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딱지와 귀지
“하루 한 알의 사과는 의사를 멀리하게 한다.”라는 말이 있다. (An apple a day keeps the doctor away)” 이 말은 1866년에 영국의 어느 지방(아마 사과 산지인 듯함.)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하는데,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과를 만병통치약 정도로 생각할 게 아니라, 다른 과일처럼 매일 먹으면 건강에 유익하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한다.
나는 사과를 별로 즐기지도 않으면서 의사를 되도록 멀리하는 편이다. 의사 만나기를 즐기는 사람은 없겠지만, 교통사고 후 반 년이나 입원했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후속 치료를 위해 의사를 수없이 만났기에, 의사 만나는 게 정말 싫다. 나이 들며 한 번씩 받아본다는 내시경 검사도 이 나이 되도록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고, 사고 후유증으로 가끔 고생해도 내색하지 않고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으로 버틴다. 그게 남달리 참을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화로 예약하고, 사무실에 가서 기다리고, 증상을 설명하고, 별로 효과도 없는 치료를 받는 시간이 아깝고 지겨워서 그런다.
그래서 의사를 만나 보자고 아내가 권하면 말다툼하기 일쑤다. 그런데도 며칠 전에 이비인후과와 안과의사를 만나자는 아내의 말에는 별다른 이의 없이 바로 만나 보기로 했다. 최근에 청력이 매우 떨어져서 대화가 어려울 정도라는 걸 느끼고 있었고, 피곤하면 목소리 내는 게 힘드니 교통사고 후 망가져서 복원 수술을 받은 성대에 문제가 있는지 점검받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주위에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들도 백내장 수술을 하는 걸 보아왔기 때문에 이참에 눈도 점검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의사가 권하면 보청기를 끼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제 내 몸도 여기저기 기능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서글펐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 청력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대개 알고 있다. 어려서 앓은 중이염 후유증 때문인지 너덧살 부터 잘 듣지 못했다. 삼십여 년 전에 청력 검사를 받아보니 오른쪽 귀는 고막이 거의 진동하지 않는 상태였고, 왼쪽 귀는 정상적인 귀보다 청력이 매우 떨어졌다. 거금 들여 산 보청기를 끼어 보았지만,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고 머리가 아파서 몇 달 쓰다가 버렸다.
11년 만에 다시 만난 안과의사 닥터 박의 한국어 실력은 그새 부쩍 늘어서 이제는 나보다 발음이 더 정확했다. 그는 약간의 백내장과 황반변성의 기미가 보이기는 하나 나이 들어가며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니 특별히 치료할 필요는 없으니 지켜보자고 했고, 안경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고 해서 마음이 놓였다.
30여 년 만에 만난 이비인후과 의사도 나이 쉰 살쯤 되어 보이는 닥터 박이었는데, 한국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라서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는데도 미국인 의사를 대하는 것보다 소통이 쉬웠고 마음이 편했다. 성대에는 별 이상이 없고, 귀에는 귀지가 잔뜩 끼었다며 집게로 끄집어 내는데 끈적끈적한 고약처럼 생긴 게 크기는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걸 두어 개 꺼내더니 고막에 들러붙은 커다란 게 아직도 있다며 매일 처방해 준 물약을 귀에 네 번씩 일주일 동안 부어주고 다시 보자고 했다. 처방전을 받아 일어서는데 아내가 옆에서 내가 ‘코딱지를 자주 후빈다’고 흉을 보아서 창피했다. 의사는 웃지도 않고 다시 코를 들여다보더니 또 다른 약을 처방해 주며 매일 자기 전에 두 번씩 콧구멍에 칙칙 뿌려 주라고 했다.
그러고 일주일 후, 닥터 박이 양쪽 귀에 물총을 쏘아서 일주일 동안 푹 불린 귀지를 빼내니 갑자기 귀가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뚫리면 이런 기분일까? 아침 산책길에 갑자기 새소리가 들리고, 부엌에서 일하며 아내가 휴대전화로 듣는 음악 소리가 내 방에서도 들리며, 저녁 산책길에서 바람에 굴러가는 가랑잎 소리가 들린다. 세상은 이렇게 여러 가지 소리로 가득 차 있는 걸 새삼 느끼겠다. 당연히 보청기는 끼지 않기로 했다.
코딱지는 어찌 되었냐고? 중계 카메라가 잡을 때 코딱지를 파서 그걸 입으로 가져가는 광경이 자주 잡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의 어느 꽃미남 축구감독 보다는 청결하지만(먹지는 않으니까), 아내 눈에는 지저분해 보였던 나의 코딱지 파는 버릇도 거의 없어졌다. 이러니 한국말을 못 하는 게 못마땅했던 닥터 박이 이뻐 보일 수밖에. 의사가 한국말 좀 못하면 어때. 실력만 좋으면 되지. 그런데 사과를 매일 열 개씩 먹는 사람이라도 의사는 가끔 만나 보아야 하겠더라.
(2020년 1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