 과연 진실로 풍월을 알았던 사람이고, 주무숙은 진실로 광풍제월 같은 사람이다. 버드나무와 오동나무는 참으로 광풍제월의 나무이며, 풍월에서 무숙을 알아보았던 황 태사 역시 호걸지사(豪傑之士)이다.
“꼼꼼히 만든 옥잔에 누런 술이 담겨 있네.”라고 했으니, 시인이 문왕(文王)에게서 광풍을 보았던 것이고 “강한(江漢)의 물로 빨고, 가을볕에 말렸다.”라고 했으니, 증자(曾子)가 공자에게서 제월을 보았던 것이다. 문왕과 공자는 나의 스승인데 직접 배우지 못했으니 후학의 불행이다. 다행히도 빛나는 바람이 세월 흘러 버드나무에 돌아왔고, 맑게 갠 달이 오동나무에 길게 걸려 있다. 문왕과 공자는 늘 내 밝은 창 앞 책상에 있으니, 보고 아는 것은 본디 나에게 달려 있을 뿐인데, 어찌 3천 년을 멀다고 하겠는가. 《시경》에서는 문왕을 화락한 군자라고 불렀는데, 나는 이제 문왕이 참나무에 부는 빛나는 바람임을 알겠다.정자(程子)가 공자를 명쾌한 분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제 공자가 행단(杏壇)의 맑게 갠 달임을 알겠다.
● 인간의 생명은 음양(陰陽), 오행(五行)의 빼어난 기운을 받고 태어나 만물의 가장 뛰어난 영물(靈物)이 되었다. 그 형체와 장부(臟腑)는 하늘과 땅, 해와 달, 음양, 오행, 10간(干), 12지(支), 6기(氣), 8괘(卦), 9궁(宮), 하늘을 도는 일수(日數), 남북의 2극(極), 동서의 2위(緯)의 이수(理數), 상(象)을 모두 갖추고 있고, 집이나 배, 수레와 병기, 악률(樂律)의 상을 상응하여 갖추고 있다. 묵묵히 이해하면 저절로 알 수 있고, 미루어 증험하면 저절로 깨달을 수 있어서 하늘과 사람이 오묘하게 합치하고 모든 이치에 은미하게 달통해야 도를 얻을 수 있고 생명을 기를 수 있으며, 병을 치료할 수 있고 천지 만물의 이치를 알 수 있으니, 무엇하러 굳이 옛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겠는가.
● 인생 백 년 중에서 즐거울 때는 오직 15세 이전이다. 추우면 옷 입고 배고프면 밥 먹으며 우러러 부모만 의지하고, 따뜻하면 좋아하고 배부르면 노래하며 그저 눈 뜨고 숨 쉬는 것만 마음 쓰면 된다. 맛있는 음식이나 재미있는 장난감은 내가 마음대로 많이 차지하고, 강탈을 당하거나 모욕을 당할 경우에는 부모가 대신 그 험한 꼴을 감당한다.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며 맡은 일에 책임도 없고, 풍년이 들든지 흉년이 들든지 걱정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부러워하는 일도 없고 마음 써서 할 일도 없으니, 심기가 편안하여 성현과 다를 바 없다.
장정이 되면 혈기와 이목(耳目)의 욕심이 생겨 마음과 생각이 이미 어지러워진다. 20세 이후에 처자식이 생기면 천만 가지 사욕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가 불처럼 타들어 가듯이 격렬해진다. 이어서 세상살이에서 생기는 일과 습속으로 사람들과 부딪히고 갈등이 야기되니, 혼백(魂魄)이 애를 먹어 낮에는 늘 눈이 어지럽고, 정신이 타들어가 꿈을 꾸면서도 미간을 찌푸린다. 구덩이에 떨어져도 더러운 줄 모르고, 함정에 빠져도 두려운 줄 모른다. 많은 사람이 얼굴에 침을 뱉어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귀신이 벌을 내려도 도망칠 데가 없다. 오직 ‘사(私)’라는 한 글자가 끼친 해악 때문이다. 한창 어려서 즐거울 때는 부모의 은혜였건만, 이때에 이르면 부모를 지나가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생각하니, 슬플 뿐이다.
● 부자(父子)간의 사랑은 하늘이 내린 것이다. 담박한 듯하면서도 상관이 있고, 도타운 듯하면서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지극히 공변되면서 밝고, 지극히 바르면서 긴밀하다. 자식이 현명하면 기뻐하되 과시하지 않으며, - 과(夸)는 대단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 걱정하는 정(情)이 기쁨과 함께 더욱 깊어간다. 자식이 변변치 못하면 근심하면서도 원망하지 않으며, 다친 자식을 보는 듯한 자애로움이 근심과 함께 더욱 간절해진다. 그러므로 사랑하되 거기에 가리지 않고 가르치되 관계를 손상하지 않으니, 이것이 군자가 하늘이 내린 사랑을 온전하게 한 것이다.
소인이 자식을 낳을 때는 부자의 천륜이 이미 손상되어 자식을 단지 자기 소유물로 생각한다. 그 때문에 자기만을 위한 사사로운 마음이 자식에게 옮겨 가 사랑이 일어난다. 이런 사랑은 돈이나 재물, 관작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이며, 천리(天理)의 사랑이 아니라 단지 자기만을 위한 욕심이다. 그래서 갓난아이였을 때는 푹 빠진 듯 예뻐하는 것이 마치 과시하기 좋아하는 자가 여색(女色)에 홀린 듯하여 사욕에 가리어 그 자식의 나쁜 점을 모르고 그 오만함에 영합하여 길러 준다.
겨우 품을 벗어나자마자 더 어린 동생에게 사랑이 옮겨 가기 때문에 어린 동생이 비록 못났어도 늘 형보다 더 낫다고 칭찬한다. 제일 먼저 태어난 자식은 젖을 뗀 지 이미 오래되었고 세상에 대한 생각이 한층 자라났지만, 부모의 사랑은 어린 동생에게 빼앗긴다. 아기귀신의 병을 만들어 내는 마음이 - 어린아이가 젖을 먹을 때 어머니가 또 임신하면 뱃속의 태아가 시기하여 젖먹이를 병들어 야위게 하므로 아기귀신이라고 부른다. - 태아 때부터 자라나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날로 소원해지고, 분노하고 원망하는 정이 날로 더하여 부모는 마침내 그 가증스러운 모습만 보고는 갑자기 그 어렸을 때의 사랑은 잊고 만다. 결국 부자 사이에 금이 가서 걷잡을 수 없는 경우가 이것이니, 두렵고도 슬픈 일이다.
● 세상 사람들은 자식을 낳을 경우에 더욱 심하게 사랑에 빠진다. 그러다가 둘째 자식을 낳게 되면 곧바로 “이 애가 형보다 낫다.”라고 말하면서 더 심하게 사랑하고 가까이한다. 또 셋째 자식을 낳으면 “이 애가 두 형보다 더 낫다.”라고 말하면서 미친 듯이 사랑하고 놀아 준다. 그래서 ‘승(勝)’이라는 이름을 지어 사랑을 표시한다. 정말 낫더라도 편애해서는 안 되는데, 꼭 나은 것도 아님에 있어서겠는가.
딸을 낳으면 반드시 “딸자식이 아들보다 더 사랑스럽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아들만 있다가 딸이 생기다 보니 그 새로 난 딸을 사랑하는 것일 뿐이지, 그가 언제 부모와 자식 사이의 진정한 사랑을 알았겠는가. 더러 딸만 많았다가 아들을 낳으면 또 “아들자식이나 자식이지, 딸은 자식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심한 경우에는 그 딸들을 미워하기도 한다. 아들과 딸 사이에 경중을 따진다면 경중이 있기야 하겠지만, 천륜의 지극한 정에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이 모두 천륜을 잃은 것이니, 끝내 어그러지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 혼인할 때 재물을 따지는 일이 날로 더욱 심해지더니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남자는 성동(成童.15세)이 되면 전답(田畓) 가치로 평가하고, 여자는 혼기에 이른 나이가 되면 돈주머니라고 부른다. 혼인을 하고 나면 반드시 공연히 “내 자식이 아니다. 사돈집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라고 말하니, 부자라는 천륜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어찌하겠는가, 어찌하겠는가. 슬퍼한들 어찌하겠는가.
● 송아지나 망아지와 떨어진 소나 말은 밤낮으로 그리워하며 울다가 반드시 달아나서 아무리 평소 왕래하지 않았던 먼 곳이라도 곧장 틀림없이 도달한다. 이 지극한 정밀함은 귀신과 같다. 망아지나 송아지가 자기 어미를 찾을 수 있는 경우도 어쩌다 있기는 하지만 많지는 않다. 이는 자식의 정이 어미보다 못하다는 증거이다. 자식이 만일 부모의 마음처럼 깊이 사랑한다면 부모가 거의 편안해질 것이다. 저 망아지와 송아지가 다 커서 또 망아지와 송아지를 낳을 것이니, 사랑하면서 또 얼마나 핥아 줄 것인가. 예전에 저를 핥아 주었던 것을 한 번이라도 기억할 수 있을까. 슬프도다.
● 날짐승들은 새끼를 낳으면 품어줄 뿐이고, 소나 말은 새끼를 낳으면 핥아 줄 뿐이다. 자식을 가르칠 줄 모르면서도 품고 핥아 줄 뿐인 사람도 이미 자식을 낳아 길렀다고 생각할 것이다. 심한 경우는 더러 자기 자식의 잘못을 알려주면 화를 내는데, 이는 스스로 자식을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다.〔無不是底父母〕”라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옳지 않게 만들어도 다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죄가 있기 때문이지, 부모가 어찌 옳지 않은 데가 있어서이겠는가. 만일 부모가 하는 일을 자식이 모두 옳게 생각해야 한다고 잘못 이해한다면 이는 대대로 그 악(惡)을 이루는 일이다. 아, 이래서야 되겠는가.
● 아버지가 양을 훔치면 자식이 당일 밤에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간한다. 어떤 사람이 물으면 울면서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불초한 자식이 형편없이 굴어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게 했으니, 자식의 죄에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하면서 성심(誠心)으로 자책하면서 사람들이 자기 아버지를 의심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기 아버지의 죄를 증언하는 자는 양 도둑질이 불의라는 것을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심 때문에 참으로 명성을 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팔려는 욕심이 부자 사이의 천륜을 가리고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총애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비의 자애로운 마음을 덮고 자식을 죽여 임금에게 먹이는 짓과 같다.식초를 얻어다가 자신의 정직함을 파는 것은,양 도둑질을 증언하는 경우와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 아버지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하니, 그것이 하늘의 덕이라는 점에서는 한가지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식에게 자애로운 것은 하늘에 따른 것으로 저절로 진심을 다하면서 거짓이 없기 때문에 만고에 자애로운 아버지라는 명칭이 없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데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힘써서 하는 의식적인 마음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효자라는 명칭이 있다. 사람이 하늘과 같지 못하면서도 명칭이 있는 것은 없는 것만도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지극한 효자라고 칭하더라도 자애로운 아버지의 마음에는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효(孝)란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천리(天理)에 어긋남이 없어야 비로소 효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증자(曾子)가 공자로부터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라는 가르침을 듣기 전에는 효에 대해 완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된 이후에야 효를 다할 수 있고, 효를 다했다면 효라는 명칭을 붙일 수 없다. 유우씨(有虞氏.舜)ㆍ민자건(閔子騫)ㆍ왕상(王祥) 같은 사람들은 부모가 자애롭지 않아서 자신들의 이름이 저절로 드러난 경우이지만, 대순(大舜)에게 어찌 효자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으리오.
죄로는 남을 속이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속이는 것으로는 하늘을 속이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며, 하늘 같은 분으로는 부모보다 큰 것이 없다. 어리석은 자들은 왕왕 이를 살피지 못한다. 그래서 자식 된 직분에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효자라고 지목하고, 효자라고 불리는 자도 그 호칭에 마음이 움직여서 태연히 스스로 효자인 줄 안다. 요순(堯舜)조차도 감히 스스로 효자라고 자처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보통 사람의 경우이겠는가. 이 모두 부모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이니, 죄가 하늘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를 섬기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다해야 하고, 분수를 넘지 말아야 하며, 겉치레를 꾸미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변변치 않은 음식으로 봉양하더라도 한결같이 망녕됨이 없는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그런 뒤에야 그 마음을 미루게 되면 자연 형제와 우애롭고 집안사람들과 화목하며 동네 사람들과 화합하게 되어 감히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을 남에게 요구하지 않고, 감히 오만한 마음으로 사물을 접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혹시 효자라고 불리는 사람이더라도 형제에서부터 집안사람들이나 동네 사람들까지 모두 그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덕을 보지 못했다면, 그 누구를 속이겠는가. 하늘을 속이겠는가.
●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손자를 사랑한다. 늘 손자에 대한 사랑이 자식 사랑보다 크다고 하는데, 자식보다 크다는 말이야말로 바로 손자에 대한 정이 자식에 대한 정만 못하다는 의미임을 전혀 모르는 말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마음에 온전하여 입 밖에 낼 겨를조차 없고, 손자에 대한 사랑은 의식에 기억되기 때문에 보통 입 밖에 내는 것이지, 어찌 자식에 대한 사랑이 손자에 대한 사랑보다 못할 정도에 그치겠는가. 예로부터 늘 손자에 대한 사랑을 말하지만, 그래도 자식에 대한 사랑만 같지는 않으니, 나는 부모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내가 곧 잊어버린다면 금수와 거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자식은 내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고, 손자는 내 자식의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이 미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에게 관계된 사람은 모두 사랑한다. 그런데 유독 자기 부모만 자기에게 관계없는 존재라는 말인가. 아래로 미루어 보면 자식의 자식에게 미치면서, 위로 미루어 보면 자기 부모에게는 미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미혹이 심하다.
● “부모를 깊이 사랑하는 효자는 반드시 즐거운 얼굴빛이 있다.”라고 했으니, 이 ‘심(深)’ 자에는 무한한 의미가 있다. 자식 된 자는 자나 깨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
● 맹자가 말하기를 “봉양하되 사랑하지 않으면, 돼지를 기르는 것과 같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사람으로 하여금 삼가 정신이 퍼뜩 들게 한다. 슬프다, 어찌 두렵지 않은가.
● 등유(鄧攸)는 자식을 버리고 조카를 살렸으니, 이는 천륜이 없는 사람이다. 비록 공정한 마음 같지만 당초 비교해서 조카와 제 자식 모두를 다 살릴 수 없다고 계산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심(私心)이고, 제 자식을 버린 것도 사심이다. 내가 왜 아이를 버린 것을 사심이라고 평가하는가. 극한 상황에서 자식과 조카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따져 보고 나서 자신에게는 훗날 자식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사사로움이 큰 것이다. 눈앞의 자식을 차마 끊어 버리고 훗날 자식이 생길 것이라고 미루어 생각했으니 매우 천륜을 업신여기는 자이다. 이 사람은 자기 처가 이미 늙어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면 조카를 버렸을 자이다.
등유의 처지가 된 사람은 아내와 힘을 합쳐 살 방도를 찾다가 요행히 자식과 조카 둘 다 온전하기를 추구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일이 급박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을 때에는 자식이 온전하면 온전한 대로, 조카가 온전하면 온전한 대로 하늘의 명을 따라야 한다. 불행히 둘 다 죽으면 함께 죽어야 할 것이다. 등유가 덕행으로 이름이 있었지만, 만일 나라가 망할 시기를 맞았다면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지 못했을 자이다. 자식을 위해 죽지 못한 사람이 임금을 위해 죽을 수 있겠는가. 등유가 자식이 없음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은 다만 버린 아들이 따라올 때 나무에 묶어 놓았던 것만 죄안(罪案)으로 삼는데, 이는 그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 만고의 죄인 온태진(溫太眞)은 옷자락을 잘랐다. 공명심이라는 사사로움이 천륜을 없앤 경우가 이처럼 심하단 말인가. 맹자는 “순(舜)은 몰래 업고 도망쳐서 종신토록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참으로 성인의 말씀이다. 가슴이 시원하고 깨끗함이 마치 서리 내린 하늘과 맑게 갠 달 아래 있는 만물이 푸름과 같다.
● 적인걸(狄仁傑)이 흰 구름을 보고 그리워한 일은 아름답다면 아름답다. 그렇지만 극진한 선(善)은 아니다. 가령 자신이 우(禹)와 직(稷)의 재능이 있고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만나 치수(治水)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면 응당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적인걸이 만난 때가 어떤 시기였는가. 음란한 역적 측천무후의 조정에서 겨우 몸을 붙이며 살아야 했고, 없는 죄를 뒤집어 쓴 채 감옥에서 목숨을 보전해야 했다. 그 와중에 나를 낳아 준 늙은 부모로 하여금 동구 밖에서 자식을 기다리는 마음을 공연히 애태우게 했으니, 아무리 마음에는 나라뿐이라고 하더라도 효성에 흠이 생긴 사람이 충(忠)을 온전히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관복과 인끈을 벗어던지고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고 그동안 효도하고 싶었던 마음을 풀며 천륜을 온전히 할 것이지, 어찌 구구하게 구름이나 쳐다보며 그리워한단 말인가. 참으로 모르겠거니와, 적인걸로 하여금 곤궁하게 굶어 가며 고용살이를 하도록 하고 여러 해 동안 어머니와 이별하면서 사직(社稷)의 회복을 꾀하도록 했다면 그것이 가능했겠는가. 그는 오히려 부귀를 위하여 계속 관직에 머물렀던 것이다.
● 부모를 위해 허벅지살을 베고 손가락을 자르는 일이 어찌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진실로 의리에 따라 해야 할 일이었다면 옛날부터 성인들이 모두 했을 것이다. 당나라나 송나라 이래로 이따금 있었지만 낙민(洛閩.정자와 주자)의 여러 군자는 그렇게 한 적이 없었으니, 어찌 성현이 성의가 박해서 그랬겠는가.
주(周)나라 이래 3천 년 동안 하늘이 낸 지성스런 효자는 백 명을 넘지 않는다. 참으로 효가 이렇게 어렵다. 내 몸의 고통을 느끼지 않고 허벅지를 베거나 손가락을 자르는 일은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평상시에 하늘이 낸 지성(至誠)이 있다가 부모의 목숨이 끊어질 급박한 상황을 맞아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른 채 그렇게 했다면 괜찮다. 그러나 만일 터럭만큼이나마 성실하지 못했던 마음이 잠깐 동안 효도에 가까워져서 차마 칼이나 도끼로 자기 허벅지와 손가락을 잘랐다면 그 죄는 크다.
나는, 요즘 세상에 사친(事親)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백에 한둘인데 손가락을 자르고 허벅지를 베는 사람이 거의 열에 다섯이나 된다는 사실이 괴이하다. 또 자르고 벤 뒤에 얼토당토않게 효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자들이 있으니, 어찌 이렇게까지 지성이 잡박하고 순수하지 못하다는 말인가. 부모와 관계된 사안이라 가볍게 의논하여 논의가 극단화되면 안 되지만, 세상 습속이 몰락해 가는 풍조를 보면 실로 긴 한숨만 나온다.
● 옛날의 효자 가운데 어떤 사람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식을 묻다가 금을 얻었다고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는 하지만, 아비가 되어서는 변치 않고 자애하며, 자식이 되어서는 변치 않고 효도하는 데는 당초 두 가지 이치가 없다. 그러므로 자애에 대해서는 차마 못할 짓을 하는 자가 유독 효도만 순전히 하는 일은 이치에 벗어난 일이다. 후대에 멋모르고 남의 흉내를 내는 사람들은 부모를 봉양한다는 이유로 어린 자식을 밀치고 화를 내며 조부모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한다. 그가 부모를 사랑하는 정성이 참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정과 바꾼 점이 있으나, 오히려 중용의 도리에 어긋난 점이 있지 않은가 싶다. 더구나 노인이 어린 손자를 사랑하는 정성에는 당나라 현종이 기꺼이 천하를 위해 자기 한 몸은 수척해지겠다는 뜻이 있다. 자기만 생선과 고기반찬을 먹고 어린 손자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과연 마음에 편하겠으며 몸의 원기를 보충할 수 있겠는가.
더러 부모가 늦게 둔 자식을 편애하면 그 사랑이 그가 낳은 손자에게까지 미치는데, 내가 봉양을 잘하기 위해 도리어 늙은 부모가 사랑하는 아이에게까지 화를 낸다면 과연 인정에 가깝겠는가. 증자(曾子)가 밥상을 내갈 때 반드시 남은 것은 누구에게 줄지 물었던 의미가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자가 “노인을 편안하게 하라.”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과연 편안하게 하는 방법이란 말인가. 그래서 부모를 섬기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효도를 한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만일 효도를 의식하고 효도를 하면 반드시 차마 야박해서는 안 되는 경우에 야박해지는 일이 있게 된다.
● 《대학(大學)》에 나오는 혈구(絜矩)의 도리는 부자와 형제 사이에 가장 절실하다. 자제(子弟)에게 요구하는 것으로써 부형(父兄)을 섬기는 일이면, 효도하지 않거나 공경하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도 적을 것이다. 백향산(白香山.白居易)의 〈제비시〔鷰詩〕〉는 정말 읊을 만하다.
임금과 신하는 천륜의 정이 없는 사이이다. 오직 임금은 백성들의 부모라는 마음으로 임금 노릇을 해야 하고, 신하는 경륜을 가지고 도리를 실천하는 마음으로 신하 노릇을 해야 한다. 덕을 가지고 만나고 마음으로 알아보니, 그 정이 어찌 친한 부자 사이 정도에 그치겠는가. 그래서 군신이 서로 돕는 의리가 있으니, 이는 오직 문왕이나 무왕 이상의 임금과 이윤(伊尹)이나 여상(呂尙) 이상의 신하만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임금에 그 신하가 서로 만난 즐거움이 있어서 천하의 어떤 사물과도 그 즐거움을 바꿀 수가 없다.
이보다 아래 단계는 임금이 천하를 망하게 하지는 않겠다고 마음먹고, 신하는 온 힘을 다해 이름을 남기겠다는 마음으로 신하 노릇을 한다. 재능으로 부합하고 세력으로 얽혀 두터운 녹봉과 높은 관직을 통해 정이 보존되고, 책임을 맡기고 그 일을 수행하는 데서 의리가 결정되어 그 관계가 이미 박하기 때문에 좋게 시작했다가도 끝내 낭패를 보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가장 아래 단계는, 임금은 귀한 몸으로 천하를 소유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임금 노릇을 하고, 신하는 부귀와 영달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신하 노릇을 한다. 서로 이익을 통해서 만나고 사사로움을 가지고 어울리며, 임금은 누가 나를 거역하겠느냐는 태도를 정으로 삼고, 신하는 그저 굽신거리며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태도를 의리로 삼는다. 관직에서 쫓아낼지 승진시킬지는 오직 하는 말이 귀에 거슬리는지 듣기 좋은지에 달렸고, 단지 그 이익이 나에게 두터울지 박할지만 고려하여 태만하든지 부지런하다.
그러다 보니 임금이 의심하게 되면 졸지에 신하들을 엄벌하는 일이 벌어지고, 신하들이 만족하지 못하면 항상 임금의 자리를 빼앗고 시해하는 일이 일어난다. 임금은 허수아비 임금처럼 외롭게 서 있으면서 홀로 구주(九州)의 재물을 마음대로 처리하고, 신하는 흙으로 빚은 인형처럼 기생하면서 스스로 평생 백 년의 즐거움을 누린다. 임금은 임금대로 신하는 신하대로일 뿐이니, 정이 어디에서 생길 것이며, 의리가 어디서 바로 설 것인가.
● 하나라 우(禹) 임금은 음식을 간소하게 먹고 궁궐을 검소하게 지었으니, 맛있는 음식이나 넓은 궁궐이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이 실제로 나에게 보탬이 없으며, 나의 백 년의 즐거움을 손상하고 나의 만세의 업적을 무너뜨릴 것이 바로 이것들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맹자는 큰 상에 가득한 음식과 몇 길이나 되는 저택을 마다했으니, 좋은 음식과 화려한 집이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이 나에게 보탬이 없으며, 남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나의 욕심을 키우고, 제 몸은 죽고 집안은 망하는 재앙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이것들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 임금이나 맹자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임금 노릇을 한 뒤에야 속이지 않는 신하가 임금을 위해 등용되며, 이런 마음을 가지고 신하 노릇을 한 뒤에야 존경할 만한 임금이 예의를 갖춰 접대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군신유의(君臣有義)이니, 나라가 살면 함께 살고 임금이 죽으면 함께 죽는다는 것이다.
● 임금이 신하에 대해서 반드시 감히 따뜻하고 배부름만을 마음으로 삼지 않을 경우에야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할 수 있으며 환난을 구제할 수 있다.
● 금수(禽獸)도 각각 따뜻하고 배부름에 대한 욕구가 있다. 그들이 사는 목적이 따뜻하고 배부른 데에 그치기 때문에 금수가 되었다. 사람이 만일 단지 따뜻하고 배부름만을 마음에 두면서 재능과 덕성이 없다면 이 또한 금수일 뿐이다. 따뜻하고 배부르고자 하는 마음을 충족시키려는 자는 임금의 자리를 도둑질하고 임금의 녹봉을 훔친 뒤에야 자기가 먹고 입는 음식과 옷을 사치스럽게 하고 아름답게 꾸밀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따뜻함도 만족되고 배부름도 극에 이른 뒤에는 역시 금수로 죽는 것이다.
고금의 군신 관계를 전체적으로 논의하자면, 요순(堯舜) 시대는 더할 나위 없고, 은나라 탕왕과 이윤(伊尹)ㆍ부열(傅說), 주나라 문왕ㆍ무왕과 십란(十亂), 한 소열(漢昭烈.劉備)과 제갈량(諸葛亮) 등은 요순 시대와 마찬가지로 훌륭했다. 그다음은 주나라 선왕(宣王)과 신보(申甫), 제나라 환공(桓公)과 관중(管仲), 한 고조(漢高祖)와 장량(張良), 문제(文帝)와 주아부(周亞夫)ㆍ신도가(申屠嘉), 소제(昭帝)와 곽광(霍光), 선제(宣帝)와 위상(魏相)ㆍ병길(丙吉), 광무제(光武帝)와 등우(鄧禹), 당나라 헌종(憲宗)과 배도(裴度), 송나라 인종(仁宗)과 한기(韓琦), 명나라 효종(孝宗)과 유대하(劉大夏) 등이다.
송나라 태조(太祖) 3대 이후의 경우에는 현명한 임금은 있었지만 현명한 신하가 없었다. 한나라의 동중서(董仲舒), 당나라의 곽자의(郭子儀), 송나라의 사마공(司馬公.司馬光)은 신하의 의리는 있었지만 훌륭한 임금이 없었다. 그 나머지는 더러 덕성이나 재능, 지략으로 공로를 세운 적이 있지만, 단지 작록(爵祿)에 얽매였을 뿐이다. 임금은 작록을 가지고 부렸고, 신하는 작록 때문에 섬기면서 어쩔 수 없이 군신 관계를 맺은 것이다. 가령 나물밥과 베옷, 좋지 않은 수레나 허약한 노복으로도 국사를 수행하고 사직과 백성들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이 신하가 해야 할 일인데, 이런 사람은 사마광 이상의 몇 사람 외에는 분명 한두 사람도 없을 것이다.
● 거룩하고 밝은 제왕을 만나 말을 하면 받아들이고 계책을 세우면 채택하여 천하 만민에게 모두 그 덕택을 입게 하고 아름다운 명성이 당대에 넘쳐흐르고 성대한 명예가 후대에 전해진다면 인간 세상의 어떤 즐거움을 이와 바꾸겠는가. 진귀한 음식이 앞에 널려 있고 서자(西子 서시(西施))가 잠자리를 깔며, 크나큰 저택은 구름과 이어져 있고 종과 북이 아름답게 울리며,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고 비단이 창고에 가득한들 이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대장부의 뜻이 있는 자라면 한순간도 이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더러 다행히 밝은 시대를 만났어도, 나의 재능과 덕성이 임금을 보좌하여 다스리기에 부족하면 어쩔 도리가 없지만, 나보다 나은 사람이 일어나서 앞장서면 내가 바로 따라서 돕고 배우면서 함께 그 공적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면 마치 수(垂)가 수(殳)와 장(斨)에게 낮추고 익(益)이 웅(熊)과 비(羆)에게 양보했지만 팔원(八元)과 팔개(八凱)의 반열에 서서 요순(堯舜)의 명신이 되었던 것처럼 장차 그 쾌활함과 즐거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禹)가 마음속으로 시기심을 품고 고요(皐陶)와 설(卨)을 내쫓고 자신이 사사(士師)나 사도(司徒)가 되고 또다시 나아가 백관(百官)을 총괄하는 관직에 간여했다면, 요순으로 하여금 화평한 정치를 망치게 했을 것이고 자신은 만고의 죽여야 할 역적이 되었을 것이니, 이 우주에 언제 이런 침통함을 풀 수가 있겠는가. 저 불초한 자들은 지혜롭지도 않고 어질지도 않으면서, 한번 배부를 욕심에 오로지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한번 따뜻할 욕심에 오로지 비단옷으로 몸을 따뜻하게 하면서 임금의 밥을 훔치고 임금의 관직을 병들게 한다. 화살 같은 세월이 홀연히 지나가 영원히 잠들어 저세상으로 가면 냄새나는 몸뚱이와 더러운 뼈에 천 사람이 코를 막고, 흉한 이름과 간교한 이야기는 만고토록 사람들의 귀에 가득할 것이다. 금 같은 성채와 보배 같은 누각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멀리 떨어져 황폐해진 무덤은 지나는 사람이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것이니, 그 어찌 영원토록 처량하게 눈물 흘리며 후회하는 혼백의 신세가 아니겠는가.
● 오복(五福)의 하나는 수(壽)이다. 장생(長生)만큼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없지만, 천지(天地)도 다하는 때가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오제(五帝) 이전부터 구주(九州)를 나누어 다스린 군주였던 인황씨(人皇氏)까지 모두 신이지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지금까지 하나도 살아 있는 존재가 없다. 신인(神人)도 장생할 수 없는데 하물며 보통 사람이겠는가. 도인(導引 양생술)으로 장생할 수 있었다면 수인(燧人 고대 전설상 집과 불을 만든 신인(神人))이나 복희(伏羲)도 모두 했을 것이고, 불사약이 있었다면 염제(炎帝)도 분명 먹었을 것이며, 황백(黃白 금은(金銀))을 정련하여 연단(鍊丹)을 만들 수 있었다면 유웅(有熊)이 반드시 만들었을 것이다. 지난 역사를 보면 분명한데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안에서 불 같은 욕심이 치성하여 타고난 명철함이 흐려지고 막혔기 때문이다.
황왕(皇王)의 장생 방법은 일반 사서인(士庶人)과 달라서 하기가 매우 쉬운데, 도리어 알지 못하고 밖에서 구했으니 미혹되다. 장생 방법은 육경(六經)에 훤히 실려 있어서 살펴보고 알 수 있다. 이를 가져다 실행할진대 두루 통달한 학자를 불러 그와 함께 하늘이 준 자리를 함께하여 삼황오제가 했던 일을 하면 만고의 역사에 죽지 않고 천지와 함께 유구할 수 있다. 하지만 차라리 안기생(安期生 진 시황(秦始皇) 때의 신선)이나 왕교(王喬 후한(後漢) 시대 신선)는 만나 보려고 하면서도 요순(堯舜)을 직접 만나려고 하지 않으며, 차라리 이담(李聃 노자(老子))이나 윤희(尹喜 도덕경을 전한 노자의 제자)는 만나 보려고 하면서도 고요(皐陶)나 후직(后稷)ㆍ설(契)은 직접 만나 보려고 하지 않고, 차라리 부처 사리(舍利)는 보려고 하면서도 스스로 주공(周公)이나 공자(孔子)는 되려고 하지 않으니,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하늘이라도 어찌할 수 있겠는가.
진 시황도 죽었고, 한 무제(漢武帝)도 죽었고, 양 무제(梁武帝)도 죽었다. 당나라 삼종(三宗 태종(太宗)ㆍ현종(玄宗)ㆍ헌종(憲宗))도 죽었고, 송나라 이종(二宗 진종(眞宗)ㆍ인종(仁宗))도 죽었다. 명나라 무종(武宗)도 죽었고, 세종(世宗)도 죽었다. 태항산(太行山)의 옛길에 부러진 차축들이 언덕을 이루었지만, 오히려 썩은 새끼줄로 말을 몰면서 채찍을 휘두르며 앞을 다투는 셈이니, 누가 따라갈 만하다고 말하겠는가. 또한 장생에 정말로 방법이 있다 해도, 반드시 여색을 끊고 음식을 조절하며, 탐욕을 제거하고 생각을 쉬게 하여 정신을 하나로 집중한 뒤에야 겨우 몇 년 정도의 수명을 늘일 수 있을 뿐이지, 역시 죽지 않을 도리는 없다. 하물며 제왕도 부귀와 식색(食色)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죽었으니, 이런 모든 즐거움을 온전히 하면서 장생을 기원한다면 모두 콩과 쑥을 구별하지 못하는 격이라고 할 것이다.
● 한 고조(漢高祖)가 자신은 삼걸(三傑)만 못하다고 한 일이나 문제(文帝)가 자신은 가생(賈生 가의(賈誼))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 일,무제(武帝)가 오랫동안 급암(汲黯)을 만나지 못했더니 다시 망발을 했다고 한 일이나 광무제(光武帝)가 사람은 참으로 만족할 줄을 모른다고 하면서 엄자릉(嚴子陵)과 함께 잤던 일,명제(明帝)가 직접 소매를 걷고 희생을 잘랐던 일이나 장제(章帝)의 너그럽고 도타운 교화, 소열(昭烈 유비(劉備))이 제갈량을 삼고초려했던 일은 모두 삼대(三代) 이상과 같은 임금들이었으니, 당송(唐宋) 시대의 군주들은 발뒤꿈치도 따르지 못한다. 어려서 가르치고 이끄는 방법이 있었고 참된 학자가 보좌했으면 모두 참된 군주가 되었을 것이다.
● 유하혜(柳下惠)는 세 번 쫓겨나고도 화를 내지 않았고,거백옥(蘧伯玉)은 항상 잘못을 줄이려고 노력했으며,장량(張良)은 유후(留侯)에 봉해졌지만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동중서(董仲舒)는 공리(功利)를 따지지 않았고,병길(丙吉)은 보육을 자랑하지 않았으며,풍이(馮異)는 큰 나무 아래에 숨어 있었다.곽태(郭泰)는 명철하게 보신했고,공명(孔明)은 국사에 신명을 다해 노력했으며,곽자의(郭子儀)는 황제의 명령을 듣기만 하면 바로 조정에 나갔다.배도(裴度)는 녹야당(綠野堂)에서 여유롭게 지냈고,이항(李沆)은 조서(詔書)를 받들지 않고 돌려보냈으며,한기(韓琦)는 띠를 드리우고 홀을 바로 세웠고,팽소(彭韶)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관직을 그만두었다. 이들은 모두 삼대 이상의 신하와 같은 신하였으니, 역대의 영웅호걸이자 빼어난 준재들도 그들의 울타리를 넘보지 못했다. 만일 일찍이 성현의 도를 듣고 학문을 통해 제도했다면 모두 참된 신하가 되었을 것이다.
● 《중용》에 “군자의 도는 부부(夫婦)에서 그 단서가 시작된다.”라고 했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의심하면서 천지가 큰 부부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천지가 그 도를 잃으면 만물이 생기지 않고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에게 부부란 작은 천지이다.
● 공씨 3대가 아내를 내쫓았으니,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시작된다는 말에 의심스러운 데가 있는 듯하다. 성군은 반드시 현신(賢臣)을 얻어야 하고, 성부(聖夫)는 반드시 현처(賢妻)를 얻어야 한다. 여자로서 성인과 덕이 어울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내가 아내답지 못한데도 굳이 집안을 주관하게 한다면, 이것은 순 임금이 공공(共工)과 환두(驩兜)를 임명하는 격이니 어떻게 집안을 살찌울 수 있겠는가. 그런 부인을 내치는 것이 군자가 도를 행하는 시작이다.
● 천성적으로 여자는 길들여야 한다는 말은 바꿀 수 없다. 옛사람들이 혼례를 제정할 적에 시부모를 뵌 뒤에 바로 가묘(家廟)를 뵐 수 있는데도 반드시 세 달을 기다려 그 사람됨을 충분히 시험한 뒤에 비로소 가묘를 뵈었으며 그런 연후에야 타고 온 거마도 돌려보냈다. 대개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내쫓겠다는 뜻을 보임으로써 교만하고 어리석은 습성을 경계하고,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기른 것이다. 이것이 위대한 《주역》에서 음유(陰柔)를 대하는 뜻이다.
● 옛사람들이 “사람이 부모나 형제에 대해서는 해서 안 되는 말을 부부 사이에는 말한다.”라고 했는데, 보통 사람들의 정서가 정말 그렇다. 그렇지만 부모나 형제에게 할 수 없는 말은 아주 사사로운 말일 것이다. 사사로움이 지극한데 의리에 합치될 리는 만무하다. 작으면 참소의 매개가 되고 모욕을 받고, 크면 패가망신하는 일이 모두 여기서 시작된다. 대체로 부부 사이에 사사로운 말이 없게 된 뒤에야 몸을 닦고 친족을 보전할 수 있다. 혼자 있을 때 삼가는 자가 아니면 할 수 없으니, 군자의 도는 여기에서 단서가 만들어진다.
● 근년에 어부가 인어(人魚)를 잡았는데, 크기가 세 살짜리 아이 같았다. 모든 생김새가 사람 같았고, 다만 수염이나 머리카락은 없었다. 사람들이 가까이 가서 보니 슬프게 울면서 눈물을 흘리며 두 손으로 앞쪽 음부를 가렸으니, 이는 남녀의 구별이 천리의 자연스러운 법칙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있는 것 중에서 부끄러움보다 큰 것은 없는데, 가장 큰 부끄러움은 남녀에서 시작한다. 인어가 울면서도 음부를 가린 것은 타고난 부끄러움이다.
옛 성인은 그런 것을 알고 혼례는 반드시 저녁에 했으니, 부끄러움을 기르고 구별을 두텁게 하려는 이유였다. 혼례를 저녁에 하는 것은, 바로 하늘은 자(子)에서 열리고 땅은 축(丑)에서 열리는 이치이며, 천지 마음의 이치를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용》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경계하고 삼가며, 혼자 있을 때 삼간다.”라는 말이 천하의 가장 근본적인 이치이다. 그래서 금수는 모두 낮에 짝을 지으니, 부끄러움과 구별이 없기 때문이고, 이런 까닭에 부자(父子)가 한 암컷과 관계한다. 저 인어가 부끄러워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면 만사 중에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는가. 그래서 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다. ‘조단(造端)’의 ‘단(端)’ 자의 지극히 은미한 데에는 ‘치(恥)’ 자가 있다.
● 세속에서 며느리를 얻을 때 혼례를 치르자마자 시아버지가 신부를 보는 것은 매우 가당치 않은 일이다. 혼례 다음 날 며느리가 시부모를 뵙는데, 주(註)에 “밤을 지내지 않으면 며느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보지 않는다.”라고 했으니, 그 의미가 은미하며 도탑다. 밤이 지나지 않으면 여전히 시집을 가지 않은 규수이고, 시아버지 될 사람은 여전히 다른 집안 남자이다. 규수에게 다른 집안 남자를 보게 하는 것은 무치(無恥 부끄러움이 없음)를 가르치는 것이다. 남에게 무치를 가르치는 사람은 그 마음도 무치한 것이니, 무치한 사람이 어디에서 근신하겠는가. 유하혜(柳下惠)가 아니면 할 수 없다.
● 선천도(先天圖)는 건(乾)이 남(南)이고 곤(坤)이 북으로, 천지의 위치가 정해졌으니 부부의 표상이다. 천지의 형상은 북이 높고 남이 낮은데도 건을 남쪽에 위치한 것은 남편의 도는 아래로 구제하기 때문이고, 곤을 북쪽에 위치한 것은 아내의 도리는 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부부의 정이 교감하여 지천태(地天泰)가 된다. 실제로는 남쪽이 밖이고 빛과 밝음의 고향이며, 북쪽이 안이고 그늘과 어둠의 지방이다. 양(陽)은 움직여 위로 가고, 그 상향성으로 인한 항(亢.치받음)을 염려하기 때문에 남쪽에 위치하여 땅에 감싸이는 것이다. 음(陰)은 고요히 아래로 가고, 그 하향성으로 인한 점(墊 빠짐)을 염려하기 때문에 북쪽에 위치하여 하늘에 가까운 것이다.
하늘의 위치는 남쪽에 있더라도 그 지도리는 북쪽에 있으니, 기실은 높은 자리에서 제어하는 것이다. 땅의 위치가 북쪽에 있더라도 그 몸통은 남쪽에 기울어 있고, 기실은 아래에 처해 있는 것이다. 부부가 조화를 이루는 도리가 여기에 갖추어져 있다.
또한 선천도의 진(震)ㆍ손(巽) 이하 여섯 괘는 모두 부부가 마주보는 표상이다. 뇌(雷)ㆍ풍(風)이 서로 가까워지는 것은 부부의 기력이 서로 돕는 것이다. 수(水)ㆍ화(火)가 서로 싫어하지 않는 것은 부부의 강유(剛柔)가 서로 제어하면서 어그러지지 않는 것이다. 산택(山澤)의 기운이 통하는 것은 부부의 정과 뜻이 서로 바탕이 되는 것이다. 부부의 위상이 정해지면 반드시 이 여섯 가지 뜻을 갖추게 되고, 그 뒤에야 집안을 살찌울 수 있다.
● 천지의 온전한 수는 10인데, 1과 6, 2와 7, 3과 8, 4와 9는 모두 음양이 상대를 이룬 것으로, 이는 부부가 배합하는 상이며 하도(河圖)가 생성한 수이다. 북동(北東)은 만물이 변하여 생기는 방위이기 때문에, 1과 3이 생성하고 6과 8이 완성한다. 바로 남편이 베풀고 아내가 낳는 상이다. 남서(南西)는 만물이 바뀌어 완성되는 방위이기 때문에, 2와 4가 생성하고 7과 9가 완성한다. 바로 아내가 기르고 남편이 가르치는 상이다.
중앙의 5는 존귀한 자리에 있으면서 집안의 일을 통어한다. 아내는 양육을 담당하여 집안의 규범을 이룬다. 부부가 집에 있으면서 이중 하나라도 어기면 집안의 도리가 어지러워져서 모든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수를 세밀하게 추론하면 그 상이 저절로 드러나고, 그 상을 세밀히 추론하면 그 이치가 저절로 나타난다. 무궁무진하여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측면이 있으니, 이를 두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근본이라고 한 것이다.
● 현명한 아내가 있고 나서 집안이 일어나는 것은 위로는 제왕부터 아래로는 사서인(士庶人)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이다. 아내의 도리는 안에 있으면서 조용함을 주로 한다. 안과 조용함은 만물의 근본이다. 안에서 잘못하면 밖에서 얻을 수가 없고, 조용함을 어지럽히면 움직임에서 구제할 수 없다. 만물과 만사가 모두 그렇다. 더구나 부부는 한집안의 천지이다. 땅이 넓고 두터운 덕으로 아래에서 짝할 수 없다면, 하늘이 어떻게 그 조화를 이루겠는가. 그래서 홍수가 나서 물이 옆으로 터져 마구 흐를 경우, 하늘은 그대로 높고 밝지만 오행(五行)이 어지럽게 움직여 만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땅이 평평해진 뒤에야 하늘이 이룬다고 하는 것은 그 이치가 참으로 그러한 것이다.
음(陰)의 도는 거스름인데, 거스름의 뜻은 본래 ‘패역(悖逆)’의 ‘역’ 자가 아니다. ‘역’이라는 말은 맞이한다는 의미이다. 양은 덮고 음은 우러러, 양에서 맞아 합해진 뒤에야 조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선천괘운(先天卦運)에서는 음이 맞이하여 양에 합쳐진다. 만물과 만사가 모두 이런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부부는 덕을 같이하여, 남편이 부르면 아내가 화답한다. 바로 이게 맞이하는 바른 이치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완악하고 어리석은 아내가 영합하면 바른 이치를 잃고 도리어 패역의 흉악한 성품이 된다면 재앙 같은 홍수가 일어나 옆으로 마구 터져 흐르고 하늘로 넘쳐 해를 가리며 산을 삼키고 언덕을 잠기게 할 것이다. 평원에는 초목이 무성하고 사람 사는 읍리(邑里)까지 뱀과 용이 넘치니, 신령스런 우(禹) 임금의 수단이 아니면 누가 소통시켜 물길로 유도하겠는가. 의서(醫書)에 육부(六腑)의 병은 쉽게 치료할 수 있지만, 오장(五臟)의 병은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그 이유는 오장은 음이기에 병이 상극(相克)으로 거슬러 전해지기 때문에 치료가 어렵고, 육부는 음이기에 병이 상생(相生)으로 순하게 전해지기 때문에 쉽게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다. 부녀의 성품도 상극으로 거슬러 전해지기 때문에 재앙이 훨씬 혹독하니, 통탄스럽다.
● 부녀자의 본성은 샘이 많고 인색하며, 괴팍하고 교만하며, 사납고 공격적이며, 성급하고 조급하며, 어리석고 우매하다. 명철한 부녀자가 아니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남편 된 사람이 이중 하나라도 가지고 있는 여자와 결합하면, 마치 땔나무에 불을 붙인 듯 그 화란(禍亂)이 치열해져 집안과 친족의 멸망은 벗어날 방법이 전혀 없다. 장부(丈夫) 중 강명(剛明)한 몇 사람이나 이런 이치를 알고 경계하며 삼가고 두려워하면서 자기를 바르게 하고 사물을 끝까지 연구함으로써 반드시 닥칠 화란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슬프도다.
● 우리나라에서는 아내를 내쫓아내는 일을 금지하고 있어서, 부녀자로 하여금 한 사람을 따라서 일생을 마치게 하니, 참으로 아름다운 법이다. 그렇지만 부녀자로 하여금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 교만함을 기르게 했던 원인도 필시 이 법이 아닌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집안이 망하게 되어도 어쩔 방법이 없는 상황이 세상의 일반적인 대세가 되었다.
아내가 되어 정숙하지 않으면 쫓아내는 것이 옳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 성왕(聖王)들은 금지하지 않았으니, 그 뜻이 원대하다. 그렇지만 아내를 내쫓는 일을 허락한다면 아울러 개가(改嫁)도 허락해야 한다. 개가를 허락해야 쫓겨난 사람이 개가를 해서 돌아갈 데가 있을 것이다. 개가를 허락한다면 아울러 개가한 사람의 자손에 대해서도 청환(淸宦)을 허락해야 하고, 그런 뒤에야 세로(世路)에 대한 원망과 억울함이 없을 것이다.
● 천지 만물은 모두 자웅(雌雄)과 빈모(牝牡)가 있다. 부부가 한집을 이루는 것은 사람의 변하지 않는 도리이다. 세상 사람들은 사사로움에 빠져서 아내를 자신의 사사로운 물건으로 보면서 마치 자기가 혼자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때문에 잘못이 있어도 모르고 나쁜 점이 있어도 살피지 않는다. 마침내 자기 몸조차 아내의 물건이 되어 감히 자기 몸처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부모 형제에 대해서도 나의 지친(至親)이 될 수가 없고 아내의 입장에서 볼 때 성(姓)이 다른 별개의 사람들로 남는다. 논밭이나 창고가 모두 대대로 내려온 나의 재산이 아니라 아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사사로운 재산이 된다.
참언(讒言)이 애욕을 통해 젖어들고, 베갯머리 송사가 천리(天理)를 소멸시키고 막아 버린다. 처음에는 내가 나의 아내를 사랑하지만, 끝내 아내가 나의 마음을 갉아먹는다. 아내 홀로 존귀해지고 나는 내 몸조차 잃는다. 마침내 부자(父子)가 길 가는 사람이 되고, 형제가 원수가 된다. 온 세상이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되는데도 깨닫지 못하니, 애통하도다. 옛사람은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다.”라고 했는데, 요즘 세속에서는 천하에 옳지 않은 처자식이 없다고 한다. 인심의 차이가 과연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 주(周)나라 사람은 태강(太姜)ㆍ태임(太妊)ㆍ태사(太姒)에서부터 읍강(邑姜)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녀(聖女)였다. 그러니 그들의 왕업이 어떻게 번창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들의 복록이 어떻게 길지 않겠는가. 삼황오제부터 지금까지, 유독 주나라가 8백 년이라는 긴 세월을 누렸던 것은 4대에 걸친 성녀의 음덕 때문이었다.
● 옛날에 태교법(胎敎法)이 있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빈말이라고 간주하고 전혀 믿지 않는다. 자식이 태어나 10세 때 선생에게 배우러 가기 전에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진지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믿지 않는다. 지금 눈으로 보는 사실로 검증하면 만에 하나도 차이가 없다. 생김새가 단정하고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게 되는 데는 태교가 더욱 절실하다.
부녀자 중에 정숙하지 않은 사람이 임신을 하고서 음식이나 거처, 말씨나 보고 듣는 것을 하고 싶은 대로 방자하게 하고 경계하거나 근신하지 않기 때문에 생김새가 바르지 않고 총명도 자연 남보다 못하니, 이는 벗어날 수 없는 이치이다. 태어난 뒤에는 편애하여 핥고 빨고 하면서 나쁜 점에 영합하고 오만함을 길러 준다. 겨우 7, 8세가 되면 교만과 어리석은 완악함이 마침내 그 아이의 성품이 되어 아무리 어진 스승이라도 가르칠 수가 없다. 아내의 완악한 폐해가 이처럼 크고 오랜 동안 영향을 미친다. 주나라 시에 복을 축하하면서 “선함을 내려 주니 무엇인가, 훌륭한 여자를 주리라.”라고 했으니, 참으로 의미가 있는 말이다.
● 상복을 입는 법에는 혈육을 나눈 가족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아내가 남편의 복(服)을 따라 입는 종복(從服)이 많다. 며느리는 시부모를 위해 마땅히 남편을 따라 삼년복을 입어야 하고, 남편의 형제를 위해 마땅히 남편을 따라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 그런데 성인이 시부모에게는 기년, 남편의 형제에게는 복이 없다고 곧장 판단했으니, 혈육의 정이 없기에 억지로 속일 수는 없다는 점을 진실로 알았던 것이다. 성인의 법은 터럭만큼도 속임이 없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정에 따라 박하게 하는 방향을 좇았으니, 그 의미가 심오하다. 후세에 삼년 및 소공(小功)을 제정한 것도 유사하다.
그러나 시부모의 궤연(几筵 상청(喪廳))에 자기 남편은 수척한 몸으로 최질(衰絰)을 입고 자리에서 나아가 곡을 하는데 자기는 보통 사람의 평복을 입고 궤전(饋奠)이나 돕고 있으면 저절로 두렵고 편치 않은 마음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며느리의 양심을 깨울 수 있고 참된 공경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이치상 필시 있는 바이다. 그렇지 않고 억지로 최질에 지팡이를 잡게 하면, 어찌 안으로 화나고 언짢은 마음을 품게 하여 더욱 며느리의 게으름과 거만함을 조장하지 않겠는가.
형수와 아주버니 사이에도 길 가는 사람과 다르지 않은 점은 열에 한둘도 없다. 심한 경우에는 안으로 샘이나 나쁜 마음을 품고 있어서 도리어 남보다 못하니, 어디에 죽음을 애도하는 상복을 운운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온 집안이 최질을 입고 있는 중에 혼자만 평복을 입고서 다시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느끼느니만 못할 것이다. 이 모두 성인이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대해서 천륜에 자연스러운 양심을 격발시킨 것이다.
소(疏)에 “수숙(嫂叔) 사이에 상복이 없는 것은 분별하여 피혐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어서 한마디 붙인 말일 뿐, 반드시 본래의 의미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이를 가지고 시부모에 대한 상복에 비교해 보면 그 은미한 뜻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이렇게 정(情)이 없는 처지로 함께 살면서,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곁으로는 형제를 대할 때 어찌 경계하고 근신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터럭만큼도 소홀함이 있으면 이리와 호랑이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격이니,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 《서경》에서는 “두 딸에게 본보기가 된다.〔刑于二女〕”라고 했고, 《시경》에서는 “내 아내에게 본보기가 된다.〔刑于寡妻〕”라고 했으니, 형(刑)을 법(法)으로 풀이한 것이다. 그렇지만 어찌 다른 글자가 없어서 굳이 ‘형’이라고 말한 것이겠는가. 그 악(惡)을 능히 다스리는 것을 법으로 삼았기 때문에 여기서 ‘형’이라고 말한 것이니, 그 취지가 은미하다. 그렇지 않다면 형제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을 ‘형우형제(刑于兄弟)’라고 해야 하는데, 과연 말이 성립하겠는가.
과처(寡妻)라고 할 때의 ‘과(寡)’ 자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옛사람들은 글자를 쓸 때 구차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기 아내에 대해서 부족하다고 판단한 뒤에 본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아내가 크고 훌륭하다는 생각을 가지면 아무리 본보기가 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 세속에서 혼인한 집안을 서로 뽐내는데, 자기 집안보다 나은 집에서 며느리를 맞아오기 때문에,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오만불손하고 남편에게 무례하다. 이렇게 해서 집안을 망치는 경우가 십중팔구이다. 이는 풍속을 도탑게 하고 세상을 맑게 하는데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예속(禮俗)을 이루려고 하면 의당 개혁할 방법이 있어야 하니, 그 해설을 하자면 말이 길지만 크게 혁신해야 할 수 있다.
● 경전(經傳)에서 형제의 도리를 말한 경우가 많지만, 서로 나쁜 점을 닮지 말라는 뜻인 무상유(無相猶) 세 글자가 가장 절실하다. 그가 마른 밥을 가지고 잘못하면 나도 마른 밥을 가지고 잘못하고, 그가 장단을 비교하면 나도 장단으로 비교한다면, 그 끝이 당 태종이 형과 아우를 죽인 지경에 이르는 것은 이치상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상(象)이 날마다 순(舜)을 죽이기를 일삼았는데, 순 임금도 상을 죽이기를 일삼았다면 과연 어떠했겠는가.
형제 사이에는 본래 똑똑하거나 못나기가 비슷하기 어렵다. 못난 사람이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똑똑한 사람이 그를 허물하면 잘나고 못난 차이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못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허물하지 않아야 천리를 보존하고 인륜을 온전히 할 수 있다. 매사에 화가 나고 원망스러운 모습을 보더라도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시간이 지나면 화해가 된다.
맹자가 “상(象)이 근심하니 순 임금도 근심했다.〔象憂亦憂〕”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근심했다.’란 무슨 뜻인가. 순 임금을 죽이지 못한 것을 근심한다는 말인가. 빈천을 근심한다는 말인가. “상이 기뻐하니 순 임금도 기뻐했다.〔象喜亦喜〕”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기뻐했다.’란 무슨 뜻인가. 순 임금을 만나서 기쁘다는 말인가. 순 임금을 묻어 버릴 꾀를 낸 것이 기쁘다는 말인가. 이는 순 임금이나 하나라 때부터 전래된 말이 아니다. 맹자가 의도를 가지고 위대한 순 임금의 심중을 설명하면서 갑자기 ‘우희(憂喜)’ 두 글자를 말한 것이다. 인지상정으로 미루어 보면 상의 근심이나 기쁨이 언제 순 임금과 상관이나 있었던가.
순 임금이 한참 있다가 우물에서 나와 홀연히 상이 온 것을 보았는데,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던 천륜이 얼굴에까지 미처 얼굴에 기쁜 미소가 한꺼번에 퍼지며 네가 기쁘니 나도 기쁘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는 터럭만큼의 틈도 용납하지 않았으니, 어느 겨를에 상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미리 짐작했겠는가. 여기에서의 ‘우(憂)’ 자는 금석(金石)에서 땀이 나는 표현이고, ‘희(喜)’ 자는 신령과 하늘이 춤을 추는 표현이니, 맹자는 참으로 순 임금을 생명력 있게 묘사했다. 맹자가 “순이 몰래 고수(瞽叟)를 업고 달아날 것이다.”라고 한 말도 성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이태백(李泰伯.李覯) 같은 무리가 언제 꿈속에서나마 이런 경지를 보았겠는가. 그런데도 감히 맹자를 비난하니 너무도 자신의 역량을 모르는 것이다.
순을 죽이려다가 죽이지 못했으니, 이것이 상의 근심이라는 것이지만, 상의 본래 의도를 가지고 말하자면 당연히 ‘상이 화를 냈다.〔象怒〕’고 해야 한다. 이미 ‘상이 화를 냈다.’고 했다면, 순이 대응해야 하는데, ‘순도 화를 냈다.〔亦怒〕’고 해야 하는가. ‘순도 화를 냈다.’고 하면 순이 어떤 사람이 되겠는가. 형제 사이에는 천륜의 본분에 본래 ‘노(怒)’ 자가 없다. 상이 날마다 순을 죽이기를 일삼았으나 순의 마음에는 단지 상의 형이었을 뿐이니, 어찌 일찍이 상이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았겠는가. 상이 두려워하며 위축되었으니, 다만 자기 동생의 근심을 보았을 뿐이다. 동생이 근심하는데 형이 어찌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순 자신의 마음은, 나는 형의 도리를 다할 뿐이지 동생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어쩌겠는가, 나에게 미진한 데가 있는가, 나에게 오히려 잘못이 있는가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여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던 나머지 근심이었다. 형제끼리 우애를 얻지 못하고, 나아가 어떻게 부모에게 사랑을 얻겠는가. 순의 근심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맹자가 곧장 위대한 순의 심정에 들어가 ‘근심’이라는 글자를 끄집어냈으니, 만일 순이 본다 해도 감격의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순 역시 기뻐했다.’, ‘순 역시 근심했다.’ 두 구절은 고금을 통하여 형제가 화합할 수 있는 위대한 법문(法文)이다. 숙독하고 잘 생각하면 아버지가 양팔에 안고 있던 모습, 어머니가 두 젖을 물리던 모습, 두 품 속의 모습이 오래 마음과 눈에 남아 있어, 백발노인이 되더라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대추와 배를 양보하는 우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앞서 말했던 금석(金石)에서 땀이 나는 표현이고, ‘희(喜)’ 자는 신천(神天)이 춤을 추는 표현이다.
● 승려가 된 사람도 자기 부모 형제에게 모두 참된 사랑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어찌 모든 효성과 우애하는 본성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겠는가. 다만 그들은 처자식이 없기 때문에 양심이 질곡 당하는 바가 없어 지극한 정이 그 천성을 보전한다. 세속 사람들은 정이 사사로운 애정에 의해 나누어지고 편파적으로 빠짐에 따라 사랑이 옮겨 간다. 마음속에는 그저 내 처자식만 있고, 내 부모 형제는 곧 잊어버린다. 글을 읽은 사대부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지난날에는 내가 부모 형제의 나였다가, 내 아내가 집에 들어와 내 자식을 낳으면 지난날 나를 낳아 준 부모나 형제들이 갑자기 딴 사람이 된다. 병에 걸리거나 춥고 배고파도 전혀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찌 내 자식이 처자식을 가지게 될 때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내 동생이 처자식을 가지게 될 때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생각하지 않는가. 승려가 스승 승려를 봉양하고 승려 형제들과 화목하고 사랑하는 것이 도리어 속인들이 부모 형제를 대하는 것보다 나으니, 처자식이 인심을 타락시킨 것이 한결같이 여기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세상 사람 그 누가 〈상체(常棣)〉 시를 읽지 않았겠는가만, 입으로만 외우고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감발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대개 《시경》의 흥(興)이 가장 알기 어렵다. 시인의 본의를 안다면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춤을 출 수 있으면 고기 맛을 잊게 되기도 하는 등 무한한 의미를 담고 있다. 가령 〈상체〉에서는 형제의 정을 말하려고 하지만 진정어리고 애태우는 심정이 마음속에서 막혀 있었다. 그 때문에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지만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때 홀연 상체 꽃이 저기 활짝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뜻이 활달해지고 표현이 분명해져서 마침내 “저기 핀 꽃이여, 어찌 그리 활짝 피었는가.〔彼其之花 何彼韡矣〕”라고 하면서 바야흐로 형제간의 일을 말했다.
이 꽃이 형제와 관련되지는 않지만 내 마음에서 감발한 지극한 뜻이 모두 이 냉구(冷句)에 있다. 그렇지만 심중에 있는 감정이 간절하고 지극하여 이제 장차 생판으로 극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상체가 활짝 피었다.’라고 곧장 말할 겨를 없이 이윽고 ‘활짝 피었지 않은가.〔豈不韡韡〕’라고 뒤집어 말했으나, 말씨가 형제간의 본분에 쌓여 ‘또한 형제가 있으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또한 꽃이 곱고 아름답지만 그저 한 송이만 피었을 뿐인데 어찌 겉으로 훤히 드러나는 선명한 광채가 있겠는가. 가지가 겹치고 꽃송이가 이어져서 겹쳐 비치고 널리 빛나기 때문에 광채가 현란하고 겉으로 훤히 보이는 것이다. 한 사람의 몸이 비록 아름답고 좋더라도, 단지 홀로 산다면 어찌 겉으로 드러나는 운치나 훌륭한 명성이 있겠는가. 반드시 형제가 모두 생존한 뒤에야 찬란한 빛이 있는 것이다.
또한 곧장 ‘형제’라는 글자를 가져와서 정당한 이치를 평범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귀담아듣거나 분명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굳이 요즘 사람들이 형제에게 야박하게 하는 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여, ‘모든 지금 사람〔凡今之人〕’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의 ‘범(凡)’ 자는 기세가 갑자기 꺾이며 심하게 감정을 변화시키는 뜻이 있으며, ‘금지인(今之人)’ 세 자는 귀에 대고 타이르는 듯한 간곡한 뜻이 있다. 또 반드시 ‘형제만 같지 못하네.〔莫如兄弟〕’라고 했는데, 그 뜻은 마치, ‘너는 처자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친구들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오직 형제만 같지 못하다.’라는 뜻과 같다.
또한 형제는 천륜이며 부모가 같다는 의리가 있다. 부인이나 아이들이 통상 하는 자질구레한 말을 누가 기꺼이 마음을 고쳐먹고 간절하게 듣겠는가. 사람이 죽어 초상을 치르는 두려움을 당해 - ‘위(威)’ 자에는 홀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뜻이 있다. - 걱정되고 급박할 때에 형이 두려우면 동생이 의지가 되고 동생이 걱정하면 형이 위로한다. 다른 사람은 아무리 많아도 전혀 상관이 없다. 이때에는 세속의 일이나 사사로운 마음이 일체 물러가고 오직 천리의 본연만 있기 때문에 그리워하고 의지하는 바가 터럭만큼도 거짓이 없으니, 이것을 ‘몹시 생각한다.〔孔懷〕’라고 한다. ‘공(孔)’ 자는 지극하여 끝이 없다는 말이고, ‘회(懷)’ 자는 마음이 끌리고 살뜰하다는 뜻이다.
더구나 거친 들판에 추워서 얼어 죽게 되면 그 화(禍)가 더욱 참혹하지만, 사이좋은 집안사람들이나 선량한 친구도 흘겨보며 지나간다. 오직 동기(同氣)가 있으면 풀이 무성하고 뼈가 쌓인 사이에서 형을 부르고 동생을 부르며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직접 자기가 짊어지고 돌아간다. 이 어찌 남들을 의식하여 하는 일이겠는가. 천륜의 지극한 정이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이 시의 ‘구(求)’ 자에는 통곡이 검은 구름을 걷어 내고, 피가 들판의 풀을 물들인다는 뜻이 있다.
위 장에서 말한 내용이 이미 간절하지만 그 감정을 설명하려니 여전히 미진하여 “저 할미새 날면서 울고 있네.〔維彼鶺鴒 飛而且鳴〕”라고 한 것이다. 암수가 서로 화합하고 수미(首尾)가 상응하여 마음에 촉발되는 것이 있어서 흥(興)에 감정을 부친 것이다. 다소 급하고 어려울 때 형이 욕을 보면 동생이 격분하고, 동생이 위급하면 형이 구해 주니, 한 몸처럼 서로 관련이 되고, 한마음으로 서로 돕는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길이 탄식만 할 뿐이다. 좋은 친구라고 하면 지극하고 절친하게 정을 나눈 사람이지만, 형제가 한 몸으로 구해 주고 받아 주는 것만은 못하니, 하물며 데면데면하고 절친하지 않은 경우에는 말할 필요도 없다는 의미이다. 탄식이 긴 것은 좋은 벗이기 때문이다. 좋은 친구가 아니었다면 길이 탄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좋지 못한 형제가 더러 서로 원망하기까지 하다가도 모욕을 막아 내는 수가 있다. 급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모욕을 당하면, 비록 죽어서 초상을 치르는 두려운 지경에 미치지 않았더라도 환난이 갑자기 발생했을 때와 모욕이 느닷없이 닥칠 적에 본심이 촉발되어 조금도 사사로운 틈이 없기 때문에 천리(天理)의 당연한 준칙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밝게 나타난다. -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를 구하듯이,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의 부모와 친해지려는 것도 아니다. 자연히 이런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양능(良能)’이다. - 아무리 좋은 친구가 있어도 끝내 구하거나 도와줄 수 없다.
위에서 길이 탄식한다고 말했으니, 여전히 정과 의리는 있다. 여기서 ‘도움이 없다.〔無戎〕’고 말했으니, 비록 밀접한 사이라고 해도 원래 남이니 과연 정이 적은 형제만도 못하다.
《시경》의 흥법(興法)에는 반드시 2구로 2구를 일으키는데, 흥이 적절하게 일어나 주제에 들어가는 것이 급했기 때문에 겨우 할미새를 말하고 바로 형제를 거론했으니, 그 뜻이 더욱 좋다. 《시경》은 본래 4자로 구를 이루는데, 형제가 서로 다투더라도 거만한 상(象)을 제외하면 어찌 드러내 놓고 욕하고 싸운 적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굳이 ‘우(于)’ 자를 썼으니, 단지 남이 안 보는 담장 안에서 소소한 다툼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시인은 각각 5자, 6자, 3자, 2자로 된 구를 지었는데, 모두 언어를 통해 이치에 통달하기 위해 부득불 그러한 것이다. 그 글자를 사용하는 데 구차하지 않은 것이 모두 이와 같다. ‘융(戎)’은 ‘무기〔兵〕’이며, 또 ‘너〔汝〕’이니, 이는 ‘돕는다.〔助〕’는 뜻이다. 이 ‘조(助)’ 자는 ‘병(兵)’과 ‘여(汝)’ 두 글자의 풀이를 합쳐서 말한 것이다. 무기가 도움이 되는 것은 마치 어려움〔難〕이 다스림〔治〕이 되는 것과 같다. ‘너’가 도움이 되는 것은 정이 친밀한 사람들에게는 너니 나니 하는 실제 관계가 있다. 막는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이는 ‘병’ 자의 본래 의미이고, 너니 나니 하는 뜻으로 말하자면 속언에서 말하는 ‘너 없으면 누구와 함께할까’라는 말이다. 어찌 다만 협운(叶韻) 때문에 구차하게 ‘융’ 자를 썼겠는가. - 경전(經傳)의 문자는 통용하거나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본래 글자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굳이 차용하는 것은 모두 두 가지 의미, 세 가지 뜻을 겸하고 있어서 그 뜻이 더욱 절실하니, 모두 이런 부류이다. -
‘증(烝)’이란 낙심하여 쓸쓸하다는 뜻으로, 도움이 없는 상황을 강조하여 말한 것이다. 상란(喪亂)이 바로잡힌 뒤에 - 상(喪)은 초상이고, 난(亂)은 급하며 어려운 일이다. - 이미 안정되고 또 편안해지면, 사사로운 의도가 가리고 천리(天理)가 침식된다. 그러므로 형제가 도리어 벗보다 못해진다. 벗이란 범범하게 ‘아는 친구〔知舊〕’ 정도를 말한다. 위 장에서는 좋은 벗이 형제보다 못하다고 했고, 아래 장에서는 형제가 도리어 소원한 보통 친구보다 못하다고 했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은가.
마침내 “안정되고 또 편안하다.〔旣安且寧〕”라는 말로 이어, 편안할 때 더욱 형제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인심을 열어 발동시켜서 “술안주를 늘어놓고, 술을 실컷 마신다.〔陳列籩豆 飮酒饜飫〕”라고 했으니, - 곧 안주가 산처럼 쌓였고, 술이 강처럼 많다는 뜻이다. - 세상 사람들이 언제 이런 일을 즐거움으로 삼았겠는가. ‘그대의 술안주를 늘어놓고,〔陳爾之籩豆〕’ ‘술을 실컷 마신다.〔飮酒之飫〕’고 했으니, 반드시 형제들이 대청에 나열하고 어린 처자식도 아울러 모여 함께 있으면서, 차례대로 술잔을 들며 잔치를 마치도록 즐긴다. 그리하면 기쁜 뜻이 서로 화합하고 정과 뜻이 통하여 아이들이 아비를 부르고 어미를 부르며 대추와 배를 서로 권하고 사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처자식이 좋아하고 합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언제 즐거움으로 삼았겠는가. 비록 자기가 사사로이 친애하는 처자식에게 금슬처럼 정이 있더라도, 반드시 형제가 함께 있어야 어울리고 - ‘흡(翕)’ 자는 어울리고 조화롭다는 뜻이다. - 화락하여 온 가족의 덕이 살찐 뒤에야 처자식의 즐거움을 길이 누릴 수가 있다. 형제간에 다투어 멀어지면 집안도 망할 것이니, 어찌 처자식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위 장의 ‘유(孺)’ 자는 바로 갓난아이의 마음처럼 참되며 간절하고 거짓이 없다는 뜻이다. 여기의 ‘담(湛)’ 자는, 좋고 맛있는 술이나 난실(蘭室)의 향기처럼 혈육과 호흡하며 화합하여 훈훈하고 진한 정이 배어 오랠수록 더욱 즐거우니, 모두 천하에 왕 노릇 하는 즐거움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가업(家業)을 보전하고 처자식을 즐겁게 해 주고자 하는 정이 지극하고 간절하다. 그 지극하고 간절한 정을 통해서 깨우치기를 “그대가 이렇게 하고자 하면, 반드시 형제와 화합하는 데서 그 이치를 추구하고, 반드시 형제를 사랑하는 데서 그 일을 도모해야 한다. 참으로 그러하다, 참으로 그러하다. 내가 어찌 속이리오, 내가 어찌 속이리오.”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형제’라는 글자를 거론할 겨를도 없이 곧장 ‘이것을, 이것을’이라고 거듭 말하여, 부모의 속내를 열어 너희 두 명의 자식들, 다섯 명의 자식들에게 나타내 보인 것이니, 참으로 말의 뜻이 깊다.
이 끝맺는 구절은 정녕코 맹세하는 말이다. 이 시는 성인이 아니면 지을 수 없었으니, 틀림없이 주공(周公) 자신의 작품이다. 만 번을 읽어 보아도 그 맛이 무궁하여, 읊조리고 감탄하며 깊이 음미하면 감격의 눈물이 저절로 떨어진다. 이 시를 읽고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결코 사람의 마음이 없는 자이니, 자신의 형제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지 않으면 요행히 모면했다고 하겠다.
주공이 동쪽으로 정벌을 간 전쟁은 만고 인륜의 변고에 해당된다. 왕위에 오르기까지 16세대 동안 쌓은 덕업, 5세대의 큰 업적과 형의 위대한 공훈을 하루아침에 전복시킬 수 없고 차마 자신 때문에 망치게 할 수 없어서, 도끼가 부서지고 이지러졌으며 피와 눈물이 흘러 개천을 이루었다. 조상과 하늘이 위에 임하였으니, 비록 지극한 정을 사사롭게 온전히 할 수는 없었지만 “내 아버지 품에서 함께 자랐고 내 어머니 젖을 함께 먹었는데 어질지 못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라고 누가 말할 것인가. 3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승의 백골에서는 아직도 피눈물을 쏟고 있을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이런 시를 지었으니, 어찌 골수에 찌르고 새기며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읽는 사람은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다.
● 맹자가 말하기를 “주공의 잘못은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했다. 이 한 구절로 형제의 정을 다 설명하여 다시 여지가 없다. 우리 왕실 선조들의 업적과 황형(皇兄)의 공로는 억만년이 지나도 끝이 없으나, 적장자인 세자가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니 하늘에 했던 기도를 저버릴까 깊은 못에 서 있는 듯, 얇은 얼음을 밟은 듯하다. 내 형과 내 동생이 어찌 나의 마음과 다르겠는가. 모자란 것을 보완하고 지나친 것을 마름질하여 완성시키는 능력을 내가 다행히 갖추고 있으니, 이것이 진실로 형제가 함께 축복하며 다행스러워 하는 일이다. 안으로 나를 다스리는 것은 이미 감당했으니, 밖으로 형을 섬겨 부디 본보기로 삼기를 바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명을 받았으니, 이에 멀리서도 받드는 것이다.
당시 이런 주공의 마음은 한결같이 진실하고 망녕됨이 없었으며 명백하고 조화롭기가 마치 맑은 하늘에 상서로운 해나 꽃밭에 부는 따뜻한 바람과 같았으니, 무경(武庚)이 관숙을 유혹하여 희롱했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것이 대순(大舜)이 “상(象)이 기뻐하니 자신도 기뻐했다.”라고 했던 마음이다. 만일 주공이 이들이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을 미리 예상하고 은나라 유민을 감독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면, 이는 아버지가 양을 훔쳤다고 증언하는 마음일 것이니, 어찌 주공이 될 수 있었겠는가.
● 함께 부모 슬하에 있으면서 아직 처자식이 있기 전에 사납게 우기고 욕하며 싸웠다면 원래 이는 승냥이나 이리, 뱀이나 전갈이지, 애당초 말할거리조차 없다. 형제는 몸뚱이는 분리되었지만 기(氣)는 연결되어 손발과 같다.
다른 집안의 여자가 일단 들어와 살면 갑자기 사사로운 존재가 되어 사랑이 옮겨 가고 정이 가리어져 시기의 빌미가 되고 싸움을 야기하여 형제들을 결국 길 가는 사람 보듯 한다. 자식을 낳으면 사랑은 그 자식 하나에 보태지고 사사로움이 수많은 갈래로 늘어나서, 길 가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 마침내 아예 원수가 된다. 그렇지만 그가 자식을 낳고부터는 낳으면 낳을수록 더욱 사랑하면서 왼쪽에 안고 오른쪽에 젖 물리며 오직 하나라도 죽을까봐 걱정하지만, 그 자식들이 나중에 아내를 얻으면 또 형제간에 다시 원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모른다. 입으로 먹고 코로 숨 쉬는 자라면 어찌 자다가 꿈속에서도 놀라 깨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역시 개, 돼지요, 짐승이나 곤충일 뿐이다.
● 어리석고 바보 같은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사랑을 어쩌지 못하고 모든 장난 다 받아 주고 아끼면서, 반드시 “집도 너에게, 논밭도 너에게, 기물도 너에게, 노비도 너에게 줄 것이다.”라고 하여, 젖 먹을 때부터 이익을 바라는 마음을 키운다. 또 둘째, 셋째 자식이 생기면, 반드시 “어떤 것은 너를 주고, 어떤 것은 너를 주겠다.”라고 말한다. 자식을 낳으면 낳을수록 사랑이 더해 가니, 또 “좋은 밭은 너에게, 좋은 것은 너에게 주겠다.”라고 말하여, 어린아이 때부터 다투는 마음을 키운다. 반드시 “너는 급제할 것이다, 너는 부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해서, 처음 지각이 생길 때부터 탐내고 부러워하는 마음을 키운다. 다른 집에 있는 좋은 물건을 보면, 반드시 “내 자식에게 주어라, 내 아이에게 빌려 주어라.”라고 하면서, 철이 들 때부터 남의 것을 함부로 빼앗는 마음을 키운다.
놀이를 통해서 그 승부욕을 조장하기도 하고, 음식을 통해서 그 많고 적음을 편향되게 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언어나 행동이 천리(天理)를 갉아 없애고 인욕(人慾)을 은근히 배양한다. 옷을 물려 입고 밥상을 같이 쓸 때 이미 사소한 일로 서로 싸우고, 아버지가 먹여 주고 어머니가 입혀 줄 때 이미 시비거리의 조짐이 생기니 뒷날 원수가 되는 것을 어찌 모면할 수 있겠는가.
● 자신이 앞서 가고 어른을 뒤로하는 것은 그 일이 사소한 듯하지만, 장유(長幼)의 순서에서 가장 긴요하고 절실하다. 대체로 마음이 공손하지 못한 자는 자기 앞에 사람이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작게는 앉거나 눕거나 걸어 다닐 때, 크게는 일을 하거나 외물에 접할 때도 남에게 양보하지 않고 매번 여러 사람보다 앞서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뒤에 있는 것을 싫어한다. 나이가 많으면 내가 어른으로 대우하니, 이는 하늘이 낳은 자연의 질서이지, 재덕(才德)이나 용의(容儀)의 차등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 위에 있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늘 싫고 괴로워서, 심한 경우에는 자기 친형이나 숙부에 대해서도 오히려 동생, 조카 노릇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러니 이는 자기 부모에 대한 마음도 말씀을 받든다거나 공경하는 마음이 없는 자이다. 더구나 동네나 고을 사람, 나라 사람들에게는 어떻겠는가.
이런 사람은 묻기를 좋아할 수가 없고, 다른 사람들과 좋은 일을 할 수도 없으며, 간언(諫言)을 따를 수도 없다. 자기 생각만 채택하여 마음대로 판단하고, 간언을 듣지 않고 현명한 사람을 질투하며, 자기를 따르고 받드는 사람을 좋아하고 아첨하는 말을 기뻐한다. 선비로 있을 때는 몸을 욕보이고 공부를 망치며, 벼슬을 하면 현명한 사람을 가로막고 권력을 도둑질하니, 이는 모두 하나의 마음이 빌미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배움은 어렸을 때부터 겸양(謙讓)을 가르친 뒤에도 매사에 차례와 순서를 중시하는 것은 바로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항우(項羽)가 어찌 사람들이 말하는 호걸이 아니겠는가마는, 글쓰기와 검술을 배우지 않았을 때부터 이미 다른 사람에게 굽히고 다른 사람의 뒤에서 순서에 따라 자신의 일을 진전시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에 송의(宋義)가 상장군(上將軍)이 되자 죽였고,회왕(懷王)이 맹약을 주도하자 시해했다. 항우가 어렸을 때부터 언제 어른의 뒤를 수행한 적이 있었던가. 유자(有子)는 “그 사람됨이 효도하고 공경하면서 윗사람을 범하기 좋아하는 자가 드물다.”라고 했는데, 참으로 의미가 있는 말이다.
● 기러기가 날 때 수십, 수백 마리가 날더라도 순서가 있고 어지럽지 않다. 혹시 나중에 도착한 새가 있으면 양보하여 차례를 지킨다. 부녀자나 어린아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우러르며 그 미덕을 칭찬한다. 그 울음 역시 차례 있고 질서 있게 울지, 함께 소리를 내는 적이 없다. 가령 십여 마리가 있어도 반드시 다 우는 일은 없고 단지 한두 마리가 우니, 이는 분명 잘 우는 기러기에게 양보하여 울게 하는 것이다.
기러기가 땅으로 내려와 모일 때에는 모이를 먹으러 가는 것인데, 역시 앞다투는 행태도 없이 날아서 차례로 천천히 내려온다. 먼저 내려온 기러기도 반드시 한 무리가 다 내려오기를 기다린 뒤에 모이를 쪼아 먹는다. 이런 점이 보통의 사물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런데 까마귀는 어지럽게 날고 한꺼번에 지저귀며 뒤섞여 싸운다. 사람들이 보고는 떠들썩함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머리가 아파 욕을 하지만, 정작 사람들 자신의 행동은 기꺼이 까마귀가 되지 기러기가 되지는 않는다. 이는 그 마음이 검기 때문이다. 《시경》에 “검고서 까마귀가 아닐 수 없다.〔莫黑匪烏〕”라고 했으니, 이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이다.
● 질서가 있는 것은 천지(天地)의 가장 근본이 되는 법칙이다. 크게는 천지와 일월(日月), 사시(四時)의 절기에서부터, 작게는 움직이고 숨 쉬는 모든 사물과, 더 작게는 도구의 쓰임이나, 더럽게는 똥오줌을 누는 일까지 모두 질서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에실이 가늘지만 질서가 있으니 비단필을 만들고, 거미줄이 미세하지만 질서가 있으니 공중에 걸린 거미줄을 만든다.
사람이 질서가 없이 사람의 도를 이룰 수 있겠는가. 질서 때문에 부모에게 순종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부부에 구별이 있고 벗에게 신의(信義)가 있는 법이다. 부모님을 친애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사물을 사랑하는 것이 인(仁)의 질서이고, 사물을 재단하여 시의에 맞게 하는 것이 의(義)의 질서이다. 상하와 귀천은 예(禮)의 질서이고, 오음(五音)과 육률(六律)은 악(樂)의 질서이며, 사리를 분별하고 참작하여 변통하는 것은 지(智)의 질서이다. 질서가 없으면 삼재(三才)의 도가 멈춘다. 배우는 사람은 본성을 따라 행동하고 익숙해져야 하니, 장유유서(長幼有序)에서부터 시작된다. 공자가 말하기를 “예와 겸양으로 할 수 있으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했으니, 이것이 장유유서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다.
● 성인 문하에서 배우는 방법은 공부 과정을 뛰어넘게 하지 않으니, 순서를 잃으면 배움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궐당(闕黨)의 동자가 어른의 뒤에 있지 못했기 때문에 공자가 빨리 이루려는 그의 태도를 미워했던 것이다. 지금 과거 문장은 고루한 기예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 근본을 두텁게 하지 않고 공부 과정을 뛰어넘어 빨리 이루려고 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겸손하고 공경하는 성실함이 없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과거에 붙어 관직에 나아가더라도 부귀를 얻기 전에는 얻을 것을 걱정하고 얻은 뒤에는 잃을 것을 걱정하는 비루한 사람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번역: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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