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23. 주일 큐티
에스라 7:21 ~ 28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의 수정본과 에스라의 찬양
관찰 :
1)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의 수정본
- 21절. “나 곧 아닥사스다 왕이 유브라데 강 건너편 모든 창고지기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가 무릇 너희에게 구하는 것을 신속히 시행하되” => 아닥사스다 왕은 자신이 내린 조서에 대하여 수정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것 같지만, 아닥사스다의 여러 표현들이 새롭게 조정이 되었습니다. 이 조서는 제국의 행정을 담당하는 실무자들에게 주어져서 실제적인 일들이 일어나도록 하는 조서가 되었습니다.
- 22절. “은은 백 달란트까지, 밀은 백 고르까지, 포도주는 백 밧까지, 기름도 백 밧까지 하고 소금은 정량 없이 하라” => 현재의 도량으로 환산하자면, 은은 3400kg, 밀은 22000리터, 포도주는 2200리터, 기름도 2200리터를 공급해 주라는 것입니다. 원래 소금은 제국의 통치 수단으로 매우 비싸게 취급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소금이 사해에서 풍부하게 공급이 되었기 때문에 특혜를 베푼 것입니다.
- 23절. “무릇 하늘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삼가 행하라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 => 아닥사스다 왕은 하나님에 대해서 경외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왕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황제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향해서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 2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제사장들이나 레위 사람들이나 노래하는 자들이나 문지기들이나 느디님 사람들이나 혹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받는 것이 옳지 않으니라 하였노라” => 제국을 통치함에 있어서 세금을 엄하게 걷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세금에는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가 있었습니다. 제국을 여행하는 자들은 반드시 통행세를 물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닥사스다 왕은 그러한 세금에 대해서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에 대해서는 모두 감면해 주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제사장, 레위 사람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 느디님 사람에 이르기까지 성전에서 수종드는 자들의 존재에 대해서 너무나 자세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이 조서 뒤에 누군가 이 모든 프로세스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닥사스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 25절.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 아닥사스다는 에스라에게 유다 지역의 종교문제 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통치권도 위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가르치라는 페르시아 황제의 명령은 에스라가 이제 팔레스틴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권위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면 이런 조서는 내려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 26절.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 하였더라” => 에스라에게 주어진 권세는 에스라의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에 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를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둘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닥사스다가 에스라가 얼마나 충성된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명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닥사스다는 에스라가 가장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충성스러운 사람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가 어찌하던지 페르시아의 황제인 아닥사스다를 위해서 일할 것임을 확신했기에 이렇게 전권위임의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2) 에스라의 찬양
- 27절.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 이제 아람어에서 히브리어로 바꾸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율법대로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지는 것,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백성들로 인해서 여호와의 성전이 아름답게 되는 것임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것이 제물의 숫자나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하는 예배자의 태도에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렇기에 에스라가 열심을 낸 것은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에스라는 종교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조상들의 하나님이 에스라 자신에게 주신 크고 놀라운 뜻이었고, 그것을 성취하시도록 역사하셨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 28절. “또 나로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 => 에스라는 이 놀라운 일에 대해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뻐기거나 내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도우시는 손이 함께 했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게 된 것임을 진실되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라는 겸손한 자의 송축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르침 :
1) 아닥사스다 왕이 내리는 조서가 초본과 수정본이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호칭의 변화입니다. 초본에서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능한 학자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조서를 내리지만(7:12), 하나님에 대한 표현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하나님”(7:15, 19), “네 하나님 혹은 그들의 하나님”(14, 16, 17, 19, 20)이라고 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에 대해 “그들의 하나님의 성전”(16), “예루살렘 네 하나님의 성전”(17), “네 하나님의 성전”(19, 20)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수정본에서는 동일하게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조서를 내리면서 “하늘의 하나님”(23절에 두 번), “네 하나님”(25, 26)으로 표현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전에 대해서 “하늘의 하나님의 전”(23), “하나님의 성전”(24)으로 바뀌었습니다. 즉 아닥사스다 조서의 초본에 의하면 하나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예루살렘에 거하는 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수정본에서는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거하시는 성전은 하늘의 하나님의 전으로 표현이 된 것입니다. 이 변화는 많은 것들을 시사합니다. 페르시아의 황제의 조서에서 그 칭호가 바뀌는 것은 별스럽지 않은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외교 문서의 단어 하나가지고도 여러 가지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조서를 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 조서의 변화를 하나님이 이루신 것이겠지만, 그것에 영향을 준 사람은 분명히 에스라일 것입니다. 그는 왕의 신뢰를 받는 자로서, 아닥사스다의 눈에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고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성경 말씀에 정통하여 왕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인류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신 것을 배우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조서의 내용이 바뀌었고, 그 기록을 에스라는 빼놓지 않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변화는 초본에 비해서 구체적인 내용이 언급된다는 것입니다. 초본에 의하면 성전 건축에 필요한 것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얼마든지 가져다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하면 사용하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그 말만 믿고 행하기에는 뒷꼭지를 잡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정본에서는 한계를 명시했습니다. 은은 백달란트까지, 밀은 백 고르까지, 포도주는 백 밧까지, 기름도 백 밧까지, 소금은 정량없이. 100 달란트는 약 3.4t, 100 고르는 약 22kl, 100 바트는 약 2.2kl입니다. 이것만 주라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그렇게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금의 감면과 더불어 성전 건축에 관하여는 전권위임을 에스라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이어야 실제로 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냥 “잘해라~”이렇게 해서는 될 일도 되지 않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실제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도 그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에스라를 통하여 알게 되었기에, 무엇보다 하나님 여호와의 선하신 손이 에스라의 위에 있었기에(28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2) 에스라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27 ~ 28절에서 에스라는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자신의 하나님이 아닌 조상들의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이스라엘의 족보에 대해서 에스라만큼 정통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놀라운 족보에 대한 지식은 너무나 탁월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뜻을 따르는 동료들이 자료를 모아놓기는 했을지라도 타국에 포로의 신분으로 있었기 때문에 한계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가 평생을 연구한 흔적이 성경에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는 스룹바벨 성전 건축이 완공되고 58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자신의 수많은 노력과 수고는 결코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노력도 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이 자신의 위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고백이요, 위대한 찬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적용 :
1) 에스라는 생각할수록 놀랍고 대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소중하게 준비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역사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이 엄청날 것입니다. 그에 비해 조그만 것 하나라도 자랑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에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주님 앞에서 마음과 생각을 겸비하여 주님만 드러내는 존재가 되길 구합니다.
2) 에스라는 페르시아의 황제 아닥사스다로부터 “네 하나님”, “네 하나님”이라고 거듭해서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다른 이들로부터 “네 하나님”, “김태수의 하나님”이라고 인정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아닌 하나님이 더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겉사람으로서의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을 죽여야 합니다. 사람들과 만나서 인맥자랑, 사역자랑, 경험자랑 등등 이런 것으로 평가받지 말고 하나님 자랑, 하나님의 역사 자랑, 하나님의 능력 자랑으로 바뀌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