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금융 상품화’ 시대 개막… 한국은 준비됐나
비트코인 ETF, 美 증시 상장
《비트코인 가치가 산출된 최초의 기록은 2010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한 개발자가 비트코인 1만 개를 내고 피자 두 판을 사 먹으면서다. 당시 피자값이 30달러 정도였으니 비트코인 1개당 0.003달러꼴이었다.
강산이 한 번 바뀌었을 뿐인데 비트코인은 현재 4만2000달러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사상 최고가였던 재작년 11월의 6만9000달러 수준에서 30% 넘게 빠졌지만, 개발자는 한 판에 2800억 원짜리 피자를 먹은 셈이다. 비트코인이 세상을 바꿀 신기술이라는 블록체인에 기반했는데도 ‘제2의 튤립 버블’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던 이유다.》
한때 ‘투기 광풍’의 중심에 섰던 비트코인이 세계 최대 금융시장인 미국에서 공식 투자 자산으로 인정받아 제도권에 진입했다. 비트코인 현물에 투자하는 상장지수펀드(ETF)가 미국 금융당국의 승인을 받아 11일(현지 시간)부터 뉴욕 증시에서 거래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비트코인 ETF의 상장도, 투자도 여전히 막혀 있다. 세계 각국이 투자자를 보호하면서도 코인 산업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만큼 한국도 제도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 비트코인 ‘주류 금융’ 진입
이미 뉴욕 증시에는 2021년 10월부터 비트코인 선물(先物) 기반의 ETF가 거래되고 있다. 선물 ETF는 비트코인을 담지 않고 미래 특정 시점에 미리 약정된 가격으로 비트코인을 사고팔 수 있는 선물 계약을 따르는 구조다. 이 때문에 실제 비트코인 가격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컸다.
이와 달리 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이번에 승인한 현물 ETF는 비트코인을 직접 담고 있어 실질적으로 비트코인을 사는 것과 같다. 그동안 비트코인에 투자하려면 가상자산 거래소에 계좌를 만들고 별도의 코인 지갑에 보관해야 했지만, 이제는 증권거래소에서 비트코인이 포함된 ETF를 주식처럼 쉽게 사고팔 수 있게 된 것이다.
비트코인 현물 ETF는 캐나다, 독일, 호주 등이 먼저 선보였지만 글로벌 금융 중심지인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만큼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동안 가상자산에 회의적이던 투자자와 초고위험을 우려했던 기관투자가의 자금이 들어오면서 비트코인이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들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 피델리티 등이 내놓은 11개 비트코인 현물 ETF가 뉴욕 증시에 입성하자마자 이틀간 거래액은 77억 달러(약 10조2000억 원)에 달했다. 헤지펀드, 연기금 등 기관의 비트코인 투자가 일반화되면 올해에만 최대 1000억 달러, 중장기적으로 전 세계 ETF 자금의 3%가량인 3000억 달러가 유입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현물 ETF 상장 이후 비트코인 가격은 올해 상승분을 모두 반납하며 하락하고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상승세로 돌아설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들이 쏟아지는 이유다. 여기에다 4월 비트코인 발행량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반감기가 예정된 것도 상승론에 힘을 보태고 있다. 비트코인이 개당 1억 원을 넘어 2억 원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비트코인은 ‘사토시 나카모토’로 알려진 개발자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불러온 중앙집권적 금융 체계에 맞서겠다며 2009년 내놓은 가상자산 원조이자 상징이다. 그런데 15년 만에 ‘탈중앙화’ 의미는 퇴색되고 제도권 금융이 코인을 흡수하는 역설적 상황이 된 셈이다.
● 실체 논쟁에도 세계 각국 제도권 포용
하지만 가격 널뛰기가 심해 투기적 성격이 강한 비트코인을 제도권 시장에 편입하는 것이 맞느냐는 논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SEC는 그동안 투자자 보호 장치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비트코인 현물 ETF의 상장을 거부해 오다가 미 연방법원이 재심사하라고 판결하면서 승인으로 돌아섰다.
게리 겐슬러 SEC 위원장은 성명에서 “이제 환경이 변했다”면서도 “SEC의 결정은 ETF에 국한된 것이지 비트코인을 승인하거나 보증하는 건 아니다. 투자자들은 가상자산 연계 상품들이 지닌 수많은 위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2위 자산운용사 뱅가드를 비롯해 메릴린치, 씨티그룹 등이 비트코인 상품 출시에 거리를 두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반면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는 “현물 ETF 등장은 비트코인의 합법성, 안정성을 보여준다”며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金)’으로서 훌륭한 가치저장 수단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범죄, 자금 세탁, 조세 회피에 쓰이니 가상자산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제이미 다이먼 회장의 발언과 상반되게 JP모건은 이번 비트코인 ETF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 같은 논쟁에도 가상자산의 제도권 편입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세계 각국도 이에 발맞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 세계 최초로 가상자산에 대한 포괄적인 규제를 담은 가상자산시장법(MiCA)을 통과시켰다. 일본은 최근 은행의 스테이블코인(법정화폐에 연동하도록 설계된 코인) 발행, 가상자산을 통한 스타트업 자금 조달 등을 허용했다. 비트코인 채굴 금지령까지 내렸던 중국도 대체불가토큰(NFT) 거래가 가능한 국영 거래소를 출범시키고, 홍콩을 전면 개방해 글로벌 가상자산 허브로 구축할 계획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1일 기자간담회에서 “비트코인이 확실히 하나의 투자재로 자리 잡은 것 같다”며 “투자자산으로서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고 안정성이 있는지 시험해볼 시기가 됐다”고 말했다.
● 정부, 뒤늦게 “현물 ETF 거래 안 된다”
비트코인 현물 ETF에 대한 현지 반응은 뜨겁지만 한국 투자자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국내 증권사를 통해 해외에 상장된 비트코인 선물 ETF는 사고팔 수 있지만, 현물 ETF는 투자가 불가능하다는 방침을 금융당국이 내렸기 때문이다.
현행 자본시장법상 비트코인 같은 가상자산은 ETF가 담을 수 있는 기초자산에 포함되지 않아 위법 소지가 있다는 게 금융위원회의 판단이다. 정부는 2017년 1차 코인 광풍이 불었을 때 금융회사의 가상자산 보유나 매입, 담보 취득, 지분 투자 등을 전면 금지했는데, 여전히 이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내재 가치를 판단하기 쉽지 않은 가상자산의 태생적 한계나 2030세대가 불나방처럼 코인 투자에 뛰어들어 사회 문제가 됐던 점을 감안하면 금융당국의 신중한 입장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번 비트코인 ETF 대응 과정에서 보여준 혼선에 대해서는 비판이 많다.
미국의 비트코인 현물 ETF 상장은 지난해 중반부터 국내 금융투자 업계의 큰 관심사였는데 금융위는 이달 11일 오후가 돼서야 이와 관련된 유권해석을 내놨다. 또 2년 전부터 캐나다, 호주, 독일 등에서 비트코인 현물 ETF가 상장됐을 때는 손놓고 있다가 미국에서 출시되자 부랴부랴 거래를 막았다. 2년간 해외 비트코인 현물 ETF 상품을 중개해 오던 증권사들은 돌연 거래를 중단했고, 미국발 ETF 거래를 준비하던 증권사도 급하게 전산을 막아야 했다. 오락가락 ‘뒷북 규제’라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
이 같은 혼선을 두고 자산시장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금융 정책의 난맥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가 적지 않다. 코인 광풍 때에는 못 미치지만 지난해 6월 말 기준 가상코인 시가총액은 28조 원을 넘어서고, 코인 투자자는 600만 명을 웃돈다.
이런데도 가상자산 불공정거래 처벌과 투자자 보호에 초점을 맞춘 초보적 단계의 ‘가산자산 이용자 보호법’은 올 7월에야 본격 시행된다. 가상자산 발행과 유통 규제, 사업자 진입 규제, 산업 육성 등을 포괄하는 2단계 가상자산법은 언제 도입될지 기약이 없다. 지금처럼 가상자산의 법적 지위가 애매모호하면 오히려 돈세탁이나 시세조종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 금융 산업의 새로운 흐름에 도태되지 않으면서 투자자 보호와 금융 건전성을 함께 고려한 인프라 마련에 속도를 내야 한다.
정임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