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郭在九)-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장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郭在九, 1954~, 전남 광주 출생) 시인은 아동문학가이자 교수로 토착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고통 받는 삶과 현실을 사랑으로 아름답게 서정적으로 승화하여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비루한 그들의 삶 속에서 조그만 들꽃을 발견해내는 섬세한 눈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는데, 곽재구 시인의 시는 개인적으로 정호승 시인의 시와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합니다.
*시인의 대표작으로는 “사평역에서”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 “그리운 남쪽” “희망을 위하여” “소나기” “새벽편지” “또다른 사랑” “바람이 좋은 저녁” “기다림” “첫눈 오는 날” “따뜻한 편지”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천 일이 지나면” “나무” “두 사람” 등이 있습니다.
*위 시가 지어질 당시 1981년에는 ‘사평역’이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근자에 지하철 9호선에 사평역이 설치되었고, 위 시의 영향을 받아 임철우(林哲佑) 작가의 ‘사평역’이라는 소설도 탄생하였습니다.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고통스런 현실의 삶과 세상의 슬픔을 그리움으로 극복하여 승화하는 느낌이 좋아 위 시를 올려봅니다.