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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많이 길지만 꼭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네이버 백과사전,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그 외의 글과 기사는 네이버에서 검색했습니다.
* 5. 18 광주 민주화운동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에 의해 시해됨으로써(79. 10. 26) 대통령 대행체제가 되고 한 동안 정국이 불안정하였다. 이러한 시기를 틈타 신군부세력(전두환, 노태우 등)이 제2군사 쿠데타를 일으켜(12·12 사태), 순식간에 무력으로 군부를 장악하고 정치권을 장악하였다. 또 다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통치 시대로 회귀하였다. 유신체제에 이어 민주헌정이 정지되고, 민주정치 지도자 투옥 등 군사독재가 재발하자 국민들의 불만은 극도에 달하여, 국민의 저항은 전국적으로 지속 확산되어 갔다. 그 동안 불만이 쌓인 전국의 학생 연대는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 모여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였다. 신군부는 이를 기회로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도 역시 비상계엄군이 각 대학을 장악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였다. 이에 울분한 전남대학교 학생과 비상계엄군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한 학생이 속출하자, '계엄철폐' '휴교령철폐'를 외치며 중심 대로인 금남로로 진출하였다(80. 5. 18).
계엄군과 공수부대원들은 시위 학생들을 향하여 총격을 가하여 죽는 학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민가나 관공서로 피신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추격하던 군인들은 드디어 민간인까지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주민들은 피하는 학생들을 감추어주고 식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다가 민간인 부녀자도 사살당하기도 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광주시 외곽으로 피신하기도 하였으나, 군대는 탱크까지 동원하여 모든 도로를 차단하고 지키고 있어서 피신과정에서 체포 또는 사살당하였다.
이에 성난 학생들과 시민들은 합세하여 저항이 더욱 거세졌고, 일부 학생들은 도청(道廳)을 점거하고, 경찰서 등에서 총기를 탈취하여 저항하였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정규군에 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종교인, 교수 등이 주축이 되어 구성되었고, 시민군에게 총기를 반납할 것을 종용하여 무장을 해제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의 무자비한 학살은 계속되었다. 무고한 어린 학생, 부녀자, 시민까지 무차별 살상이 이어졌다.
그러나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했기 때문에 이러한 비극의 현장은 외부에 즉각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광주 시내를 탈출한 일부 사람들에 의해 그 비극의 사실이 전해졌다. 처음에는 유언비어(流言蜚語)처럼 전해지면서, 북한 무장 간첩이 침투하여 저지른 만행이라고 소문나기도 했으나 드디어 3일째 되는 날부터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그 잔혹상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드디어 10일째 되는 5월 27일 대규모 진압군이 투입되어 도청을 탈환함으로써 수많은 시체가 쌓인 가운데 시위는 진압되었다.
* 상황일지
● 민주항쟁의 발발
5월 17일 (토요일, 맑음)
· 21시 40분 : 비상국무회의, 비상계엄 전국확대 의결
· 23시 00분 :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검속
· 24시 00분 : 비상계엄 전국확대, 광주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및 학생 연행
5월 18일 (일요일, 맑음)
· 9시 40분 :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
· 10시 00분 : 학생들이 "계엄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
· 10시 15분 :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 10시 20분 : "금남로로 가자"는 구호와 함께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
· 15시 40분 : 유동 3거리에 공수부대가 등장하면서 진압작전 감행
· 19시 02분 : 계엄사령부, 광주지방 통행금지시간이 저녁 9시로 앞당겨졌다고 발표
5월 19일 (월요일, 오후부터 비)
· 3시 00분 : 증파된 11여단 병력, 광주역 도착
· 9시 30분 :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 10시 00분 :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 14시 40분 : 조선대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무리한 진압작전 전개
· 15시 00분 :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 회의를 갖고 시위 진압을 완화하도록 건의
· 16시 30분 :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생 김영찬이 계엄군의 총에의해 부상
· 20시 00분 : 수만명의 시민들 "전두환 타도" 외침.
5월 20일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 8시 00분 : 고등학교 휴교조치
· 10시 20분 : 카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힌 채 심하게 구타당함. 공수부대와 시민간의
공방전 계속
· 18시 40분 : 금남로에서 200여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이자 시위대
분위기 고조
· 20시 10분 :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금남로, 충장로, 노동청 방면에서 공수부대, 경찰과 대치
· 21시 05분 : 노동청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 사망
· 21시 50분 : 광주MBC건물 방화
· 23시 00분 :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 사망
● 계엄군의 발포와 무장봉기
5월 21일 (수요일, 맑음)
· 0시 35분 :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 2시 18분 : 시외전화 두절
· 4시 00분 :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
· 4시 30분 : 광주KBS건물 방화
· 8시 00분 :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20사단 병력과 충돌
· 10시 15분 : 실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 맨 앞으로 교체
· 10시 19분 : 광주세무서건물 전소
· 11시 10분 : 대형헬기, 도청광장에 도착
· 12시 59분 :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 13시 00분 :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 사격 시작
· 13시 20분 :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 14시 15분 : 도지사, 경찰헬기에서 시위해산 종용하는 설득 방송
· 14시 35분 :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
· 14시 40분 :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 15시 48분 : 공수부대원들이 주요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
· 16시 00분 : 화순, 나주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 16시 43분 :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기관총(LMG) 2대 설치
· 17시 30분 :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
● 해방광주
5월 22일 (목요일, 맑음)
· 9시 00분 :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 10시 30분 : 군용헬기 공중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
· 11시 25분 :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 12시 00분 :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 13시 30분 : 시민수습위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 방문, 7개항의 수습안 전달
· 15시 58분 :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 17시 18분 :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결과 보고
· 17시 40분 :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 21시 30분 : 박충훈 신임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 맑고 한때 흐림)
· 8시 00분 :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 10시 00분 : 시민 5만여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
· 10시 15분 :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 시작
· 11시 45분 : 도청과 광장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 13시 00분 :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 15시 00분 :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전단이 시내전역에 살포
· 19시 40분 :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 오후에 비)
·13시 20분 : 공수부대,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14시 20분 :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교사부대간의 오인 총격전 발생
·14시 50분 :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 비)
· 11시 00분 : 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와 광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원 전달
· 15시 00분 :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7시 00분 :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 21시 10분 :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발생 예방과 식량공급 청소문제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 아침 한때 비)
· 5시 20분 :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 8시 00분 :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 감행
· 10시 00분 :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4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 15시 00분 :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7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상황 브리핑
· 19시 10분 :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 시킴.
· 24시 00분 :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 최후의 항쟁
5월 27일 (화요일, 맑음)
· 3시 00분 :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
· 4시 00분 :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 4시 10분 :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들에게 사격
· 5시 10분 :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전역 장악하고 진압작전 종료
· 6시 00분 :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 방송
· 7시 00분 :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 8시 50분 : 시내전화 통화 재개
* 사진 자료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학생들을 막고 있는 공수부대
화려한 휴가
계엄군의 폭행
금남로의 살육
신혼부부
시민군과 공수부대
차량시위
집단발포
시민군
부상자 (흰 옷 입은 분은 의사인 듯)
광주 고립
충정작전
유가족
친구의 빈 자리..
전두환, 노태우 재판 당시 사진 ('~전대통령'이라고 붙이기 싫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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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 5월 항쟁 직후, <전남매일신보>에 실린 시
아아 光州여! 우리나라의 十字架여!
김 준 태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해와 달이 곤두박질 치고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있을 때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을 뒤집어 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
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버렸나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지원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구나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 밖에 나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까요.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 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해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런데 나는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나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음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며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우리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예수는 한번 죽고
한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 백번을 죽고도
몇 백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품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심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전두환 사형선고 [ 서울지법 - 1996년 ]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형사합의 30부 (재판장 김영일부장판사)는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12,12 5,18사건 1심 선고공판에서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사형, 노태우 전대통령에게 징역 22년 6월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내란 및 군사반란 사실 등이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면서 이들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함께 기소된 정호용, 황영시, 하화평, 이학봉 피고인에게 징역 10년, 허삼수, 유학성, 최세창, 이희성 피고인에게 징역 8년, 장세동, 차규헌, 주영복 피고인에게 징역 7년, 박종규, 신윤희 피고인에게 징역 4년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날 전두환, 노태우 피고인에게 각각 적용된 군형법상 반란 및 내란 수괴 내란목적살인, 상관살해, 뇌물수수죄 등 10가지 죄목과 반란 및 내란중요임무종사, 뇌물수수죄 등 9가지 죄목을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전,노피고인에게는 재임 중 기업체 등으로부터 받은 뇌물로 각각 받은 2,059억 5천만 원과 2,838억 9천 6백만원 전액을 추징금으로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날 1심 구속기간(6개월)만료로 석방된 유학성, 황영시, 이학봉, 최세창, 장세동 피고인 등 5명에 대하여는 구속집행정지를 취소, 법정구속하고, 불구속 기소되었던 차규헌 피고인에 대해서도 직권으로 법정구속했다. 그러나 이희성, 주영복, 신윤희, 박종규 피고인등은 법정구속하지는 않았다. 또 반란중요임무 종사혐의를 받고 있는 박준병 피고인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김영일 재판장은 판결문에서 전씨네 대해 "전피고인은 군병력을 동원, 군내부 질서를 파괴하고 헌법질서를 문란케 한 점에서 죄질이 매우 무겁다"며 "더욱이 수많은 기업체로부터 돈을 받아 엄청난 부정축재를 한 점은 비록 대통령 재직 중 경제적 안정에 기여하고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례를 남기는 등의 업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크게 참작할 수 없다"고 양형이유를 밝혔다. 검찰과 피고인측은 각각 항소했다.
최종으로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17년형을 선고받습니다. 그 후...
구속 2년여만인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특별사면과 함께 복권까지 되어 정치활동도 가능해졌습니다.
당시,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은 추징금을 각각 1,893억원, 2,229억원을 미납한 상태였습니다.
전-노씨와 함께 12.12사태, 5.18 및 부정축재 사건 관련자 15명도 석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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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살인마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라는 차원에서 아시아나 항공으로부터 1등석 왕복항공권을 무료로 제공받고,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라는 차원에서 LA 방문 때는 공항에서 LA총영사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특혜를 누리고 있구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 살인마는
제대로 된 처벌조차 받지 않은 채 호위호식하며 아주 잘 살고 있는 반면,
당시의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에 시달리거나
행방불명되어 시체조차 찾지 못해 이름만 써 있는 비석을 어루만지며 눈물짓는 유가족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역사는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오늘 화려한 휴가 보고왔다규ㅠㅠㅠㅠㅠㅠㅠㅠㅠ 2시간 내내 울었어요 마지막 이요원의 말대로 절대로 그들을 잊지 않겠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5월18일. 피투성이가 된 광주를 보았습니다.. 저 짐승만도 못한놈들이 원하는것이 국민의피였습니까 아니면 추잡한 욕심이었습니까 ...
화려한 휴가 어떻게 나오든 꼭 보려 했는데 다행히 영화도 잘 뽑았다네요.
오늘 봤어요...너무 울어서 머리가 아픈데 이거보니까또눈물이나네요...남친아버지가 영화에서처럼 광주에서택시운전하셨거든요...김상경친구로나오시는분 아이를 보더니 '딱나네...'이러더라구요...아버지가 나가서 싸운다는걸 어머니가 겨우 뜯어말리셨다고...그소리듣고 또울고...진짜 가슴이 먹먹합니다. 안보신분들 꼭보세요!!!!
오늘 화려한 휴가 봤어요........ 진짜 전국민이 다 봤음 좋겠습니다.
화려한 휴가 이번에 일때문에 갔다오고나서 꼭 보러가야지 후 ㅠㅠㅠㅠㅠ 진짜 전두환 미친놈
화려한휴가 보는 내내 이거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않았을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전씨는 참 잘살고있는데 너무 안타깝다구... 이런거보면 우리나라는 캐 후진국
저희아빠가 이때 군대가기바로직전에 마지막으로 영광에사는 큰누나네집에 놀러갔는데 그날 바로 5.18ㄷㄷㄷ... 그때 막 할아버지가 큰누나네집에전화해서 우리아빠절대보내지말라고 여기오면 다잡혀가고다죽는다고 절대 거기서 아무데도못하게하라고 막 그랬다는디 ㅠ.ㅠ만약그때우리아빠 큰누나네집안갔으면 ㄷㄷㄷ
m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